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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로 가는 길
이 홍사
돌아갈 길은 아득한 석양인데, 그렇더라도 이쯤에서 열 받은 굴착기를 잠시 세우고 식히며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가자.
홍랑은 주행하던 대형 굴착기를 세웠다.
하필 이곳이라?
이토록 가슴을 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 짠함을 두고 그리움이라 일컫는가?
고개를 돌려 멀리 허공을 살핀다.
그 마을로 가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짧은 늦가을 해는 이제 막 서산을 넘었다. 홍랑은 주행하던 굴착기를 갓길에 세우고 멀리 서산마루에 붉게 물든 석양을 보고 담배를 빼서 물었다.
길게 한 모금 들이킨다.
이쯤에서 좀 쉬어가야 한다. 굴착기가 아니더라도 유압기기란 원래 그런 기계다. 그렇다고 시동을 끄면 안 된다. 아이들링 상태에서 열을 식혀야 하는 기계다.
사방은 지난여름 무성하게 자란 잡풀이 늦가을 바람에 사위어가는 황량한 공장용지고 도로만 왕복 팔 차선으로 거창하고 거대하게 닦아놓은, 5공단이지만 도로는 아직 한산하다. 아니다. 한산한 정도가 아니라 텅 비어있다. 여기서 해마루 공원을 넘으면 지금쯤이면 퇴근 차량으로 엄청 밀릴 것인데 여기는 한산하다 못해 고즈넉한 분위기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넘어 쓸쓸한 대지다.
홍랑은 굴착기 창을 열고 담배 연기를 밖으로 내뿜는다.
담배 연기가 가리키는 저곳 어디가 그곳이지 싶다. 그 마을로 가는 길이. 아마도 지금 기초공사를 하는 저 공장의 뒤쪽 어디쯤 될 것이다. 눈대중으로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고 짐작해 보니 대충 그렇다.
항상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는 길었고 마을이었다. 황톳길 고개 너머에 열댓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인데 이젠 마을뿐만이 아니라 그 황톳길 고개도 없어졌다. 그 마을에 가는 길이, 그 황톳길 고개가 아마도 저기, 기초공사하는 공장용지 어디쯤이었을 거다. 마을 뒤에는 작은 동산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온데간데가 없었다. 삽시간에 다 밀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5공단 개발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공장용지를 만들었다.
외국인 전용 단지로 지정이 되면서 국내 업체에는 분양을 하지 않았던 부지인데, 어느 합작회사인지는 모르지만, 분양을 받고 나니 공사가 바쁜 모양이다. 야간에 콘크리트 타설을 마저 하려는지 현장에는 미리 불을 밝히고 레미콘 차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멀리서 한눈에 보아도 아직 기초공사다.
이 부지 때문에 시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공장용지가 가격이 비싸고 또 부지를 완공하자, 제조업의 경기가 부진해졌고 무엇보다 이 나라의 인건비가 오르고 노조가 과격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꺼려 분양이 더디던 부지인데 용케, 임자를 만나니 바쁜 모양이다. 아마도 시에서 유치하려고 무슨 특별혜택을 준 모양이다.
외국인 전용 단지에 입주업체를 다 채운다는 게 이번 민선시장의 공약이었다.
그는 그 공약을 내걸어서인지 모르지만, 당선되었다. 이 도시는 본래 지금 야당으로 전락한 지난 정부 여당의 텃밭인데 그 공약 덕분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후보가 시장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외국인 전용 단지에 입주업체가 다 들어오면 이 도시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불어날 것이다. 그건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사람이 몰리면 당연히 장사가 잘 될 것이고 그리고 공장용지로 편입되지 않은 땅을 가진 사람들은 지가가 오를 것이다. 일단은 인구가 많아야 뭐든지 활발하게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이치, 자꾸만 공장을 다른 지역으로 빼앗기는 이 도시의 사람들은 인구 유입이 숙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건 어느 지방 도시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공장이 들어오기도 전에, 아니 공장이 아니라 용지가 분양되기도 전에 인근의 상업 개발지역에는 발 빠른 개발업체의 아파트 단지가 먼저 들어왔다. 대단지인데 두 곳이고 초고층 아파트다.
