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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잘못한 사람이 잘못을 빌거나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성질을 내면서 잘한 사람을 나무라는 어처구니없는 경우에 기가 차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적반하장이 일어나는 심리적인 원인은,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잘못한 줄은 알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을 때, 또는 자신의 잘못의 원인을 타인에게 돌려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시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피해자가 가해자에 비해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 이런적반하장의 갑질행위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학교 폭력으로 인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서 징계처분을 받은 가해 학생과 그 부모가 자녀의 학생부에 기재될‘주홍글씨’를 우려해서 사건을 쌍방폭행으로 몰아가 징계를 무효화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누가 봐도 일방적인 가해 학생이라 판단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학폭위 징계처분에 불복해서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최근 들어 크게 늘고 있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양심을 찾아 볼 수 없는 적반하장의 상황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자행되고, 이것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들이 없다면, 무질서의 끝판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적반하장의 비도덕적이고 공의와 정의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이런 상황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는 자리의 특징을 잘 간파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있다가 이 세 명의 일행을 발견하고 달려가 영접하며, 장막에 들어와 잠시 쉬고 먹고 갈 것을 청하였습니다(창18:1-5).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떡을 만들게 하고, 가축 중에서 가장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하고, 엉긴 젖과 우유를 준비해서 세 명의 나그네에게 대접합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처럼 옆에 서서 시중을 듭니다(창18:6-8).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 약속해 주십니다(창18:10-15).
식사를 마친 두 명의 나그네는 소돔을 향해 출발하고, 하나님만이 아브라함 곁에 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으시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복을 주십니다(18절). 그리고 이어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19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의(righteousness)’와 ‘공도(justice)’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와 공도’가 무엇일까요?
19절 말씀을 새 번역 성경으로 보면,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의 ‘의와 공도’를 새 번역본 성경에서는 ‘옳고 바른 일’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옳고 바른 일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합니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면, 하와가 선악을 알기 위해 선악과를 먹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옳고 바른 일의 기준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6:6)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드리는 번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삶의 기준 뿐만 아니라 선악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면 무고한 자들을 정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호세아 선지자의 선포를 인용하셔서 이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12:7).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장로의 유전을 기준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정죄하였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십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제사와 번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았다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공의와 정의를 원하시는 것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말씀 두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기원전 8세기 선지서 아모스서 5:24을 보겠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개역개정).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의와 공의가 사회 전반에 흘러 가득 차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을 바라보며 애통함으로 부르짖던 미가 선지자의 말씀 중에 미가서 6:8절을 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개역개정).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새 번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바라셨던‘의(righteousness)’와 ‘공도(justice)’는 여전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택한 백성들에게도 원하시는 모습입니다.‘의와 공도’즉,‘옳고 바른 일’에 대해 미가선지자는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도 없는 제사나 형식적인 번제를 원하지 않으시며, 자비와 충성, 인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 원하십니다. 자비롭고 충성스러우며, 인애가 있고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사람은 함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정죄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불의한 일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며 살아가는 삶을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왜? 교회 다닌다는 성도들이 15 퍼센트 이상 된다는 우리나라에 범죄가 끊이지 않는 것일까요?
길을 가다가 서서 한 바퀴 뺑 돌아보면 수많은 십자가를 확인 할 수 있는 우리나라, 편의점보다 교회가 더 많다는데, 왜 교회는 예전과 같이 사회에 옳고 바른 일에 대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교회를 향한 비난이 쏟아지고 안티 기독교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이 땅의 교회들이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수많은 목회자들이 생명력을 잃어가는 이 땅의 교회를 두고 근심하며 중보하고 있습니다.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할 교회가 왜 힘을 잃어버렸을까요?
첫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옳고 바른 일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지만, 겉모습만 성도인 사람들이 너무 만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알려는 의지가 없거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일까요?
둘째,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수 많은 가정에서 영어, 수학 공부를 위해 학원을 보내고, 과외도 하지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과외를 하거나 학원에 보내는 경우는 보기 힘이 듭니다.
성경은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은 28:19-20을 보면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까지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데, 갈수록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곳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에 교회학교가 없는 곳이 전체 절반 이상입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제약 때문에 미약하지만 교회에서는 절박함으로 열심히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왜 변화가 없을까요?
셋째, 배운 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 그리고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라 말씀하십니다.
배운 대로 말씀 한 구절이라도 지켜 행한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으로 변화되고, 나아가 세상이 변화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르치지도 않고, 배운 대로 행하지도 않는 것일까요?
넷째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을 온전히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죄인입니다.
이 세상 수많은 죄들이 있지만 가장 흉악한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9에 보면,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않기 때문에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함께 행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자라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작고 연약할수록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10:17))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드리고 신뢰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 자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이 가장 먼저 찾아 가실 곳이 어디일까요?
우리 시대에 크고 작은 어려움과 문제가 얽혀 있는 곳, 억울함이 사무쳐서 부르짖는 소리가 가득한 그 곳, 그 어느 곳보다 절실하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드러나고 실현되어야 할 곳에 예수님은 먼저 방문하시지 않으실까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소돔을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평가가 소돔보다 나을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실현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가 바로 지금입니다.
소돔에 임한 하나님의 멸망의 심판이 우리 각 사람에게 임하기 전에, 온전한 회개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확립되어야 할 장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지금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곳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환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차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여러분이 선입관을 가지고 차별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려 하였다면
여러분 또한 예수님이 책망하신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이 시대에 선택하시고 세우신 피스메이커, 즉 화평케 하는 자로서 여러분이 생활하고 있는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간직하고 잘 분별하여 늘 공의와 정의를 행할 수 있는 선한 자가 될 수 있도록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