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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검색한 내용입니다.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고 본 그의 저서를 소개한 글입니다.
역사의 연구(The Study of History)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
토인비는 문명의 발전 법칙을 발생, 성장,몰락,해체의 과정으로 보는 문명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 독창적 문명론에 관한 비판도 많으나, 날카로운 통찰력이 넘쳐흐르는 이 책은 현대를 이해하는 데에도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저술이다.
책의 의도
서문 첫머리에서 토인비는 “이 책은 표제가 암시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 하나의 시도이다. 곧, 나는 인류의 역사를 하나의 전체로서 조망해 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1972년이라는 해까지의 역사를 조망해 본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그것을 전 세계적으로 조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또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특정한 국가나 문명 또는 종교를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또 그것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환영에서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종래의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과 문명관을 초월해 세계의 모든 지역의 역사와 문명을 동등한 가치로 바라보고자 한 그의 입장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역사 연구의 단위
제1부 ‘역사의 모습’에서 먼저 그는 역사 연구의 단위를 탐색하는 것부터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역사의 단위는 비교적 자기 완결적인 것으로, 따라서 다른 역사 부분에서 잘라 내도 어느 정도는 하나의 정돈된 단위가 되는 것을 뜻한다. 토인비는 역사를 국민 국가라는 입장에서 연구하는 통상적 방법을 피하고 있다. 이는 크게 보면 국민 국가란 보다 큰 ‘문명’ 속의 한 단편에 지나지 않고, 문명이라는 큰 단위 쪽이 국민 국가라는 작은 단위보다 왜곡이 적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토인비는 이처럼 역사 단위를 정의하고 문명 이전의 각 사회를 살펴본 뒤 그리스와 중국, 유대의 역사 과정을 길잡이로 각 문명의 역사 ‘모델’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리스 모델
그리스 모델에 포함되어 있는 구성 요소는 그리스 문명(토인비가 말하는 ‘그리스 문명’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 로마 문명 또는 고대의 고전 문명으로 불리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의 내부 역사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이는 동시대의 다른 문명과의 관계와 그리스도교와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교를 통해 그 이후로 이어지는 그리스 정교 문명과 서유럽 문명의 관계도 포함된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의 구조는 다음과 같은 요소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 세계는 문화적 통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통일되지 않았으며, 거기에서 비롯된 첨예한 대립 때문에 결과적으로 폴리스 국가들 간에 전쟁이 빈발하여 황폐화되었다. 문명 역시 손상을 입어 사멸하게 되었을 때 로마 제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통일되면서 일시적인 평화와 질서를 가져왔다. “이 평화는 단 한 사람의 승리자만을 남기고 다른 정치적 대국(大國)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 싸우는 녹아웃의 연속이라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이룩된 것이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붕괴는 그리스 문명의 사멸을 뜻한다.
둘째, 그리스 문명이 쇠약해진 뒤 사회사의 구조는 소수의 지배자가 영역 내의 시민과 이제까지 그리스 문명에 매료되어 온 원시 민족의 영역 외부에 있는 시민들 사이를 서로 갈라놓았다. 그 뒤 두 계급은 각각 내부와 외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
셋째, 같은 계급에서 그리스 문명의 종교사적 구조에서는 내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리스도교를 창조한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세계를 개종시키고, 그곳을 침략한 야만족을 개종시킨다. 그리스도교가 채택한 사회 형태인 그리스도교 교회는 문화적 공백기 이후에 두 개의 새로운 문명, 곧 동방의 그리스 정교 문명과 서방의 그리스도교 문명(서유럽 문명)을 탄생시키는 ‘누에고치’의 역할을 한다.
넷째, 외부의 프롤레타리아트(야만족)는 로마의 세계 국가를 군사적으로 정복하고, 그 영역 내부에 후계 국가를 수립하지만, 새로운 문명의 창조에 대한 이들의 기여도는 내부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비교할 때 매우 작다.
