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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 강 - 定慧品- 4
善知識아
外離一切相이 名爲無相이라
能離於相하면 卽法體淸淨이니
此是以無相으로 爲體니라
善知識아
於諸境上에 心不染曰無念이라
於自念上에 常離諸境하야
不於境上에 生心이니
若只百物을 不思하야 念盡除却인댄
一念絶에 卽死하야 別處受生하리니
是爲大錯이라 學道者는 思之니라
若不識法意인댄 自錯은 猶可어니와
更勸他人하며 自迷不見하고
又謗佛經하나니
所以로 立無念爲宗이니라
***
시대가 자꾸 복잡해지고
어려운 일이 자꾸 많아질수록,
사실은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聖人(성인)의 가르침! 또는
聖人의 어떤 정신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聖人의 정신세계를 잘은 몰라도,
그런 대로나마 우리가 더듬어 본다고 하는 이 사실이,
참 값지고 소중한 일이라면 상당히 값지고 소중한
일이 될 줄 믿습니다.
세상엔 단체도 많고 또 모임도 많고, 갈 곳도 많고
가면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도 많습니다.
대개 요즘 한 사람이 대여섯 가지 모임.
심하게는 2 ~ 30개의 모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그걸 우리가 한 번씩
잘 점검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 모임은 성격이 어떻고 거기가면 뭘 하고,
거기 갔을 때는 기분이 어떻고, 돌아오면
내 마음상태가 어떻고 하는, 것들을 이렇게
쭉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끼 밥을 하고도 스스로 품평을 하듯이,
최소한도 몇 시간 또는 하루, 이렇게 다녀온다면,
그런 반성은 꼭 필요한 것이지요.
사실 부처님을 인연으로 해서, 우리가 모인다고
하는 이 모임의 마음상태와 또 돌아가서,
그리고 또 그 자리에서 주고받는 이야기와
거기 모였을 때의 그 사람들이 어떤 마음상태를
가지고 모였는가?
최소한도 개인으로 돌아갔을 때야 어떻든 간에,
거기에 모였을 때만이라도 최소한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모였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볼 때...
저도 모임이 법회 말고도 한두 개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부처님의 공부를 한다고 하는 이런 모임은
평생을 통해서 가장 값지고 의미있고,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제대로 불교를
공부를 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는가는
차치하고라도, 이런데 시간을 투자 한다는
이 사실이, 그래도 뭔가 사람으로서 사는
어떤 보람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 어디에 가서든 떳떳할 수 있는,
그리고 뭔가 자랑할 만한 그런,
내가 이러한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 하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 깊이 느끼는
이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거기에 또 감사를 느낀다고 하면
더욱 바람직한 것이고요. 근래에
우리 청림회가 10주년을 맞이하고,
요즘 육조단경을 이렇게 공부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회원이 된다 하더라도 회장님이나 또는
총무님이 절친한 도반이 있으면 세세하게 일러
주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겁니다.
궁금한것은 서로 묻고, 또 묻지 않더라도 좀 친절을
베풀지 못하는 점이 불자들의 좀 부족한 점인데,
좀 보완이 되었으면 불자들의 모임이 좀 더
좋아지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도합니다.
善知識아
外離一切相(외리일체상)이
名爲無相(명위무상)이라
“선지식아 외리일체상이 명위무상”이라고 했는데,
이 무상이라고 하는 없을 無(무)자. 모양 相(상)자.
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이 무상이라고 하는 낱말은,
불교에 있어서 아주 고준하게 생각하는 낱말이고,
이 두 글자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불교의 핵심을
나타내는 글자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가 공부하는 이 육조단경에서,
육조스님께서 아주 즐겨 쓰시고,
또 마음속에 아주 깊이 감동하고 있는
그런 낱말이 無相이라고 하는 글자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相이 없다 이런 말이지요.
그런데,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우리가 좀 생각을 해야할 대목이지요.
無相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有相(유상)을 생각해야 봐야 됩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 있잖아요?
형체가 있고 모양이 있고 형상이 있고...
우리는 전부 유상속에 사는데, 거기에서
지혜의 눈 하나를 더 뜨자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자는 거예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살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한 눈을
더 떠서 보통 우리 범부의 눈에서부터
조금 더 밝은 눈 하나를 더 밝혀 보면,
있는 것으로 보이던 것이
전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있는 것이 전부 없는 것으로 보인다.
透視(투시)가 된다는 뜻입니다.
透視!
