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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시조 비문과 신도비명
1) 함양부원군 시 문도 오공 휘 광휘 묘비문
삼가 오씨 족보를 살펴보니 공(公)이 고려조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상서성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글월 올려 관리되려는 선비 삼백인을 선발하여 육학을 부흥시켰는데 그때 공주에 반적이 일어났으므로 토벌책을 상주하여 평정하고 왕명에 따라 충청도에 가서 민생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관리들의 기강(殿最:근무고과)을 바로잡았다.
또한 명주(江陵)에 도적이 일어나 울진 삼척을 함락시키므로 왕이 공을 흥위위 상장군으로 삼으니 토평하고 개선하였다. 이 공훈으로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의 위계에 올라 함양군으로 봉하여지니 자손들이 함양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아들 열(列)은 산관이요 홍예(洪芮)는 함양군으로 시호가 문순이요 양예(良芮)는 학사이다.
손자 정원은 원외랑, 정(靖)은 밀직사, 정(挺)은 참정, 적(迪)은 함양군으로 시호 문익, 하익은 첨정이다.
증손 세룡은 대사성, 규(圭)는 직장, 현비는 직제학으로 시호 정민, 현석은 상서, 한신은 검교이다. 현손 중원은 이조판서, 흥(興)은 소윤, 천도는 박사, 방식은 소윤, 일악은 중랑장, 백룡은 현감이다. 五세손 대영과 선량은 같이 형판(刑判), 엄(儼)은 관찰사, 조는 현감, 봉길은 이판(吏判), 상덕은 호가 두암으로 소감, 조선조 때 이판이 증직되고 시호 문충, 사웅은 참판, 사권은 현감, 인민은 정랑, 종형(종馨)은 상장군이다.
6세손 강(江)은 현감, 상문은 사인, 호(皓)는 진사, 경지는 부제학, 치선은 호가 수심재로 관찰사, 치행은 호 화산으로 이판, 치인은 호판, 안기는, 참판, 안우와 중부는 같이 현감, 덕수는 직장이다.
7세손 덕산은 인의, 경충은 현감 대사간, 응(凝)은 호가 금남재로 병판 남원군, 능(凌)은 대사관, 현무는 현감, 적선은 수찬, 숭하는 생원, 변하는 호가 귀휴정으로 현감, 팽숙은 이판, 걸(傑)은 부위, 윤(倫)은 직장, 척(陟)은 소윤이다.
8세손 필은 부장, 종하는 참봉, 종은은 판관, 종주는 사직, 종한은 북평사, 홍수는 참의, 언보는 부사, 언필과 붕(鵬)은 같이 참봉, 윤공은 수찬, 계형은 주부, 계룡은 현감, 세득은 좌랑, 종은은 교수, 맹학은 참의이다.
9세손 영(齡)은 익선(翊善), 징(澄)은 정랑, 숙(淑)은 우후, 완(琬)과 성대는 같이 직장, 봉준, 억령, 근(瑾), 기수, 인수, 이의는 같이 참봉, 숙정은 생원, 숙동은 사직, 세준은 찰방, 경복은 주부, 식(軾)은 교수, 신도는 생원이다.
10세손 윤원은 사직, 윤형은 부솔, 운대는 군수, 세영은 진사, 경(瓊)은 유일(遺逸)로 봉사, 만령은 공신, 극성은 호가 문월당으로 현감, 윤성은 판관, 경(勁)은 직장, 적(勣)은 직제학, 홍언, 대겸, 세준, 윤충, 신충, 세기는 같이 참봉, 빈(玭)는 정자, 황(璜)은 도사, 개(玠)는 유일로 이조참판, 세평은 교수, 대손은 생원, 초(偢)는 감정이다.
11세손 견수는 설서(說書, 七품벼슬), 천수는 정랑, 인(寅)은 승지, 개(盖)는 사과, 신(藎)은 현감, 맹(孟)은 봉사, 극인은 판결사, 흡(潝)은 호가 용계로 좌랑, 익(瀷)은 호가 우재, 연(演)은 호가 취수당으로 사과, 섭(涉), 정헌, 운(霣), 윤(潤)은 같이 사마, 정미는 부정, 희남은 공신, 진(震)은 공판, 명생, 효립, 봉남, 덕유, 칭(儞)은 같이 참봉, 경협은 도사, 덕융과 추(楸)는 같이 감정, 건(健)은 호가 덕계로 전한, 준(俊)은 훈도, 현(俔)은 공신, 한(亻+間)은 호가 수오당으로 교수, 간(侃)은 봉사다.
