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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譜』-북보 김영진(성균관대 한문학과) 1. “우리나라의 姓氏(성씨)는 본국의 土姓(토성)은 三韓(삼한) 및 三國(삼국) 王公(왕공)의 후예가 많다. 그 외 혹 하사받은 姓(성)과 혹 중국으로부터 온 姓이 있어 각각 系譜(계보)를 이루고 있으나 중국만큼 姓氏가 혼란하여 고증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譜牒(보첩)으로 증빙할 수 있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東國諸姓譜(동국제성보)』20권 丁時述撰(정시술찬),『姓苑叢錄(성원총록)』任慶昌著(임경창저)【『述先錄(술선록)』에 任慶昌(임경창)、丁時述(정시술)、鄭四川(정사천):(정곤수-필자주)은 譜學(보학)의 大家(대가)이다. 라고 하였다】『氏族譜(씨족보)』53권 朴思正著(박사정저),『百家譜(백가보)』10권 許涵著(허함저),『氏族源流(씨족원류)』李景說著(이경설저),『氏族源流(씨족원류)』7권 趙從耘著(조종운저),『閥閱通考(벌열통고)』4권 내 조부(이덕무-필자주)가 윤색 수정 보완하였고 불초손 圭景(규경)이 또한 修補(수보)하였다. 『八八帖(팔팔첩)』碧珍李姓著(벽진리성저),『萬姓叢譜(만성총보)』兪彦䥧著(유언선저),『東喬錄(동교록)』20권 撰人闕(찬인궐),『搢紳世譜(진신세보)』는 八世(8세)까지 기재한 것과 十世(10세)까지 기재한 것이 있다.『文譜(문보)』、『武譜(무보)』、『蔭譜(음보)』、『司馬譜(사마보)』等編(등편)이 있다.『明衛譜(명위보)』는 高麗人(고려인) 所著(소저)로 松京(송경)에 있다고 한다.『海東姓氏錄(해동성씨록)』梁誠之著(양성지저),『百家譜略(백가보략)』撰者闕(찬자궐)이 있다. 이 외에 姓氏에 관한 책은 몇 종이나 있는지 알 수 없다.”1) “성종조에 南原君(남원군) 梁誠之(양성지)가『海東姓氏錄(해동성씨록)』을 지었다. 明憲公(명헌공) 李坡(이파)는 우리나라 씨족에 대하여 대대로 미미한 경우라도 모두 그 支派(지파)를 분변하였다. 또 고려의 여러 科擧(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무 榜(방) 第(제)몇째를 인명마다 일일이 세었는데, 한 사람도 착오 나지 않게 하였다. 西川府院君(서천부원군) 鄭崑壽(정곤수)는 성씨의 譜牒(보첩)에 뛰어나 서울과 지방 士族(사족)의 역대 이름자와 出處(출처)의 사적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혹 와서 그 世系(세계)의 내력을 물으면 반드시 하나하나 짚어 가며 상세히 설명해 주기를,‘그대의 선대는 아무개에서 일어났고 아무개 아무개를 거쳤으며 몇 대가 현달하고 몇 대가 벼슬하지 않았다’하여 마치 직접 눈으로 보고 말하는 것처럼 하였다. 洪汝河(홍여하)는『海東姓苑(해동성원)』을 지어 그 선조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찾아 먼 三代(3대)까지 모두 자세히 상고하여 써 놓았다. 또 그 音(음)이 소속된 五聲(오성)의 구분을 상고하여 변별해서 연계시켜 놓지 않은 것이 없다. 그 鄕貫(향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추구한 부분에서는 멀리는 중국, 가까이는 우리나라에 있어 모두 깊이 있게 分派(분파)를 찾아 기록하여 각기 그 보첩을 얻게 되었다. 현감 趙仲耘(조중운)은『氏族源流(씨족원류)』를 지었고 典簿(전부) 丁時述(정시술)은『諸姓譜(제성보)』를 지었는데, 모두 譜學(보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文簡公(문간공) 李宜顯(이의현)은 우리나라의 성씨를 모아 李、金、朴、鄭、尹、崔、柳、洪、申、權、趙、韓의 12성을 가장 잘 알려진 성이라 하고, 그 다음으로 16성, 또 그 다음으로 25성, 또 그 다음으로 41성, 또 그 다음으로 19성, 또 그 다음으로 38성, 또 그 다음으로 136성을 모았다. 