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
시의 운명, 혹은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세월’
김창수(문학평론가, 고려대 강사)
기항지의 풍경
비탈밭이라고 해서
무엇 하나 비스듬히 자라는 법 없지
국수당 비탈밭 빼곡이 익은 보리를 벨 때
쪽쪽 곧은 대공이 한 단 묶어 들며
(중략)
썰물을 따라 내려갔다가는
밀물에 쫓기어 비탈을 기어오르곤 하며
그렇게 배운 비탈진 사랑법 하나
수도국산 인천제철 언덕빼기에 비스듬히 꽂고
언젠간 반드시 꼿꼿하게 일어서 보리라고
출근길을 따라 내려갔다가는
퇴근길 인파에 쫓기어 숨가쁘게 기어오르면서도
비탈이라고 해서
무엇하나 비스듬히 자라는 법 없지
또 그렇게 자라날 우리들의 사랑법
- 「비탈진 사랑법」에서
화자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고단한 도회의 출퇴근길을 비탈진 해안을 오르내리던 썰물과 밀물의 변함 없는 운동을 떠올리며 견뎌내자고 말한다. 또 비탈진 밭에서도 꼿꼿하게 자란 국수당(자월도의 지명)의 보리 대공들처럼 살아가자고 다짐해 본다. 비탈진 땅은 물건과 사람을 끊임없이 미끄러지게 만든다. 그런데 송림동 수도국산만 그런 게 아니다. 온 인천이, 온 도시가, 아니 온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비탈인지도 모른다. 세계는 경쟁을 통해 끊임없이 개인을 미끄러지게 만든다. 도시와 세계의 지배자인 자본은 자신이 어제 구축한 기반을 내일에는 스스로 붕괴시키고 추상화시키면서 증식해나간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은 대량 해고를, 노동 유연화 정책은 모든 노동자를 잠재적 실업자로 미끄러지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모두 시지프스이고 수도국산은 코카사스 산이다. 비탈진 현실 속에서 곧게 일어서려는 힘겨운 노력을 이 시는 담고 있어 아름답다. (그런데 수도국산은 재개발되어 고층아파트들이 곧추 서 있는걸 보았다. 특히 인천제철 앞쪽 비탈에 높이 솟은 아파트는 아름답기는커녕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흉물이었다. 수많은 송림동 사람들을 내쫓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해서 그런지 인천에서 가장 불쾌한 건물로 기억된다.)
시의 운명 혹은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세월’
김영언은 그의 시에다 황해에 떠있는 섬과 섬사람들의 정서를 생생하게도 옮겨 놓았다. 그것은 그가 시적 주인공들의 육성을 거듭해서 들어 왔으며, 그들의 소리를 시의 리듬과 조화시키는 비결을 터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그를 자월도의 정서적 도주(島主)라 불러도 될 것이다. 이 말이 그의 상상력을 섬에다 가두자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몸은 이제 섬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당분간은 도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앞으로 그의 ‘세월’에는 도시적 삶과 그에 대한 촘촘한 탐구가 더 담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망 고도 25층을 헐떡이는 엘리베이터」나 「유쾌한 김 선생의 하루」와 같은 작품은 어떤가? 소시민적 삶의 허구를 3인칭 시점을 잡아 그리고 있는데, 시점이 어딘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시는 아무래나 ‘나의 이야기’를 ‘나’의 정서로 표출할 때가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뜬금없이 시란 무엇인가라고 그에게 물어보자. 김영언은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세월’이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김영언의 시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나는 그 말이 모든 시와 시인에게 적용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여린 풀들 몇 가닥
비쩍 마른 종아리를 치켜들고
무너진 장독대를 기웃거린다
소문 없이 굵어진 감나무 가지 끝에서
행여 소식이라도 떨어져 내리지
않을까, 않겠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다만
아무 가져갈 것 없이 가볍게 떠난 자리
옹기종기 그림자들 묻힌 자리에선
여윈 버섯들 자잘한 그리움으로 피고 지고
밑 빠진 대항을 넘성거리는
여린 풀들 몇 가닥 같은 발자국들아
도회지 팍팍한 삶처럼 뒤꿈치 굳은 살 갈라진
늙은 감나무 밑동 같은 얼굴들아
두런두런 쌓이는 이슬이 가녀린 바람마저 잠재우면
길은 산발한 잡풀 속에 잠들어
행여 거친 꿈에 시달리는지 자꾸만
깊은 도랑 속에 뒤척뒤척 몸을 빠뜨리고
소문 없이 잔가지 무성해진 감나무는
그 새벽 풀숲으로 여전히
풋감들 수북수북 떨군다, 이제
아무도 그 세월을 주워 가지 않건만
-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세월」 전문
이 시는 주인이 떠나버린 폐가의 모습이거나 황폐해진 고향의 정경일 터이다. 그러나 여기서 감나무의 형상은 그 음역을 훨씬 넓혀서 다른 지시물들을 대응시켜도 되겠다. 감나무를 시인으로 보면 어떻겠는가? 누가 주워가건 주워가지 않건 감나무는 자란다. 여기서는 시인이 “찾는 이 없다고 / 꽃을 피우지 않으리 / 오는 이 없다고 / 어찌 그리움마저 피지 않으리”(「살구꽃 핀 세월」)라고 유장하게 읊은 대목을 떠올리면 좋겠다. 감나무는 잔가지를 내뻗고, 밑동이 갈라터지고, 그 주변에 잡초들은 자란다. 사람들을 먹여 살리던 ‘대항’(큰 독)은 밑이 빠지고, 버섯들은 습기를 만나면 보송보송 자라나고 겨울이면 말라간다. 이 모든 것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순조롭다. 어느 하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있다. 우리도 시도 이같이 그리워하다가 지치고 길을 잃기도 하고 또 메말라가기도 하는 법 아닌가? 이제 그의 다음 시를 조용히 기다리기로 한다.
- 부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