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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金光炫)
[문과] 인조(仁祖) 1년(1623) 계해(癸亥) 정시(庭試) 병과(丙科) 2위(04/04)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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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회여(晦汝)
호(號) 수북(水北)
생년 갑신(甲申) 1584년 (선조 17)
졸년 정해(丁亥)【補】(주1) 1647년 (인조 25)
향년 64세
합격연령 40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부제학, 청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수북(水北). 할아버지는 김극효(金克孝)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며, 어머니는 권송(權悚)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생원·진사 양과에 모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판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재로 뽑혀 연원도찰방(連源道察訪)을 제수받았다.
1625년(인조 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 및 홍문관부정자, 검열·정언 등을 역임했다. 이괄(李适)의 난 및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사건 때 영사공신(寧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으나 뒤에 개훈(改勳) 때 삭제되었다.
1626년 수찬·교리·암행어사 등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 호조판서 심열(沈悅)의 종사관으로 기읍(畿邑)에 파견되어 기민구제에 힘썼다. 사간·응교·대사헌·대사간·예조참의 등을 거쳐, 1634년 부제학이 되었다.
이 때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인조의 사친추숭(私親追崇)을 옹호함을 임금에게 아부한다 해 탄핵하다가 삼수(三水)로 유배당하였다.
다음해 재이(災異)가 빈발함을 이유로 방면되어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아버지 김상용이 강화로 피난했다가 강화가 함락당해 그 곳에서 자살하자, 김광현도 홍주의 오촌동(鰲村洞)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호종(扈從)의 공을 수록하고 대사간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청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든 문서에 청나라 연호 쓰기를 거부하고 단지 간지만 씀으로써 파직당하였다.그 뒤 이조참판을 배수했으나 사직하였다.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이 일어나 강씨가 사사되자, 강빈의 오빠 강문명(姜文明)이 사위였던 까닭에 순천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그 곳에서 울분 끝에 죽었다.
전서(篆書)와 해서(楷書)를 잘 썼으며, 글씨로는 홍천에 있는 「홍양청난비(洪陽淸難碑)」 및 통진에 있는 「민기신도비(閔箕神道碑)」와 「영상이탁묘비(領相李鐸墓碑)」가 있다. 시문집으로 『수북유고(水北遺稿)』 4권이 전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광현(金光炫))]
[문과] 인조(仁祖) 4년(1626) 병인(丙寅) 중시(重試) 병과(丙科) 1위(04/08)
[생원]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 [생원] 1등(一等) 5위(5/100)
[진사]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46위(76/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04명 [甲1‧乙1‧丙2]
전력 찰방(察訪)
관직 이조참판(吏曹參判)
관직 부제학(副提學)
문과시험답안 책문(策問):기강(紀綱)
타과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1등(一等) 5위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三等) 46위
본인문과 인조(仁祖) 4년(1626) 병인(丙寅) 중시(重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1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상용(金尙容)[文]
[조부(祖父)]
성명 : 김극효(金克孝)[進]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생해(金生海)
[외조부(外祖父)]
성명 : 권개(權愷)[進]
본관 : 안동(安東)【補】
[처부(妻父)]
성명 : 심률(沈慄)[進]
본관 : 청송(靑松)【補】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김상용(金尙容)
[문과] 선조(宣祖) 23년(159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8위(18/4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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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경택(景擇)
호(號) 선원(仙源)
시호(諡號) 문충(文忠)
생년 신유(辛酉) 1561년 (명종 16)
졸년 정축(丁丑)【補】(주1) 1637년 (인조 15)
향년 77세
합격연령 30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판돈녕부사,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서울 출신.
김번(金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김생해(金生海)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선원촌(江華仙源村)으로 피난했다가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어 왜군 토벌과 명나라 군사 접대로 공을 세워 1598년 승지에 발탁되었다.
그 뒤 왕의 측근에서 전란 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했으며,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0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로 좌천, 이후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잠시 한성우윤·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머물렀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하였다.
인조반정 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했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1630년(인조 8)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바로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일찍이 외할아버지인 정유길에게서 고문(古文)과 시를 배웠다. 그리고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황신(黃愼)·이춘영(李春英)·이정구(李廷龜)·오윤겸(吳允謙)·신흠(申欽) 등과 친밀했으며, 당색이 다른 정경세(鄭經世)와도 도학으로써 사귀었다.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면서 인조 초에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갈리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체는 2왕(二王: 晉의 王羲之·王獻之 父子)의 필법을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다.
