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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강 - 般若品- 4
善知識아 何名般若오 般若者는 唐言에 智慧也니
一切處所와 一切時中에 念念不愚하야
常行智慧하면 卽是般若行이니
一念愚에 卽般若絶이오 一念智에 卽般若生이어늘
世人이 愚迷하야 不見般若하고 口說般若나
心中常愚하나니 常自言, 我修般若라하야
念念說空하나 不識眞空이로다
般若는 無形相이라 智慧心이 卽是니
若作如是解하면 卽名般若智니라
何名波羅密고
此是西國語인데 唐言엔 到彼岸이니
解義에 離生滅이니라 着境生滅起하야
如水有波浪하면 卽名爲此岸이요
離境無生滅하야 如水常通流하면
卽名爲彼岸이니 故號波羅密이니라
善知識아
迷人은 口念하되 當念之時에 有眞有非어니와
念念苦行하면 是名眞性이니
悟此法者는 是般若法이요
修此行者는 是般若行이라
不修卽凡이요 一念修行하면 自身이 等佛이니라
善知識아
凡夫卽佛이요 煩惱卽菩提니
前念이 迷卽凡夫요
後念이 悟卽佛이며
前念이 着境하면 卽煩惱요
後念이 離境하면 卽菩提니라
***
마하반야바라밀다.
바라밀다까지 설명하는데,
범어로 된 이름을
기본적인 상식에 의해서 설명하는데요.
육조스님은
어떤 지식이 축적되기 이전에,
깨달음을 먼저 성취하신 분이지요.
대개 불교의 이해의 순서로 보면,
교리적인 지식이 어느 정도 밑에 깔리고,
경전에 대한 이해, 최소한도
몇 십 권 의 경전은 보게 되고,
그리고 또, 불교 의식이나
또는 제도상의 생활.
이런 것을 상당히 익힌 뒤에
대개 깨달음을 경험하기가 일쑤인데,
이분은 깨달음이 먼저 있고 그런 것들을...
머리를 깎고 사미계를 받고 하는 이런 것들도,
전부 그 뒤에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그래서 경전의 전통적인 용어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좀 특별하다고 할 수가 있지요.
그 특별한 것이
어떤 경우는 좀 지나칠 때도 있는 반면에,
그러나 대개 어떤 깨달음의 안목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상당히 빛나고 돋보이는
그런 점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뭐 마하반야바라밀!
이 낱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깨달음의 안목에서 불교의 상투적인 용어들을
어떻게 소화하고,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런 것은 상당히 주목을 끌게 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가 있겠지요.
그래서
마하는 앞에서:(16강) 설명을 했고,
“크다.”
“위대하다.”
어째서 그렇게 크고 위대한가 하는,
마음의 크기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면,
이번에는
般若. 소위 지혜라고 하는데
깨달음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반야바라밀다. 또는 반야심경.
금강반야바라밀경. 이런데 나오는 반야가
모두 여기서 해석 되고 있습니다.
善知識(선지식)아
何名般若(하명반야)오→
선지식아 무엇을 이름 하여 반야 라고 하느냐?
般若者(반야자)는 唐言(당언)에 智慧也(지혜야)니→
반야라고 하는 것은 당나라 말로 지혜다.
한자로 하면 智慧다 이것이지요.
一切處所(일체처소)와
一切時中(일체시중)에
念念不愚(염념불우)하야→
그 지혜라고 하는 것은 모든 장소,
모든 시간에,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그 순간순간이 어리석지 아니하다.
그래서
常行智慧(상행지혜)하면→
항상 지혜를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으면,
卽是般若行(즉시반야행)이니→
“반야의 행이다.” “지혜의 행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지요.
요컨대 우리가 아무 문제가 없고
이해관계가 없고,
어떤 감정의 동요가 없고,
이럴 때는 보통 사람들의 지혜도 상당해요.
그러나 어떤 문제에 봉착한다던지,
그것이 나의 이해관계에 걸려 있다든지,
나의 어떤 감정과 명예에 직결되어 있을 때는
그만 캄캄 해지지요.
그래서 여기서
육조스님께서 특별히 강조 하시는
말씀 중에,
일체처소
일체시중
이런 말을 했어요.
