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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과 유다의 난세(3,1-12)
“주 만군의 주님”이라는 표현으로 시작과 끝이 표시되는 3,1-15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고발로서, 아하즈 통치 초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본다. 아하즈는 기원전 735년 스무 살에 임금이 되었는데(2열왕 16,1-2),당시 유다 왕국은 외세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 임금의 나이도 젊었으므로 유다의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의 통치 초기에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이 일어나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이사 7장 참조) 아하즈는 오히려 아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단락 안에서도 후대에 첨가된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제3장
3,1 자 보라,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너희가 의지할 모든 것을, 저장된 모든 빵과 저장된 모든 물을 없애 버리시리라.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주 만군의 주님”에 대해서는 1,24 각주 참조. 본래의 뜻을 살리자면 ‘주님이신 만군의 야훼’라고 옮길 수 있다.
“주 만군의 주님”이라는 표현에서 ‘주’는 일반명사 ‘주인, 주님’(아돈 אדון)이고 뒤에 나온 ‘주님’은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 ‘야훼(יהוה)’다. (그래서 뒤의 ‘주님’만 굵은 글자로 되어 있다.)
너희가 의지할 모든 것을
3,1안에는 동사 ‘샤안(שׁען 의지하다)’에서 파생된 비슷한 형태의 명사들이 네 번 반복하여 사용된다. 먼저 ‘의지할 모든 것’이라고 번역된 두 단어는 ‘마슈엔(משׁען)’과 이 단어에서 만들어진 여성명사 ‘마슈에나(משׁענה)’이고, “저장된 모든 빵과 저장된 모든 물”이라고 번역된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빵의 미슈안(משׁען)’과 ‘물의 미슈안(משׁען)’이다. ‘미슈안’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각주 참조.
동사 ‘샤안(שׁען 의지하다)’은 이사 10,20(2회) ; 30,12 ; 31,1 ; 50,10에서 다시 사용된다. 이미 2장에서 보았고 2,22에서도 예고된 바와 같이, 의지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이사야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다.
저장된 모든 물을
‘미슈안(משׁען)’은 매우 드문 단어로서 ‘막대기’를 뜻한다. ‘빵의 막대기’는 빵을 끼워두는 막대기를 뜻하기 때문에 ‘저장된 빵’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저장된 물’이라고 번역된 구절은 본디 ‘물의 막대기’로서, 빵의 막대기에서 유추된 표현이다. 이 단어는 이 구절 이외에는 2사무 22,19=시편 18,19에서만 사용되는데, 거기에서는 “환난의 날에 그들이 나를 덮쳤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의지(‘미슈안 משׁען’)가 되어 주셨네.”라고 말한다.
3,2 용사와 전사 재판관과 예언자 점쟁이와 원로
2-3절에서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언급되는데, 이들은 사회 지도층으로서 이스라엘이 의지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점쟁이”나 “마술사”처럼 본래 금지된 이들만이 아니라 “재판관”이나 “예언자”와 같이 그 자체로서는 합당한 제도들까지도 “없애(치워) 버리시리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 아닌 그 어떤 것을 마치 하느님처럼 의지하려 할 때 하느님은 그 거짓된 안전을 무너뜨리신다. 양식과 물을 비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재판관과 원로도 있어야 하지만, 인간적인 수단들이 절대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인간적 수단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점쟁이와
각종 점술 행위는 대개 다른 민족들에게서 들어온 것으로, 이스라엘에서는 금지되었다. 신명 18,10.14참조.
3,3 장교와 귀족 고문관과 장인과 마술사를 없애 버리시리라.
주님께서 심판하실 대상들로 군사와 종교 지도자들이 언급되지만 임금과 사제들은 언급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아직까지 이사야는 왕정의 붕괴와 성전 파괴의 가능성까지 내다보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남왕국 유다에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께서 택하고 세우신 제도들로서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사야는 이들을 중시하는 예루살렘의 전통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더 멀리 본다면, 이스라엘은 유배를 통해 성전과 왕조까지도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3,4 그런 다음 나는 풋내기들을 그들의 제후로 세우고 철부지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리라.
