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내일보다 죽음이 먼저 올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자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죽음이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인지도 기억해야 한다. 이를 잘 대변하는 속담이 있다. “내일이 먼저 올지, 내생이 먼저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오리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죽음을 늘 ‘먼 미래의 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늘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산다. 그래서 죽음이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명상해야 한다. 이는 아주 중요하다. 경전에 보면 타락한 시대의 사람들 수명은 불확실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죽음에는 어떤 규칙도, 순서도 없다. 죽음은 늙은 사람, 젊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아무 때나 불쑥 찾아온다. 건강하던 사람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죽기도 하고 반면 누워 지내는 병약한 환자가 오래 살기도 한다.
죽음에 이르는 원인과 목숨을 유지하는 방법을 비교해 보면 죽음을 왜 예측할 수 없는지는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몸이 강하고 오래 갈 것이라고 믿으며 소중하게 여긴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 희망을 저버린다. 우리 몸을 바위나 쇠 같은 것에 비교해 보자. 얼마나 허약하고 연약한가. 건강하게 살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지만 음식조차 우리를 병들게 하고 죽음으로 내몬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대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풍족하고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이 명확하게 표출된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기기들이 마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이나 되는 것처럼 집착을 한다. 자동차, 기차, 배, 비행기가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편의를 제공하고, 안락을 선사했지만 때로는 우리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곤경에 빠뜨리는 경우도 빈번하다.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얼마나 많은가. 안전하고도 빨리 이동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빚어낸 결과다. 사람들은 경고도 없이 죽음을 맞아야 한다. 우리 삶을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애써 보지만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죽음을 삶의 끝이라 여겨 두려워한다. 설상가상 죽음 앞에서는 평생을 바쳐 쌓아온 것들 재산ㆍ권력ㆍ명성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막강한 군사를 통솔하는 권력자라 해도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부자라면 최상의 치료를 받을 수는 있지만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전문가를 고용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재산을 두고 가야 한다. 동전 한 푼 가지고 갈 수 없다. 가장 친한 친구도 동행할 수 없다. 혼자서 다음 세상을 맞아야 한다. 이때 수행의 경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강력한 통치자들이었다. 평소 경비가 얼마나 삼엄한지 일반인들은 그들 곁에 다가갈 수도 없었다. 과거에 내가 베이징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매번 같은 집회장에서 모택동을 만나야 했다. 지금도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문마다 경호원들이 서서 우리를 감시했다. 죽음이 닥칠 때는 그런 경호원도 소용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달라이 라마를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죽음이 나를 덮칠 때 나는 혼자일 것이다. 달라이 라마라는 직책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제자도, 신도도 많은 승려라고 항변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제 백만장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죽음이 엄습해 오는 순간, 그의 재산은 그에게 고통과 불행을 더할 뿐이다. 그 부자는 마지막 순간에 극심하게 불안해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몸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유산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누구에게 남길 것인지로 고민을 해야 하니 괴로움은 커질 뿐이다. 이런 상황은 이해하기 모호한 철학적 가정이 아니라 일상적인 현실이다. 죽는 순간에, 죽은 다음에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이런 주제를 명상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우리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운명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특별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대하고, 애정을 각별하게 보낸다. 소중한 그들이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하지만 죽어 가는 순간에는 소중한 그들도 속수무책이다. 몇몇은 죽어 가는 우리를 위해 뭐라도 해 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 가족이나 친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리의 다음 생을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다. 죽어 가는 순간, 가족과 친구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걱정만 끼치는 경우도 있다. 남겨지는 가족의 미래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고통은 더 극심하게 몰려올 것이다. 자신은 죽어 가고 있는데 살아 있는 가족들의 앞날을 걱정한다.
우리 몸은 우리에게 대단히 소중하다. 잉태된 순간부터 몸은 우리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이자 가장 굳건한 동반자였다. 그런 몸을 잘 보살피기 위해서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 배고프면 음식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셨다. 피곤하면 휴식도 취했다. 소중한 우리 몸을 보살피고, 편하게 하고, 보호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몸도 우리에게 봉사를 한다. 몸은 주인인 우리가 하는 다양한 요구를 항상 들어 줄 준비를 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마음은 매 순간 움직인다. 우리가 그 무엇을 하든, 심지어 잠을 자는 순간에도 마음은 쉬는 법이 결코 없다. 죽음이 닥칠 때면 우리는 몸을 포기한다. 몸과 마음은 분리가 되고, 그토록 소중했던 우리 몸도 그저 끔찍한 시체가 되고 만다. 따라서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재산ㆍ명예ㆍ가족과 우리의 몸조차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미지와 직면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의식의 연속체 속에 심어 놓은 선업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은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죽음을 깊이 있게 거론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눈을 감고 외면한다고 해서 죽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는 무관하게 죽음을 맞아야 한다, 언젠가는. 따라서 미리 준비를 하려면 죽음의 과정을 명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명상은 죽음의 과정을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죽음이라는 중대한 상황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효과적이려면 죽음의 확실성을 명상한 다음에는 죽음의 과정을 명상해야 한다. 이것은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음을 명상을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죽음은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다. 죽음은 특정한 시점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수명이 다하거나 공덕의 힘이 다했을 때 찾아온다. 아니면 갑작스런 사고로 죽음을 맞기도 한다. 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 처음에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것이다. 치유가 불가능한 순간이 오면 종교에 의지하고, 기도를 할지도 모른다. 기도 덕분에 처음엔 차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병세는 점점 악화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병이 깊어지면서 의사가 명확한 진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진다. 병상에 오래 누워 있다 보면 건강을 회복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푹신한 침대조차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 몸은 점점 감각을 잃어갈 것이다, 시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