그것은 어떤
神通力(신통력)을 얻어서 투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특별한 투시하는 안경을 써서 투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존재의 실상을, 모든 있는 것의
실다운 모습을 이해하게 되면 그 실다운 모습.
실상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實相無相(실상무상)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 실상과 무상이 따라다니면서,
실상은 무상이다.
무상은 실상이다.
그렇게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개 우리 사람들의 마음이 있다고 하는,
그 눈앞에 그냥 나타나는 거기에 하나도,
거르지도 않고 조금도 침투해보지도 않고,
거기서 좀 더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지도 않고,
눈에 띄는 그대로 보려고 하고,
그대로 거기에 집착하고,
그대로 거기에 온갖 우리마음을
거기서 일으키기 때문에,
인간의 제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반야 부 600권.
부처님의 경전이 상당히 많은데,
그 가운데 600권이나 되는
반야 부의 계통의 경전이,
햇수로 치면 21년간이나 설했다고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데,
그 많은 경전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아요.
또 무상은 무라는 한 글자로도 표현할 수가 있고,
또 空이라고 하는 한 글자로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空이라고
하는 것이나
無相이라고 것이나,
같은 것이지요.
그러면 거기서 현상이 왜 空이냐?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왜 空이냐?
그 空을 이해시키려 하다 보면,
緣起(연기)라는 말을 설명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因緣(인연)이라는 말을 설명 않을
수가 없어요. 인연이라는 말이나
연기라는 말이나 같습니다.
범어에서 중국 사람들이 번역할 때,
그 번역하는 사람이 간혹 인연이라고도 번역하고
연기라고도 번역을 하고 해서 그렇지
같은 뜻 이예요.
그럼 결국 인연이라고 하는 것.
연기라고 하는 것을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돼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내용은 空이다. 무상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무상이라고 하는 낱말을
육조스님은 가슴속에 아주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계시고, 또 당신이 잘 쓰시고,
어떤 도리를 설명 하는데
아주 자주 쓰시는 말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온갖 아픔이나
또는 고통. 슬픔. 괴로움
이런 것들이 대개 相이라고 하는.
形相(형상)이라고 하는
여기에 모두 우리가 걸려서,
여기에 속아서 모두 그런 아픔이나
슬픔이 있게 됐다고
불교에서는 진단하는 것이지요.
善知識아→
선지식이라고 하는 말은 육조단경을 읽을 때 마다
기분 좋은 말 이라고,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는데
우리 모두, 무지몽매한 우리를 보고, 육조스님께서는
“선지식”이라고 이렇게 불러주시니,
이런 부름을 받는 우리는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어쨌든 딴 데 가서 인간 취급 못 받더라도,
육조스님에게만은 선지식이라고 이렇게 대접을 받으니,
이것 또한 아주 상당히 기분 좋은 표현입니다.
外離一切相(외리일체상)이
名爲無相(명위무상)이라→
밖으로 일체상을 떠나는 것이 이름이 무상이다.
상이 밖에 있으니까요. 밖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말입니다. 떠난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거 뭐 相을 다 뚜드려 부수어서 가루로 만들어서
無相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도 건들지 말고
그대로 두고, 지야 어떻게 생겼든 간에, 그 성격이
어떻든, 생김새가 어떻든, 살아가는 것이 어떻든,
그냥 그대로 두고, 내가 거기에 끄달리지 않으면
아무 일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아무 일없는 거예요.
불교의 이 해결책이 진짜 완전한 해결책입니다.
아무리 앞에 있는 거 바로 잡아서, 내 마음 편하게
하려고 해봐도 그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천 년에 바로 잡습니까? 계속 새롭게. 새롭게
내 마음과 맞지 않는 것이 또 생기는데요. 그러니까
내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거기에서 초연해지면 그것이 무상입니다.
각자 어떻게 생겼던든지
그거는 아무리 엉망으로
생겼더라도, 역시 나에게는
무상이라는 것입니다.
참 좋은 해결책이예요.
外離一切相이 名爲無相이라.
若離於相(약리어상)하면
卽法體淸淨(즉법체청정)이니→
만약에 상을 떠날 것 같으면,
어떤 현상에든지,
상에 끄달리지 아니할 것 같으면,
모든 존재의 자체가 텅 빈다. 이겁니다.
법체. 존재의 자체가 텅 빈다.
법체라는 것이 뭐 꼭 진리라고 볼 것이 없습니다.
존재 그것이 곧 진리니까요. 존재의 그 자체가요.
모든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사물이든, 사건이든,
사물과 사건의 그 자체가 청정. 텅 빈다. 이거예요.
텅 비게 된다. 그럼 대 자유인이 되는 것이지요.