한데 완공은 했지만 거의 빈 아파트란다.
소문을 듣기로는 분양이 임박했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저녁마다 빈 아파트를 돌아다니면서 불을 켜고 아침이면 불을 끄는 사람을 채용해서 밤에 보면 아파트가 거의 분양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소문도 있다.
홍랑이 지금 생각하기에도 그 소문이 맞지 싶다. 아직 공단이 다 들어오지 않았고, 도시의 인구가 폭증하지 않았는데 대중교통의 사각 지역에 있는 저 신설 대단지 아파트가 그렇게 쉽게 분양이 되었을 리는 만무다.
수요를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중소도시에 아파트가 난립하는 건 정부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유는 수도권 아파트의 분양 상한가를 정했기 때문이란다. 수도권에 아파트 분양 상한가를 정부에서 정하고 나니 그 비싼 땅에 아파트를 지어서는 수익을 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이치. 비교적 땅값이 싼 중소도시로 아파트 개발업자들이 몰리는 것 역시 당연하다. 서울에는 새로 아파트를 짓지 않으니 기존 아파트의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고 했다. 분양 상한가를 정해서 집값을 잡는다는 정책은 당연히 실패다. 그러나 고집이 세고 경제에 대해서는 문맹과도 같은 정부는 철회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지은 아파트도 그 여파로 빈 아파트가 속출한 것이리라. 저녁에 불마저 켜지 않는다면 삭막한 이 부지는 유령도시가 따로 없을 거다.
굴착기는 거의 한 시간을 달려왔으니 유압유를 냉각시키는 차원에서 잠시 쉬어가야 한다. 기사에게 끌고 들어가라고 했으면 무시하고 그대로 주행했을 것이다. 유압기기란 유압유가 열을 너무 받으면 그 유압을 막고 있는 고무 재질의 리데너가 경화된다. 그게 유압기기의 가장 흔한 고장이다. 굴착기도 예외는 아니다. 한 시간 정도 주행을 했으면 일이십 분은 쉬어가야 하는 기계다. 엔진의 힘을 바로 받아서 구동시키는 자동차와는 구조가 다르다. 그러나 기사들은 그런 점을 무시한다. 퇴근 시간이 되면 뭣이 그리 바쁜지, 아무리 주행 거리가 길어도 주기장까지 그대로 주행을 하는 것이다. 그게 기사와 차주의 차이다. 그 차이는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게 마련이다.
오늘은 공단 저쪽 변두리에 생기는 전원주택단지의 석축 공사를 마치고 들어가는 길이다. 일주일이 넘게 작업했는데 기사는 굴착기를 현장에 두고 승용차로 출퇴근을 했다. 오늘 작업을 마친다는 걸 일찍 알았더라면 아침에 홍랑이 승용차로 출근을 시켜주면 좋았을 것을, 점심을 먹고 연락이 와서 기사가 차를 두 대를 끌고 들어갈 수가 없는 일이라 사무실 경리부장인 여동생에게 현장까지 태워달라고 해서 홍랑이 직접 작업을 마친 굴착기를 끌고 들어가는 길이다. 기사는 저녁에 약속이 있다면서 키를 넘겨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 뒤였다.
전원주택도 지금 시작하면 후발주자가 된다.
예전에 연립주택이나 원룸을 짓던 업자들이 눈을 돌려 이젠 전원주택이다. 머지않아 전원주택도 원룸 꼴이 날 것이 분명하다. 수요와 공급의 적절한 선을 찾지 못하는 게 문제다. 좀 된다고 하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무조건 과잉공급을 만들어 버린다.