작품으로는 평양의 숭인전비(崇仁殿碑) 및 풍덕군수(豊德郡守) 장인정(張麟禎)의 비에 남긴 전액(篆額)이 있다.
시조로는 「오륜가(五倫歌)」 5장,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9편이 전한다.
한 때 김상용의 죽음을 놓고 스스로 분신한 것이 아니라 실화(失火) 때문이라는 이설도 있었다. 그러나 박동선(朴東善)·강석기(姜碩期)·신익성(申翊聖) 등의 변호로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1758년(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화 충렬사(忠烈祠), 양주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봉명서원(鳳鳴書院), 안변옥동서원(玉洞書院), 상주서산서원(西山書院), 정평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선원유고(仙源遺稿)』 7권이 전하고, 판본은 안동봉정사(鳳停寺)에 보관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상용(金尙容))]
[진사] 선조(宣祖) 15년(158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위(6/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40명 [甲3‧乙7‧丙30]
전력 참봉(參奉)
관직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관직 한림(翰林)
문과시제 표(表):송조보청물선하태원(宋趙普請勿先下太原)
타과 선조(宣祖) 15년(158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1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극효(金克孝)[進]
[조부(祖父)]
성명 : 김생해(金生海)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번(金璠)[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정유길(鄭惟吉)[文]
본관 : 동래(東萊)【補】
[처부(妻父)]
성명 : 권개(權愷)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제(弟) : 김상관(金尙寬)【補】
제(弟) : 김상건(金尙謇)[進]【補】
제(弟) : 김상헌(金尙憲)[文]
제(弟) : 김상복(金尙宓)[進]【補】(주3)
[가족과거]
자(子) : 김광현(金光炫)[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만력10년임오2월28일사마방목(萬曆十年壬午二月二十八日司馬榜目)』(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古350.48 사마방ㅍ])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안항 : 『만력10년임오2월28일사마방목(萬曆十年壬午二月二十八日司馬榜目)』(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古350.48 사마방ㅍ])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김극효(金克孝)
[진사]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8위(38/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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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희민(希閔)
생년 임인(壬寅) 1542년 (중종 37)
졸년 무오(戊午) 1618년 (광해군 10)
향년 77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1542년(중종 37)∼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민(希閔), 호는 사미당(四味堂). 본관은 안동(安東[新]).
증조부는 상주판관(尙州判官)를 지낸 김영수(金永銖)이고, 조부는 평양서윤(平壤庶尹) 김번(金璠)이며, 부친은 신천군수(信川郡守)을 지냈던 김생해(金生海)이다. 왕실과 긴밀한 관계였는데, 그의 부친은 성종(成宗)의 아들인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사위였다.
또 김극효는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가문에 장가를 들었는데, 정유길은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柳自新)을 사위로 두었다.
따라서 정유길은 광해군의 처외조부가 되고 김극효는 광해군의 처이모부가 된다.
1562년(명종 17)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고, 1564년(명종 19)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 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묘와 신도비는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석실에 있다.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장남인 김상용(金尙容)은 우의정(右議政), 4남인 김상헌(金尙憲)은 좌의정(左議政)에 오르는 등 그의 가문에서 고관대작이 조선말까지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그래서 그를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중시조로 삼는다.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전세마(前洗馬)
관직 돈녕도정(敦寧都正)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생해(金生海)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신천군수(行信川郡守)
[처부(妻父)]
성명 : 정유길(鄭惟吉)[生]【補】(주1)
본관 : 동래(東萊)【補】
[안항(鴈行)]
형(兄) : 김대효(金大孝)
형(兄) : 김달효(金達孝)[生]
[주 1] 처부 : 『상촌고(象村稿)』 卷之24, 墓誌銘, [동지돈녕부사 김공묘지명(同知敦寧府事金公墓誌銘)]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가정43년갑자7월20일사마방목(嘉靖四十三年甲子七月二十日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1])
김생해(金生海)
[진사] 중종(中宗) 32년(153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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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지혼(之渾)
생년 임신(壬申) 1512년 (중종 7)
졸년 무오(戊午) 1558년 (명종 13)
향년 47세
합격연령 26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1512년(중종 7)~1558년(명종 13).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지혼(之渾)이다. 본관은 안동(安東[新])이다.
증조부는 김계권(金係權)이고, 조부는 김영수(金永銖)이며, 부친은 김번(金璠)이다. 외조부는 홍걸(洪傑)이다.
1537년(중종 32)에 진사시 합격하였다.
