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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걷어 올린 초식과 붉은 모래의 세계
-이홍사 소설집 『꼰대 생각』
박승민(시인)
핏속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이홍사 소설가는 부지런하다. <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 이후 창작집 1권, 소설집 6권, 장편소설 3권 등 평균 이삼 년에 책 한 권씩 내놓을 만큼 그의 글쓰기는 규칙적이며 일상화되어 있다. 지난 5월에 『페르세우스여 안녕』이란 장편소설을 펴내고 돌아서서 또 다른 소설집 『꼰대 생각』을 내놓을 만큼 ‘이야기’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 못지않다. 더군다나 이홍사 소설가는 전업 작가도 아니다. 그는 구미에서 중장비업체를 운영하는 동시에 미얀마에도 사업체를 거느린 어엿한 ‘경영자’이기도 하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홍사 소설가의 소설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것인데, 이는 그의 핏속에 이야기를 직조하는 타고난 능력이 내재되어 있고, 이를 특유의 성실성으로 ‘받아 적는’ 후천적인 노력까지 겸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번 소설집 『꼰대 생각』에는 총 열네 편의 길고 짧은 단편들이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의 숲은 이룬다. 여기에는 현 정부의 실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괄호속의 아우성」, 「꼰대 생각」)이나 젊은 세대들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꼰대 생각」,「어처구니는 어디로 갔을까」), 부부 간의 소통부재(「여래심」), 죽은 아우를 통해 ‘죽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가묘를 미리 만듦으로써 ‘죽음을 예비하는 자’의 태도(「빈집」, 「나의 장례식」)를 다룬 작품과 낯선 미얀마에서 사업하는 이방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문화적 차이(「어처구니는 어디로 갔을까」)를 다룬 작품까지 다양하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 봐야할 점은 이런 일상적 주제를 넘어서서 보다 더 삶의 근원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소설들 역시 적절히 배치되어 있는바, 골동품 경매장에서 우연히 산 달항아리를 통해 “달의 뿌리”를 집요하게 캐는 「달의 뿌리」, 육식동물들의 치열한 적자생존의 법칙 속에서 그나마 이 세계를 세계답게 유지시키는 “초식동물”들의 희생과 헌신을 그린 「초식동물의 눈」이나 「청동 코끼리」 「붉은 모래」 등은 일상을 넘어서서 일상 바깥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소설집의 폭을 넓히고 있다.
갈등을 넘어가는 방법에 대한 탐구
우선 이홍사 소설의 발화자들은 우리 소설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홍사 소설가가 중장비 기사로 출발해서 중장비 업체를 거느린 중소기업가가 된 만큼 그의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대게가 ‘노동자’의 입장보다는 ‘업주’의 입장에 선다. ‘업주’의 입장에서 실물경제를 보고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는 우리 소설에서는 거의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소설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괄호속의 아우성」에서는 “괄호”는 그 형상이 의미하는 바처럼 무언가를 묶어놓고 제한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먹고사는 일이 좀 좋아지려나 싶었지만 타이어가게를 하는 군대 동기도, 목욕탕에서 만난 덤프트럭 차주인 권 사장도 “일이 이렇게 바싹 마르기는 생전 처음”인 상황에 놓인다. 거기에 “PC방 아르바이트 한 명 모집에 팔십 명이 몰려”들었다는 신문 기사는 불난 집에 부채질 정도가 아닌, 대형 선풍기를 틀어놓는 형국이 되고 이는 급기야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신과 성토로 이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라는 역병까지 창궐하면서 “국민은 수직으로 추락한 경기 속에서 역병과 싸우며 혼란의 도가니에서 헤매고 있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이 와중에 결정적으로 처형의 막내아들인 “청수”의 자살미수소식까지 들린다. “청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마쳤지만 극심한 취업난으로 연거푸 취업에 실패하자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까지 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모든 실의에 빠진 자들’에게 이런 질긴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보리쌀도 모자라서 그걸 서로 뺏어먹으려고 했단 가난한 어린 시절”과 “저수지 공사에 일력을 나가 밀가루 한 됫박을 얻어오던 지난 시절”을 상기시키며 “조금만 참고 살면 희망이 보인다.”라는 말을. 즉 “괄호”라는 것은 늘 있어왔으되, 고정된 것이 아니라서 시절에 따라 그 규모가 훨씬 더 넓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청수”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종래 우리가 ‘노동자의 권리’만 중시하던 시각의 반대편에서 ‘중소기업 업주’들의 입장과 고민을 들려줌으로써 이 둘의 절충을 어떻게 시도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숙제’를 주고 있다.