4절은 1-3절의 결과다. 뛰어난 군인들과 재판관들, 귀족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공백 상태가 되어 자격이 없는 이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풋내기들”로 번역된 단어는 본래 ‘젊은이’를 뜻하지만(נער 나아르, 5절에 사용된 단어와 동일) 고대 사회에서 젊은이는 경험이 없고 판단력도 부족하여 통치를 하거나 재판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므로 미성년자, 어린아이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1열왕 3,7에서 솔로몬은 자신이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백성을 이끄는 법을 모른다고 하며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다. 예레 1,7-8에 나타난 예레미야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이들은 스스로 나이와 경험이 부족하여 맡겨진 직무를 올바로 수행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3,5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저마다 제 이웃을 괴롭히고 젊은이가 노인에게, 천민이 귀인에게 대들리라.
사회의 지도층들이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기본 질서가 무너지는 모습을 나타낸다. 본디 젊은이가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율법에 들어있고(레위 19,32등) 천민과 귀인으로 구분되는 사회 계층의 차이도 당연한 것으로서 지켜져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위에 언급한 레위 19,32에서 노인을 공경하라는 계명이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9,2)는 말씀에 따라 주어지는 계명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를 어기는 것은 단순한 무례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뜻하신 질서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3,6 저마다 제 집안의 형제를 붙잡고서 “자네는 겉옷이라도 가졌으니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주게나. 이 폐허를 자네 손으로 맡아 주게나.” 하고 간청하리라.
저마다 제 집안의
직역하면 ‘제 아버지의 집’이다. ‘아버지의 집(בית אב)’은 가장을 중심으로 하여 가장의 아들들과 그 가족들로 구성된 대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집안’은 같은 집에 살지 않더라도 사회의 중요한 구성단위가 되었다. 창세 12,1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라. 여기에서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가 살고 있는 거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을 말하는 것이다.
간청하리라
본래 집안의 권위는 혈연성의 기준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해지며, 누가 지도자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6절이 묘사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 계층뿐만 아니라 가정 내의 기본질서까지도 유지되지 않는 상황이다.
3,7 그러나 바로 그날로 그는 소리쳐 말하리라. “나는 치유자가 되고 싶지 않네. 내 집에는 빵도 없고 겉옷도 없으니 나를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지 말게나.”
치유자
“치유자”로 번역된 ‘호베쉬(חבשׁ)’는 이사 1,6에서 상처를 싸맨다는 뜻으로 사용된 동사의 능동태 분사형이다. 1,6에서 이 동사가 황폐해져 가는 유다의 상황을 개선하고 회복시킨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치유자’ 역시 폐허가 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임무를 맡은 사람을 지칭한다.
되고 싶지 않네
상황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아무도 지도자로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겉옷”, 곧 지도자 역할을 맡기 위해 필요한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또는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그가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하더라도-그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장 자신이 살길을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겹다는 것이다.(“빵도 없고”)
백성의 지도자
전쟁의 지휘관, 통치자, 재판관 등에 적용되는 단어다.(여호 10,24 ; 판관 11,6.11 등)
3,8 정녕 예루살렘은 비틀거리고 유다는 쓰러졌으니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영광스러운 현존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정녕 예루살렘은 비틀거리고
‘비틀거리다’(카샬 כשׁל)는 6절에 사용된 “폐허(마크셸라 מכשׁלה)”의 어근이다. 어근과 조어법을 고려한다면 후자는 비틀거리게 하는 것, 걸려 넘어지는 무더기를 뜻한다. 이 절에서 비틀거림은 바른길을 가지 못하는 죄악의 상태가 아니라 죄의 결과로 벌을 받아 똑바로 서있지 못하게 된 상태를 나타낸다.