다섯째, 비잔틴과 서유럽이라는 두 지역의 ‘그리스적’ 문명이 역사 과정 속에서 발생한 그리스화가 바로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에 포함되어 있는 그리스적 요소를 매개로 하여 간접적인 것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스 문화에서 영감을 퍼올리려는 시도이다.
이 같은 그리스 모델의 각 요소는 다른 문명의 역사에도 적합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첫 번째는 수메르=아카드 문명(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제국)과 러시아에서의 그리스 정교 문명(모스크바 제국), 일본의 극동 문명(도쿠가와 바쿠후)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의 경우는 구세계의 서쪽 끝의 역사에서 가장 가까운 유사물을 찾고자 한다면 아마 동쪽 끝에서 발생해 전파된 대승 불교일 것이다. 그러나 대승 불교는 동아시아에서 그 세력과 권력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조차도 도교의 ‘도관’과 중국의 국교적 철학인 유교 가운데 어느 쪽도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다.
중국 모델
중국 모델은 세계 국가의 이상이 차례로 실현되지만, 중간에 종종 분열과 혼란에 빠지는 하나의 시리즈로 나타난다. 이 모델은 이집트와 인도의 경우에도 타당하다. 그러나 그리스와 중국이라는 두 개의 모델이 모든 경우에 적합하지는 않으므로 이 둘을 합쳐 개선한 모델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대 모델
제3의 유대 모델은 유대인의 이산 공동체에서 표본을 취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국가와 고향을 빼앗기고 각국에 흩어져 소수파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의 통합과 지속을 유지하는 새로운 수단을 발견했다. 또 다수파에 융합되지 않고, 특히 종교적 일체성을 중요시하며 생존에 필요한 경제력을 손에 넣음으로써 이것들의 통합과 지속에 성공한 모델이다. 이모델에 속하는 것으로 스코틀랜드인과 레바논인들의 이산 공동체를 꼽을 수 있다.
모델의 총괄
이와 같은 모델을 총괄하면, 지방 국가에서 세계 국가로의 이행에는 그리스 모델, 세계 국가에 뒤이은 성쇠의 교체 리듬에는 중국 모델 그리고 이산 공동체에 대해서는 유대 모델이 필요하게 된다. 이 모델들은 각 문명의 비교 연구에 불가결한 지적 도구가 된다.
그리고 제1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토인비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모든 문명, 곧 전적으로 개화된 독립 문명 열네 개와 위성 문명 열일곱 개 이외에 유산된 문명 여섯 개를 포함해 이들의 리스트를 도표로 제시하고 있다.
문명의 탄생
제2부에서는 문명의 탄생을 논하고 있다. 문명은 어떻게 탄생되는가. 토인비는 인종이나 환경은 불충분한 설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는 생명을 통해 이를 설명하며 그 해답을 신화와 종교에 대한 통찰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창조는 만남의 결과이며, 그 만남의 과정이 도전과 응전으로 묘사된다. 또 도전과 그에 대한 응전은 실제로 효과적 창조를 가져올 수 있는 한계를 자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느 한 문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극이 필요하고, 그 도전은 창조성을 질식시킬 정도로 심각한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문명의 성장
제3부는 ‘문명의 성장’에 대해 논한 부분이다. 순조롭게 태어난 문명은 탄생 자체가 최초의 높은 장애를 뛰어넘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후 저절로 발전의 동력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반드시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탄생 직후에 성장을 멈추어 버린 몇몇 사회가 그 증거이다.
이들 사회의 성장에 관한 특질을 조사해 보면, 이곳에서는 어떤 도전에 대한 응전이 성공하고, 그것이 또 새로운 도전을 불러일으킨다는 단순한 동작이 시리즈로 진행될 때, 그것을 사회가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도전과 응전이 연속해 일어나고 있을 때, 그 움직임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토인비에 의하면, 예언할 수 있는 목표를 향하고 있는 불가피한 진보라는 개념은 인간에 관련된 영역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 사회의 성장은 그 사회의 지도자들이 획득하는 자기 결정력의 증대를 통해 측정되며, 한 문명의 운명은 이 창조적 인격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것이다.
