철의 왕국 금관가야의 몰락
우리나라역사에서 고대 3국이라함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들 주요 3국과 함께 당당하게 경쟁을 하였던 부여와 가야에 대해서는 매우 간략한 역사들만이 단편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특히 가야는 단 한줄의 역사와 단 한기의 비석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시대의 부장품들은 매우 우수하며 수량적으로도 많아 그들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지상위에는 역사를 남기지 못하였으나, 지하에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풍부한 역사를 남겨 놓았다.
가야관련 유물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이고 주목되는 것은 철제 관련 유물들이다. 강철갑옷과 투구를 비롯해,강철검,비늘갑옷, 비늘말갑옷,군사용도끼, 심지어는 각종농기구와 화로와 같은 생활도구까지 강철로 제작하였다. 더구나 가야지역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철갑옷만 70여 벌이 넘으며, 이것은 고대 3국 유적지에서 나온 강철갑옷류를 모두 합친것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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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퇴래리에서 출토된 판갑옷
퇴래리에서 출토된 갑옷은 , 인체에 맞게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다른 가야의 철갑옷류와 마찬가지로 불에 달군 쇳덩이를 반복해서 두드리는 단조(鍛造)과정을 거쳤다.
모두37개의 조각으로 되어 있으며, 연결했을때 곡면처리가 되도록 입체적으로 재단되어 있다. 출토갑옷에는 8cm내외의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것은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못을 끼워 놓기 위해 만든것이다.
당시 철을 녹일때 숯을 함께 넣는 방법으로 녹는점을 1500도에서 1300도로 낯출 수 있었다고 한다. | 흔히 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압력에 의해 멸망당하였고, 그 영역도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의 좁은지역만을 설정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서기 4세기 이후의 일이다. 4세기 이전 가야는 한반도 남부 국가들중 가장 강력한 철제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연맹왕국이었다고 하지만 그 결속력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니었다.
김해는 금관가야의 중심지이다. 가장 대표적인 김해 대성동 고분을 비롯해 퇴래리 유적등 무수한 유적지와 발굴 예정지역이 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던 금관가야에 과연 이 같은 우수한 철제 무기들과 강력한 군사가 필요하였을까란 의문이 든다. 왜냐면 농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의 전투력은 다소 뒤떨어지는 것이 대부분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관가야는 농업국가가 아니었다.
금관가야가 농업국가였다는 주장은 단순한 추론일뿐이다. 김해의 지질조사결과 현재 김해평야지역은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전까지만 해도 바다였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요한 근거로 김해 예안리에 있는 해식동굴을 들고 있다. 또 현재에도 김해평야를 10m정도만 파고 들어가도 바다뻘과 바다조개류등을 어렵지 않게 채취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금관가야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김해평야는 김해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따라서 금관가야는 초기부터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였으며, 이런 영향으로 인하여 서기 4세기 이전까지는 백제보다 가야의 영향력이 일본에서 오히려 더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한과 예맥 왜가 철을 수입해 가며, 마치 이것을 돈처럼 사용하는데 낙랑과 대방군에도 공급하였다는 기록이 나와, 가야의 철기 생산과 수출이 얼마나 활발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가야는 말에까지 갑옷을 입히는, 그야말로 완벽한 형태의 철기병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파사왕과 지마왕시대때 5천명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가야원정을 시도하였지만 모두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다만 기록에는 날씨의 탓으로 돌리거나, 전쟁의 결말을 아예 삭제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단 한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가 이 사건에 대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바로" 왜의 배후를 좇아 금관가야 종발성에 이르렀고 이내 항복을 받아냈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일본이 주체적으로 한반도를 침공한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입장에서 병력을 착출당하였거나 제공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기록이다.
또한 금관가야지역인 부산 복천동 김해 대성동등지에서 발견되던 철갑들은 물론 대규모 분묘들도 400년을 전후하여 급격하게 중단되었다. 반면 여타의 가야연맹지역에선 400년을 전후하여 오히려 그 출토량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부산 복천동 고분 경우 5세기 초엽으로 추정되는 신라양식의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결국 한반도 남해안 전역을 장악하고, 일본에까지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금관가야국은 고구려라는 최강의 군단을 맞아 몰락의 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또한 5세기 초엽부터 일본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철갑옷이 등장하는데, 이것역시 금관가야의 몰락으로 인한 대규모 유민집단의 이주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강철의 제국을 추구하였던 꿈은 532년을 기점으로 한반도에서 사라져 갔다. 과연 그들은 현재 일본을 있게한 주측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일본이 그토록 자신들의 역사에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배제시켰으며, 백제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였는지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강철제국에 대한 가야의 열정과 꿈은 신라로 이어졌다고 본다. 비록 삼국역사에 올바르게 자리매김하였다고 볼 수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부식이 사대주의적 사관에 입각하여 삼국사를 저술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또한 가야와 일본의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표면적으로는 한국역사를 높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일본이 가야의 계승자가 아닌가란 식의 제국주의적 사관은 경계해야 할것이다. 가야의 역사는 분명 이땅에서 이루어졌으며, 가야를 최종적으로 통합한 신라만이 정당한 역사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첫댓글 그링여!!우리 가야 우물을 더 파 봅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