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첫 교산교회와 온수리성공회성당
2019.7.4
강화도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던, 그래서 세례조차도 사람들의 감시를 피해서
해질 무렵 바닷가에서 배를 띄우고 몰래 베풀었던 것이 한알의 밀알이 되어 태어난 교회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교산리의 교산교회와, 선교 초기 지어진 한옥 교회당의 모습을
여지껏 간직해오고 있는 강화읍 온수리의 성공회 성당인 온수리성당을 순례하고 왔다.
7월 초순, 뜨거운 날씨였지만 그 옛날 이 땅에 복음이 처음 전해지던 때의 그 뜨거웠던
믿음과 열심에 비하랴 싶어, 참고 뛰어다니며 열심히 보고 느끼고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강화도 첫 교회 강화교산교회
강화지역에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감리교회의 모교회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셀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웠고 1892년 후임으로 존스목사가 부임하면서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천에 옮겼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발도 딛을 수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내리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계'를 조직했는데 오히려 얼마 후 계도 깨어지고
교인마저 잃게 되었다. 50명의 계원이 다 떠나 버렸는데 유독 이승환이라는 한 사람만 계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강화 출신으로 술집을 경영하면서 교회에 다니던사람이었는데 믿음이 생기자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인
강화로 귀향을 해서 늙으신 어머니를 전도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다. 유명한 선상세례식이 바로 그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선상세례식에서 참고). 이후 이승환은 고향인 강화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전도에 힘썼고
교인 4-5명이 생기자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강화 교산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선상세례
1892년 인천 제물포교회에 부임한 존스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강화를 찾아갔으나
입성을 거부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제물포에서 주막을 하던 이승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막을 그만두고 고향인 강화 서사로 돌아왔다. 농사를 지으면서 늙은 어머니를 전도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다.
부탁을 받은 존스 목사는 조선인의 복장을 하고 은밀히 강화를 찾아왔지만 다리목마을의 김초시 양반가문에서
"서양 오랑캐가 우리 땅을 밟으면 쫓아가서 그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반발하여 들어올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존스 목사는 이승환에게 어머니를 배로 모시고 오게 하였고 이에 이승환은 노모를 등에 업고
들판을 지나고 다리를 건느고 산을 넘고 갯벌을 지나 목사님이 기다리는 배로 갔다.
때마침 음력 15일, 보름달이 환히 빛나는 밤이었다. 존스 목사는 달빛에 예문을 비추어 읽으면서
배 위에서 세례를 주게 되었고, 이것이 강화에 최초로 복음이 시작되는 겨자씨가 되었다.
첫번째 담임교역자이자 선상세례식의 주인공인
존스 목사(1892년 내리교회 부임) 가족의 1892년대 당시 사진
기독교선교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날 교회당 건물과
지금 예배당으로 사용중인 현대식 교회당 건물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성공회 온수리성당
성공회는 공식적으로 개신교에 속하지만
천주교처럼 죄를 신부에게 고백하는 고백소가 있다.
헌금봉투꽂이
현대식으로 지어진 새 성당 건물
새성당 문앞에 심겨진 수령 150년 된 왕소나무 한그루
강화제석봉평화전망대
교산교회당에서 2 ㎞ 거리에 있으나, 교회와 전망대 두 곳 모두 민통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부대 정문에서 출입허가증을 받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강 건너 북한 땅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 보이고 있건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긴 그리움의 쪽지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망배단
물에도 들어가는 '해병대상륙돌격장갑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