유다는 쓰러졌으니
8절은 “예루살렘-유다”와 “주님”을 언급함으로써 1절과 연결되며, 1-7절에서와 같은 선고가 내려지는 이유가 무어인지를 밝혀준다. 8절 후반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잘못이 어떤 구체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된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현존을
직역하면 ‘그분 영광의 눈들을(עני כבודו)’이고 ‘영광스런 그분의 눈들을’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3,9 그들의 얼굴 표정이 자기들의 죄를 증언하고 그들은 소돔처럼 자기들의 죄악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그들은 불행하여라!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표정”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학카라(הכרה)’는 구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단 한 번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70인역에서는 ‘부끄러움’이라고 번역하고 타르굼에서는 ‘편파적인 처사’로 옮긴다.
자기들의 죄를 증언하고
직역하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고’이다. 죄를 지으면서 인간이 본성적으로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 죄를 감추려는 마음까지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죄에 대해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대 그레고리우스는 소돔이 죄의 부끄러움도 모르고 악명이 자자하여 자기 악행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소돔과 고모라의 아우성이 하느님께 들렸다는 것은(창세 18,20) 그만큼 소돔이 자신이 짓는 죄의 어둠을 보지 못하고 고의로 죄를 지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불행하여라!
본문에 사용된 ‘오이(אוי)’는 불행이나 저주를 선언하는 감탄사다. 11절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된다.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다
이 구절이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재앙을 겪은 이유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거슬렀기 때문이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잠언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구약성경의 인과응보 사상에는(잠언 1,33등) 악인이 겪게 되는 불행에 대해 두 가지 표현 방식이 있다. 한 가지는 하느님께서 악인을 징벌하신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악은 그 자체로 멸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 측면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상반된다거나 구약성경에서 어느 한 가지 측면만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약성경의 사고에 부합하지 않는다.
3,10 너희는 이렇게 말하여라. “의인들은 잘되고 자기가 한 일의 성과를 누리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여라
갑자기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말하여라”라고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불행선언인 11절을 참조하여 이와 대조를 이루는 행복선언으로 고쳐서 번역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의인은 행복하여라.’) 그러나 70인역 역시 형태는 다르지만 ‘말하다’ 동사를 사용한다(‘그들은 ... 라고 말한다’).
의인들은 잘되고
10-11절은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이라는 주제에 있어서나 그 사용된 표현들에 있어서나 전형적인 지혜 문학적 요소들을 보인다.(시편 1편 ; 128,2 ; 잠언 12,14 ; 16,20 등) 또한 지금까지는 ‘예루살렘-유다’라는 집단 전체의 죄악과 그 운명에 대해 말하다가 여기에서는 의인과 악인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는 점도 이질적이다. 이를 개인적인 선악에는 반드시 갚음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예언자가 그 공동체에 속한 이들에게 온 백성이 심판을 받는다 해도 각자는 올바르게 살 것을 권고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그보다는 10-11절은 후대에 9절을 확장한 것으로서 이미 심판과 재앙이 실현된 이후의 공동체를 향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한 일의 성과를 누리리라
원문 직역 ; ‘그들의 행동들의 열매를 먹으리라’
3,11 악인은 불행하여라! 그는 잘못되리라. 제 손이 저지를 대로 되갚음을 받을 것이다.
3,12 나의 백성을 아이들이 억누르고 여자들이 다스리는 구나. 아, 내 백성아! 너희 지도자들이 너희를 잘못 이끌고 너희가 걸아야 할 길을 혼란하게 하는구나.
나의 백성을 아이들이 억누르고
번역에 어려움이 있는 구절이다. 한 단어씩 순서대로 번역하면 ‘나의 백성, 그를 억누르는 자들은 아이’인데, ‘아이’로 번역된 단어(머올렐 מעולל)는 뜻이 분명하지 않으며 ‘관리들’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아이’는 단수형인데, ‘억누르는 자들’은 복수형이라는 점도 문제가 된다.