이것은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든지
모든 장소. 모든 시간.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하루 가운데도 웃다가 울기도하고,
울다가 또는 화내기도 하고,
화내다가 평상심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별별 감정의 기복이 심한데
그런 별의별 감정의 상황을 겪으면서,
그것을 육도라고 말하지요.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누구와 어떤 경쟁심. 투쟁심
이런 것이 잔뜩 작용할 땐
그건
“아수라”라고 그러고,
무엇이든 명예든 돈이든 배고파하고,
부족해하는 그런 심리상태가 될 때
그것은 우리가
“아귀”라고 하고,
별별 상황을 하루에도 수차 겪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어느 어떤 순간에도
不愚해야된다.
어리석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대개 중생들은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또 자기 문제하고 딱 맞닥뜨려 놓으면
어리석기 마련 이예요.
남의 이야기를 할 때는 꼭 깨달은 사람같이,
성인이 다 된 사람같이,
자기는 아주 초연한 것같이 이야기를 잘 하지요.
그러나 정작 자기 이해관계에 부딪쳐 놓으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해줄 때 보다
더 어리석게 처신합니다.
그래서 아마 이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것 참 지혜가 무용지물이 되고,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고, 수
행이니 무슨 불교공부니 하는 것이
그런 상황에서 무용지물이 될 때, 참 안타깝지요.
누구든지 그렇지 않아야 되는데요.
지혜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이
아마 부족해서 그렇지 않을까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로선 자꾸 듣고,
얄팍하게나마 자꾸 훈습하는 길 밖에 없어요.
자꾸 익히고 훈습하는 길 밖에는 달리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 놓으면 그것도 언젠가 쓰일 때가 있어요.
티끌모아 태산이 되듯이 티끌 하나하나가
그 뭐 태산이 되겠어요? 그러나 모이다보면
태산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一念愚(일념우)에
卽般若絶(즉반야절)이오→
한 순간에 어리석으면
반야가 딱 끊어져 버리면.
지혜가 그만 딱 끊어져 버리면
그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一念智(일념지)에
卽般若生(즉반야생)이어늘→
한 순간 지혜로우면 반야가 나온다.
어떤 경우는 지혜롭고
어떤 경우는 또 어리석으냐?
이것이 내가 사물을 볼 때 거리를 두고 보면,
그 사물이 그런대로 정확하게 보이지요.
그러나
그 사물을 눈에 딱 갖다 대놓으면
그것은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제대로 판단이 안서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자기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객관시 해서 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갖는 훈련을 쌓아야 되어요.
훈련.
요즘 제가 아는 대우대학의 어떤 교수는
‘행복 훈련소’ 라고 하는 걸 차려 가지고,
심리학 교수인데, 행복 훈련을 하고 있어요.
사람들 모아가지고 한 번 씩...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일단은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거리를 좀 두는 것,
남의 것이라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그런 훈련을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世人(세인)이 愚迷(우미)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미해가지고서,
不見般若(불견반야)하고→ 지혜를 보지 못하고,
口說般若(구설반야)나
心中常愚(심중상우)라→
입으로야 매일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잘도 쓰고,
잘도 외우고
걸핏하면 반야니 뭐니 하지요.
그러나
심중은 상우하나니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느니,
常自言(상자언)호대→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뭐라고 하는가? 하니,
我修般若(아수반야)라→
나는 반야를 외운다. 반야를 닦는다고 말한다.
반야심경을 그냥 병풍으로 쓰고,
글씨로 쓰고,
반야심경을
한 편씩 사경을 하고는 무슨 일을 해도 한다는
이들도 있고,
또 금강경을 수백 번. 수천 번 사경하는
이들도 있고 그래요.
어쨌든 좋은 일이예요. 좋은 일인데
그것만 가지고 “반야를 닦는다.” 라고 할 수는 없지요.
육조스님의
이 해석이 참 명쾌하고 뛰어난 것이
바로 정곡을 찔러서 늘 이야기를 해줍니다.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너무나 잘 아는 분이지요.
念念說空(염념설공)하나→
생각 생각마다 공을 잘 말하지만,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
잘도 외우지마는,
不識眞空(불식진공)이로다→
眞空을 알지 못한다.
般若(반야)는
無形相(무형상)이라→
반야는 형상이 없다.
智慧心(지혜심)이 卽是(즉시)다 이거예요.→
지혜의 마음이 곧 반야이다 이겁니다.
반야라고
하는 것이 무슨 덩어리가 따로 있겠나?
이것이지요. 어디서 주워오는 것도 아니고,
만들어서 탁자위에 올려놓는 그런 경우도 아니고요.
지혜의 마음이 곧 반야다.
若作如是解(약작여시해)하면
卽名般若智(즉명반야지)니라→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그것이 곧 반야의 지혜다.
이것이 당나라 말의 “지혜다.”