오늘 작업을 한 현장도 베틀산이 훤히 보이는 공단 뒤편의 야산 자락이었다. 조망권은 다른 곳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위치였다. 정남향이고, 쉽게 손을 털 수 있다고 업자는 장담했다. 기사가 돌아가고 홍랑은 한참이나 업자인 배사장과 얘기를 하다가 출발했다. 배사장도 이번이 아무래도 전원주택지로서는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헐값에 야산을 사서 개발행위 허가를 받고 전원주택지를 조성하여 택지로 등기를 하고 되파는 형식으로 차액을 챙기는 게 업자의 일이었다. 문제는 그놈의 개발행위 허가다. 그 행위의 적합, 부적합, 기준점이라는 게 담당 공무원의 주관적인 입장이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공무원을 잘 구워삶고, 법을 제대로 알고 야산을 구매해야 한다.
어떤 서툰 업자가 땅을 구해서 개발행위를 넣었다가, 이삼 년에 걸쳐 대여섯 번 수정하여 허가를 넣고 끝내 허가를 받지 못하고 지쳐서 손을 든 땅을 헐값에 접수한 다른 업자가 단 몇 달 만에 허가를 내고 택지로 지번을 완벽하게 부여받는 건 무어라고 설명할 수가 있을까?
그건 담당 공무원이 들고 있는 잣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업자에겐 이 잣대를 들이대고, 저 업자에겐 저 잣대를 들이대니 그런 결과가 초래된다는 말이다.
그건 남의 일이고, 홍랑 자신은 전원주택지를 조성할 일이 없다. 하고 싶어도 후발주자가 되어 분양실적이 저조할 건 뻔하다.
한데, 이젠 어디에도 없다. 산동면 신당리 231번지가 있었던 뒷골이라 불리던 산 너머 마을은 없다. 어디에도 그 마을로 통하는 길도 없다.
5공단 몇 블록으로 바뀌었지 싶은데 그 지번을 알 길이 없다.
그곳이 결코 홍랑의 고향은 아니다.
군에 있을 적에 참 많이도 쓴 주소이고 지번까지 외우던 곳인데 저렇게 공장용지로 둔갑을 했다. 그 집, 뒤란으로 통하는 동산의 황톳길도 사라졌다. 군대 시절, 첫 휴가를 나와서 일병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고, 방위병이 동원되어, 앉은 파리조차도 미끄러지게 한다며, 반짝반짝하게 닦은 군화를 신고 넘어갔던 길이고, 군에 입대하기 전에 백구두에 발목까지 오는 당시에 유행하던 롱코트를 입고 넘었던 황톳길 고개다. 그 이전에는 교련복을 입고 넘어가서 하룻밤을 자고, 친구 어머니께서 정성을 들여 싸주시던 도시락을 책가방에 넣고 넘던 길이었는데 이젠 없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물론이고 그 친구도 없다.
성현례!
저 보이지 않는 고개 너머에 살았던 친구 Y 아니, 편의상 그 친구의 이름을 절구라고 하자. 절구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뒷골은 본디 집성촌이라 그 일가붙이들이 촌락을 형성하고 살고 있었다. 절구의 바로 이웃, 큰집에 사는 사촌 여동생이었는데 이름이 현례였었다. 눈이 크고 유난히 뽀얀 피부를 가졌는데 절구보다 한 살 아래였었고 당시에 인근의 여상을 다녔다.
절구는 홍랑과는 다른 중학교에 다녔으니 불알친구는 아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동급생으로 만났다. 일학년 때는 다른 학급이어서 얼굴만 아는 정도로 지냈는데, 이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되었다. 아무튼, 그 친구의 집에 뻔질나게 들락거린 이유는 절구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들락거렸지만, 그 집 어른들은 물론이고 절구조차도 왜 그렇게 친근하게 들락거리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짐작하겠지만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학창시절에는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지 말도 걸지 못했다. 현례는 스스럼이 없었지만 홍랑이 오히려 숫기가 없었다.