바깥 경계가 텅 비게 보이면,
그대로 내가 자유롭습니다.
그것이 텅 비게 보이지 않으니까,
거기에 걸려 가지고 속을 끓이고,
시시비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가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것은
제일 어리석은 일이예요.
그러니까 절대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法體淸淨(법체청정)이니→
相만 떠나면 모든 존재의 자체가 텅 비어 버린다.
청정이라는 말은 텅 비어 버린다. 이 뜻입니다.
텅 비어 버리느니,
此是以無相(차시이무상)으로
爲體(위체)니라→
이 무상으로서 체를 삼는다.
저 앞에서: (32강)
無相爲體(무상위체).
無住爲本(무주위본).
無念爲宗(무념위종).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無相으로서 근본을 삼는 것이다.
無相이라고 하는 이 낱말의 의미는
우리가 세세생생 음미해도 다 못하고,
세세생생 설명해도 다 못하고,
세세생생 공부해도 정말 확철대오
하기 전에는 제대로 깨닫기가,
내 것으로 하기가 어렵다
우리 마음이 텅 빈 마당에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이 지나갔습니까? 희로애락의
빛과 그림자가 수없이 내 마음의 마당 뜰을
쓸고 지나갔지만,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왜 없느냐? 본래 없는 거예요.
그게 본래 없는 건데 잠깐 지나갈 뿐이거든요.
그 무상을 그렇게 이해해야 된다고요.
우리의 온갖 경험과 지식과, 자기의 삶을
동원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 바로
이 無相의 도리입니다.
善知識아 於諸境界(어제경계)에→
모든 경계에, 앞에 나타나는 일체의 경계에,
心不染曰 無念(심부염왈 무념)이라→
마음이 거기에 물들지 않는 것.
“對染不動(대염부동)이라.”는 말이 있어요.
경계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境界(경계)라고 하는 것은, 나 외에
다른 모든 객관을 경계라고
불교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境界 = 나 이외의 다른
모든 객관들을境界라고 한다.
온갖 경계가 벌어지지요?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
아니, 심지어 잠 속에서까지 내 앞에 펼쳐지는
온갖 모습들. 온갖 상황들.
거기에 내 마음이 물들지 않는 것.
그것이 무념이라고요.
무념이라고 해서 무슨 아무런 생각이 없이
목석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석처럼 되는 것이 아니예요.
잡념이 없다는 것이지,
거기에 끄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니까요.
생각할 수 있는 근본은 그대로 있어요.
우리
心體(심체)는 있는데, 잡념이 없는 것이 근본 이예요.
그것이 무념입니다. 예를 들어서 빈병 하면,
병이 비었다는 뜻이지,
병이 없다는 뜻이 아니거든요.
空甁(공병)이라는 말이
無念이라는 말과 똑 같습니다.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망념이 없다는 뜻입니다.
"공병" 하면, 병이 비었다는 뜻이지
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마음이 없다고 하면
그거 큰일 나지요.
그러면 목석처럼 돼버립니다.
於自念上(어자념상)에→ 자기의 생각위에,
常離諸境(상리제경)하야→ 항상 모든 경계를 떠나서,
不於境上(불어경상)에
生心(생심)이니→
경계 위에서 마음을 내지 말지니,
경계 위에서 마음을 내지 말라.
경계 위에서 마음 안 내기가 참 어렵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꼭히 내 일이 아닌데도
거기에 거들게 되고, 빠져들게 되고,
내일이라고 해서 또 빠져들고...
년 전 부터인가 유명한 책, 세상에 소개됐지요.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고 하는...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라.’그리고 그 다음
말이 더 중요해요.
‘모든 것은 다 사소하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라.
그럼 뭐가 사소한 거냐?
모든 것은 다 사소하다.
내가 여기 이렇게 건강하게 있으면 끝이에요.
그 외에 것은 다 사소한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오지,
그렇지 않고는 안 된다고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면
현실을 외면하는 것 같은 소리이고,
그런 의미도 좀 있지만, 외면 안하려야
안 할 수 없는 거예요. 왜 그런가?
내가 참여 해가지고 어떤 사회 부조리라든지,
시시비비에 참여 해서 그것을 바로 잡아 놓으면,
한 1년이나 2년이라도 세상이 조용하면 하지요.
당연히 한다고요. 그것을 바로 잡기도 전에
딴 게 또 터져요.
계속 끊임없이 터지는 겁니다.
끊임없이 터지는 것...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바로 잡으면 그것이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세상의 어떤 그런 문제들을 통해서
내가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길이 언제쯤일까?