또 複姓(복성)으로 南宮(남궁)、皇甫(황보)、鮮于(선우)、石抹(석말)、扶餘(부여)、獨孤(독고)、令孤(령고)、東方(동방)、西門(서문)、司馬(사마)、司空(사공)을 모아 11성을 찾았으니, 모두 298성이다.” 앞의 글은 五洲(오주) 李圭景(이규경)의「姓氏譜牒辨證說(성씨보첩변증설)」(『五洲衍文長箋散稿(오주연문장전산고)』), 뒤의 글은 橘山(귤산) 李裕元(이유원)의 〈明卞氏族譜(명변씨족보)〉(『林下筆記(임하필기)』권18,「文獻指章編(문헌지장편)」)이다. 이를 통해 조선조 譜牒類(보첩류)의 현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한편 ‘藝文志(예문지)’성격의 책으로 영조 연간에 만들어진『海東書冊(해동서책)』(필사본 1책, 수경실 소장)이 있는데 이 책의 ‘譜牒類(보첩류)’에는『瓊源錄(경원록)』,『聖源錄(성원록)』,『宗族記(종족기)』(以上(이상) 3종 高麗(고려) 任景肅(임경숙)),『璿源錄(선원록)』(太朝<태조>),『海東姓氏錄(해동성씨록)』(梁誠之<양성지>),『萬姓通譜(만성통보)』(丁時<정시>2)),『源流譜(원류보)』(趙中耘<조중운>),『姓源總錄(성원총록)』(任慶昌<임경창>),『窮源錄(궁원록)』(閔鎭遠<민진원>),『璿源譜略(선원보략)』,『姓苑叢寶(성원총보)』,『氏族源流(씨족원류)』(丁必東<정필동>3))가 著錄(저록)되어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 개별 姓氏의 연원 및 명문가의 간략한 계보를 제시한 책들이다. 18세기 초까지는 아직 黨派譜(당파보) 성격의 책은 보이지 않는다. 당파보 성격의 책으로 시기가 가장 올라가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18세기 중엽의 청풍김씨가의『北人譜(북인보)』(필사본 1책, 단국대 연민문고 소장)와 1800년경의 고려대 신암문고본『남보』이다. 한편‘南譜’는 아니지만 남인 명문가의 계보를 정리한『儒紳近系(유신근계)』(표제‘文蔭近系(문음근계)’, 필사본 1책, 수경실 소장)란 책이 있다. 이 책은 崔鶴羽(최학우)4)가 연안이씨가를 비롯한 82家(가)의 南人家(남인가) 중 近者(근자)에 文科(문과)에 급제하거나 蔭官(음관)을 지낸 인물의 先系(선계) 5世와 외조 및 처부를 필사해둔 것이다. 끝에 다음과 같은 小識(소식)가 있다. “(전략) 삼가『儒紳近系(유신근계)』를 살펴보니 이는 우리 黨(당)의 文科(문과), 蔭官(음관) 五世譜(5세보)이다. 延城(연성):(연안-필자주)李氏(이씨)、豊山洪氏(풍산홍씨)、安東權氏(안동권씨)、平康蔡氏(평강채씨)、同福吳氏(동복오씨)、泗川睦氏(사천목씨)、押海丁氏(압해정씨)、晋陽姜氏(진양강씨)같은 경우는 東方(동방)의 世臣(세신)이요, 南人(남인)의 巨室(거실)이다. 지금 五世(5세)의 사이에 그 出入(출입)의 자취와 浮沈(부침)의 이치를 역력히 기억할 수 있으니 비록 두 세 대부는 밝은 조정의 羽儀(우의)가 되고, 관원 사이에 名族(명족)이 되었으나 예전의 이른바 宅揆(택규)(정승)、銓衡(전형)(이조판서)、方伯(방백)(관찰사)、連帥(연수)(병사) 등은 적막하여 들리지 않으니 어찌 이다지도 앞 시대에는 번성하고 뒷시대엔 쇠락했단 말인가. 이에 마음에 유감이 있으니 이는 당파의 폐해가 아니겠는가. 드디어 이를 써서 붕당에 대한 경계로 삼는다. 崇禎紀元後三辛丑(숭정기원후삼신축)(1781) 完山(완산) 崔鶴羽(최학우)는 쓴다.”5) 2. 한 姓氏의‘大同譜(대동보)’의 편찬은 시기가 올라가지만, 명문가에 대한 본격적인 ‘綜合譜(종합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부터이다.『諸家譜(제가보)』,『縉紳譜(진신보)』,『簪纓譜(잠영보)』,『萬家譜(만가보)』등이 대표적인데 이들 인물 종합보는 全的(전적)으로 양반 명문가만으로 구성되었다. 