더불어 표제작인 「꼰대 생각」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노동의 관점’을 놓고 벌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을 다룬다. 시대가 변하면 노동의 관점도 당연히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 ‘노동하는 태도’에 대한 세대 간의 관점의 차이는 간극이 너무 크다. “홍랑”은 그야말로 흙수저 출신으로 “하루 열여섯 시간 이상을 67일 동안 굴착기 운전석에 앉아 있던” 신화를 바탕으로 어엿한 중장비 차주로 성공했다. 그런 자신과 비교할 때 아들의 노동관과 인생관은 영 마뜩하지 않다. 홍랑이 보기에 아들은 일이 귀한 줄도 모르고 “노는 게 최선이고 쉬는 게 차선”이면서 아버지가 한 마디 충고하도 할라치면 “옛날하고 지금과 비교를 하지 마세요. 시대가 어떻게 변했는데 고리타분한 소리를 하려고 해요?”라는 핀잔을 하기 일쑤다. 늘 시계를 오 분 일찍 맞춰놓고 하루를 일찍 시작하던 자신의 근면 성실은 “꼰대” 혹은 “수꼴”로 폄하되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항상 오 분 일찍 현장에 도착하는 버릇을 들여라. 오 분이 중요한 법이다”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일을 시키는 사람이 오 분 정도는 기다려야죠.”라고 아들은 답한다. “일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고객이라고 생각해라.” “노가다 판에서 고객이 어디 있어요? 갔다고 올게요” 라는 식으로 아들과 아버지의 ‘노동관’은 대립을 넘어 폭발 직전까지 와 있다. 그러면서 홍랑은 오늘도 혼자 중얼거린다. “따지면 신세대가 기성세대보다 많이 배웠을지 모르지만, 밥을 구하는 능력은 꼰대 세대가 월등히 낫다”고.
회자정리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
그런데 이번 소설집의 또 다른 한 축은 ‘죽음’의 문제이다. 생과 사의 문제만큼 많이 다루어진 문학적 주제는 없을 터, 이홍사 소설가 또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과 사의 문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젊어서 총망 받는 교사였던 동생의 난데없는 죽음을 모티브로 한 「빈집」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동생은 “나”와 네 살 터울로, 나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공부도 잘하고 나를 잘 따랐다. 그런데 오늘이 동생의 기일이다. 아내와 아들은 동생의 집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고, 나는 차마 동생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서 9년째 제사에 불참하고 있다. 때문에 집은 비어 있고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빈집”에 홀로 있다가 밀려오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환영과 괴로움 때문에 “국밥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술이 몇 순배 돌면서 내 기억 속으로 동생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고 있다. 동생이 일곱 살 때, 시골 십리 길을 걸어서 사학년이었던 나를 찾아오던 그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군대 시절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그대로 든 채 대구에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또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서 작전 도로를 걸어서” 나를 찾아왔던 동생의 기억은 어제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일처럼 또렷하다. “어떻게 왔냐?” “갑자기 보고 싶어서 형님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이 단순한 문답 속에는 형과 동생의 끊을 수 없는 수만 가지 말과 감정이 섞여들어 있다. 때문에 나에게 동생의 죽음은 잠재적으로 늘 내면화되어 있는 상태이고, 그게 동생의 기일이라는 날이 오면 임계점을 넘어 나를 다시 한 번 생과 사의 지옥으로 빠트리곤 한다. 동생이 한창 아플 때, “낙안읍성에 한번 갔으면 좋겠어요. 아이들 데리고”라는 유언 아닌 유언은 지켰지만 이제 다시는 그 낙안읍성을 동생과 함께 가지는 못한다. 회자정리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 이보다 더 무섭고 분명한 자연법칙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화자 자신이 자신의 무덤을 미리 써놓는, 이른바 “가묘”를 두고 벌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나의 장례식」은 죽음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나”는 환갑을 맞았고 윤사월이 끼어 있는 해에 “봉남리 자두밭”에 가묘를 조성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강산석재”의 “정달공”, 이름하여 평생을 돌을 만진, “정의 달인”과 함께 석축까지 쌓을 계획을 세운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죽음은 할머니의 친구 분인 “범골할매”의 죽음이다. “범골할매”는 어버이날을 맞아 동네에서 해주는 잔치를 다 받아먹고 춤추고 놀다가 다음날 자는 듯이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요양원에서 막 바로 장례식장으로 가는, 죽을 권리조차 박탈당한 현행 의료시스템에 강한 불신을 갖고 있고 화장이나 수목장 등의 방식에도 탐탁해하지 않다. 