12세손 처문은 호가 화포로 유일로 보덕, 숭문은 현감, 익창은 호가 사호로 정랑, 산로는 정랑, 산항은 판관, 흥조는 우후, 찬조는 호가 영회정으로 절도사, 윤조는 공참, 환(渙)은 찰방, 정엽은 호가 수암으로 교위, 경웅은 주보, 정언은 참봉, 장(長)은 호가 사호로 승지, 경원은 교수, 일춘은 참봉, 문도는 공신, 윤세는 첨정, 대용은 주부, 대인은 직장이다.
13세손 증(澄)은 호가 윤호로 주부, 전(晪)은 호가 절암으로 사인, 담(譚)은 진사, 염(濂)은 첨정, 순고는 감정, 성(誠), 욱창은 사과, 식(植), 尙(상), 복(福)은 같이 참봉, 삼달은 호가 취은이명, 태웅은 주보, 홍업과 필성은 같이 참봉, 열(悅)은 공신, 일변은 참의이다.
14세손 여집은 직장, 여림은 통례, 중서는 검교, 첨경은 호가 죽서로 정자, 첨선은 진사, 두환은 생원, 국선과 영진은 같이 참봉, 훤과 번(翻)은 같이 공신, 정민은 참의이다.
15세손 사종은 판관, 상옥은 호가 송파로 지평, 상주는 진사, 명증은 전랑, 적(績)은 생원, 규(糾)는 호가 괴헌, 위(緯)는 사과, 형(泂)은 현감, 시회는 좌윤이다.
16세손 영훈은 진사이고
17세손 임석은 호가 죽은, 임현은 우후이다.
18세손 세웅은 호가 운담이다.
연면함이여! 후예들이 번영하고 있으니 모두 다 공의 넉넉한 음덕이로다. 함양군 남부의 화장산의 남향 자좌(子坐)에 있던 공의 무덤은 실전된지 오래였다. 그러나 1907년(丁未) 봄 후손 응수, 응현이 묘역 내에서 비석조각을 발견하게 되어 이때 오씨 종친들이 봉분을 수축하고 석물을 세웠다. 이 고을 함양의 군수로 부임한 불녕(不佞) 또한 이 역사(役事)를 상의하게 되었는데 재열 광열 영호 기준 등이 비음기를 청하기에 오른쪽과 같이 약기한다.
1909년 9월 정삼품 월성 이종원 이 글을 짓고 씀.
2) 고려좌복야 상장군 봉함양부원군 시 문도 오공 신도비명 병서
어떤 가족의 성씨의 터전을 확립한 시조는 바로 나무로 치면 뿌리요 물로 치면 원천과 같다. 그 모여진 힘이 깊이 뻗고 두텁게 쌓여 후대에 물려준 다음에야 맑은 물은 영원히 흐르고 음덕의 그늘은 무궁하게 드리워질 수 있으니 그것은 속일 수 없는 천리(天理)이다.
오씨는 동방의 대성이고 함양오씨 또한 벌족 중의 하나이다. 그 득관시조는 고려좌복야 상장군 함양부원군이요. 시호가 문도이며 휘 광휘(光輝)가 바로 그 분이시다.
보첩을 살피건대 무혜공 첨(瞻)께서 송(宋)나라(註1)에서 동래한 이래 동방 오씨가 이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후 훈장과 시호를 세습하여 오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문양공 오연총(文襄公 吳延寵)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더욱 저명하게 되었다. 四대를 내려와 문하시중 평장사 극훈(克訓) 문하시중 충의공 수권(守權) 함양군 현필(賢弼)이 공의 위로 三세이다.
고려 명종 7년 정유에 태어난 공은 상대의 음덕을 이어받고 출중한 재질로 어려서부터 널리 배우고 문장을 좋아하여 17세 되는 계축년에 문과장원에 뽑혀 명예와 여망이 당대의 기대에 부합되었다. 일찍이 글을 올려 관리응시자 300여인을 선발하여 성균관에서 강학하니 유학이 다시 진작되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벼슬이 상서성좌복야에 이르렀다.
