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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글
백두산 천지를 여행했다.
내 나이(65세)쯤 되면 백두산여행을
한두번쯤 했을것이지만 나는 백두산 여행이 초행이다.
그간 여러번 갈 기회는 있었으나 늘 바쁘다는 핑게로 미루다가
이번에는 "함평군 민주평화통일 21기 자문위원단"에서
평화통일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위한 워크샵 일정으로 중국 연길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래서 독립지사들의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보았으며
우리민족의 혼이 깃든 백두산 천지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행후에 여행기나 산행기를 남기는 습관이 있어서 여행기를 써 본다.
본 여행기는 내 개인의 시각에서 보고 느낀것을 간단하게 기록한것이며
훗날 기억을 더듬기 위한 일기형식의 글이다.
이번 여행지를 나열하면 대략 이렇다.
2025년 7월 2일(수)에 출발하여 5일(토)에 귀국하는 3박 4일의 일정이었으며
중국내 조선족 자치주 연길에 도착하여 시인 윤동주생가와 기념관을 둘러보고
일송정 정자에 올라 만주벌판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이도백하로 이동하여 백두산 천지에 오르고 장엄한 장백폭포 보았으며
도문지역(두만강가)에서 북녁땅을 바라보는 일정이었다.
여행기는 사소한 현장들은 기록에서 제외하였으며
초상권의 문제로 단체사진은 제외하였고
핸드폰으로 찍은 개인사진과 풍경사진의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썼다.
연길 공항에 내려 이동하면서 한컷!
비가 온후 게인 날씨였으며 깨끗한 도시 느낌이고
이곳도 7월 초순의 날씨가 무덥다.
첫날 첫번째 방문지는 윤동주시인의 생가 방문이었다.
이슬비가 내리는 오후 시인의 생가 명동촌은 한가했다.
명동학교는 1906년 설립한 민족학교인데 북간도에서
조선인들을 교육한 교육의 성지인듯했으며 명동학교 같은 교육이 있었기에
항일운동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이 실감났다.
잠시 윤동주시인의 대표시 "서시"를 읇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내가 중고등학교 어느때인지 모르나
교과서를 통해 처음으로 접한 서시의 언어는 순수하고 강렬했다.
감히 시인의 작품을 해설할수는 없다.
다만 지금의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적어 본다.
시인은 일제 강점기시절 자신이나 민족에게 부끄럼없이 살고자 다짐을 했고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서도 개인과 민족등 모든것을 사랑해야지 라고
한번 더 다짐을 하는것 같아서 애처롭기도 하다.
청년 윤동주의 시적 언어는 수십년 지난 지금의 시각에서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마당 한쪽에 아담한 건물이 있는데 시인의 기념관이다.
시를 무기로 삼은 시인의 기념관에 들어가 사진과 자료를 둘러봤다.
윤동주시인은 이곳 명동촌에서 태어나 초,중등 교육을 마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에서 공부하였다.
언젠가 청와대 뒷산 인왕산을 오르기 위해 걷다가
"시인 윤동주 하숙집"이라는 현판을 본적이 있는데 자세하게는 모르겠고
아마도 하숙집터를 안내하는것으로 기억된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부자집 아들이었나 보다.
윤동주는 창씨개명 운동이 일어나자 차라리 일본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였으며 항일독립운동을 도모하던중에 잡혀 후꾸오까 감옥에 갇혀있다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이름모른(생체실험)주사를 맞고 사망하셨다.
육사는 연희전문학교시절 늘 같이 다니던 정병욱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5살이나 어렸지만 문학적 동지였다.
육사는 1941년 연희전문 졸업기념으로 시집 필사본을
친구 정병욱과 스승 이양하에게 보내 시집을 발간하려 하였으나
스승 이양하로부터 민족적 색채가 강해서 발간시기를 만류하여 보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건너 갔으며 1944년 정병욱도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된다.
정병욱은 자기가 보관중인 육사의 시 필사본을
전남 광양에서 술도가(주조장)를 운영하는 어머니에게 맡기고 입대한다.
"살아 돌아 올때까지 간직해 주시고 두 사람이 다 죽어
돌아오지 않더라도 독립이 되거든 모교로 보내 세상에 알려지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술도가 마루를 뜯어내고 술 담는 항아리에 시를 보관했다.