이렇게 해가지고 해석은 했지만,
사전적인 해석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이런 것은 사전하고 비교해 보면
우리가 확연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제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 학자들이 사전적으로 해석한
주해를 우리가 많이 접하지요.
경전을 읽다보면 의례히 밑에
각주가 나와 서 뭐라고, 뭐라고 잔뜩
소개를 해놓고 하는데,
이렇게 명쾌하게 우리 마음에 와 닿게
하는 이런 해석은 참, 보기드믑니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 중심이니까요.
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우리들 자신이
과연 반야와는 어떤 정도의 관계를 갖고 있는가?
선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늘 여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佛敎學(불교학)만 할 경우는
자기 자신과는 관계없이,
그야말로 유교에서 말하듯이
‘書者書(서자서) 我者我(아자아).
책은 책이고 나는 나고.’
이런 식으로 하는데,
불교는 그렇게 되면 불교가 아니지요.
불교는 어쨌든 인간학 이고,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육조스님의 이러한 해석이 참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何名波羅密(하명바라밀)고→
마하반야바라밀. 구체적으로 하려면
바라밀다까지 해야지요?
그러나 바라밀만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무엇을 이름 해서 바라밀이라고 하느냐?
此是西國語(차시서국어)인데
唐言(당언)엔 到彼岸(도피안)이니→
서쪽나라 말인데, 당나라 말로는 도피안이다.
“피안에 이르다.”라고 하는 뜻이다 이겁니다.
“저 언덕에 이르다.” 그것을
解義(해의)에→
다른 어떤 뜻으로 해석을 하자면
離生滅(이생멸)이다→
생멸을 떠난 것이다 이겁니다.
왜 저 언덕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
생멸을 떠났다고 하는 것인가?
참 깊이 해석한 것입니다. 깊이...
저는, 바라밀= 도피안 이것을
“모든 문제의 해결이다.”
이렇게 풀이를 하거든요.
흔히 그런 풀이를 하는데,
彼岸(피안: 저쪽언덕= 열반세계)의 반대말은
此岸(차안: 이쪽언덕= 사바세계)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이쪽언덕 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이 많은 곳. 문제가 많은 곳. 그러니까
피안은 고통도 없고 모든 문제도 해결된 곳.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무엇인가?
바로 이생멸입니다.
離生滅! 생멸을
떠나는 것입니다. 궁극적 해결은...
이생멸이라고 하는
離生滅은 또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生死(생사)예요. 삶과 죽음을 떠난 것이다.
그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지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떠나고,
“삶과 죽음에서 해탈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도피안이지요.
저 언덕에 이르렀다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의 그 골치 아픈 문제.
속상한 문제.
또 온갖 신체의 어떤 병고로부터의 고통.
아니면 심리적인 고통.
직장에서 또는 가정에서 사회에서,
친족간에 아니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것이
수없이 많지요. 그러나 그런 것과 아울러
궁극적인 고통은 삶과 죽음 이예요.
죽음 같은 고통은 없지요 사실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죽음이 워낙 고통스럽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하는,
그런 풀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생사를 떠난 것을
“저 언덕에 이르렀다.”
궁극적인 문제까지 다 해결된 상태지요.
着境(착경)에
生滅起(생멸기)하야→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난다.
여기서 착경. 경계라고 하는 말은
일체차별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차별 현상을 말하고
또, 내가 살아있다.
또는 살아있음의 반대는 죽음이다.
이것도 모두가 경계예요.
이것도
우리가 겪는 현상이니까요.
그런 현상에 집착하게 되면 생멸이 일어나서,
如水有波浪(여수유파랑)하면→
예컨대 물에 파랑이. 물결이 있을 것 같으면,
卽名爲此岸(즉명위차안)이다→
바로 이 언덕이 된다.
파랑이라고 하는 것은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바로 생사를 말하는 것이고
생멸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멸을 표현할 때, 이 물결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왜냐?
그 것은 우리가 자주 보는 것이고,
또 바로 눈앞에서 그저 몇 초 사이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물결이거든요.
금방 물결이 일어 날 때는 생이요.
그 물결이 사라져 버리면 멸이고 그렇습니다.
저도 어쩌다가 바닷가에 한 번씩 가보면
그 물결치는 것을 그야말로 하염없이 볼 때가 있어요.
보면
그렇게 다양한 크고 작은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도,
결국은 물결이 하나로 돌아가고,
그 하나의 물에서 끊임없이 물결이 또 일어나거든요.