때에 공주 명학소의 천민들이 작당하여 공주성을 공격 함락(註3)시켰으나 관헌들이 능히 막지 못하자 공이 진압책을 주청하고 나아가 고을관리(長吏)를 퇴출시키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물어 대의로써 백성들을 설득시키니 이때 난민(亂民)들이 두려움을 알고 도적들이 숨을 죽이며 그 지역이 안정되었다.
신종 2년에 명주(溟州:江陵)의 반란군이 삼척․울진을 함락시켜 북쪽 경계가 소란하게 되자 공이 흥위위상장군으로 나아가서 토벌하여 화평을 찾았다.
고종조에 거란군이 쳐들어왔다. 공이 김취려․조충 등과 함께 양광도(忠淸道)로 가서 크게 쳐부시고 화평을 얻었다. 조정에선 공훈일등(一等)에 책록하고 추중정란광국 공신호를 내리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로 위계를 올려 함양부원군에 봉하였다.
공이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을 때 여장군 임청(呂將軍 林淸) 박상서선(朴尙書 善)도 물러나 쉬고 있었으므로 이에 여생을 보낼 곳으로 삼아 천령의 산수지간을 거닐며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일생을 마쳤다. 후세 사람들이 그 노니던 대(坮)를 삼휴(三休:세 사람이 쉬다)라 하고 그 마을을 괘관(掛冠:벼슬을 그만두고 관복을 벗은 곳. 갓거리)이라 하여 세세대대로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공의 졸년은 미상이나 조정에서는 특명으로 함양군 남쪽 화장산 중록 남성골 자좌원(子坐原)에 예장하고 문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위 정경부인의 성씨도 전해지지 않으나 세상에서 공이 여임청․박선 두 분과 함께 여흥민씨 사위라 일컬어오고 두 집안 가첩에 모두 실려있다. 그러나 함양오씨 구족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음으로 여기에 등재하지 않은 것은 또한 의심처는 그대로 남겨 둔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공의 아들은 셋인데 열(列)은 금오위 산관이요, 홍예(洪芮)는 개부의동삼사로 함양군을 습봉하였으며, 양예(良芮)는 학사이다.
손자 중 장자계의 정원(貞原)은 원외랑이요, 수원(壽原)은 이부상서이며, 차자계의 유(裕)는 호부상서이고, 유정(惟正), 정(靖)은 밀직사, 정(挺)은 참정, 적(迪)은 삼중대광으로 함양군을 습봉하였으며, 셋째 아들계의 하익(河益)은 첨정인데 그 아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오늘 수십세에 이르러 자손들이 번창하여 전국에 널리 퍼져 있고, 충신 효자, 공훈자, 학자, 명망가와 수절자가 보첩에 앞뒤로 서로 줄을 이으니 이 어찌 공의 음덕의 두터움과 맑은 물의 원천의 원대함이 아니겠는가.
공의 묘소는 병란을 겪은 이래 실전된지 오래였으나 지난 고종 정미년(1907년)에 후손 응수(膺洙)가 있어 비로소 주민의 속전설화를 믿고 묘를 찾아나서 무덤 아래에서 비석단편을 얻어 공의 묘임을 고증하였다. 종족들에게 통문협의하여 다시 보수 치산하여 석의물(石儀物)까지 모두 갖추었으나 오직 신도비를 세우지 못함을 한으로 삼아왔다. 무오에 이르러 뒤늦게나마 신도비 세울 것을 협의하여 뜻을 모았다.
후손 균식(均植), 기환(基奐), 규홍(奎洪), 규환(珪煥), 수종(秀鍾), 영종(榮鍾), 지영(智永) 등 종인이 보첩을 안고와 불초본인에게 글을 청하였으나, 늙고 보잘것이 없어 능히 감당할바 아니로되 공의 행적을 살피니 넌지시 글쓸 마음이 생겼다.
대체로 공이 고려성시에 출생하여 일찍이 평민에서 조정에 올라 현직을 두루 거치고 장상(將相)의 자리에 이르러 경직(京職)에서는 학문을 일으키고 유풍을 진작시키는데 공헌하였으며, 외직에 나가서는 반적을 토벌하고 국난을 바로잡는 공훈을 세웠다.