그후 일본 학도병 강제 징집에서 돌아온 정병욱은 보관중인 필사본 시집을
경향신문 기자였던 강처중에게 전달하고
강처중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가져온 시를 더해 31편으로
"1948년 정음사"에서 시집을 출간한다.
이 시집이 "서시"가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정병욱 어머니가 필사본 시를 잃어 버렸더라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시이기도 하다.
훗날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다.
전남 광양 망덕포구에 가면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가옥이 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참조 요약)
선구자 노랫구절의 "일송정"에 올랐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도피하여 항일운동을 하였고
이곳 만주벌판에서도 치열한 항일운동 전투가 있었는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대표적이고 여기에서 가깝다고 했다.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을 묘사한 노래 "선구자" 구절의 일송정 소나무를 일제는 베어 없애고
쇠말둑을 박아놓아 소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지금은 아담하고 작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행의 단체사진을 찍고 드넖은 만주벌판을 내려다 본다.
독립지사의 후예로서 감회가 깊어진다.
나의 외조님은 독립유공자이시다.
광복단 전남지대장으로 활동하시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1919년 대구고법에서
12년 징역이 확정되어 복역하시고 고문후유증으로 하늘의 별이 되셨다.
대한민국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과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으셨다.
일송정에서 내려다 본 용정시와 혜란강 그리고 저 넓은 벌판이 온통 옥수수밭이다.
높은산은 까마득히 멀고 넓은 들판이 아득하다. 이곳이 만주벌의 일부이다.
바닥이 투명한 유리다리
처음에는 생소하여 무서울것 같았으나 그리 무섭지 않아 편하게 걸으며 사진을 찍었고!
행정실장님도 무섬증이 없는지 가볍게 사뿐 걷는다.
이제 백두산 천지를 가기 위해 소형버스(봉고승합차 비슷)를 타고 오르는데
지그재그 시멘트 포장길을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으며 빠른속도로 달리는데 몸 흔들림이 심하다.
백두산 능선의 상층부는 키 큰 나무가 없고 초원처럼 펼쳐진 능선의
움푹 들어간 곳에는 겨울 잔설이 굳어 푸른 초원에 상처처럼 히끗히끗 하얗다.
본래 백두산은 하얀 설산이란 뜻인데 지금은 기후 온난화로 여름에는 하얀눈을 전혀 볼 수 없다고..
저 언덕 넘이가 천지 연못이다.수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오르고 있고
정상에는 천지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마치 울타리 담장처럼 빽빽하게 서있는 모습이다.
백두산 협곡 아래로 한컷!
천지 오르는 길에 회장님 그리고 남성위원님들과 한컷!
드디어 백두산 천지를 처음으로 본다.
천지는 하늘아래 첫 연못!
사시사철 하얀 설산위 마르지 않는 푸른연못 그곳에 올랐다.
백두산 정상에서의 느낌은 표현하기 힘든 뭔가가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닿도록~"
애국가 구절이 아니더라도 백의민족의 정기가 여기에서 시작한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천지앞에 선 순간 나의 백두대간이 드디어 완성됐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한반도 산맥을 말함인데
나는 남한구간 약700km 거리를 4년에 걸쳐 나누어 걸었고
그 산행기를 역어 2019년 12월 "돼지친구의 백두대간 산행일기"라는 책으로 발간했었다.
나는 백두대간이 내 인생에 꼭 걸어보고 싶은곳이었다.
언젠가는 백두산도 걸어서 오르고
북한구간 백두대간 길 걷는것을 꿈꾸며
유명 산악인과 저명한분들이 "백두대간 평화 트레일"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한적이 있는데 나도 회원으로 가입한적이 있다.
그러나 민간인이 할수 없는 영역이어서 지금은 중단되었는데
백두대간 최초 완주자이신 남난희 선생님과
남북한지역을 모두 걸었던 뉴질랜드 사람 "로저 셰퍼트"가 동호인으로 활동하셨고
소설가와 시인들도 다수 참여하였었다.
나는 아직도 꿈꾼다.
북녁땅 백두대간이 언젠가 개방이 되어
세계적인 "한반도 평화 트레일"이 만들어지기를 기도하며
그 길이 열리는 날 모든것을 멈추고 나는 그길을 걷기 위해 떠날것이다.
백두산은 내 생애 최고의 멋진모습이다!
조상님 은덕인가?
아니면 나의 간절한 바램을 백두산 마고할매가 받아준 것인가?
