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 위해선 ‘선’의 기준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 선은 착하고 올바르며 바른 행실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 “항상 선해야 선한 걸까?” “한 번의 죄를 저지르기만 해도 그 사람은 악한 것일까?” 난 아니라고 본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죗값을 받고 앞으로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행동 또한 선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못 할 것이라고 본다. 물론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이 진짜 악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선’의 기준은 매 순간까진 아니더라도 착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선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몇몇 특수한 상황에서 인간은 악해진다. 자신의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받지 않는 상황, 즉 물과 음식이 없고, 사람에게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은 이기적이고, 악해진다는 “껍데기 이론”이 있다. 껍데기 이론이란 네덜란드의 동물학자 ‘프란스 드발’이라는 사람이 즐겨 말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인간이 만든 문명, 교양, 예의는 위기 상황에서는 너무나 쉽게 깨어진다는 이론이다. 재난, 아포칼립스와 같은 장르의 영화를 보면 남의 재산을 약탈하고, 강간,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온다. 물론 배우의 연기겠지만, 영화에서 이런 캐릭터를 볼 때마다 ‘인간은 결코 선하지 않다.’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실제로도 재산, 재물을 약탈하다가 붙잡힌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난 인간이 위기 상황에서 악한 행실을 보인 사례를 찾아보았다.
이스터섬을 사례로 들겠다. 이스터섬의 원래 이름은 ‘라파 누이’라는 섬이었다. 원주민이 살기 전의 라파 누이 섬은 숲이 울창한 섬이었고, 서기 900년경 폴리네시아인들이 이 섬을 발견하고 살기 시작했다. 라파 누이 사람들은 두 개의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두 부족의 추장들은 서로의 권력과 명예를 과시하고 싶어서 거대한 석상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모아이 석상이다. 석상을 만들기 위해 채석하고 다 만든 석상을 옮기기 위해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토양은 침식되고, 고기잡이에 사용할 배도 만들 나무조차 없어졌다. 더 이상 모아이 석상을 만들 수 없게 되자 두 부족은 폭력으로 힘을 과시하게 되었고, 결국 한 부족이 전멸당하고 말았다. 고기잡이도 할 수 없고, 농업 생산량이 극히 저하된 황폐한 섬에서 먹을 것이 없어지자 생존한 부족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15,000명에 달하는 인구에서 대량학살로 2,000명까지 줄어들고 만다. 두 부족 간의 욕심과 적대감, 악의로 자멸해버린 생존자들로 인해 황폐해진 섬은 1722년 부활절, 네덜란드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자원이 바닥나며 식량이 부족해진 위기 상황에 몰렸을 때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 가?”에 대한 회의심으로 검색을 했다. 하지만, 이번 사례는 문명이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은 원주민의 사례라 현재 인류에는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 인류도 위기 상황에 몰린 라파 누이 사람들처럼 이성을 잃고 서로를 잡아먹을 정도로 악해질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난 또다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사례를 찾아보았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사례로 들겠다. 1971년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스탠퍼드 대학교 교수인 필립 짐바르도라는 사람은 심리학 교수로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감옥 실험의 목적은 ‘선했던 사람들도 환경이나 권력이 주어지면 얼마나 악해질까?’였다. 교수는 참가자를 지원받았는데 육체적, 정신적 장애가 없으며 과거 범죄나 약물 남용이 없는 중산층 가정 출신의 24명의 남자 대학생들을 뽑았다. 즉 평범한 사람을 대상으로 얼마나 악해지는지에 대해 실험했다. 실험은 감옥의 상황을 재연하는 것, 24명 중 18명이 참가했고 나머지 6명은 만일에 대비해 대기했다고 한다. 참가자 18명 중 9명은 교도관, 9명은 죄수로 역할이 나누어졌다. 참가자 교도관들은 실제 교도관 옷을 입고 죄수를 제압하기 위한 무기도 지급되었다. 죄수 역할의 참가자들도 마찬가지로 실제 상황처럼 느껴지도록 그들의 집에서 체포되어 죄수복을 입으며 실험이 시작되었다. 실험 1일 차부터 평범했던 학생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교도관들 교도소 내에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자발적으로 17가지의 통제 규칙을 만들었고 실험 2일 차에는 수감자들이 일으킨 반란에 소화기를 무기 삼아 진압하였다. 실험 3일 차가 되자 수감자들은 저항의지를 상실했고, 자신을 진짜 죄수라 여기기 시작했다. 실험 4일 차에는 현실과 실험을 구분할 수 있는 인원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실험 5일 차가 되자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성적 학대, 고문하기까지 했다. 이를 본 교수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실험을 중단시켰다. 원래는 2주를 목표로 정했던 실험은 단 5일 만에 중단되었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 결과는 처참하다. 정말 ‘인간의 본성은 악이다.’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잘 나타내는 실험인 것 같다. 하지만,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인위적인 실험, 즉 고의로 사람의 악을 끌어 올리는 실험인 것 같아 보였다. 그리하여 이번엔 자연적으로 생긴 위기 상황에서의 인간의 반응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덮쳤다. 그로 인해 제방이 무너지면서 뉴올리언스에 80%가 침수되었고, 물에 잠긴 도시는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갔다. 약 1,300명이 사망하고 약 15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파괴된 주택은 30만 채가 넘었고, 경제적 손실은 1,250억 달러에 달했다. 도시기반 시설이 마비되고 통신은 끊어지며 의약품과 구호품도 제때 전달되지 못했다. 특히 사회경제적 자원이 부족한 흑인과 빈곤층에게 피해가 집중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뉴올리언스에 분명히 엄청난 아귀다툼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도시기반 시설이 마비된 상태의 도시와 집을 잃은 사람들, 그야말로 위기 상황이다. 과연 뉴올리언스의 사람들은 서로를 공격하며 자신의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의 안전을 해할까? 시간이 지나 물이 빠지고 기자들이 들어가 사실을 확인했다. 뉴올리언스 경찰 서장 보고에 의하면, 재난 기간 강간이나 살인은 단 1건도 없었다고 한다. 초기에 구호품이 보급되지 않아 상점을 약탈하는 사건은 있었지만, 이내 정상을 되찾고, 위기 상황에서 서로 돕고 격려하며 버텼다고 한다.