어떤 길이 있을까?
계속 그렇게 세상사 쫓아가다 보면,
마음 편할 날 한 번도 없는데, 편할 날이 언젠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이
수행을 시작 하셔서 성도하시고 부터,
많은 제자들이 들어오고 그 제자들이
둔한 사람도 많지만,
사리불이나 목련같이 뛰어난, 그 당시
사회에선 아주 뛰어난 사람들. 그리고
그 후 역사상 보면,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를 많이 하거든요.
승속을 막론하고...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냥 적당하게 대충
그렇게 쉽게 살았느냐 하면, 그게 아녜요.
피나는 정진을 했다고요. 아주 치열한
인생을 살았어요. 보통 사람들의 한 열배의
인생을 살았다고요. 그런 삶을 살면서
얻어낸 그런 깨달음에 의한 가르침이지요.
이런 것이 다 그냥 가르침이 아니라고요.
어떻게 보면 이들이
세상의 부조리를 외면하는 것 같은
그런 말씀이지만, 수많은 세월을 밤을
지새가면서 고심하고 해서 통한 도!
도통 해가지고서 이런 것이 도통한데서
나온 소리입니다.
살아보면 이런 말이 맞다고요. 간혹
어떤 이들은, 불자들 중에서도, 스님들 중에서도
이런 거 세상의 시시비비를 외면 한다고 하는
그런 것을 아주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는 이가 있거든요.
스님들이 공부하는 치문이라고 하는 책에,
세상의 시시비비에 대해서 거기 보면
편지도 있고, 훈계하는 것도 있고, 비문
같은 것도 있고요.
是非窟裏(시비굴리)에
莫回頭(막회두)하고
聲利門前(성리문전)에
高着眼(고착안)하라.
시비굴.=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 하는
그 굴속에 머리 돌리지 말라.
그 쪽으로 머리 돌리지 마라.
거기에 머리 따라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거예요.
괜히 말려들어서는, 온갖 복잡한 너저분한 일이
생겨서 엉망진창이 돼버리지요.
그리고
聲利門前에 高着眼하라.
이것은, 시비굴리는 아무에게나 권할 수 있지만,
성리. 이거는 세속 사람들에게는 권하기가 조금
힘든 말 이예요.
聲은 명성입니다. 그리고
利는 이양. 이익 문제입니다.
명성 과 이익에 고착안하라. 그랬어요.
눈을 높이 떠라. 안목을 높이 가지라.
그랬어요.
그거 뭐 시시하게 보라 이거지요.
명성과 이익에 마음 그리 쓰지 말고,
하찮은 것으로 그렇게 보라. 이겁니다.
설사 그런 데에 나아가더라도 뭐 높은 벼슬.
높은 직위에 나아가더라도 그것을 그렇게
탐착해서 좋아서 할 것이 아니라, 그냥 인연이
닿아서 하게 되면 하고, 말게 되면 마는 이런
식으로 좀 눈을 높이 뜨고, 나아가든지 말든지
하라는 것이지요.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아, 이익이 생기면
당연히 취해야지요. 이익이 생기면 챙겨야지요.
그렇지만,
그 이익에 그냥 코를 박고, 거기에 목을 매달고
하는 그런 식으로 살게 아니라, 차원을 좀 높이,
눈을 좀 높여 가지고, 그렇게 살라는 뜻에서
고착안입니다. 착안을 높여라. 높이 착안하라.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좋은 말이지요.
저는 이것을 매일 여러 수 만 번 외웁니다.
是非窟裏에 莫回頭하고
聲利門前에 高着眼하라.
그런데 직접 발은 안 가지는데, 마음은 가지지요
또. 그것만 해도 어지간히 수양이 되었지요?
발이 가지진 않는데 마음이 가져서 마음이
늘 불편하다고요.
주변에 시시비비 꺼리가 생기면,
직접 몸은 가진 않지만 마음은 따라
가 가지고 편치가 않는데,
마음까지 따라 가지 말아야 되거든요.
사실은 그것만 해도 어지간히 수양이 되었지만요.
대개 보면 발이 따라 가서, 좌충우돌 하면서
의협심이나 있는 것 같이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해결 하려고 들지만, 그게 될 리가 없지요.
되지도 않는다고요.
불교에서 볼 때
조금 비극적으로 보는 안목이 뭔가 하면,
세상을
增劫減劫(진겁감겁) 이라는 말이 있어요.
불교에서 연령을 볼 때 팔만 사천세에서
십세 까지 내려간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사람의 수명이 팔만 사천세였어요.