이틀동안 허락하지 않았다던 천지가
오늘은 화창하게 허락을 해서 수정처럼 맑은 천지를 본다.
백두는 옛 조선의 땅이였다.
아니 저 만주벌판도 우리 조상들이 말타고 달리던 땅이였다.
그래서 아름답지만 더 애틋하고 안타깝다.
천지를 보고 하산하는 인파를 보라.
절반은 한국인이고 절반은 중국인인듯 하다.
중국인들은 장백산이라 부르고 우리는 백두산이라 부르는데
우리가 백두산을 신성시 하는것 처럼 저들도 장백산을 신성시하나 보다.
중국령 장백산 정상 아래 관리건물과 철조망으로 둘러쌓인 군인막사도 있다.
이제 하산를 해야하는데
그리움이 아쉬움으로 남아 자꾸만 더 머물게 하고
다시 천지를 한번 더 바라다 본다.
장백폭포를 보러 갔다.
백두산이 머금은 물이 흐르다가 협곡에서 수직 절벽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수이다.
폭포는 물안개를 피우며 시원하게 내리는데 웅장하고 장엄하다.
저 거대한 폭포수에 더 가까이 갈수 없는것이 아쉽다.
장백폭포는 백두산이 발원지이며 이 물은 송화강으로 흐른다고 한다.
떨어지는 폭포수 양옆으로 하얀 바위같은 모습들이 펼쳐져있다.
하얀 눈덩이인지 포말이 쌓여 언것(아이스)인지 분간이 안되는데
아마도 녹지 않은 눈과 포말이 섞여 얼음덩이가 된듯 하다.
장백폭포수가 흐르는 게울옆에는 온천지대여서
온천연기가 스멀스멀 피어 오르고 있다.
산장에서 온천수에 계란을 삶아 팔고 있어서
한봉지를(3개, 10위안) 샀는데 반숙계란이고 유항냄새가 났다.
일행이 묵었던 주점(호텔)은 온천호텔이엇다.
평소 사우나와 온천을 좋아하는 나는 이틀동안 야외온천에서 온천욕을 하며
여독을 풀고 백두온천을 경험하기도 했다.
(운영시간은 14시~23시까지)
백두산과 장백폭포를 보고 하산하여
다음 방문지 도문지역으로 가기위해 고속도로를 2시간정도 달렸다.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면서 가이드로부터 항일 독립군 전적지 이야기를 들었고,
연해주 조선동포들의 실상을 설명 들었다.
그리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바라 본 차창밖은 끝없는 벌판이었고 평야였으며 온통 옥수수밭이었다.
겨울에는 추워서 토지이용에 한계가 있겠지만 지금의 옥수수는 건강하게 보인다.
그래도 중국은 옥수수 부족국가여서 미국과 남미에서 많은 옥수수를 수입하는것으로 알고 있다.
예전에는 곡물 수출국가였으나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료용 옥수수가 절대부족한 것이다.
도문지역에 도착했다.
이곳은 강 하나로 북한과 중국으로 갈라지는 두만강가 국경지역이다.
바라다 본 강 건너는 북한지역인데 강 사이에 섬이 있고
섬의 나무숲에 가려 북한지역이 자세하게 보이진 않았다.
오래전에는 인근지역에서 북한주민의 탈북 사례가 빈번했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연길식당에서 나온 백김치를 담은 얼음그릇을 한컷!
김치그릇이 얼음이어서 시원함을 보존해주고 눈요기가 되서 신박하다.
마지막날 묵은 호텔인데
오래된 건물이지만 엔틱가구와 식사등등 품격은 괜찮았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12시 인천으로 향하는 아시아나기를 탔고 돌아왔다.
이번 여행은 일반적인 여행과 다르게 항일유적지 탐방을 겸한 워크샵이어서
조심하려고 노력했고 사무처 직원들의 완벽한 준비가 감사했다.
그리고 청년위원님들의 수고와 배려가 고마운 여행이었다.
그리고 백두산 천지를 감상할수 있었던것이 좋았고
푸른 수정같은 천지못의 전경은 나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것 같다.
함평민주평통21기 자문위원님 같이 여행을 할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하고 고급지게 명품여행을 할수 있도록 애써주신 회장님께도 감사드리고
사무처 직원분께도 감사드립니다.
2025년 7월 9일(수) 저녁에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