왜 그렇게 숫기가 없었을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녀를 보러 그곳에 갔지만 정작 그녀가 작은 집이라고 나타나면 홍랑이 숨어버렸으니, 허! 거참!
지금 생각하니 그녀는 발랄한 성격이었다.
“절구오빠! 저! 오빠 참 순진하게 생겼다. 그렇지?”
무슨 나물이 담긴 대바구니에 들고 마루에 내려놓던 그녀의 말이었고, 홍랑을 처음으로 평가한 현례의 말이었다.
그 목소리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귀에 쟁쟁하다.
홍랑이 어떤 이성에게 평가받기는 처음이었고, 그렇게 가슴이 쿵, 내려앉고 설레는 말은 없었다. 그 말은 홍랑에게 순진하게 살아야 한다는 지시어였다. 그 지시어는 평생을 따라 다녔다. 최소한 그녀 앞에서는 순진해야만 했다. 그때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다녀온 뒤였지 싶다. 수학여행에서 그 절구와 급격히 친해졌으니.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당시에 여상 일학년이었고 집에서 버스로 통학을 했다.
살아오면서 이따금 눈에 선하게 떠오르고 생각이 나는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살며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어디 사는지 최소한의 안부라도 물어보고 싶지만, 친구조차도 없다. 슬픈 일이다.
홍랑은 고개를 들어 고개가 있던 그 마을로 가는 길이 있었던 곳을 살핀다. 아무리 보아도 허공이다. 기초공사를 진행하는 현장의 불은 더 밝아졌고 노을은 더 옅어졌다. 노을이 저렇게 슬퍼 보이기는 처음이다.
가자! 유압유가 어지간히 식었을 거다.
홍랑이 다시 담배를 물고 출발하려는데 힐끗 보니 그 고개에서 친구, 절구가 손짓한다.
얼레? 이게 뭐야?
홍랑은 서서히 출발하는 굴착기의 급브레이크를 잡았다. 육중한 굴착기의 붐이 출렁거리며 멈춰섰다. 홍랑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고개가 있던 자리를 살폈다. 그 친구는 없고 그 고개가 있던 자리에는 철새의 무리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난데없이 그 친구가 왜 보였지?
홍랑이 현례에게 정식으로 편지를 보낸 건 군에서였다.
훈련소에서 훈련병으로 교육을 받던 시절, 애인에게 편지 쓰기 시간이 주어졌다. 훈련소장의 재량으로 만든 시간이었다. 애인이 정말 없는 훈련병은 부모나 형제를 대상으로 편지를 써도 좋다고 했다.
그 시간에 떠올린 게 현례였다.
주소는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주소를 몰라도 산동면 신당리 뒷골이라는 것까지만 써도 워낙 시골 마을이니 편지가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최소한 그 마을을 담당하는 우체부는 그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대충 외우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우체국에서 택배까지 취급하는 게 아니었고 편지와 전보가 고작이었다. 지금 아이들은 전보가 뭔지를 모를 것이다. 스마트폰이 이렇게 발달한 시대에 전보가 있을 리가 없다. 옛날에 전보가 있었다고 하면 그게 뭐냐고 물을 것이다. 혹시 아직도 전보라는 시스템이 우체국에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현례에게 편지를 썼다. 미사여구를 동원한 장문의 편지였다. 그 편지는 훈련소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일괄 보내졌다.
열흘 안에 편지에 답장을 오는 훈련병에 한해서는 한나절 행군 훈련 대신에 내무반에 앉아서 영상을 보는 정신교육이 주어진다고 했다. 물론 훈련소장의 재량이었다. 홍랑은 편지 끝에 그 내용도 적었다.
한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답장이 온 것이다.
겉치레의 언어로 점철된, 마지못해 보는 위문편지의 답장이 아니고 오빠라는 호칭을 쓰며 깨알 같은 글씨로 두 장이나 되는 답장이었다. 훈련병인 홍랑은 꿈만 같았다.