문명의 쇠퇴
제4부는 ‘문명의 쇠퇴’를 다루고 있다. 왜 과거에 존재했던 문명들이 쇠퇴했는가. 그는 문명은 쇠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토인비는 결정론에 빠지기보다 문명이 성장을 유지하는 과정 속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 사회를 이끄는 창조적 리더십은 창조력이 없는 대중을 이끌어가기 위해 그들을 사회적으로 ‘훈련’시키는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도자가 창조적 영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에는 자신의 의도와는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실례로서 아테네와 베네치아를 ‘단명한 자기 우상화’로 해명하고, 동로마 제국을 ‘단명한 제도의 우상화’, 다비드와 골리앗(신구 군사 기술의 상징)을 ‘단명한 기술의 우상화’, 로마 교황권을 ‘승리의 도취’로 해명하고 있다.
문명의 해체
제5부는 ‘문명의 해체’이다. 문명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지만 그 쇠퇴는 불가피한 것이며, 대체로 방치된 채 해체로 이어지는 동일한 형태를 밟고 있다. 대중의 힘이 지도자에게서 분리되면 지도자는 과거의 견인력과는 성질이 다른 폭력을 사용해 그 지위를 확보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소수의 지배자와 내부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그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야만족으로 구성된 외부 프롤레타리아트로 분해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들 집단이 해체의 시련에 대해 사회적으로 어떤 대응을 보이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또한 토인비는 해체기에 사람들의 영혼에 나타나는 심리적 분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곳을 잃고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게 되면 달아날 곳을 찾는다. 일부의 위대한 영혼은 인생에서 스스로 물러나 은둔한다. 두 번째 위대한 영혼은 인생을 ‘지상’에서 배우는 속된 종류의 생활이 아닌 고차원적인 것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며, 영혼을 위한 씨를 뿌린다. 이렇게 하여 해체에 대한 고차원적 도전으로 대승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등장하는 것이다.
세계 국가
제6부에서는 ‘세계 국가’를 논하고 있다. 사회가 분열 과정에 들어가면 대체로 세 개의 분파로 분열되며, 각자 나름대로의 제도를 만들어 낸다. 소수의 지배자는 적대적 국민들을 통합해 세계 국가를 만들고 그를 통해 위험하게 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세계 국가는 세계 전체를 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한 문명의 전체 영역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토인비는, 세계 국가는 그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면 그를 초월하는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인가를 자문하며, 세계 국가의 몇 가지 제도를 검토한 결과, 세계 국가는 무의식적으로 고도의 수준 높은 종교와 야만을 동시에 활용하며 특히 전자를 중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세계 국가는 실제로 국지적이며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장차 인류 전체가 살게 될 정치적 통일체의 선구적 형태라는 비전을 제시해 주고 있다.
