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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강 - 行由品-1
六祖大師法寶壇經 -門人 法海 記-
一. 行由品
時에 大師- 至寶林하시니 韶州韋刺史名璩-
與官僚로 入山하야 請師出於大梵寺講堂하야
爲衆開緣說法이어늘 師-
升座次에 刺史官僚三十餘人과 儒宗學士三十餘人과
僧尼道俗一千餘人이 同時作例하고 願聞法要러라.
大師-
告衆曰, 善知識아 菩提自性이 本來淸淨하니
但用此心하면 直了成佛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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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行由品(행유품)
六祖大師法寶壇經
法寶壇經!
이 壇(단)자는 계단 할 때,
이런 강단 할 때 쓰는 그 壇자입니다.
진리의 가르침!
그 중에서도 불 · 법 · 승 · 삼보 할 때,
佛寶(불보). 法寶(법보). 僧寶(승보)! 그러지요.
여기서는 “법보의 단 이 되는 그런 경전이다.”
그런 뜻으로 법보단경! 법보단경! 그렇게 합니다.
조사스님의 어떤 행적을 기록한 것이나,
아니면 법문을 기록한 그런 내용을 가지고,
經(경)이라고 붙인 경우는 이 육조단경 하나지요.
제가 알기로는 그런 것 같습니다.
門人(문인) 法海(법해)가 記錄(기록)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직접 쓰는 일은 드물지요.
쓰는 일도 있긴 있습니다마는, 육조단경의 경우는
그 제자. 법해라고 하는 제자가 스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기록을 해나갔지요.
평소에 법문 하시면서 남긴 말씀을 그대로
법문할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써요.
필사를 하고 남겨놓고, 또 다듬어서 좋은 문집이 되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또 큰스님이 걸어온 길을
“스님 어떻게 살아 오셨습니까?
고향은 어딥니까?”
이런 것들도 수시로 물어서 기록으로 남겨 놨지요.
그 일을 한 사람이 법해라는 스님입니다.
10가지로 되어 있는데,
여기 보면 행유품. 첫 번째는 행유품 이예요.
이 품이라고 하는 것도 경전에나 붙이는 이름입니다.
行由藏(행유장)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할 수도 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화엄경에 무슨 품. 무슨 품 하듯이,
또는 법화경에 무슨 서품. 방편 품. 보현 행원 품.
보문 품 이런 식으로 붙이듯이
꼭 경전의 그 격식을 따서, 품자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경전으로서,
語錄(어록)이지만 하나의 경전으로서의
어떤 체제를 제대로 갖췄다고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품자를 붙인 이것도 특이한 것이지요.
요즘 말로 하면 하나의 章(장)이 되겠습니다.
行由(행유)
라고 하는 말은 걸어온 길입니다.
당신이 살아온 行蹟(행적). 행적을 행유 라고 해요.
또 다른 말로는 行狀(행장)이라고도 해요.
세속에선 履歷(이력)이라고도 그러지요.
이력을 소개 한다 그러는데,
불교에서는 이력을 소개 한다 안 하고
행장을 소개 하겠습니다 그러는데
살아온 길. 뭐 태생이 어디이고 고향이 어디이고,
말하자면 법문을 하면서 법문 하는 시간을 빌려서,
당신이 걸어온 길을 “내가 이야기 하겠다.”하면서
직접 자기 입으로 이야기한 걸로 되어 있어요.
그래 그것을 법해스님이 밑에 앉아서
다 기록을 해서 책으로 남겼지요.
時(시)에 大師(대사)가 至寶林(지보림)하시니→
어느 때에 육조대사께서 보림에 이르시니 보림에,
보림사에 이르시니,
韶州韋刺史(소주위자사)→
위자사. 자사는 벼슬 이름이지요.
名璩(명거)→
이름이 거. 위거라는 사람인데,
與官僚(여관료)로 入山(입산)하야→
관료로 더불어 산에 들어 왔더라.