엄격한 신분 구별과 嫡庶(적서)에 대한 차별을 적용하는 것으로 이는 조선후기 ‘종합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 된다. 그 중에서도 ‘黨派(당파)’라는 특수한 역사 배경 속에서 등장한 ‘黨派譜(당파보)’는 동아시아 각국의 족보 가운데 조선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사례이다. 19세기에 이르러 당파보(명문가 ‘종합보’ 포함)가 대규모로 정리된 배경에는 哲宗(철종) 연간과 大院君(대원군) 執政期(집정기)의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집권층에서 상대편을 자기 당파로 흡수하여 정치적 힘을 확대하려는 柔化策(유화책)의 일환으로 이전 시기 ‘逆(역)’이나 ‘邪(사)’로 규정된 불명예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伸寃(신원)과 官爵(관작) 회복을 시행한 것이다. 한편 시대가 내려올수록 인구 증가에 비례하여 庶孼(서얼)들이 많아지고, 常賤民(상천민)의 양반 冒稱(모칭)과 족보에의 投託(투탁) 編入(편입)이 증가한 것은 또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당파보는 당파 내의 결속과 유대의 유지 및 증대에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名家(명가)의 내력과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얻고 婚姻(혼인)할 가문의 물색 및 인재 등용을 위한 참고자료로서의 기능도 겸하였다. 일반적으로 노론보는 ‘簪纓譜(잠영보)’6), 소론보는 ‘簪譜(잠보)’7), 남인보는 ‘南譜(남보)’8), 북인보는 ‘北譜(북보)’9)라는 명칭으로 존재하였다. ‘北譜’는 北人, 엄밀히 말하면 小北 가문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당파보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대의 집권 세력인 ‘大北派(대북파)’는 완전히 몰락하였지만, 대북파의 정치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小北派(소북파)’는 조선 말기까지도 28姓 69家를 중심으로 결속과 유대를 다지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소북파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南人(남인)과 北人(북인)은 東人(동인)에서 분파되었다. 建儲議(건저의) 사건을 일으킨 西人(서인) 鄭澈(정철)의 처벌 문제로 東人 내부에서 견해차가 발생하여 李山海(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禹性傳(우성전)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가 대립한 것이다. 여기에는 銓郎(전랑) 천거 문제를 둘러싼 이산해와 柳成龍(유성룡)의 알력, 李潑(이발)과 유성룡의 불화, 평양기생 문제를 계기로 발생한 이발과 우성전 사이의 私感(사감) 등도 아울러 작용하였다. 우성전과 유성룡을 추종하는 자들을 南人이라고 하고, 이발과 이산해를 추종하는 자들을 北人이라고 하였다. 分黨(분당) 초기에 북인 중에는 李珥(이이)·成渾(성혼)과 교유하거나 그 문하에 출입한 사람이 많았으나 주로 曺植(조식)의 문하생들이 그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東人에서 分派된 北人은 1599년(선조 32) 洪汝諄(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자 당시 정랑으로 있던 南以恭(남이공)이 이에 반대하면서 다시 大北과 小北으로 갈라졌다. 