그 이름이 왕부에 책록되고 봉토를 받아 이름이 청사에 남게 되었다. 문무를 함께 갖춘 재질로 자기 수양(修己)과 적을 무찌른 위대한 행적은 진실로 일대의 명신이라 부르기에 충분하고 마땅히 한 성씨의 터전을 확립한, 세계(世系)가 이어질 시조가 될만하다.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이것은 오히려 공에 대한 모든 것을 말했다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생각건대 그분이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와 영달과 명예, 공을 쌓는 일밖에 초연함이며, 각건 쓰고 지팡이 짚고 산수지간에서 편안하고 한가로이 지내다가 평생을 끝맺은 일, 그리고 그만둘 때를 알고 만족할 줄 아는 그 고결한 풍절과 숨은 운치는 마치 장사도(張司徒)와 소태부(疏太傅)의 고결한 풍절을 듣는 것같다. 그 온화한 음덕이 깊게 축적되고 두텁게 쌓여 후인들을 계발하고 도와줌이 어찌 여기에 있다고 아니하겠는가. 애석한 일은 세대가 멀어지고 사적이 일실되어 그 훌륭한 말씀과 아름다운 행적을 모두 상고할 수 없는 것이다. 이어 비에 새겨 이르기를,
중국에서 시원한 오씨가 동방에서 번창하였도다. 씨족이 분화되어 각기 종파를 달리하니 현명한 복야공이 중세에 분연히 나타나 천령에 봉토를 받아 비로소 터전을 잡고 관향을 열었도다. 옛날 주공(周公)과 강숙(康叔)을 노(魯)나라와 위(衛)나라 왕으로 봉분한 것과 같으니 세계(世系)를 이을 터전을 확립했다면 한집안과 한나라가 무엇이 다르리요. 재기와 공업이 일세에 우뚝하고, 문무겸전하니 윤길보에 가히 비유할만 하도다. 어떤 공을 세웠는가. 백성을 진정시키고 도적을 토평하였도다. 이떤 위업을 남겼는가. 유풍을 떨치고 학문을 일으켰도다. 그 공, 그 위업은 나라가 공에게 힘입었으니 청사에 드리워 백세에 걸쳐 가히 보리로다. 오직 공의 음덕을 아는 이가 많지 않을지라도 만년의 벼슬 그만두고 은퇴한 고결한 풍절은 더욱 높으도다. 영달과 명예의 길은 예나 지금이나 도도하도다. 영달, 명예를 일삼지 아니하고 주역의 고괘(蠱卦:亂이 극에 달하고 다시 興한다는 괘) 그것이 아니던가. 삼휴대 괘관동이 있으니 고매한 발자취를 우러러 추정해 볼 수 있도다. 공이 저처럼 숭고하고 음덕이 이처럼 뛰어나니 마땅히 그 맑은 흐름은 영원히 넉넉하게 흐르리다.
화장산 언덕에 있던 위엄있는 유택이 오래 숨겨진 뒤에 나타났으니 신령께서 자손들의 충심을 끌어 일으킨 것이로다. 신도비(용트림한 덮개와 거북대석 위에 새긴 비석) 세울 겨를이 오랫동안 없었으나 그 없음을 추보코자 하니 비록 늦기는 했을지라도 가히 잊겠는가. 공과 덕이 사람에게 있으니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 그 공덕이 나타날 것이기에 그 말을 돌에 새겨 영원히 가르칠만 하도다.
1978년(무오戊午) 4월 일 화산 권용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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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吳姓)의 약사
역사적으로 씨족은 자연과 더불어 존재하고, 족보도 또한 자연과 같이 존속(存續)한다. 자연에는 원리와 원칙이 핵이다. 이의 생극(生剋) 조화가 우주를 생성하고 동정(動靜) 변역(變易)하여 인류를 포함한 만유의 물사(物事)를 화생(化生)케 하는 진리로서 무리수적(無理數的) 군분(群分)하고, 유리수적(有理數的) 유과(類科)하여 사회 성분으로 존망케 함이 그 섭리라 한다. 그 섭리는 기용(基用) 四九수로서 三百六十수 분수(分數)를 시변화삼(時變化三), 이승(二乘)한 一萬五千二十 유과수(類科數)에 윤생률(潤生率)를 가한 수가 곧 물사의 총수(總數)이며, 인종(人種) 또한 三百六十에 四분종지一(四分種之一)의 윤생률을 가한 것이라 한다.