請師出於大梵寺講堂(청사출어대범사강당)하야→
스님을 대범사 강당에 청해서,
爲衆開緣說法(위중개연설법)이어늘→
대중을 위해서 인연을 열어서 설법 하거늘,
대범사는 아마 소주. 지금 소관이라고 하는
그 도시에 있는 절로 그렇게 제가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보림사에 계시는데 보림사까지 소주자사가 일부러 와서,
스님을 대범사에다 모셔놓고 법문이 시작되었다 하는
이야기지요.
師-升座次(사-승좌차)에→
스님께서 법좌에 올랐을 때에,
刺史官僚三十餘人(자사관료삼십여인)과
儒宗學士三十餘人(유종학사삼십여인)과→
“유종학사”라고 하는 말은 유교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종학사삼십여인. 자사를 위시해서,
우리가 지금 우리고 말하면 도지사지요.
그 관료들 30여명. 유교학자들 30여명.
불교 僧尼道俗一千餘人(승니도속일천여인)→
승니는 스님들이고, 도속은 道敎(도교).
도교 사람들입니다. 도교를 믿는 사람들.
그리고 세속 사람들.
모두를 통틀어서 道俗(도속) 이렇게 합니다.
승니도속. 모두 합해서 1000여명이,
同時作例(동시작례)하고→
같은 때에 예를 하고,
願聞法要(원문법요)러라.→
법요 듣기를 원하더라.
법요.
법문이라 하지 않고 왜 要자를 썼는가 하며는
법문 중에서도 요긴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테니까요.
이 스님의 말씀은 전부 아주 요긴한 법문이다 하는
그런 뜻에서 法要! 要자를 붙였습니다.
법요 듣기를 원하더라.
大師- 告衆曰(대사- 고중왈)→
육조대사가 대중들에게 고해 가로대,
善知識(선지식)아→
이 스님은 선지식이라는 말을 곧잘 해요.
누구를 보고도 선지식입니다.
청문대중. 전혀 불교하고 상관없는 사람에게도,
여기 보면 승니도속. 유종학사. 자사관료
이 사람들 모두 그냥 선지식이라고 그렇게 불러요.
그것이 또 육조스님의 독특한 호칭 이예요.
육조스님이 우리를 부를 때.
보통 대중을 부를 때 “선지식 아”그래요.
우리가 알기로 선지식이라고 하면
상당히 도가 높은 분. 도를 깨달아서
남을 지도할 수 있는 분. 그럴 때 선지식이라 그래요.
잘 아는. 진리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 이 뜻입니다.
선지식=
진리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
화엄경에 53선지식이 있지요?
거기에도 보면 별별 사람이 물론 많습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육조스님께서
모든 사람을 “선지식이다.”라고 부르는 것이
크게 잘못됨이 없고, 또 우리가 한마음 열고,
생각을 하면 어떤 사람도 전부 나에게 선지식이 됩니다.
다 나에게 선지식이 되고 스승이 되는 입장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 입장이 누구나...
제자가 됐든 자식이 됐든, 누구가 되었든 간에
사실은, 심지어 사물 하나하나 까지도
선지식일 수가 있어요.
우리가 마음만 열고 살면 다 배울 것이 있지요.
앞으로도 계속 육조스님은 “선지식 아”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
이것이 첫 법문 이예요.
菩提自性(보리자성)이
本來淸淨(본래청정)하니
但用此心(단용차심)하면
直了成佛(직료성불)하리라.
이것은 정식 격식을 갖추어서 하는 법문으로서는
첫 법문인데, 진짜 첫 법문은 나중에 소개 되지만
자기가 깨닫고 나서 오도송 비슷하게 말씀하시는
그 내용이 진짜 처음으로 하는 법문이고,
이것은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서 하는 법문으로서는
“첫 법문 이다.”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菩提自性이 本來淸淨하니
但用此心하면 直了成佛하리라.
아주 유명한 말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菩提自性(보리자성)→
깨달음의 자성. 말하자면
우리의 깨달음의 마음자체.
우리 마음의 깨달음은
어떤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인데,
수행을 통해서 얻기 이전에 우리는 마음자리에는
이미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그것이 보리자성입니다.
누구는 性善說(성선설)을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性惡說(성악설)을 주장하고 그러는데,
우리 불교에는 보리자성. 性覺說(성각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깨달음의 요소가 우리 마음에 본래 있다.