대북은 이산해와 홍여순을 중심으로 奇自獻(기자헌)·李爾瞻(이이첨)·鄭仁弘(정인홍)·許筠(허균)·柳夢寅(류몽인) 등이 참여하였고, 소북은 남이공과 金藎國(김신국)을 중심으로 柳永慶(류영경)·柳希奮(류희분)·李慶全(이경전)·李効元(이효원)·朴彛敍(박이서)·成俊耉(성준구) 등이 참여하였다. 宣祖(선조) 末(말)에 大北은 小北을 몰아내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여 정권을 굳혔다. 그러나 영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홍여순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骨北(골북)과 홍여순·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肉北(육북)으로 또다시 분파되었다. 여기에 永昌大君(영창대군)과 仁穆大妃(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는 中北(중북)도 있었다. 유몽인을 수령으로 한 중북에는 기자헌·鄭誾(정은)·鄭昌衍(정창연)·李慶全(이경전)·李溟(이명)·朴承宗(박승종) 등이 가담하였다. 한편, 대북에 밀려난 소북은 영수 격인 유영경이 영의정에 올라 한때 득세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하기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광해군의 등극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 소북은 남이공과 유영경 사이에 틈이 벌어져 다시 분당되었는데, 남이공을 중심으로 한 당을 淸小北(청소북) 또는 南黨(남당)이라고 하고,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당을 濁小北(탁소북) 또는 柳黨(류당)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선조 말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시기는 여러 갈래로 분당 대립된 대북 세력이 지배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대북의 전성기는 인조반정으로 인해 끝나고, 소북은 서인과 남인에 흡수되기도 하였다. 인조 때는 좌의정을 지낸 南以雄(남이웅)이 그 잔존 세력을 규합하였으나 잔여 세력도 효종 현종 때 대부분 남인에 흡수되었다. 소북은 28姓 69家를 중심으로 하면서, 특정 시기에 뛰어난 行誼(행의)와 文學(문학)을 보인 이들을‘7학사’, ‘8문장’,‘5군자’등으로 지칭하였다. 또 1657년(효종 8)에는 30여 명의 소북 인사들이 모여 ‘八約條(팔약조)’10)를 확정하는 등 특유의 결속력으로 소규모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소북파는 학자로서의 명성보다는 문학 성향이 특히 강하였다. ‘7학사’,‘8문장’, ‘5군자’의 명단을 소개한다. ① 七學士(칠학사): 소북 1세대이다. 1599년 淸議(청의)로써 대북에 저항하다 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7~8년간 삭탈관작을 당하였는데 대체로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기의 인사들이다. ‘7학사’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南以恭(남이공:1564~1640), 金藎國(김신국:1572~1657), 李必亨(이필형:1572~1617), 朴彛敍(박이서:1561~1621), 宋馹(송일:1557~1640), 崔東立(최동립:1557~1611), 朴慶業(박경업:1560~1626) ② 八文章(팔문장): 소북 2세대로서 대체로 17세기의 인사들이다. 