그러다가 십 세까지, 십 세
定命(정명)으로 내려간다는 거예요.
요즘은 잠깐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잠깐 그렇다는 겁니다.
잠깐...
예를 들어서 호롱불 불꽃이 꾸준히 타다가도,
잠깐 밝게 비출 때가 있고
촛불도 그럴 때가 있어요.
그와 같이 근래에 그렇게 수명이
잠깐 10년 이상 길어지지,
그것이 계속 그렇게 되진 않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거는 우리가 뭐라고 꼭히 말할 수는 없는
것이고...
어쨌든 불교이론에는 보면 팔만 사천세에서
십 세까지 내려갔다가, 십 세에서 다시
팔만 사천세로 올라가요.
내려 갈 때를 減劫(감겁)이라고 그래요.
올라갈 때를 增劫(증겁)이라고 그래요.
감겁에는 이 사회에 좋지 아니한 일이 생기면,
그게 안 없어져요. 아무리 단속을 해도 안 없어진다고요.
안 없어지고 어디엔가 그게 살아 있다는 거예요.
대개 보면 그렇더라고요.
우리나라의 어떤 여러 가지 모습들만 봐도
세상에 어떤 사람이 안 좋은 문제를 만들어 놓으면,
그걸 강력하게 단속을 했는데도 그게 남아 있던지,
그와 유사한 것이 있던지,
그 보다 더 나쁜 것이 있던지 간에,
자꾸 생기는 겁니다. 자꾸 생긴다고요.
악이 자꾸 增해요. 더 불어나요.
좋지 아니한 일들이 자꾸 더 많아지고,
좋은 것은 줄어들고...
그런데 增劫시대에는 좋지 아니한 것은 자꾸 사라지고,
좋은 것은 한 번 생기면 그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좋은 일들이 불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온다는 거예요.
그것은 증겁시대가 그렇다는 겁니다.
구사론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제들이 많은데, 그 문제를 쫓아가서 해결 하려고 하면,
해결이 어렵고 그래서
莫回頭. 머리 돌리지 마라. 거기 머리 돌리지 말라.
그 뜻입니다.그 길이 제일 상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소극적인 인생을 이야기 하는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꿰뚫어본 그런 말씀이지요.
不於境上(불어경상)에
마음을 내지 말지니라.
若只百物(약지백물)을
不思(불사)하야→
만약 다만 온갖 사물들을 생각하지 아니해서,
백물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사물. 온갖 현상입니다.
念盡除却(념진제각)인댄→
(이것은 잘못된 상태를 말합니다).
생각이 다 해서, 생각을 다 제해 버린다면,
여기는 생각이 없는 걸 말하는데 사실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끄달리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요.
여기는 아무것도 생각을 아니해서
생각이 끊어져버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一念이 絶(일념절)에
卽死(즉사)하야→ (이것은 죽음입니다.)
한 생각마저 끊어지면 그것은 곧 죽음이어서,
別處受生(별처수생)하리니→ 다른 곳에서 생을 받게 된다.
是爲大錯(시위대착)이라→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까 목석처럼 되어 가는 것이 무념이 아니고,
무상이 아니고, 바람직한 공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생각이 더욱 또렷또렷하고,
더욱 맑아지고 더욱 분별이 정확하고,
공부를 할수록 이렇게 되어 가는 것이지,
흐리멍텅하고, 목석처럼 아무 분별이 없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그건 죽음과 마찬가지고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學道者(학도자)는
思之(사지)니라→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정말 진정한 인생의 바람직한 삶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 깊이 생각하라 이겁니다.
그것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 학도자 =
바람직한 인생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라.= 思之니라.
若不識法意(약부식법의)인댄→
만약에 법의 뜻을, 가르침의 뜻을 알지 못할진댄,
自錯(자착)은
猶可(유가)어니와→ 스스로 잘못되는 것은
그렇다손 치자 이겁니다.
지 혼자 지 잘못이니까요. 그런데
更勸他人(갱권타인)하며→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기를 권하며,
목석처럼 되어 가기를 권하는...
自迷를 不見(자미불견)하고→
자기의 미혹한 것은 보지 아니하고,
又謗佛經(우방불경)하나니→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나니
所以(소이)로 立無念爲宗(입무념위종)이니라→
그래서 내가 무념위종을 세워서 종으로, 으뜸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혼자 잘못 되는 것도 안 돼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런 것을 권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無念이라고 하는 것이,
목석처럼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망념이 없는 것. 끄달리는 생각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