여자들이 다스리는 구나
“여자들”을 ‘고리대금업자들’로 수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아이들’과 ‘여자들’이 백성을 지배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내정의 혼란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하즈와 히즈키야의 통치 초기에 임금이 나이가 어려 대비가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지만,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달리 번역하여 ‘관리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이 문제되는 상황이라면 외세의 압력에 흔들리는 유다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희 지도자들이
70인역에는 ‘너희를 복되다 하는 이들’이다. 키프리아누스는 이를 풀이하여, 죄를 짓는 사람에게 충고로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듣기 좋은 말로 죄인을 위로하는 이들은 오히려 죄를 더 키우게 한다고 말한다.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3,13-15)
13-15절의 심판은 앞의 본문, 특히 12절에 묘사된 상황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정치 지도자들에게 희생되는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옹호하신다.
3,13 주님께서 재판하러 일어서신다. 백성들을 심판하러 일어나신다.
백성들을
이 자리에 복수형인 ‘백성들(עמים)’은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70인역에는 ‘당신 백성’으로 되어 있다. 호세 4,1-5 ; 미카 6,1-5에서와 같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시는 것이 문맥에 맞는다.
3,14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원로들과 고관들에 대한 재판을 여신다. “바로 너희가 포도밭을 망쳐 놓았다. 너희의 집은 가난한 이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가득하다.
재판을 여신다
이사 1장 이하 지금까지의 고발들은 주로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서 잘못을 따지는 것이었고, 당신 백성이 하느님께 올바로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1,2)등을 증인으로 부르시며 판가름을 요청하거나 징벌을 선호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부터는 하느님이 고발하시는 분이라기보다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재판을 하신다. 이사야서 전체에 나타날,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바로 너희가 포도밭을 망쳐 놓았다
‘원로들과 고관들이 포도밭을 망쳐놓았다’는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이어지는 문맥을 중시하여 상류층에 속한 이들이 글자 그대로 포도밭의 수확을 빼앗아 농민들을 억압하거나 경제적으로 착취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포도밭’이라는 표현은 5,1-7에 나오는 포도밭의 비유를 상기시킨다. 그 본문에 따르면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5,7)다. 그런 의미의 포도밭, 곧 이스라엘을 망치는 것이 다음 구절에 나오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착취로 구체화된다. 여기에서 5장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착취가 “내 백성”에 대한 억압으로, 하느님의 소중한 포도밭을 망치는 행위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더구나 그들을 억압하는 이들이 이스라엘인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상대로 하여 가난한 이들을 “내 백성”이라고 지칭하신다는 것은 더욱 의미가 깊다. 이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참으로 하느님의 백성에 속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구분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3,15 어찌하여 너희는 내 백성을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짓뭉개느냐?” 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아모 2,7의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는다”는 것과 유사한 표현이다. 고대 근동에서 ‘얼굴’은 ‘체면’, ‘위신’과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얼굴을 짓뭉갠다는 말은 단순히 경제적인 착취가 아니라 그들의 인격을 무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주 만군의 주님”은 이사 3,1에 나온 표현이다. 현재의 맥락에서, 주님이신 만군의 야훼라는 이 호칭은(3,1 각주 참조) 과연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주인’, ‘군주’로 모실 분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시는 분, 그들을 구해내는 분이신 만군의 주님이 이스라엘의 참 ‘주인’이시다.