그렇다고 아들에게까지 내 묘지를 관리하라고 요구할 수 없는 탈근대의 시대를 살고 있다. 때문에 내 죽음은 내가 준비한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고, “정달공”과 나의 묘지에 대해 의논하게 된다. 왜냐하면 “정달공”은 “예술가적 안목”과 “기(氣)와 음양의 조화”까지 두루 살필 수 있는 묘지 쓰기의 달인이자 장인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생각이 고루할 수도 있겠지만, “깊은 산이 아니라 야산에 묻혀 후손들이 소풍 삼아 와서 산소 앞 잔디밭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놀다가는” 그런 장소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나는 아내도 모르게, 오히려 아내를 생각해서, 또 자식들의 장래의 편리까지를 고려해서 석축에 석관까지 쓰는 나만의 묘지를 완성한다. 그리고 상상해 본다 “내 장례를 치르는 날,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이 묘지작업의 근본적인 숨은 동기는 다름 아닌 “묘지를 제대로 만들고 나면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사사로운 욕심은 버리”는 내 나름의 생이 결단이기도 하고 육십갑자를 넘기고 새로 시작한 삶에 대한 새로운 다짐의 의식일 수도 있다. 당신의 마지막은 어떻게 준비하시겠습니까? 「나의 장례식」의 “나”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이홍사 소설가는 미얀마에서 주택임대업을 하고 있다. 때문에 한 달은 미얀마에 다른 한 달은 한국에 있는 이중생활을 몇 년째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코로나” 사태로 근 일 년 반 이상을 미얀마에 가지 못한 상태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로 인해 일상 경제 자체가 마비된 상황이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처구니는 어디로 갔을까」는 미얀마와 한국 간의 문화적 차이와 사고의 차이를 “퓨퓨”라는 가사도우미와의 갈등을 통해서 풀어내고 있다. “퓨퓨”는 “홍랑”의 가사도우미로 일하지만, 애인이 생기고부터 씀씀이가 헤퍼지고, 선불요구는 물론이고 “홍랑”에게 야금야금 빌려간 빚도 점차 늘게 된다. 급기야는 “홍랑”이 한국에 있는 동안, 홍랑이 애지중지하는 오토바이마저 중고시장에 팔아넘기면서 “홍랑”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홍랑”은 이 과정을 통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여러 번 목격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퓨퓨”를 해고하게 되는데, 이 “어처구니없는 상태”의 최종 압권은 “퓨퓨”가 감당 못할 빚을 “홍랑”에게 지고나가면서도 새로 얻은 “방값”과 새 직장을 잡을 때까지의 “생활비”를 빌려줄 것을 요구하는 그 당당함에 있다. 그러니깐 “퓨퓨”와의 전쟁에서 나는 완패하면서 “어처구니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에는 “퓨퓨”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홍랑”의 매니저를 맡으면서 수학선생으로 ‘투잡’을 뛰는 야무진 “때슈” 같은 사람 또한 있기 마련. 어떤 의미에서 “어처구니”는 전 세계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어쩌면 「괄호속의 아우성」의 “청수”나 「꼰대 생각」의 “아들”의 세계관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이 과도기를 형상화 한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어처구니는 어디로 갔을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초식성의 지향과 붉은 모래
그러나 이홍사의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주목할 작품들은 「달의 뿌리」 「초식동물의 눈」 「청동 코끼리」 「붉은 모래」 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현실에 기반 하되 그 현실을 살짝 넘어서서 ‘세상의 근본 질문’에 육박해 들어가는 공력들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청동 코끼리」와 「초식동물의 눈」은 “초식동물”의 지향이라는 상호 겹치는 부분을 고려할 때, 이홍사 소설의 궁극적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추측하게 한다.