인류는 태초(BC X년대) 중앙아시아에서 발상(發祥)되어 양(洋, 오대양)의 각주(各州)로 유포하였다 하며, 기억년(幾億年) 누진(累進)된 오늘의 인구는 五十억이라는 팽배(澎湃)를 이루어 범람을 공상(恐相)하고 산인제한(産人制限)을 궁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인류학이 성문(成文)되면서 인류사가 성립함은 가승(家乘) 씨족사(氏族史) 국사(國史) 민족사(民族史)를 근저로 삼았고, 따라서 동서(東西) 세계문화사(世界文化史)로 발전하여 고금의 흥망을 고찰할 수 있으며, 이를 요소(要素)로 미래사(未來史)를 설계하면서 이래 60년사를 추사(推寫)하여 간다.
인류는 최초 구석기(舊石器, 기원전 삼천년대)로써 원시 생활(穴居構木巢野處食木實)을 하던 두뇌 진보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기원전 이천년대)를 이루어 농경 목축 생활에서 협동집단 방위체제적인 조기(肇基) 취락국가(聚落國家)를 형성하고, 사회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한다. 그리고 인류는 우주의 대표적인 존재며, 만물 중 영주(靈主)라 한다. 우리 민족은 중앙아시아에서 밝은 곳을 따라 몽고(蒙古)를 경유 동역(東域)으로 흘러온 황색족(黃色族)으로서 퉁쿠스계라 한다.
우리는 신석기시대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이념으로 평양성(平壤城, 阿斯達)에 국호(國號) 조선(朝鮮)을 세워 신시(神市)를 베풀었기로 시조를 삼은 바 반만년 역사가 누진된 오늘은 세계주의시대(世界主義時代) 두뇌집단시대(頭腦集團時代) 통계시대(統計時代)라는 생활 양상(維新體制)이 새로이 세계를 향하여 급격한 변화 차원에서 충격적인 운주(運籌, 잘살기 새마을)로 전진하고 중흥의 기선(機先)을 포착(捕捉)하여 분단의 三八선을 없애고 국토와 민족통일을 지표(指標)로 삼고 있다.
이렇듯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긴 역사 속의 우리 오성사(吳姓史)를 거슬러 살필 때 그 연원은 유구하다. 주(周, 중국)의 완치시대(完治時代, 기원전 450) 태백 중옹(太白仲雍)이 봉(封)함을 받아 그 남방소주(南方蘇州, 古蘇)에 국호 오(吳)를 세워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르러는 문물의 성(盛)함이 선진을 이루었다. 예(例)하여 오음(吳音, 漢文의 四聲)이 있고, 오악(吳樂, 雅樂)이 있고, 오직기(吳織機, 紡織術)․오여(吳絽)․오라(吳羅)․오견(吳絹)이 있으며, 오수수(吳須手, 陶磁器術) 또는 오검(吳劍)․오죽(吳竹) 등은 동양 세계에 일찍이 전파되어 지금도 유명함을 들 것이다. 오국(吳國)은 일변(一邊) 오초칠국(吳楚七國, 趙膠․西膠․東蓄․齊南 등) 중맹주(中盟主) 노릇을 하면서 부차왕(夫差王)은 국서(國墅)가 접한 월구천(越句踐)과 적이 되어 쉴새없이 공방을 벌려 심지어는 와신상담(臥薪嘗膽, 원수 갚다)․오월지사(吳越之思, 상극)․오월동주(吳越同舟,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다.) 등 해학(諧謔)을 후세에 남게 하고 망하였으나 후손 오기(吳起)는 「오자(吳子)」라는 병서를 찬한 바 「싸움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고, 공격은 반드시 취하여야 한다.(戰必勝攻必取)」하는 팔진법(八陣法, 凡科敵有不卜而戰者八)은 유명하여 「병가의 할아버지(兵家之祖)」가 되었고, 「유가의 경전 가운데 오씨왈(吳氏曰)」이라 주해한 것은 후진 계발(啓發)에 철인으로서 이 모두 오 나라 왕손이 한 것이다.