관직은 호조좌랑(戶曹佐郞)‧사의(司議)‧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547년(명종 2) 사간원(司諫院)으로부터 문음(蔭敍)에 의해 삼조(三曹)에 입사하여, 형조정랑에 제수한 것은 잘못된 등용이므로 체직시켜야 한다는 요청이 있었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아 계속하여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번(金璠)[文]
[처부(妻父)]
성명 : 이침(李忱)【補】
봉호 : 경명군(景明君)
본관 : 전주(全州)【補】
[출전]
『임당유고(林塘遺稿)』 下, 文, [통훈대부 행신천군수 황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김후묘갈명(通訓大夫行信川郡守黃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金侯墓碣銘)]
김번(金璠)
[문과]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探花郞]위(03/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AE40BC88FFFFB1479X0
자(字) 문서(文瑞)
생년 기해(己亥) 1479년 (성종 10)
졸년 갑진(甲辰)【補】(주1) 1544년 (중종 39)
향년 66세
합격연령 35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안동(安東)【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제용감첨정, 평양서윤, 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문서(文瑞).
김삼근(金三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계권(金係權)이고, 아버지는 장령 김영수(金永銖)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로 현령 김박(金博)의 딸이다.
1498년(연산군 4) 진사에 합격하고, 1513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군자감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예조좌랑·병조좌랑·경기도사·헌납·이조정랑·병조정랑·예조정랑·제용감첨정·평양서윤·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전적 때 관북지방에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삼남(三南)의 곡식을 조운할 마땅한 사람을 고르지 못할 때 낮은 관직으로 뽑혀 명성과 경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양서윤이었던 1523년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농업에 힘쓰고 민식(民食:백성을 위한 식량)과 창름(倉廩:관곡을 쌓아두는 창고)을 넉넉히 하며 군졸에게 잡다한 세(稅)를 없애주어 백성의 주거를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뒤에 요승(妖僧) 학조(學祖)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지나쳐서 당시 사림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번(金璠))]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甲3‧乙7‧丙23]
전력 진사(進士)
관직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문과시제 책문(策問)
타과 연산(燕山) 4년(149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부모구존 자경하(慈慶下)【補】(주3)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영수(金永銖)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사헌부장령(行司憲府掌令)【補】(주4)
[조부(祖父)]
성명 : 김계권(金係權)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삼근(金三近)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박(金博)[生](주5)
본관 : 강릉(江陵)【補】
[처부(妻父)]
성명 : 홍걸(洪傑)(주6)
본관 : 남양(南陽[唐])【補】
[안항(鴈行)]
형(兄) : 김영(金瑛)[文]
제(弟) : 김순(金珣)【補】(주7)
[주 1] 졸년 :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 거주지 : 『정덕8년계유9월○일문무잡과방목(正德八年癸酉九月○日文武雜科榜目)』(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보물 제603호])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 구존 : 『정덕8년계유9월○일문무잡과방목(正德八年癸酉九月○日文武雜科榜目)』(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보물 제603호])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모 구존을 추가.
[주 4] 부관직 : 『정덕8년계유9월○일문무잡과방목(正德八年癸酉九月○日文武雜科榜目)』(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보물 제603호])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 관직을 추가.
[주 5] 외조부 : 『정덕8년계유9월○일문무잡과방목(正德八年癸酉九月○日文武雜科榜目)』(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보물 제603호])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주 6] 처부 : 『정덕8년계유9월○일문무잡과방목(正德八年癸酉九月○日文武雜科榜目)』(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보물 제603호])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주 7] 안항 : 『정덕8년계유9월○일문무잡과방목(正德八年癸酉九月○日文武雜科榜目)』(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보물 제603호])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김영수(金永銖)
출생일 1446년(세종 28)
사망일 1502년(연산군 8)
조선전기 통례원봉례, 영천군수, 금교도 찰방 등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적옹(積翁). 아버지는 한성판관 김계권(金係權)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숙하여 음보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성품이 민첩하고 사무에 숙달되어 옥사를 잘 다스렸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나서 사헌부감찰에 제수되고 상주판관이 되었다.
또,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도감랑(都監郎)이 되어 잘 접대하여 명예를 드날리고 의금부경력·도총부사·중추원도사가 되었다.
이어 영덕현령으로 나아가 기민을 다스리고 부역을 고르게 하였다.
이어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장령(掌令)·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거쳐 영천군수·금교도찰방에 임명되었다.
사어(射御)와 바둑, 장기, 음률(音律)에 능하였고, 팽임공장(烹飪工匠)이 되어 음식을 삶는 일에 종사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영수(金永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