바람의 방향에 따라서,
세기에 따라서
또 그 물결이칠 때
뒷 물결과 앞 물결 관계에 따라서,
아주 다종다양한 현상을 그리면서
생멸. 생멸. 생멸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 하는데,
결국은 하나의 물에서 생멸됩디다.
거 참 볼만해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볼만한 장면이...
아주 단순한 동작이고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지마는
그것이 참, 보는 묘미가 또 있더라고요.
불교에서는
이 생 과 멸이라고 하는 것을,
죽음의 상태. 삶의 상태.
이런 것들을 사실은 떼어놓고 보는데,
또 깨달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떼어놓고 보지를 안 해요.
그것을 하나로 봅니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역시 삶이 있는 것으로...
그래서
“물과 물의 맛의 관계다.”
이런 표현들을 또 합니다.
우리가 바닷물을 먹어보면 짠맛이지요?
그런데 물 떠나서 짠맛은 없어요.
만일 짠맛이 죽음이라면,
또는 空(공)이라면,
물은 有(유)요 生(생)이거든요.
짠맛을 보려면 물을 먹어야 돼요.
공을 알려면 色(색).
유의경계.
있음의 경계 에서 없음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이야기를 하더라도
진공을 알지 못한다. 방금 있었는데,
그 진공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色卽時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 색이공이거든요. 공이색이예요.
공과 색이 둘이 아닌 이치.
짠맛과 물 그 자체가 둘이 아닌 이치.
그것을
불교에서는 生死(생사)와도 연관 시켜서
이해하고, 있음과 없음을 연관 시켜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모든 존재와 존재의 본성을 연관시켜서
이해하기도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공과 유의 관계를 물과 물맛. 짠맛이라고 하면
제일 아주 쉽게 떠오르지요.
뭐 단맛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물속에 포함되어 있는
그 짠맛(혹은 단맛)은
물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데,
그러나 또 그 짠맛은
엄연히 물은 아니라고요.
물은 아니에요.
그 물은 아니라고 하는 말에
어폐가 있는 것이 바로 유는 공이 아니다
하는 말에 어폐가 있는 것이지요.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는 말에
어폐가 있다는 것이지요. 불교에서 보면...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있는 것은 없는 것하고 분명히 다르다.”
이래야 이해가 되거든요?
그럼 불교에서는
“있는 것은 없는 것하고 다르지 않다.”
이래야 말이 된다고요.
짠맛은 물하고 엄연히 다르다고 하며는
어폐가 있잖아요.
“아, 물 떼놓고 짠맛이 어디 있느냐?”
이거예요. 당장 따지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요 진짜...
있는 것 빼놓고 없는 것은 따로 없어요.
마찬가지로 없는 것 빼놓고 있는 것도 따로 없고요.
짠 것을 알려면 물을 마셔야 돼요.
물을 안 먹고는 짠맛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眞空妙有(진공묘유)니,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니,
그런 말이 참, 처음에는 애매모호하고
무슨 그런 소리가 있는가 싶지마는,
사실은 하나하나 우리의 어떤
그 사량 분별이지만,
깨달음의 어떤 이해가 아니고,
사량 분별로도 어디까지는 이해가 가능 하거든요.
예컨대
물에 파랑이 있을 것 같으면,
이름이 차안이 된다. 이 언덕이 된다.
離境無生滅(이경무생멸)하야→
경계를 떠나서, 앞에서는 着境(착경) 이고요.
여기서는 離境입니다.
이경을 떠나서 생멸이 없어서
如水常通流(여수상통류)하면
제가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통류.
여기 통류 한번 나오고
뒤에 가면 또 나와요.
道是通流(도시통류)라.
육조단경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글자가 통류입니다.
通流.
거기는 아예 道是通流라고 나와요.
道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통류다 이겁니다.
如水常通流(여수상통류)하면→
예컨대 물이 항상 통류한다.
어느 쪽으로든지 흐른다 이겁니다.
어느 쪽으로든지...
卽名爲彼岸(즉명위피안)이니→
막힘없이 흐르는 그것이 피안이다.
물이 갇혀 있어서 물결만 치고 있으면,
그 물결의 입장에선 이쪽. 此岸(차안)의 경우이고,
똑 같은 물을 가지고 설명하더라도
그 물결만 설명하지 않고, 어디든지 흐른다.
쏟아 보라고요. 어디 안 가는 데가 없다고요.
그 흐르는 그것이 통류예요.
어디든지 막힘없이 흐르는 것.
그것이 “彼岸(피안)이다” 이것입니다.