예루살렘 여인들에 대한 경고(3,16-4,1)
이 단락은 예루살렘의 상류층 여인들을 비판한다. 3,1-15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지도층에 속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한 다음 3,16-4,1에서는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그 부인들에게까지 경고함으로써, 그들 모두가 재앙에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아모 3,9-15에서 아모스 예언자가 사마리아에게 심판을 선고한 다음 4,1-3에서 사마리아의 부유층 여인들을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부르며 비난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단락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이사 3,16-17은 먼저 시온의 딸들의 잘못을 고발한 다음 그에 따른(“그러므로”) 심판을 선포하는 형식으로 온전한 하나의 신탁 형식을 구성하고, 이어서 18절에서는 “그날”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하여 주님의 날을 묘사하는 새로운 내용이 도입된다. 연대를 추정하면 3,16-17은 기원전 8세기 이사야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앞의 신탁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이는 18절 이하는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에 속하는 것인지 판단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3,1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시온의 딸들이 교만을 부리고 목을 빼고 걸어 다니면서 호리는 눈짓을 하고 살랑살랑 걸으며 발찌를 잘랑거린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번역문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에서는 “말씀하셨다” 다음 절이 ‘... 이기 때문에(כי 키)’라는 접속사로 이어진다. 다시 말하면, 16절에 묘사된 내용이 심판의 이유로 제시된다.
시온의 딸들이 교만을 부리고
아래에 나오는 모습과 같이 장식하고 다니는 “시온의 딸들(예루살렘의 여인들, 문맥상 아마도 부인들)”의 행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만(동사로 사용된 ‘가버후 גבהו’)”이다. 2.11.17에 나온 “거만(가버후트 גבהות)”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이므로, 우리는 이 여인들의 “교만”이 “인간의 거만은 꺾이리라”는 2장의 예언대로 주님의 날에 심판을 받아 낮아지고 수그러질 것임을 내다볼 수 있다.
목을 빼고
성경에 자주 나오는 “목이 뻣뻣한”(신명 9,13) 것과는 다르다.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순종하지 않음, 완고함을 나타내는데, 여기에서 목을 뺀다는 것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고개를 쳐들고 잘난 척하며 걷는 것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콧대가 높다는 표현에 가깝다.
3,17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를 드러내시고 그들의 이마를 벗겨 보이시리라.
딸들의 정수리를 드러내시고
‘드러내다’로 번역된 ‘시파흐(שׂפח)’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버짐 피게 하다’등으로 번역하기도 했으나, 아카드어와 아랍어의 유사한 단어들이나 대중 라틴말 성경을 참조할 때 ‘드러내다’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이마를
이 단어(포트 פת)역시 뜻이 분명치 않고 과거에는 구멍, 여인의 치부 등으로 번역되었다. 아카드어 ‘이마’와 연결 지을 수 있고, 바빌론에서는 앞머리를 깎는 것이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여기에서는 그렇게도 교만스럽던 예루살렘의 부인들이 예루살렘이 재난을 겪을 때에 정복자들에 의해 겪게 될 수치를 묘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18 그날에 주님께서는 패물들을 없애 버리시리라. 발찌와 태양목걸이와 반달 목걸이,
패물들을 없애 버리시리라
“없애 버리시리라”는 표현은 3,1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의지하던 것, 하느님이 아니면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거두시는 것을 뜻하며, 그럼으로써 오직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이 장차 겪게 될 재앙의 의미다.
이하에 나오는 여러 가지 패물 이름들의 의미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70인역에서도 히브리어 명사들을 하나하나 옮기기보다 번역자가 살던 시대의 장신구 이름들을 열거한다. 그러한 번역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단어들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온갖 종류의 장신구와 옷가지’라는 의미의 전달이기 때문이다. 열거된 단어들 가운데에는 거의 동일한 것들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경우도 잇다.(예를 들면 모자와 머릿수건)
태양목걸이와 반달 목걸이,
앞의 각주에서 말한 내용과 별도로, “태양 목걸이와 반달 목걸이”의 경우는 특별한 점이 있다. 이들은 태양신 숭배 또는 월신숭배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걸이들이 나중에는 단순한 장신구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본디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들 자신이 이러한 목걸이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기에 이러한 장신구를 사용한 사람들은 마치 신상같이 꾸미고 있는 셈이었다. 이 목걸이들 외에도 향수병과 부적 등에 대한 언급은 예루살렘 여인들의 사치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우상숭배나 미신적인 예식에 참여했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께서 패물들을 ‘없애버리시는’ 것은 우상들을 ‘치워버리는’(1사무 7,3.4 등)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3,19 귀걸이와 팔찌와 머리쓰개,
3,20 모자와 발목 걸이와 가슴 띠, 향수병과 부적,
3,21 인장 가락지와 코걸이,
3,22 예복과 덧옷, 장옷과 손지갑,
3,23 망사 옷과 아마 속옷, 머릿수건과 너울을 없애 버리시리라.