또 다른 사례로는 2001년에 일어난 9.11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불타오를 때 수천 명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착하게 계단을 내려왔다고 한다. 그들은 소방대원이나 부상자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길을 비켜주기까지 했다. 생명이 오고 가는 절박한 순간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성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보인다. 난 사실 조금 놀랐다. 영화를 많이 봐서인지 내 생각 한구석에는 ‘인간은 위기 상황에 이기적으로 변한다.’라는 고정 관념이 있었는데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건을 조사한 뒤로 인간이 그리 악하진 않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에 대해서 나의 최종 의견은 ‘인간은 선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전 세계 모두가 무정부 상황과 같이 위기 상황에 놓인다면, 인간의 선함은 장담할 수 없다.’가 내가 바라보는 인간에 관한 생각이다.
희망은 필요한가?
‘희망은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은 희망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먼저 역할에 대해서 알아보자.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이라고 정의되어있는데 그렇다면 희망은 무엇을 바랄 때 나타나는 행동인가?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경험한 희망은 바라는 것 이상으로 더 절실할 때 나타나는 동기인 것 같다. 나는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희망을 생각했을 때 스포츠 경기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경기에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경기를 찾아보았고, 정말 많은 선수가 있었지만, 카자흐스탄 줄다리기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카자흐스탄 우랄스크에서 중학교 대항 줄다리기 시합이 열렸다. 선수는 양측 각 5명, 왼쪽이 청팀, 오른쪽이 홍팀으로 정해지고 게임이 시작이 시작됐다. 왼쪽으로 줄이 넘어가기 시작하고 청팀이 게임을 유리하게 가져갔다. 오른쪽의 홍팀 선수 중 4명이 중앙선을 넘었고, 1명만 중앙선을 넘으면 청팀이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홍팀의 마지막 주자 줄다리기 소년이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줄다리기 게임은 3분 동안 지속됐다. 홍팀이 질 고비가 몇 번이고 찾아왔지만, 마지막 주자인 줄다리기 소년이 죽을힘을 다해 고비를 넘겼다. 중앙선과 한 걸음을 남기고 포기하지 않은 줄다리 소년의 이길 수 있다는 희망으로 끝내 청팀이 패배하고 홍팀이 승리를 쟁취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희망의 역할은 ‘끝나기 전까지 끝난 게 아니다.’ 줄다리기 소년과 같이 희망을 갖고 끝까지 포기 안 한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고 놀랍다. 자신의 한계에 도달해도, 상대방이 압도적으로 유리해도, 질 것을 알아도 포기하지 않은 스포츠 선수들의 경기는 사람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그럼 희망의 역할은 끝나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동기인 건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상황은 스포츠 경기와 비슷하지만, 좀 더 극단적인 사례가 있을까? 경기가 우승을 위한 것이라면, 생존하기 위해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가지고 찾아보았다. ‘마지막 한걸음까지’라는 실화 영화가 내가 찾아보고 있는 생존을 위한 희망인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독일 클레멘스 포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소련에게 패배하게 되었고, 포렐은 소련의 포로가 되어 25년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았다. 기차를 타고 포로수용소로 가는 길만해도 몇 달은 걸렸고, 얼어 죽는 사람은 물론 포로라는 신분으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포렐은 가족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이상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다짐했고, 포로수용소에서 4년을 버텨낸 뒤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기차를 타고도 몇 달이라는 시간이 걸려 도착한 포로수용소 주변에는 하얀 눈 말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포렐은 몇만km를 걷고 몇 차례의 위기도 부딪쳤지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갖고 계속 걸어 나갔다. 그 결과 포렐은 10년 만에 가족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이처럼 희망은 어떤 역경이라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희망이 좋은 것일까? 어떠한 의도로든 만들어진 희망은 항상 좋은 것일까? 나는 안 좋은 희망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많은 것 중에 하나를 예시로 들자면 도박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돈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억 단위의 돈을 건 사람들도 있다. 나는 이런 희망은 건강하지 않다고 본다.