당시에는 행운의 편지라는 게 있었다.
그 편지를 받으면 똑같은 내용을 일주일 내로 일곱 사람에게 보내면 행운이 온다는 것이다. 행운의 편지를 받고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편지를 보내지 않아 암살되었다는 묵시적 협박까지 담긴 내용이었으며 그 편지 끝에는 당신에게 행운을 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에 그 편지를 받으면 기분이 고약했다. 홍랑도 그 행운의 편지를 여러 번 받아보았다. 그러나 다 무시하고 아궁이에 던져넣었다. 단 한 번도 그 편지의 내용대로 다른 사람에게 행운의 편지를 보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꼴로 살고 있는가?
그 편지 내용대로 모든 사람이 행운을 구하고자 일곱 명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치자, 그러면 서너 달 있으면 편지가 기하급수로 불어나서 세계인은 매일 행운의 편지만 쓰는 기막힌 꼴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홍랑의 세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편지를 한두 번쯤은 받아보았을 것이다.
훈련소에서 현례에게 답장을 받은 느낌은 행운의 편지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 편지는 잘 보관하고 짬이 날 때마다 꺼내 읽으며 고된 훈련소 생활을 마칠 수가 있었다. 물론, 부대장이 약속한 행군은 참가하지 않고 영상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다. 홍랑은 현례에게 답장을 보냈다. 남들이 자는 시간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덕분에 행군은 참가하지 않고 영상교육을 받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내용도 편지에 담아서 보냈다. 그 편지에는 답장하지 말라, 답장을 받을 즈음이면 자대로 배치를 받아서 옮겨갈 것이라고 했다.
자대로 옮겨가서 홍랑은 맨 먼저 현례에게 군사우편을 보냈다. 어디에 근무하고 있으며 보직은 무어라는 것까지 소상히 일러주었다. 답장은 재깍 왔다.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했다. 정말이지 황홀한 답장이었다. 그러면서 절구 오빠가 입대 일자가 정해졌고 소집영장을 받았다고 했다. 친구의 소식을 현례를 통해서 들어야 했다. 그것도 기분이 나쁜 일이 아니었다.
절구보다 현례가 더 가깝다?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황홀한 일이었다.
친구인 절구는 대학 다니던 학기를 마치고 입대하느라 홍랑보다는 육 개월이나 늦게 입대했다. 어느 훈련소에 있다. 어디로 배속되었다. 심지어 절구의 부대 주소까지도 현례를 통해서 정보를 입수할 수가 있었다. 홍랑이 편지를 두 번 보내면 한 번은 답장이 왔다. 같은 부대원들은 홍랑에게 온 현례의 편지를 돌아가면서 읽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애인의 편지를 돌려 읽는 것으로 위안이 되던 시절이었다. 편지로 현례의 사진도 받았고 그 사진도 돌려보고 있을 즈음, 친구인 절구의 주소를 현례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절구에게도 편지를 보내고 받았다. 절구는 당시에 전투경찰을 지원해서 육군이 아닌 전투경찰로 김포공항에서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다. 절구에게 편지를 한번 보내면 현례에게는 세 번 정도 보내는 꼴이었다. 군인이었던 홍랑에게는 절구는 항상 현례에게 밀리는 존재였다.
홍랑이 첫 휴가를 나와 집에 들렀다가 가장 먼저 인사를 간 곳이 절구네 집이었다. 바로 허공이 되어버린 저기 저쪽의 황량한 공장용지 허공 어디쯤이었을 거다. 절구네 어른에게 인사를 드리는 목적이 아니라 이미 짐작하겠지만 현례를 보기 위함이었다. 사전에 편지로 언제 휴가를 간다, 며칟날 어른들께 인사를 가겠다고 현례에게 알렸으니 현례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절구네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현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에는 현례를 데리고 나와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음악다방에 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집성촌이라 보는 눈이 많고 무엇보다 현례에게 홍랑은 순진한 대상이어야만 했다.