세계 국가는 불멸한다는 깊은 믿음을 갖게 되는 근거로 로마 제국이 신성로마 제국과 그리스 정교권의 동로마 제국 그리고 ‘제3의 로마’로 모스크바 대공국 및 러시아 제국으로 부활했고, 중국에서도 진과 한 제국이 수와 당 제국으로 부활한 데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세계 제국이 전파 매체로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로마 제국 내의 약초 유포와 아랍 칼리프 국가의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종이가 전파된 일이 제시되고 있다. 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서 중앙 정부의 속주에 대한 체제 유지 도구로 사용되었던 교통과 우편 등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로마 제국과 아랍 칼리프국에 계승되었는데, 물론 중국과 인도의 여러 제국에서도 이러한 정책이 시행된 사실을 거론하고 있다. 이러한 수단은 이후에 세계 종교를 전파시킨 길이 되었고, 야만족의 침입을 안내해 준 길이 되었다. 토인비는 세계 국가에 관해 그 내부 제도를 이루는 언어와 문학, 수도, 문관 제도의 역할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세계 교회
제7부는 ‘세계 교회’이다. 토인비에 의하면, 고도의 수준 높은 종교의 출현은 인간 역사에 중대한 한 획을 그은 것이므로 이를 문명으로 취급해 충분히 논할 만한 것이라고 했다. 고도의 수준 높은 종교는 멸망해 가는 문명의 기생물(암)이 아닌 것은 물론, 단순히 새로운 문명 탄생을 위한 고치 역할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토인비는 고도의 수준 높은 종교란, 그 자체로 구성되는 새로운 ‘종류’의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정신적 열망은 성취되지 않았지만, 그 목표는 인간과 우주의 저편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직접적 인격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에 있었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를 낳아 준 모태가 되는 작은 문명에서 자신의 발을 거두어들이고 세계 종교로서의 불가피한 길을 걸으며 인류 전체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종교는 그 자체가 제도화되면서 스스로를 배신하고 경직된 구조와 관용이 없는 편협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기술하고 있지만 토인비 자신은 “분명히 역사에서 종교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지만 나는 여전히 ‘종교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영웅 시대
제8부에서는 ‘영웅 시대’를 논하고 있다. 토인비는, 문명은 항상 그 자신의 결함과 실패에 의해 파산해 온 것일 뿐, 외부로부터의 작용으로 인해 파멸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회가 스스로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해 사멸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 그 사회의 경계 외부에 있던 야만족들의 침입을 받아 결정적으로 파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계 국가의 경계가 굳건히 정해지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통된다. 이러한 경계로 인해 평화로운 세계 국가와 야만족의 접촉은 불가능하다. 경계란 그들이 파괴적 습격을 감행할 때까지 그들을 문 밖으로 내쫓고 있기 때문이다. 야만족들은 성벽을 굳건히 한 문명에 비해 자유롭게 행동하며 결국 승리를 얻는다. 그들은 황폐해진 과거의 문명의 본거지를 차지하고 잠시 동안 ‘영웅 시대’를 즐긴다.
그러나 영웅 시대는 고도로 수준 높은 종교와는 달리 문명의 역사에 그 어떤 새로운 장도 열지 못한다. 야만족들이란 역사의 무대에서 죽은 문명의 기와 조각을 긁어내는 빗자루에 불과한 것이다. 토인비는 ‘영웅 시대’에서 위와 같이 문명의 탄생에서 사멸에 이르는 과정을 더듬어 본 뒤, 이어지는 제3부에서 문명의 ‘접촉’과 역사 연구의 의미를 검토하고 있다.
문명들의 공간적 접촉
제9부는 ‘문명들의 공간적 접촉’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같은 시대에 한두 문명이 빈번히 문화적으로 접촉할 때(대개 그러한 접촉은 한쪽이 해체 과정에 들어갔을 때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이 같은 형태의 접촉이 특히 중요시되는 점은, 고도의 수준 높은 대부분의 종교는 문명이 서로 엇갈려 있는 장소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공격적’인 문명은 그 희생자에게 문화적이자 종교적인 것은 물론, 인종적으로도 열등자라는 낙인을 찍는 경향을 지닌다. 그 희생자인 공격을 받는 쪽은 이질적 문화에 자기 자신을 강제로 동화시키려고 노력하든가 과도한 방어적 자세로서 이에 대응하게 된다.