“성품 자체에 바탕으로써 깔려있다.”←
이것이 보리자성입니다.
보리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니까요.
또 道(도)라고도 번역하고 覺(각)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보리자성! 참 좋은 말이잖아요.
우리 자성은 깨달음으로 이미 갖춰져 있다.
준비 되어있다 하는 것입니다.
本來淸淨(본래청정)→
그것이 본래청정 이예요.
본래 훌륭한 거예요. 아무 문제가 없다고요.
번뇌 망상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그대로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
본래부터 훌륭하게 뛰어난 그것이다.
우리의 한 마음이. 본래 마음이. 본래 심이...
但用此心(단용차심)→
그런데 그것을 다만 그 마음만 쓰면,
단용차심. 다만 이 마음. 보리자성이
본래 청정한 그 마음만 쓸 것 같으면
곧 바로 성불이다. 바로 성불이다.
아주 참, 법문이 간단하지요?
“戒(계)를 지켜라.”
“布施(보시)를 해라.”
“忍辱(인욕)을 해라.”
“勇猛精進(용맹정진)을 해라.”
“무슨 뭐 3000拜(배)를 해라.”
“뭘 해라.”“뭘 해라.”
그런 이야기 없어요.
우리 마음이 본래 깨끗한 그 자리입니다.
그 깨끗한 그것만 제대로 쓸 줄 알면...
그래 여러 마음이 있어요.
캄캄한 마음도 있고
도둑놈 마음도 있고,
아귀 같은 마음도 있고
축생 같은 마음도 있고,
부처마음도 있고
보살마음도 있는데요.
보리자성!
그 중에서도 제일 알짜배기 깨달음의 자성자리!
깨달음의 마음자리! 그것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데,
그것만 쓰라 이겁니다.
그것만 자꾸 개발하고 그것만 자꾸 펼치면,
다른 것은 저절로 쓰러지게 되어 있어요.
무슨 아귀마음. 축생마음. 아수라마음 이것이
다 있지만, 그것은 안 쓰면 없어지는 겁니다 안 쓰면...
안 쓰면 안 나타난다고요. 이것 참, 묘한 말입니다.
菩提自性이 本來淸淨하니 但用此心하면.
다만 이 마음만. 보리자성의 이 마음만 사용한다면
그대로 성불이다. 곧 바로 성불이다. 直了成佛이다.
그런데 다른 것이 옆에서 자꾸 고개를 쳐들고
그냥 올라오지요.
계속 그냥 다른 마음이 고개를 쳐들고 올라오지요.
앞에서 천태스님 이야기를 했는데,
천태스님이 이 불교를 공부해서 정리한 이야기는,
一念三千(일념삼천) 이라고 해서 인간의 한 순간의
마음속에 3000가지 요소가
동시에 와글와글 한다는 거예요.
부처도 올라오고
보살도 올라오고,
아귀도 올라오고
축생도 올라오고,
한 순간에 3000가지 요소의 마음을
갖추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맞는 거거든요.
우리가 의식하는 것도 있고
의식 못하는 것도 있고...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내가 이거, 부처로써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아귀로써 해결할 것인가?’ 하하하
어떤 문제가 야기 했을 때, 그거 갈등하지요.
불교공부 안 했으면 괜찮은데
이 알량한 불교공부 좀 해놓으면
야~ 이것 참, 그대로 본성대로
내 성질대로 할 수도 없고,
부처님이 쳐다보는 것 같고,
부처님이 시키는 대로 하려니까
내 마음이 아직 허락하지 않고,
참, 갈등이 심하지요?.
그래서 장자 같은 사람들은
공자가 나타나 가지고,
孔子(공자)같은 어쭙잖은
聖人(성인)이 나와 가지고,
仁(인). 義(의). 禮(예). 智(지)를 세워 놓으니까,
그걸 가지고, 그것을 빌미로 해서 세상에 죄악을
짓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그런 “인 의” 를 내세워 놨기 때문에,
거기에 전부 걸려서 그것을 이 세상에
“사람이 살아가는 하나의 기준이다.” 해 놓으니까,
거기에 걸린 사람. 그것 때문에 죄짓는 사람.