첫 휴가에서 현례를 두 번 만났다. 당시에 여상 삼학년이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서 다녔는데 현례는 졸업을 했다고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 여고생들은 그랬다. 일학년은 단발머리, 이학년은 양 갈래로 묶고 다녔고 머리카락이 더 길어 삼학년이 되면 양 갈래로 땋아서 다녔으니 머리 모양만 보고도 몇 학년이지 단박에 알아볼 수가 있던 시절이었다.
현례에게는 단발머리가 참 잘 어울렸다. 첫 휴가를 나와서 두 번을 만났는데 모두가 절구네 툇마루에서였다. 손도 잡지 못했지만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았는지 해가 설핏하도록 노닥거리고 귀대를 했다. 현례는 은행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지고 다음 달부터 면 소재지에 있는 사설우체국에 나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편지를 하기가 더 좋겠네?”
절구는 현례의 단발머리 사진을 편지로 보내달라고 하고는 일어섰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주고 뒤란으로 통하는 고갯마루를 넘어 황톳길을 내려와서 귀대했다.
휴가를 가서 현례를 만났던 얘기를 써서 절구에게 편지를 보내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었다. 절구는 약이 올랐는지 둘이서 잘해보라고 했다. 진즉에 다리를 놓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현례를 좋아하면 결국은 절구 자신이 홍랑의 형님이 된다고 했다. 기분 나쁜 소리는 아니었다. 다음 편지에는, 친구! 라는 호칭 대신에 처남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런 재미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즈음 절구에게서 온 편지에는 전역하면 복학을 하지 않겠노라고 했다. 이유는 다시 공부해서 신학대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 절구는 홍랑과 같은 문과를 나와 국어교육과에 들어가서 선생님이 될 인재였는데 그 길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무래도 신학을 전공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했다. 홍랑이 알기로는 절구네 마을 가까운 곳에 교회도 없을뿐더러 신학에 관해 얘기를 들은 바가 없어 너무 생소했다.
절구가 목사가 된다?
아니라고 했다.
선교사가 되어 동남아 불교국가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다고 했다. 그게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일이고 내린 임무일 거라고 했다.
그때부터 절구의 편지 끝인사에는 신의 은총이 가득하길, 하나님의 손길로 어루만지시길, 신의 가호가, 이런 문구가 들어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고 했다. 담배에 관해서라면 홍랑보다 절구가 더 일찍부터 피웠고 더 많이 피우던 인간인데 끊었다는 편지를 받았다.
현례는 예상대로 사설우체국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편지를 받고 알았다.
그때부터, 홍랑은 주소를 달리 써야 했다. 사실이지 집으로 보내는 편지는 부담스러웠다. 할 말을 완벽하게 하지 못했다. 혹여 식구 중에서 편지를 먼저 읽어보는 사람이 있을까 언어를 구사하고 단어를 선택하는데 고민을 해야 했는데 우체국에 근무하니 편지를, 더 자주 마음대로 쓸 수가 있었다.
현례도 편지글에 언어를 채택하는데 더 과감해졌다. 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휴가를 언제 나오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절구가 전역할 때까지 홍랑은 한 번도 절구를 만나지 못했다. 휴가가 겹치는 시기가 없었다. 요즘처럼 휴가를 모았다가 자기가 쓰고 싶을 때 쓰는 게 아니었다. 요즘은 휴가를 미루거나 당길 수가 있다니, 그런 군대도 다 있나 싶을 정도다.
절구는 전역하고 한 학기 동안, 공부를 다시 해서 서울의 어느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절구가 서울로 가자 홍랑과 만나는 횟수는 빈번하게 줄었고 만나면 추구하는 바가 달라, 공동 관심사가 줄어드니, 말이 아귀가 맞지 않아 점차 멀어지는 건 당연하 이치, 절구는 홍랑을 만나면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면서 교회에 나갈 것을 종용했다. 그게 홍랑의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을 했다.