문학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들인 만큼 문집들이 刊本(간본) 또는 寫本(사본)으로 대부분 현존하고 있다. ‘8문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沈广齊(심엄제:1597~1660), 姜栢年(강백년:1603~1681), 朴守玄(박수현:1605~1671), 鄭昌胄(정창주:1606~1668), 李休徵(이휴징:1607~ 1677), 任翰伯(임한백:1605~1664), 南宣羽(남선우:1609~1656), 申濡(신유:1610~1665) ③ 五君子(오군자): 소북 3세대에 해당하는 인물들로, 역시 문학 또는 行誼()로 이름을 떨쳤다.‘5군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宋瓆(송질:1676~1741), 尹彙貞(윤휘정:1676~1754), 嚴慶遂(엄경수:1672~1718), 李庭綽(이정작:1678~1758), 嚴慶遐(엄경하:1678~ 1739) 소북가들은 대부분 近畿(근기) 및 忠淸(충청) 지역에 세거하였다. 이른바 ‘三楊(삼양)·三城(삼성)·七州(칠주)’가 그것이다. 三楊(삼양)은 楊州(양주)·楊智(양지)·楊根(양근), 三城(삼성)은 水城(수성:水原<수원>)·蓮城(연성:安山<안산>)·寧城(영성:天安<천안>), 七州(칠주)는 廣州(광주)·伊州(이주:伊川<이천>)·坡州(파주)·忠州(충주)·淸州(청주)·公州(공주)·洪州(홍주)이다. 소북은 일부 노론과 친분 있는 가문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소론 또는 남인과 밀접했으며, 이들과의 連婚(연혼)도 많았다. 조선후기에는 다양한 人物(인물) 綜合譜(종합보)들이 등장하였다. 이 가운데 남인과 북인의 당파보는 이이화 편『조선당쟁관계자료집』(여강출판사, 1987)에 영인되어 그 자료적 중요성이 알려진 바 있다. 이이화씨는 노론보와 소론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단국대 연민문고 소장『北人譜(북인보)』(필사본 1책)는 현존하는『북보』중 가장 이른 시기인 176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청풍김씨 金復休(금부휴)의 舊藏本(구장본)으로 앞의 90장까지는 매 장에 13단의 줄을 그어 26姓 50家11)의 인물 계보를 기재하였고, 그 뒤에 자신의 가문인 청풍김씨를 추가하여 총 26姓 51家의 소북 주요 집안을 기재하였다. 科擧(과거) 및 官職(관직) 내력만을 기록하고, 장인 및 사위 관련 정보는 기록하지 않는 등 소략한 양상을 보인다. 전주이씨 선원파보다 광주이씨를 앞에 둔 점도 독특하다. 연민문고본『북인보』를 제외하면 현존하는『북보』들(현재까지 20종 가량이 발굴되었다12))은 대부분 185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으며, 연민문고본에서 확대, 개편된 것들이다. 2단계는 1850~60년대본『북보』로 서울역사박물관본(以下本<>들 보다 초기 형태이다), 밀양박씨 대호공파본, 밀양박씨 대호공파 소장 흥양유씨본, 의령남씨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수록 성씨와 가문이 확대되어 28姓에 근접한 양상을 보이지만 여전히 사위 등의 기재는 부실하다. 이즈음부터 소북가에서는 대대적인『북보』轉寫(전사) 작업이 시작되어 1870~90년대에 이르면 최종적으로 확립된 형태를 띤다. 