3,24 향수 내음 대신 썩은 내가 나고 허리띠 대신 밧줄이 감기리라. 곱게 땋았던 머리가 대머리가 되고 호사스러운 옷 대신 자루 조각이 감기리라. 정녕 아름다움 대신 수치가 자리 잡으리라.
향수
“향수”라고 번역된 단어는 ‘발삼’이다. 발삼은 외국에서 들어온 사치품으로서 화장품으로만이 아니라 전례 때에도 사용했고 방부제로도 사용했다.
썩은 내가 나고
이사 3,1-3에서 하느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했던 모든 것을 없애버리시리라고 선포한 다음 3,4-15에서 그 후에 따르게 될 혼란을 묘사했듯이, 여인들의 경우에도 하느님께서 패물을 ‘없애버리신’ 다음에 그들이 겪게 될 재앙이 묘사된다.(3,24-4,1) 계속 반복해서 사용되는 ‘... 대신(타하트 תחת)’이라는 전치사는 상황의 극적인 대조를 강하게 드러낸다.
자루 조각이 감기리라
“자루 조각”은 자루를 만드는 거친 천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애도 또는 속죄하기 위해 입는 옷을 뜻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요나 3,5-8에서는 니네베에서 회개하기 위해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자루옷을 입게 했다고 말한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시편 30,12과 정반대의 상황을 표현한다.
아름다움 대신 수치가
70인역에는 이 행 전체가 없는데,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히브리어 본문의 번역에 어려움이 있다. “수치”는 쿰란 사본인 1Qis에 따라 삽입한 단어인데, 과거에는 ‘아름다움 대신 낙인이’라고 번역했다. 공동번역은 “수치의 낙인이 찍히리라”로 번역했다. 지금도 다른 언어의 번역본들에서는 ‘아름다움 대신 낙인’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25 너의 남편들은 칼에 쓰러지고 너의 용사들은 전쟁터에서 넘어지리라.
너의
25절에서는 분명하게 전쟁을 예고하는데 2인칭 단수 표현에 유의해야 한다. 3,25-4,1에서는 시온을 의인화하여 여인으로 나타내며, 히브리어 여성 단수인 25절의 “너” 역시 시온(예루살렘)을 지칭한다.
3,26 시온의 성문들이 슬피 통곡하고 시온은 황폐해져 땅바닥에 주저앉으리라.
시온의 성문들이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성문 앞 광장 곧 재판이 이루어지거나 도시의 중심이 되는 곳, 또는 방어를 위한 성문’을 지칭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샤아르(שׁער)’가 아니라 ‘열린 곳, 출구’를 뜻하는 ‘페타흐(פתח)’다. 그 의미는 전략적인 요충지, 또는 문이 남지 않고 통로만 남은 출입구로 보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어떤 경우든 이미 침략군이 그 성문을 통해 들어가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모욕한 상황에서성문이 슬퍼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온을 향한 길들은 비탄에 잠기고”(애가 1,4)와 유사한 표현이다.
주저앉으리라
이 구절도 “아, 사람들로 붐비던 도성이 외로이 앉아있다”(1,1)와 매우 가깝다. 두 구절 모두 시온이 여인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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