홍랑은 당시에 귀하다는 굴착기를 배워 객지 현장을 떠돌고 있었으니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었고, 명절 끝에 절구네 어른께 인사를 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현례도 홍랑이 전역을 하기 직전에 서울의 무슨 해운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리고 편지는 중단되었다. 홍랑이 전역을 하고 절구네 어른께 인사를 올리러 갔었지만 현례를 보지는 못했다. 그 후에도 명절 끝이면 홍랑이 인사를 갔지만 현례는 명절조차도 집에 내려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현례의 편지 덕분에 군 생활은 지겹지 않게 보낼 수가 있었다. 순전히 그녀의 덕이었다. 한데 지금은 어디에 살며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홍랑보다 한 살이 적으니 아마도 남편이란 작자는 홍랑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로 저 기전 허공에 살았던 위인인데, 그 마을로 가는 길은 이제 없다.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마을의 위치가 어렴풋하다. 분명히 저 공장용지 뒤의 큰 산줄기를 보니 기초공사를 하는 저 현장 너머지 싶다.
한번 가볼까?
홍랑은 굴착기의 붐을 들어 버켓을 지면에 내리고, 굴착기를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세우고 시동을 껐다. 지금 출발하더라도 해마루 공원을 지나면 체증이 심할 거다. 홍랑은 굴착기에서 내려 공사 현장으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섰다. 이 차선 도로였는데 인도에는 보도블록을 깔았지만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잡풀이 돋아 있었다. 예전에는 면 소재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하는 길이었는데 세월은 이렇게 흘렀다.
“정말 강산이 변했군!”
중얼거리며 또 담배를 물었다. 예상대로 공사 현장은, 기초를 콘크리트로 타설하고 있었다 굴착기에 앉아서 보던 것 보다 상당히 큰 공장을 짓는 모양이다. 불을 밝힌 현장에는 레미콘이며 인부들이 빽빽했다.
절구는 신학대학을 나와서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강원도의 어느 개척교회에서 설교하며 공부를 더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때 홍랑은 몸값이 제법 나가던 노련한 굴착기 기사였다. 당시에는 굴착기 기사가 아무나 무시할 직업이 아니었다. 홍랑은 군수 딸이 아니면 중매에 나서지 말라고 할 정도로 몸값이 나가던 중후한 베테랑이었다. 그때 공무원이 된 친구와 월급을 슬쩍 비교하니 홍랑이 거의 세 곱이었다.
그러나 신학을 전공한 절구는, 홍랑이 혈안이 된 경제성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철저히 무시하고 성실하고 차분하게 시골 노인들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하고 있었다.
홍랑이 경제의 물밑에서 억지를 부려 손을 짚고 나와 뭍의 맛을 알아보려고 근근이 벌어서 간간이 할부금을 내는 방식이지만 자신의 굴착기를 소유했을 즈음, 절구는 캄보디아로 날아갔다. 그게 그의 소원이자 인생의 목표였던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날아갔다. 홍랑이 알기로는 캄보디아는 불교국가였는데 선교사로 갔다면 오지에 투신한 셈이다.
홍랑은 그 친구가 떠나는 걸 보지 못했다. 현장을 떠돌아다니며 일하기에 바빴다. 일은 밀리고 굴착기가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뒤늦게 소문에 들으니 배낭 하나에 성경만 넣어서 날아갔다고 했다.
가까이 오니 어딘가 어디인지 더 모르겠다.
굴착기에 앉아서 보았을 적에는 지금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공장 뒤편 어디이지 싶었는데 막상 들어서니 닦아놓은 공장용지는 온통 잡초밭이고 그 옛날 산동면 신당리 뒷골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더 가늠하기 힘들어졌다.