또 죄도 아닐 것을 그 선에다가 맞추려니까
또 죄가 되는 거예요.
인의예지라고 하는
그 어떤 틀을 딱 정해 놓으니까
그 틀에 안 맞는 건 전부 죄예요.
사실은 죄도 아닌데
그 기준에 맞추려니까 죄가 된다고요.
그래서 장자는 사정없이 공격하잖아요?
어쭙잖은 聖人(성인)이 인의예지를 만들어 놓고는,
거기 틀에 안 맞는다고 죄라고 하는 거예요.
그 틀이 뭐냐 이겁니다.
공자.
그 시시한 친구가 만든 것이 아니냐?
이것입니다.
그 시시한 친구가 엉터리로 만들어 놓은 것.
거기에 안 맞으면 죄라고 하니 그래서
세상이 전부 죄 판이 돼버렸다 이겁니다.
아, 그 대단한 말 이예요.
그것이 없으면. 그 기준이 없으면 뭐가 죄예요?
아무 것도 죄가 아닌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이것이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기는
하면서도 또 상당히 깊이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이야기는 잘못 이해하면
조금 넘칠 가능성이 상당히 많지요.
그 참,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이야기는 아주 기가 막히더라고요.
아, 인의예지라고 하는 걸 딱 세워놓고,
그 선에 안 맞으면 전부 죄악시 해 버리는 거예요.
그 선에 안 맞으면 전부 죄악시 해 버리는 거라고요.
지금 東(동) 西(서)가 전부 가까워져 가지고,
서양 사람들의 그 풍속도 우리가 잘 알고,
우리 풍속도 서양 사람들이 잘 알고 그러는데,
보면 상반되는 것이 너무 많잖아요?
상반되는 것이 너무 많은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무엇이 善(선)이고, 무엇이 惡(악)인지
애매한 것도 적지가 않지요.
물론 확실한 것도 있지만요.
이런 말들은 정말 아주 법요입니다. 法要!
菩提自性이 本來淸淨하니
但用此心하면 直了成佛하리라.
다음부터는 자신이 걸어온 길.
자신의 행장. 자신의 이력을
지금부터 이야기할 차례이고,
먼저 서두로서 딱 이렇게 큰 법문 한 마디
딱 이렇게 던졌어요. 아주 좋은 법문입니다.
菩提自性이 本來淸淨하니
但用此心하면 直了成佛하리라.
집에 돌아가면서
이걸 한 1000번쯤은 우리 외우십시다.
이것은 외워야 됩니다.
천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사가 마음을 먹고,
온 공무원들 다 동원하고,
공무원들 30명이나 동원해서,
그렇게 법석을 차려놓고
법문을 딱 했을 때,
천하의 육조스님도 뭔가,“하~~,
내가 멋진 법문 한 마디 해야지.”
틀림없이 아마 속으로 준비 했을 거예요.
그 준비하신 법문이 바로 이겁니다.
그 준비하신 법문이...
가만히 보면
돌 속에 알맹이 돌 같은 느낌이 와요.
그 뭐 다른 지저분한 이야기가 없지 않습니까?
菩提自性이 本來淸淨하니,
우리에게는 깨달음의 자성이 있어요.
뭐 부처님만 부처의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 부처의 요소가 있다고요.
그것이 菩提自性이거든요.
어떻게 하더라도 그것만 잘 쓰면 좋은데,
그런데 금광에 금을 캐려고 하며는,
다른 잡석 많이 나오잖아요?
어떻게 금만 집어올 수 있나요?
금만 집어오면 참 일도 적고 좋을 텐데.
그런데 금. 1kg 캐내려면
잡석을 수 천. 수 만 톤을 파헤쳐야 된다고요.
수 천 수 만 톤을...
참 그것도 문제예요.
이 菩提自性이라고 하는 말은,
다이아몬드면 다이아몬드 그것.
금 이면 금 자체만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의 삶은 그걸 캐기 위해서
수 천, 수 만 톤의 잡석을 건드리지 않으면,
금은 구경도 못한다는 사실.
이것이 또 문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