희망은 기대를 원점으로 생겨나는 동기라고 생각한다. 기대는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림’을 뜻하는데 이를 이루지 못하면 그만큼 실망하게 된다. 만약 카자흐스탄 줄다리기 소년이 3분 동안이나 시합을 지속했지만, 패배했더라면 과연 소년은 기뻐했을까? 포렐이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해 탈출했지만, 실패하고 다시 포로수용소로 돌아갔더라면 행복했을까? 도박으로 돈을 잃은 사람의 심정은 긍정적일까? 난 절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점은 희망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기대와 희망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큰 동기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을 너무 크게 가져 실망의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 또한 실망의 후폭풍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야기해본다.
인간에게 희망의 필요성과 역할은 너무나 잘 알겠다. 희망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도와주고 이를 실천하게 하는 동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실망의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희망은 득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배려심은 의무일 수 있는가?
이번엔 ‘배려심은 의무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데 이 질문에 의문이 생겼다. “배려가 의무이면 배려가 아니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다. 서비스직의 사람의 경우 사람에게 싫든 좋든 배려해야 하지만, “저 사람이 배려하는구나”가 아닌 “저 사람이 일하는구나”로 인식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배려가 의무인 사람에만 해당할뿐더러 서비스직의 사람이 행동한 배려는 배려로 해당한다. 아무리 의무라고 한들 배려의 행동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평소에 행하는 배려와 의무적으로 행하는 배려는 무슨 차일까? 애초가 차이가 있을까?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닐까?
‘칸트’라는 사람의 말에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임마누엘 칸트’는 1700년대에 독일에 살았던 철학자이다. 칸트의 3대 저서 중, 인간의 윤리적 삶에 대해 다루는 ‘실천이성비판’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에서 내가 원하는 배려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칸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의무론’의 범주에 속해있다. ‘의무론’은 쉽게 말해 ‘삶을 착하게 사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칸트에 따르면 윤리적 측면에서 우리 인간은 ‘자연적 경향성’과 ‘실천 이성’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지닌 존재라고 한다.
‘자연적 경향성’은 감정, 식욕, 성욕과 같이 다른 동물들도 지닌 본성을 뜻하고, ‘실천 이성’은 도덕적인 행동을 판단하며 도덕 법칙을 실천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해 주는 이성적인 능력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깡패가 사람을 때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깡패가 사람을 때리고 있어, 하지만 내가 깡패를 말렸다간 나도 맞을 것 같아. 무서워! 도망가자”라는 예시에서‘무섭다’라는 감정에 이끌려 도망간 사람은 ‘자연적 경향성’을 따른 사람이고, “깡패가 사람을 때리고 있어. 내가 가서 말려야지!”라는 예시에서 ‘실천 이성’을 통해 자신이 깡패에게 맞는 한이 있더라도 도덕적 의무를 위해 용감하게 나서 깡패를 말리는 것을 뜻한다.