계명대본(창녕성씨 구장본), 초계정씨본, 성균관대 2책본, 성균관대 3책본, 김영진 2책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계명대본 4책본『북보』는 경기도 양평에 세거한 창녕성씨가에서 소장했던 것으로, 19세기 후반에 완비된『북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기의 여타『북보』들에 비해 개별 인물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번에 影印(영인)하게 된 성균관대 3책본은 이전에『조선당쟁관계자료집』(이이화 편)에 영인된 바 있지만 성균관대 9책본『남보』와 동일 가문에서 세트로 만들어 소장했던 책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어 다시 영인하게 되었다. 이『북보』에는 첫 면에 ‘玉山世家(옥산세가)’, ‘張氏家藏(장씨가장)’이란 印(인)이 찍혀 있고,『남보』에는 첫 면에 ‘玉山後人萬卷樓信(옥산후인만권루신)’, 끝 면에‘長宜子孫(장의자손)’이란 印이 찍혀 있다. 이 두 종의 책은 경상도 인동(현 구미시)에 세거했던 인동장씨 집안의 책이고, 필자는 위암 장지연(1864~1921)이 1894년(이 해에 장지연은 進士가 되었다) 무렵에 필사해놓은 책으로 조심스레 추정하고 있다. 3. 이제 성균관대 3책본『북보』의 특징을 간략히 서술한다. 제1책에는 李氏(전주、광주、연안、함평、전의、한산、성주、용인), 柳氏(전주、문화、진주), 金氏(청풍、안산、경주) 등 3姓 14家. 제2책에는 金氏(광산、언양), 朴氏(밀양、고령、울산), 南氏(의령), 任氏(풍천), 嚴氏(영월), 尹氏(파평、남원、함안、칠원), 鄭氏(해주、하동、동래、초계), 閔氏(여흥) 등 8姓 17家. 제3책에는 洪氏(남양), 姜氏(진주), 沈氏(청송、풍산), 宋氏(여산、은진、진천), 趙氏(배천、양주), 崔氏(전주、삭녕、강화、경주、화순、강릉), 申氏(고령), 許氏(양천), 盧氏(풍천), 成氏(창녕), 黃氏(창원), 慶氏(청주), 權氏(안동), 具氏(능성), 蔡氏(평강), 吳氏(보성), 愼氏(거창), 裵氏(성산) 등 18姓 27家가 수록되었다. 도합 28姓 58家이다. 기재 사항은 大科(대과), 小科(소과), 武科(무과), 官職名(관직명), 蔭職(음직), 장인을 기본(科擧<과거>와 蔭<음>엔 色<색>이 있는 圈點<권점>을 침)으로 하고 있다. 號(꺾쇠 표시 병기)를 아울러 기재한 경우도 상당히 많으며, 간혹 字, 문학 또는 학행, 墓道(묘도) 문자, 문집 및 저술 유무, 사승 관계, 특기할 사항 등을 기재한 경우도 있다(예: 全州(전주) 李希得(이희득)의 경우“字德甫(자덕보), 芝峯撰碣(지봉찬갈), 有文集(유문집)”, 그 손자 李厚根(이후근)의 경우 “仲晦(중회), 有文名(유문명), 湖上八君子之一(호상팔군자지일)”등이 기재되어 있다. 또 이희득의 조카 이수광과 그 아들 이성구의 아래에는“見(견)『南譜』”13)라고 하여 후손의 타 당파까지 기록하고 있다. 廣州(광주) 李命益(이명익)의 경우 “畏齋門人(외재문인)”이라 적고 있다. 특기할 사항의 사례로는 양주 趙弘璧(조홍벽)의 “壬辰白衣扈從(임진백의호종), 光海時不參收議(광해시불참수의)”, 보성 吳行健(오행건)의 “世以三吳稱之(세이삼오칭지), 廢朝時不仕(폐조시불사), 只謝西宮(지사서궁)”, 진주 柳澗(유간)의 “水路朝天淹沒(수로조천엄몰)”, 밀양 朴履九(박리구) 朴履綏(박리수)의 ‘伏誅(복주)’ ‘伏法(복법)’이 기재된 경우14) 등을 들 수 있다). 庶(서)를 기재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전주 柳近(유근)의 아들 柳延之(유연지)에, 밀양 박평의 아들 朴齊家(박제가)에, 보성 吳運昌(오운창)에 ‘庶’가 적혀 있다. 창녕 成俊耉(성준구)의 아래에는 “庶子奉祀(서자봉사)”라고 적혀 있다). 4. 당파보는 黨人의 주요 가계를 일목요연하게 요약·정리하고 있으며, 특정 인물을 자기 당파로 끌어들이거나 빼버리는(逆賊<역적>의 경우) 등 한 인물의 당파가 바뀌게 된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小北派는 가문별로 남인 또는 소론과 친한 경우가 많으므로 주목을 요한다. 