“뭐가 이래?”
뒤에 있는 큰 산의 산세를 보아도 정확한 위치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공장용지는 석축을 쌓아 계단식으로 만들었고 뒷골의 위치가 좀 높은 마을이었으니 아마도 이쯤이 맞지 싶은데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 뒷골은 없다. 무성한 잡초밭 어디에도 그 마을로 통하는 길은 없었다.
홍랑은 광활하게 닦아놓은 공장용지를 둘러보며 뒷골의 위치가 그 공장용지 허공 어디쯤이었을 거라는 짐작만 했다. 마음이 공장용지만큼이나 황폐해졌다. 홍랑은 허공을 올려다보며 서성이고 있었다.
절구는 캄보디아로 건너가서 현지처녀와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친구들 사이에서 서 들려왔다. 캄보디아에서도 아주 깡촌, 시골 중의 시골로 들어가, 그마을 시골 처녀와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 소문을 들은 것이 캄보디아로 건너간 지 삼 년이 넘었을 즈음이다. 프놈펜에서 차로 몇 시간이나 걸리는 아주 시골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시에 홍랑은 굴착기의 할부를 다 갚고 한 대 더 구매했던 때였다. 두 대가 되자 홍랑은 자가운전을 그만두고 기사를 채용해서 본격적으로 영업과 관리에 몰두했다. 지금이야 그런 일이 드물지만, 당시에 굴착기 영업은 전국이 무대였다. 홍랑이 그렇게 종횡무진 현장으로 뛰어다닐 적에 아주,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고등학교 동기생들의 모임에 나가, 술자리에서 그 소문을 들었다.
절구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적에는 너무 실감이 일지 않아 덤덤했다.
“그 친구가 왜 죽어? 지금 열심히 설교하고 있을 거야.”
아니란다. 벌써 서너 달 전의 일이라고 했다. 절구의 동생이 소식을 듣고 다녀왔다고 했다. 어떤 친구는 열대지방에서 댕기열에 걸려 앓다가 죽었다고 했고, 어떤 친구는 이미 병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나라의 의료시설로는 손을 쓰지 못했다고 우겼지만, 어느 게 진실이든 그 친구는 죽었다는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유해라도 와야 할 거 아니야?”
홍랑은 그 소식을 전한 동기 녀석에게 소리를 질렀다. 마치 그가 절구를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 친구야! 목청 낮춰! 현지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를 보여 줘야 한다며 그곳의 어느 절에 안치했대.”
“하나님 말씀을 전하던 전도사가 죽었는데 절에 안치해?”
홍랑은 또 목청을 높였었다.
절구의 동생, 성구가 들어가서 젊은 현지의 미망인과 그렇게 합의를 보고 나왔다고 했다. 그 나라의 문화가 그러니 따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동기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나라는 기일이 되면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는 나라이니 유해를 가지고 나오는 것보다 그곳에 두는 것이 낫고, 또 장차 태어날 자식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를 보여 주어야 하니, 그곳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곳에는 절, 법당에 유해를 담은 단지가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다고, 마치 본 것처럼 얘기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게 벌써 이십 년도 넘은 일이다.
아무튼, 그 친구, 절구는 없다.
홍랑은 그 소식을 들은 날을 생각하며 황량한 공장용지 앞에서 또 버릇처럼 담배를 물었다. 심란하니 담배에 손이 가는 모양이다.
뒷골이라는 마을은 어디에도 없다. 저 허공 어디쯤이 그의 집이 있었던 위치일 거다. 그 마을로 가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집 뒤란으로 통하는 황톳길 고개도 없다.
그 마을로 가는 길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리고 현례도 그 마을에 없다. 그 마을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 길은 혹시 홍랑,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홍랑은 볼우물이 파이도록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다. 마을이 있었을 허공에 노을이 퍼지고 있었고 철새의 무리가 열을 지어 붉게 물든 하늘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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