이때 실천 이성에 따라 발생하는 ‘선한 것을 실천하고 싶다’라는 의지를 ‘선의지’ 또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한다’라는 의식을 ‘의무 의식’이라고 한다. 칸트는 선의지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자체만으로 선한 것”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칸트는 윤리적 행동을 할 때 자연적 경향성이 아닌, 의무 의식이나 선의지를 통한 윤리적 행동만 인정했다. 쉽게 비유하자면, 부자가 아프리카에 기부하였을 때 기부를 한 동기가 ‘사회적 이득이 있어서’, 또는 ‘동정심과 같은 감정이 동기가 돼서 기부한 것’이라면 칸트에 기준에선 이것은 윤리적 가치가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기부한 이유가 ‘돈 많은 사람이 돈 없는 사람을 돕는 것’, ‘사람을 돕는 것이 의무니까’라면 칸트의 기준에서 이것은 윤리적 가치가 있는 행동이다. 어떤 행위가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닌 동기에 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칸트의 사상을 ‘동기 주의’라고도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선한 것을 실천하고 싶다’라는 의지를 ‘선의지’ 또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한다’라는 의식을 ‘의무 의식’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도덕 법칙’은 무엇이냐? 칸트는 “이건 도덕 법칙이고 저건 도덕 법칙이 아니야”라는 것보다 어떤 원칙들이 도덕 법칙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먼저 도덕 법칙은 ‘가언명령’이 아니라 ‘정언명령’이라고 한다. ‘가언명령’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내리는 조건부 명령이다. 예를 들어 “살인을 저지르면 감옥에 가니까 살인을 저질러선 안 돼!”와 같이 어떤 목적을 승인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보편타당성이 없는 것을 뜻한다. 반면 ‘정언명령’은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든 적용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야만 하는 규칙이다. 예를 들어 “살인과 같이 나쁜 행동들은 결과와 상관없이 무조건, 절대로 저지르면 안 돼!”와 같이 행위의 결과에 상관없이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을 뜻한다. 칸트는 도덕법칙은 반드시 이런 정언명령의 형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 도덕법칙, 즉 정언명령이 성립되려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 칸트의 표현으로 ‘정식’이라고 하는 이 조건들은 ‘보편화 정식’, ‘인격성 정식’으로 2가지가 있다. 칸트의 원전에 따르면 이렇게 표현했다. ‘보편화 정식’은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이다. 쉽게 말을 풀면 “네가 생각한 준칙이 세상에 보편화되었을 때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생각해 봐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어”라는 준칙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세상의 도덕법칙이 되었을 때 서로서로 죽이는, 즉 나쁜 문제들이 일어난다면 정언명령이 성립되지 않는 거다. 두 번째로 ‘인격성 정식’은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절대로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동하라”이다. 쉽게 말해 “항상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도 대해야 한다. 즉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해주어야 한다.”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서비스직의 사람에게 막말하고 반말하며 본인이 원하는 서비스를 받는 ‘수단’으로만 서비스 직원을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을 풀면 서비스직의 사람을 서비스 수단으로 이용하되, 서비스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는 거다. 서비스 직원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서비스 수단으로 이용하되 사람으로 존중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럼 다시 맨 처음의 본론을 되돌아보면 내가 이야기한 “배려가 의무이면 배려가 아니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은 풀렸다. 내가 생각한 ‘배려의 의무’는 싫든 좋든 배려해야 한다는 것, 즉 어떠할 때는 가식으로라도 배려해야 한다는 서비스직의 의무에 너무 얽매여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서비스직의 의무와 관계없이 “배려가 의무일 수 있는가? 에 대한 답변은 내놓지 못하겠다. 물론 세상 사람 모두가 칸트의 사상대로 ‘선의지’와 ‘의무 의식’을 가지고 사람을 배려한다면 너무나 좋고 경쟁과 전쟁이 없는 세상을 가져와 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본인의 이득을 위해 남에게 사기를 치는 세상이다. 길거리엔 도쟁이가 있고, 인터넷, 전화로는 사기를 치며, 게임이나 익명성이 있는 가상 세계에선 욕을 너무 쉽게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쉽사리 남을 믿지 못하여 도와주지도 도움받지도 않는다.
“세상 사람 모두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배려가 넘치는 도덕법칙이 생겨난다면, 인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인턴 생활하면서 이런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그래서 난 인턴 생활을 하면서 “나만이라도 배려를 많이 하면서 살아야겠다” 생각했고, 실제로 난처한 상황에 빠진 여러 사람을 도와주었다. 화장실이 급한 사람에게 화장실 장소를 알려주고, 라이터가 없는 사람에게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라이터도 빌려주었으며, 길을 여쭈어보시는 분에게 최대한 상세히 길을 설명해드리며 같이 길을 찾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나의 이러한 사소한 실천은 변함이 없다.
그것이 ‘의무’니까 사람을 돕는 것이다. 그렇기에 칸트의 사상을 쉽게 이해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칸트가 생각하는 배려와 내가 생각하는 배려가 일치해서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신났다. 그래서 “배려가 의무냐? 아니냐?” 에는 정확한 답변은 못 하겠지만, 최소한 “나는 배려를 의무로 실천하고 있다.”라고 답할 수 있다.
|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