소북 인물들은 유수한 문학을 남겼지만 아직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였는데,15)『북보』는 그들 인물과 계보 파악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요컨대『북보』는 정치사, 당쟁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하거니와 조선후기 소북파 문학 연구에도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1) “我東姓氏, 本國土姓, 多三韓、三國王公之苗裔, 其餘或賜姓, 或自中原出來, 各有譜系, 不如中國姓氏之淆亂難考也. 譜牒之可徵者, 亦略列于下.『東國諸姓譜』二十卷, 丁時述撰,『姓苑叢錄』, 任慶昌著【『述先錄』中, 任慶昌、丁時述、鄭四川, 爲譜學大家】,『氏族譜』五十三卷, 朴思正著, 禮山縣人,『百家譜』十卷, 許涵著,『氏族源流』, 李景說著,『氏族源流』七卷, 趙從耘著,『閥閱通考』四卷, 我王考潤色修補, 不肖孫圭景, 亦有修補.『八八帖』, 碧珍李姓著,『萬姓叢譜』, 兪彦䥧著,『東喬錄』二十卷, 撰人闕,『搢紳世譜』, 有八世, 有十世成譜者,『文譜』、『武譜』、『蔭譜』、『司馬譜』等編.『明衛譜』, 高麗人所著, 在松京云.『海東姓氏錄』, 梁誠之著,『百家譜略』, 撰者闕, 此外姓氏之書, 未知有幾種否也.” <“아동성씨, 본국토성, 다삼한、삼국왕공지묘예, 기여혹사성, 혹자중원출래, 각유보계, 부여중국성씨지효란난고야. 보첩지가징자, 역략렬우하.『동국제성보』이십권, 정시술찬,『성원총록』, 임경창저【『술선록』중, 임경창、정시술、정사천, 위보학대가】,『씨족보』오십삼권, 박사정저, 예산현인,『백가보』십권, 허함저,『씨족원류』, 리경설저,『씨족원류』칠권, 조종운저,『벌열통고』사권, 아왕고윤색수보, 부초손규경, 역유수보.『팔팔첩』, 벽진리성저,『만성총보』, 유언䥧저,『동교록』이십권, 찬인궐,『진신세보』, 유팔세, 유십세성보자,『문보』、『무보』、『음보』、『사마보』등편.『명위보』, 고려인소저, 재송경운.『해동성씨록』, 량성지저,『백가보략』, 찬자궐, 차외성씨지서, 미지유기종부야.”> * 朴思正(박사정)은 본관은 무안, 호는 聾窩(농와)로 부친은 古心齋(고심재) 朴履文(박이문: 1675~1745, 문과, 正言<정언>), 외조부는 睦林馨(목림형), 장인은 李雲根(이운근: 李山海(이산해)의 고손)이다. 數(수)、禮(예)、譜學(보학)에 뛰어났다고 하며 저서로『喪禮酌通(상례작통)』이 있다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박이문은 문장가로 명성이 있던 인물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진,「18세기 嶺南(영남) 지역 한문산문 연구 序說(서설)(1)-미수 허목 師承(사승)과 근기 남인과 영남 남인의 소통을 중심으로」(『18세기 영남한문학의 전개』, 2011, 계명대학교출판부)를 참조. 2) 나주 丁時述(정시술:蔭<음>, 典翰<전한>, 典簿<전부>)의 誤寫(오사)이다. 顯宗(현종) 때 인물이다. ‘만성통보’는 ‘諸姓譜(제성보)’, ‘東國諸姓(동국제성)’ 등으로도 불렸다. 3) 정필동의 생몰년은 1653~1718. 4) 본관 전주. 1762년생. 1798년 생원. 선산에 세거한 명문가 출신이다. 남인가이지만 소북쪽과도 연혼 관계가 있다. 李鈺과도 성균관에서 교유했다. 5) “(전략) 謹按儒紳近系, 乃吾黨文蔭官五世譜也, 至若延城之李、豊山之洪、安東之權、平康之蔡、同福之吳、泗川之睦、押海之丁、晋陽之姜, 東方之世臣, 南人之巨室也. 今五世之間, 夷考其出入之跡、升沈之理, 歷歷可記, 雖有二三大夫羽儀明廷, 銅魚皀盖間, 出名族, 而向所謂宅揆銓衡方伯連帥, 寂廖無聞, 何其前盛而後衰也, 於此有所感於心者, 玆豈非黨倫之獘也歟. 遂書之以爲朋黨之戒云爾. 