오씨 기원은 「오기(吳起, 姓吳生起의 뜻)」로부터 창씨되었음을 알 수 있고, 주말 戰國時代를 거쳐 기원후 五세기말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쟁패란(爭覇亂)을 피해 신라에 망명한 오성(吳姓) 휘(諱) 첨(瞻)자 시(諡) 무혜공(武惠公)은 오기의 후손이니 우리 나라에 최초 입국하셨으므로 시상조(始上祖)가 되신다. 무혜공께서 입국(신라 지증왕 1년, 서기 500년)하시자 왕명을 받아 천령(天嶺, 咸陽 古號)의 관백(冠伯)이 되어 읍기(邑基, 今 함양읍 冠洞)를 개척하고, 마을을 설치 이곳에 머물게(設衙定居) 하심으로 천령산 아래 관동은 한국 오성의 발상지이다. 천령에서 자손이 세거 번연(繁衍)하여 혹은 신라․백제․고구려․중국(中國) 사이를 왕래하면서 유위(有爲)하였던 까닭에 오성의 습봉지(襲封地)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우리 민족이 퉁쿠스계라든가 단군 시조설과는 달리 우리 오성은 한족계(漢族系)임을 알 수 있고, 일찍 동양 전역에 유포된 고족(古族)으로서 어떤 시대 어느 영역에서나 문무겸비(文武兼備)한 특히 문양공(文襄公)같은 문화적 역사적 인물(人物血食, 將相 文學 碩博 義烈 忠孝 后妃) 등이 배출되어 공헌한 바 빛을 발함이 적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무혜공 25대손에 이르러 관향(貫鄕)을 근거로 분적(分籍)된 수십파 중 지금(1978년) 해주(海州) 울산(蔚山) 낙안(樂安) 고창(高敞) 함평(咸平) 나주(羅州) 평해(平海) 동복(同福) 군위(軍威) 장흥(長興) 화순(和順) 함양(咸陽) 흥양(興陽) 13파로 7만 가호에 40만인으로서 전국 성비(姓比) 인구순(人口順) 12에 위하는 망족(望族)이다. 이상 분적 중 함양과 흥양 오씨는 무혜공 25대손 휘 광휘(光輝)께서 시조가 되시다. 때는 고려 중반기(明宗 神宗 1100년~高宗 1200년 사이) 민란(民亂)이 일고 외적의 연침(連侵)으로 국정이 소요(騷擾)함에 이르렀다. 때를 당하여 시조 휘 광휘께서 김취려(金就礪)와 조충(趙沖)으로 더불어 난민과 외적을 평정하고 유풍(儒風)을 진작하셨나니 공헌한 바 큼으로 관(官)에 출장입상(出將入相)인 좌복야(左僕射)에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일등훈(一等勳)을 받은 정란광국공신(靖亂匡國功臣)이요, 금자광록대부위(金紫光祿大夫位)에서 시(諡) 문도공(文度公)이며, 천령부원군(天嶺府院君)을 수봉(受封)하여 천령백(天嶺伯)이 되시다.
부원군께서는 관동(冠洞, 天嶺邑基) 북편 1리 삼휴동(三休洞, 함양읍 三帥臺)에 조토(胙土)를 정하셨나니 함양오씨(咸陽吳氏)의 근원지로서 관향이 발상되었다. 천령산 아래 관동은 한국 오씨의 상조 무혜공께서 수봉(受封)으로 초창 개읍(開邑)하신 조토 유지(遺址)여서 인이동명화(因而洞名化, 通稱 掛冠洞 갓거리동)하였고, 천령산 아래 삼휴동은 함양오씨 시조 문도공께서 수봉하신 정거 조토 유지이므로 이로 말미암아 마을 이름(통칭 三休臺, 三帥洞)으로 되었다. 삼휴동이란 당시 여조(麗朝) 삼장상(三將相, 吳上將軍 光輝 呂大將軍 林淸 朴尙書 善)으로서 동문삼서(同門三婿)요 동향관씨(同鄕貫氏)의 삼조(三祖)며, 동대삼휴(同臺三休)로 서로 더불어 소요하셨나니 그 연원이야 참으로 천부(天付)의 결연(結緣)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령 구족(舊族) 오 여 박(吳 呂 朴) 세 성의 유적 전설이 함양 강산으로 더불어 만고에 쉬지 않고 흘러 내려가고 있다. 삼휴동심(三休同心)에 삼휴대(長圓形 巖盤)가 있다. 수호함이 자손의 당위된 도리일 것이다.