이 설명은요.
아무나 못 하는 거예요.
육조스님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彼岸.
저 언덕. 생사를 떠난 자리.
또 생멸을 떠난 자리.
모든 문제의 해결.
고통을 떠난 그 자리를 소위 피안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여기서는 “물의 통류와 같은 것이다.”
라고 그랬어요. “물의 통류와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죽음이 오면,
거부하지 않을 사람이 없어요.
아픔이 오면 거부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가 거부해봐야 아픔은 오고야말고,
죽음은 오고야말고,
떠나는 것은 떠나고야말고,
손해 보는 것은 손해보고 마는데,
내 마음에서 전부 거부하는 거예요.
다 거부한다고요. 그런데,
깨달은 사람은 어떻겠어요?
그냥 통류 해버립니다.
通流.
그냥 손해 보는 거예요.
이익이 들어왔을 때처럼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익과 손해를 둘로 안 보는 겁니다.
생과 사를 둘로 안보는 그 상태가 통류입니다.
그것을
道是通流(도시통류)라고 그래요. 그것이
生死解脫(생사해탈)입니다.
불교에서
생사해탈. 생사해탈 그토록 부르짖었지만,
어느 누구 안 죽은 사람 있습니까?
어떤 祖師(조사) 안 죽은 조사 있나요?
그런데 그들이 생사해탈한 것은 틀림없어요.
우리 안목으로 보면 전부 죽었지만,
그들은 생사를 우리가 생각 하듯이
그렇게 거부하고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생사를 이미 초월해 버렸어요.
통류 해 버렸다고요.
通流.
그냥 밥 먹듯이.
배고파서 밥 먹듯이 맞이하는 것이 생사입니다.
그런 그 사람에게는 이미 생사가 없는 거예요.
그럴 수 있는 것은 뭐냐?
본래 생멸 없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마음.
心體:
(17강) 를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결국은...
그것을 쟁취하지 못하면.
그것을 체득하지 못하면
그런 경지를 맛볼 수가 없는 거예요.
통류가 안 되는 것이지요.
죽음이 온다고 그 죽음을 따라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기어이 거부하면서 안 간다고, 안 간다고 하면서
끌려가는 것이 우리들의 작태지요.
通流 가
되어야 됩니다.
이 通流라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저 뒤에 가면
道是通流(도시통류)라.
道 라고 하는 것은 뭐냐?
通流하는 것이다 이겁니다.
조사스님들이 가끔 자기만이 개발한...
이런 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지요.
머리 짜내서 개발한 것이겠습니까만,
그런 낱말들이 간혹 있어요.
원효스님의 빛나는 말 가운데,
神解
(신해)라고 하는 말이 있지요. 신해.
귀신 이라는 神자 하고,
이해한다 하는 解자. 신해한다.
우리의 마음 작용 그 능력을.
마음의 능력을 신해라고 표현해요.
“참 신해지.” “귀신같이 알지, 귀신같이 알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감지하는 능력.
이 세상의 어떤 센서가 우리마음 같은
센서가 있겠습니까?
마음 그건 정말 뛰어난 겁니다.
귀신같이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神解예요.
우리마음을 잘 표현 했다고
원효스님이 잘 쓰시는
神解라는 낱말을 그렇게 극구 칭찬 합니다.
우리는 하도 그냥 온갖 탐 진 치
삼독과 팔만사천 번뇌 망상 에
찌들리고 찌들리고, 때가 묻고
때가 묻어가지고, 그 센서가 막
그냥 완전히 마모될 대로 마모되고,
때가 낄 대로 첩첩이 끼었는데도, 잘 알잖아요? 지금...
아주 감지력이 뛰어 나지요. 지금도...
그렇게
많이 때가 묻었는데도
감지능력이 뛰어 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아주 갈고 닦고 청정하게 만들고,
공부를 통해서 집중을 해가지고서
경계를 뛰어 넘었다면,
감지능력이 어느 정도 뛰어나겠는가?
한번 상상해 보세요.
“신해”라는 말도 이것이 사실은 부족하지만,
할 수없이 언어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 말밖에 못쓰지요.
그러나 그 표현은 참 좋다고요.
神解!
온갖 번뇌로 뒤덮여 가지고, 때가 낄 대로 낀대도
아,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如水常通流(여수상통류)하면→
물이 항상 통류할 것 같으면,
卽名爲彼岸(즉명위피안)이다→
저 언덕에 이른 것이다.