「청동 코끼리」의 경우 “나”의 유일한 취미 중의 하나가 골동품을 파는 경매장에서 소소한 골동품을 사는 것이다. 어느 날 크기가 한 자는 족히 넘을 청동 코끼리 한 마리를 경매로 집에 들여놓게 되었다. 그런데 쇠로 된 수세미로 청동 코끼리를 목욕시키면서 점점 이 청동 코끼리의 하자가 눈에 들어온다. 체형에 비해 귀가 너무 크다. 또 코는 “하늘로 치솟고” 있다. 더군다나 “어딘가 모르게 저돌적이고 반항의 빛이 역력한 공격형 태도”이기도 하다. 조형미와 균형미에서 많이 처지는 코끼리인 것인데 더 큰 문제는 초식동물인 코끼리가 “포악한 초식성”의 형태라는 것이다. 어딘가 한 곳에 집중하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다른 일을 못 하는 “나”의 성정상 이 ‘문제의 코끼리’는 늘 숨겨둔 근심 같은 것. 그러던 어느 날, 팔공산에서 글을 쓰는 문우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경매장을 발견했고 “나”는 거기에서 완벽한 형태의 청동 코끼리 상을 발견한다. 이 코끼리는 “코를 늘어뜨리고 양순하게 생겨 먹은 것이 등에 십장생도를 양각”까지 해놓은 명품이다. 그 표정 또한 “온순해서” 집에 있는 코끼리와는 완전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야말로 내가 이상적으로 꼽는 코끼리의 초식성과 조화, 균형미를 완벽하게 갖춘 코끼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코끼리 찾기’는 아마 이홍사 소설가의 소설에 대한 일종의 소설관이라고 바꾸어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청동 코끼리」에 삽화처럼 나오는 문인들과의 모임은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서사가 아닐 수 없다. 「초식동물의 눈」의 경우, 세상은 “동물의 왕국”과 같아서 약육강식이 지배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초식동물 같은 이들이 남아서 이 세상을 보다 더 세상답게 만든다. 그런 초식동물계에 속한 사람으로는 “홍랑”의 후배가 있다. 그는 닉네임도 “초식동물”로 쓸 만큼 “눈매가 선한 것”을 사랑하고 “사물이나 대상을 접하는 시각과 인식의 폭이 홍랑의 그것보다는 넓고 높기” 때문에 홍랑의 2년 후배지만 홍랑이 유독 아낀다. 이 “초식동물”은 사람과의 분쟁에 있어서도 “언제나 져주고 먼저 사과를 하는 인간”이다. 그런 초식류의 인간으로는 “홍랑”이 사업을 하는 나라인 미얀마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순도 백 프로의 순수” “순수의 절정!”이라고 홍랑이 말할 만큼 미얀마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소녀들의 미소와 함께 보는 눈”은 초식동물의 원형에 가깝다. 다른 초식류로는 A의 아내인 B보살과 C의 아내가 있다. 그 반대편, 즉 육식동물류로는 A와 C, C의 시어머니가 있다. A는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했으면서도, 성에 차지 않아 행정고시를 계속 공부하고, 공부하는 와중에 무책임하게도 B보살과 결혼을 한다. 생계는 당연히 B보살이 책임을 지게 된다. 초식동물은 이런 류의 인간을 가장 혐오한다. 이유는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른”채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함으로써 “남의 인생까지 조지는”사람이기 때문이다. 역시 또 다른 육식동물로는 C와 C의 어머니를 들 수 있다. “홍랑”보다 두 살 많은 C는 주정뱅이로 삼백일을 술에 절여 산다. 그가 포기한 농사는 오롯이 C의 아내의 몫인데, 여기에 시어머니의 학대와 언어폭력이 도를 넘고 있다. 즉, 육식동물들에 의한 초식동물들의 수난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여전해서 「초식동물의 눈」은 우리시대의 ’우화‘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붉은 모래」의 세계는 흥미롭다. 사진작가 매니져 토니는 “붉은 모래”만 전문적으로 찍는 작가이다. 그것도 붉은 산이 아니라 붉은 해변의 붉은 모래만을. 홍랑은 페루의 플라야 로하 해변에 있다는 “불다 못해 핏빛이 되어버린” 이 모래밭에 언젠가 갈 결심을 굳힌다. 그것은 아마도 너무 열심히 산 자가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자, 남은 삶의 시간이 별로 없는 자가 마지막으로 돌아갈 성소(聖所) 같은 것일 터. 그만큼 홍랑은 살아남기 위해 몽골로 미얀마로 새로운 시장을 찾아서 고투했고, 고투한 만큼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이다. 어떤 의미에서 “홍랑”이 미리 자신의 가묘를 만든 행위와 “붉은 모래”는 형태만 다를 뿐 “회귀본능” 곧 언젠가 돌아갈 날을 대비한, 대비한 만큼 더 치열하게 살겠다는 상징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서서 “그 일은 희망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묘소에 “붉은 모래”를 가져다 놓고 싶은 홍랑의 심정은 삶을 돌아보는 자의 마지막 의식 같은 행위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페루의 해변, 그 붉은 모래 언덕에 두견 한 마리 붉은 울음을 토해내며 선회하고 있는 게 선하게 보”이는 상태이자 자기 내면에서 올라오는 “붉은 울음!” 마지막 열망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홍사 소설가는 전술한 바와 같이 내면에 이야기를 직조하는 자동기술 같은 것이 작동하고 있다. 「청동 코끼리」의 그 큰 귀로 세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경청하며 이를 꾸준히 자기 이야기로 엮어내는 능력이야 말로 소설가로의 이홍사의 최고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이홍사 소설가는 우리문학이 다루지 않는 사각지대, 예컨대 ‘중소기업운영자의 입장’이나 수많은 여행과 사업을 통해 얻은 문화적 차이와 동질성을 들려줌으로써 독자들에게는 문학적 지평을 넓혀준 공이 크다. 그런 이홍사 소설가도 이젠 한 갑자를 돌아서 “가묘”를 스스로 쓰고 새로운 출발의 선상에 있다. ‘가묘를 쓰는 마음’으로 다음 ‘이야기를 쓰는’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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