토인비는 이 같은 두 가지 반응 모두 현명하지 않다고 간주하고 양자의 공존이라는 더 큰 문제를 직시하면서 의식적으로 상호 조정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바로 고도의 수준 높은 종교가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 온 방법이다. 오늘날 우리의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문화라는 인류의 공통적 운명을 이미 서로 나누어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적대적 경쟁을 통한 상호 대결이 아닌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일이 진정한 지상의 명령이 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 문명에서 영감을 얻은 그리스도교에는 그리스 문명이 만든 요람이 깃들어 있으며, 또 박트리아인이 그리스인 제국을 계승해 세운 야만의 쿠샨 왕국에는 주로 인도 문명에서 감명을 받은 대승 불교에 역시 그리스 문명의 요람이 깃들어 있음이 거론되고 있다. 더욱이 근대 서유럽과 러시아 및 동아시아의 ‘접촉’에 관해서는 그 무렵 러시아와 동아시아가 보인 서유럽 배타주의와 수용주의의 대비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시리아 문명과 그리스 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 궁극적으로는 쌍방이 모두 해체된 뒤 복합 문명이 탄생했다. 곧, 삼위일체의 그리스도교는 유대적 일신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리스적인 종교의 두 가지 착오(인간 숭배와 다신교)에 대한 놀랄 정도의 타협을 뜻한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화되어 유대적 일신교에서 멀어져 간 데 대한 의식적인 신중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이슬람교도 신학적 목적에서는 그리스 철학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의 비그리스적 전설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또한 제9부에서는 동시대의 문명 접촉이 가져온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결과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많은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문명들의 시간적 접촉
제10부는 ‘문명들의 시간적 접촉’을 테마로 삼고 있다. 동시대의 문명 접촉만이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마주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현존하는 문명이 죽은 문명을 르네상스(재생)라는 형태로 살려 내며 그와 접촉한다. 토인비가 사용한 ‘르네상스’라는 말은 이탈리아에서 그리스 문명을 재생시킨 사실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넓은 의미에서 다른 많은 사회에서도 르네상스적 현상은 공통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토인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놀랄 만한 문화적 재생으로 간주하지만, 본질적으로 망령은 살아 있는 것보다 가치가 적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 사회가 고대 문명의 재생을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적 출발의 대용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회는 숨이 멈추게 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마지막으로 제12부는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이다. 토인비는 “역사의 경과를 조사한 뒤, 스스로 ‘역사는 무엇인가’ 또는 ‘어떻게 하여 역사가 쓰이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면 내 역사 연구는 완전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토인비는 결코 모든 사실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역사 기술 역시 이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역사가는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관찰자들과 마찬가지로 실재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역할을 부여받은 존재였다. 그리고 이 같은 사고방식은 역사가로 하여금 ‘무엇이 진실인가, 무엇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라는 연속적 판단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역사가는 이를 위해 모든 사실의 연구를 개관하며 분류, 비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
토인비(1889~1975)는 1889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1911년 옥스퍼드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를 졸업하고 동 칼리지의 연구원 겸 연구지도원에 임명되며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연수 여행을 떠났다. 1년 뒤 귀국해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고대사를 강의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투키디데스의 세계와 현대를 철학적으로 동시대로 삼고자 하는 토인비 사학이 최초로 싹텄다.
1915년 외무부에서 전시 근무에 종사한 뒤, 1919년 파리강화회의의 영국 대표단의 중동 지역 전문위원으로 출석했다. 이 임무를 마친 뒤 학교로 돌아와 런던대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1925년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연구부장이 되었다.
『역사의 연구』(1934~1954, 1961)는 1934년에 제1~3권이, 1939년에 제4~6권이 간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에는 다시 외무부에 근무했다. 1946년 파리강화회의에 다시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으며, 1954년에 『역사의 연구』 제7~10권을 간행했고, 1960~1961년에 제11~12권을 간행했다. 1972년에는 『도설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Illustrated)』를 출판했고, 1975년 요크에서 죽었다.
『역사의 연구』는 종래 열두 권으로 된 원본과 서머벨(D. C. Sommervell)에 의한 축쇄판이 유포되었으나, 1972년 『도설 역사의 연구』가 최종적인 결정판이다.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