저 언덕에 이르렀다는 것이 뭐냐?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그냥 그 상황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달을 보면 달 그 자체가 되고,
죽음이 오면 죽음 그 자체가 돼 버려요.
죽음 그 자체인데 죽음을 거부할 까닭이 없지요.
사물을 보면 사물 그 자체가 되고요.
그러니까 무슨 주의주장 이니 사상이니
하는 그런 말은,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해당이 안 됩니다.
佛敎思想(불교사상).
般若思想(반야사상).
華嚴思想(화엄사상).
사상이란 말을 참 많이 쓰는데,
그 경전 안에서 주로 많이 거론하고 있는
주장이라고나 할까, 그렇게는 표현할 수 있어도
그것이 불교에서는 꼭 “이러이러한 사상을 내세운다.”
이런 말은 해당이 아니 됩니다.
사실은... 사상이 없지요. 불교는 사상이 없습니다.
通流
(통류)가 돼버려야지 “어떤 사상이다.”
이렇게 고집해 버리면 그것은 통류가 아니에요.
아무리 화엄사상 이라 하더라도,
圓融無碍思想(원융무애사상) 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고집하고, 거기에 집착하면
그것은 이미 통류가 안 되는 것이지요.
거기에 이미 집착한 것이 되어서
中道(중도)가 아니지요. 거기서 벗어나야 됩니다.
故號波羅密(고호바라밀)이니라→
그러므로 호를 바라밀이라고 한다.
善知識(선지식)아
迷人(미인)은→ 어리석은 사람은
口念(구념)하되→ 입으로 자꾸 외우기는 하되,
當念之時(당념지시)에→ 마땅히 생각하는 그 때에,
有眞有非(유진유비)어니와.→
진도 있고 비도 있어.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다.
그러니까 미혹한 사람은
이 바라밀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간혹 편안한 마음,
이해관계도 전혀 없고, 감정의 기복도 전혀 없이,
아주 편안한 마음 상태에서는
거의 도통을 다한 것 같거나,
부처가 다 된 것같이 느끼다가도,
어떤 상황이 일어나면 달라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有眞有非입니다.
念念若行(염념약행)하면→
생각 생각에 만약에 행할 것 같으면,
是名眞性(시명진성)이니라→
이것의 이름이 진성. 참 성품이다.
悟此法者(오차법자)는→ 이 법을 깨달은 사람은,
是般若法(시반야법)이요→
반야의 법이라고 할 수가 있고,
修此行者(수차행자)는→ 이 행을 닦는 사람은
是般若行(시반야행)이다→ 반야행 이다.
선지식아
부터는 마하반야바라밀에 대한
그런 낱말 해석을 다 하고,
전체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그런 이야기 같네요.
不修卽凡(불수즉범)이요→
이 마하반야바라밀행을 닦지 아니할 것 같으면
곧 범부고,
一念修行(일념수행)하면→
한 순간이라도. 한 생각이라도
마하반야바라밀행을 수행한다 하면,
自身(자신)이
等佛(등불)이니라→ 자신이 부처와 같은 것이다.
善知識(선지식)아
凡夫卽佛(범부즉불)이요→
사실 알고 보면. 범부가 곧 부처요.
물이 곧 짠맛이고. 짠맛이 곧 물이지요.
煩惱卽菩提(번뇌즉보리)라→
번뇌가 곧 보리다. 물 떠나서 짠맛 없고
짠맛 떠나서 물 없습니다.
젖는 성품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도 그래요.
물과
습성.
젖는 성품.
그것도 둘이 아니다.
前念(전념)이
迷卽凡夫(미즉범부)요→
지금 까지는 우리가 미혹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범부라고 하지요.
그런데
後念(후념)이
悟卽佛(오즉불)이며→
이 순간 이후부터 깨달으면 그대로 부처에요.
부처가 따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귀가 하나 더 달리거나 눈이 하나 더 달리거나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미 해서 전념이지요.
말하자면... 지금까지 살아온 그 삶은
미 했으니까 범부라고 하고,
지금부터라도
이 도리를 알아가지고 깨달으면
미 했던 그 사람이 그대로 부처지요.
前念(전념)이
着境(착경)하면→
지금까지. 앞에 생각이 만약에 경계에 집착 했다면,
卽煩惱(즉번뇌)요→
곧 그것을, 경계에 집착하면 번뇌이고,
後念(후념)이 離境(이경)하면→
후념이 경계에 집착 않고, 경계에 따라가지 않고
경계를 떠나 있으면,
卽菩提(즉보리)니라→
그것이 곧 보리이다. 깨달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