부원군 조기토에 세거 자손이 번연하여 영(嶺)의 사해(四海)로 유포되었는데 영호(嶺湖)가 주활지(主活地)요, 이제 시대와 영역 또는 세정에 따라 거주하지 않는 곳이 없음(無處不居)으로 삼천여 가호에 1만 5천인의 대족이다. 함오(咸吳)는 이천년(二千年)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씨족으로 유시위조걸손(有時偉祖傑孫)이 출종(出踵)하여 민족 국가 사회에 유위(有爲)한 예족(譽族)임을 자려(自勵)한다. 그리고 혈통과 소목(昭穆)을 밝히고 경조돈종(敬祖敦宗)을 위하여 초창(初創) 수보(修譜)하신 조상들께서 문화적 사회적으로 불편한 시대상과 공황적(恐慌的)인 경제 처지에서 보행(步行) 수종(收宗)에 만난(萬難)을 겪은 희생 이래 五차 속보(五次續譜)에 갈성(竭誠)하신 역대 조상께 후손은 보은하여야 하며, 그 긍지를 지켜 전통 정신적 물질적 세칙(世則)으로 삼는다.
무오수보(戊午修譜)는 정사적(正史的) 명확을 기하고자 관계된 많은 문헌을 수집 다각도로 고증 수록하고 세원(世源) 인물 시대 지리 사유(事由)를 밝혀 구보상(舊譜上) 미명점(未明點)을 절충하고 편찬 유신(編纂維新)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대동세원유적지(大同世源遺跡地)를 찾고 대동상계(大同上系)와 더불어 분적(分籍)을 집약하여 성도(成圖)로써 대동 소목을 밝혔으므로 일후(日後) 정사적 표본보(標本譜)가 될 줄 믿는다.
이래 미비(未備) 숙원(宿願)이던 선사(先事, 神道碑 守護石 修塋石階改 齋修繕 設庫裝門 美化樹木 등)를 수보(修譜) 동시(同時) 준공하였기에 만행(萬幸)이나 원래 규모의 졸(拙)함이 유감이어서 후일 운잉(雲仍)의 걸성(傑誠)에 기대를 둔다. 전일 낙보(落譜)된 많은 종친(完州․錦山․驪州)을 금보(今譜)를 계기로 참보(參譜)케 하였으니 종경(宗慶)이 아닐 수 없다. 생존 종친의 연명부(連名簿)를 참작하여 한번 보아도 다 알 수 있도록(一覽知悉) 파별․주거․남녀․생활․상황을 자세하게 벌려 기록(羅記)하고 이후 족의상(族誼上) 유대(紐帶) 긴밀(緊密)을 기대한다.
끝으로 수보와 선사를 위하여 시종여일하게 하등의 결여없이 일인(一人)도 불행없이 성취하게 됨은 오로지 조령음덕(祖靈蔭德)의 가효(加効)요, 오직 만손(萬孫)이 할 바 효성의 총괄된 화목으로써인지라 무상(無上)의 종영(宗榮)임을 동하(同賀)하고, 영원히 광선창후(光先昌後)할 족의를 굳게 다짐하는 차제(次第)이다.
대한민국 수립 三十주(一九七八) 기념 축기회 화장산 영화재 함양오씨대동무오수보소
후손 琴溪公派 二十四世 吳珪煥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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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오씨 대종회 추향제 안내
일시 : 2021년 10월 31일(일요일) 12:00
장소 : 경남 함양군 유림면 유평화촌로 154(서주리 625-10)
* 참석인원 : 각 종중 회장님,총무님,재무님 및 대종회 임원 참석
○참석교통편 : 당일 오전 07시30분 정각에 출발하는 대절버스 이용
⟪지하철4호선 사당역 4번 출구 150m 전방, SK주유소 앞⟫
(안내☏▸총무,오순식 010-5049-9960,오현정 010-8888-4673)
2021. 10.12.
함양오씨 대종회장 오 재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