崇禎紀元後三辛丑(1781)獺祭魚節哉生魂, 完山崔鶴羽識.”<“근안유신근계, 내오당문음관오세보야, 지약연성지이、풍산지홍、안동지권、평강지채、동복지오、사천지목、압해지정、진양지강, 동방지세신, 남인지거실야. 금오세지간, 이고기출입지적、승침지리, 력력가기, 수유이삼대부우의명정, 동어급개간, 출명족, 이향소위택규전형방백련수, 적료무문, 하기전성이후쇠야, 어차유소감어심자, 자기비당륜지폐야여. 수서지이위붕당지계운이. 숭정기원후삼신축(1781)달제어절재생혼, 완산최학우식.”> 6) 단국대 연민문고 24책본(현존 21책), 고려대 육당문고 17책본, 성균관대 존경각 17책본, 규장각 14책본 등이 대표적이다. 성균관대 17책본은 善本(선본)으로 필체도 좋고 연대도 純祖(순조)연간까지 올라간다. 7) 규장각 7책본, 전주최씨 후손가의 6책본(현존 5책) 등이 대표적이다. 8) 장서각 4책본이 일반적이나, 성균관대 존경각과 규장각의 9책본이 最善本(최선본)이라 할 수 있다. 9) 계명대(창녕성씨가 구장) 4책본, 성균관대 존경각 3책본과 2책본, 단국대 연민문고(청풍김씨가 구장) 1책본 등이 대표적이다. 10) 八約條(팔약조)는 소북인의 생활 지침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立朝仕君同心(입조사군동심: 벼슬하면 같은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다) ② 老人潛居敎孫(노인잠거교손: 노인이 되면 물러나 자손을 가르친다) ③ 少年閉門讀書(어린사람은 문을 닫고 공부에 열중한다) ④ 爲宰不買田土(위재부매전토: 벼슬하고 있을 때는 땅을 사지 않는다) ⑤ 嫁娶不計榮枯(가취부계영고: 혼인은 상대 가문의 영화와 쇠락을 가리지 않는다) ⑥ 私居勿言公事(사거물언공사: 사사로운 곳에서 공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⑦ 居不移安國坊(거부이안국방: 권력자들이 주로 사는 안국동에는 살지 않는다) ⑧ 鄕不下忠淸道(향부하충청도: 낙향해도 충청 이남으로는 가지 않는다) 11) 전주이씨(璿源家<선원가>)는 여러 파가 있어서 家의 숫자는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 있다. 12) 이본 현황은 필자의 2011년 논문 참조요. 13) 고성 李增(이증), 용인 李鎰(이일), 밀양 朴震元(박진원)의 아래 등에도 “見『南譜』”라고 되어 있는데 이런 사례는 매우 많다. 북인에서 남인으로의 전향 또는 그 밀접성을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14) 양천 許晟(허성)-許槃(허반) 부자의 옆에도 “庚子(경자:1840)伏法(복법)”, “庚子絞(경자교)”가 기재되어 있다. 15) 소북 문학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다. 강세황, 최성대 정도가 개별적으로 학계에 알려졌었을 뿐 ‘소북’이란 당파에 속한 집안이란 것조차 잘 알려지지 못했다(최근 허필, 송질, 임천상 등이 조명됨). 근래에 들어 소북파 문인 연구를 위한 자료 번역으로 후추 김신국, 죽창 강주, 사천 심제, 초정 박수현 등이 간행되었고, 임상원·임천상의 필기 잡록『쇄편』이 번역 중에 있다. 소북 문인들은 詩會(시회) 및 집안 잔치뿐만 아니라 유명 글들의 선집 및 필사, 선배 문집의 교정 및 간행 작업에 집체성을 띈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면밀한 자료 정리와 의미 도출도 필요하다. 참고문헌 『北譜』, 성균관대 존경각본, 단국대 연민문고본, 계명대(창녕성씨가 구장)본 외. 이이화 편,『조선당쟁관계자료집』, 여강출판사, 1983. 이건창, 이민수 역,『당의통략』, 을유문화사, 1972. 강경훈,「重菴(중암) 姜彛天(강이천) 文學(문학) 硏究(연구)-18세기 近畿(근기) 南人(남인) 小北文壇(소북문단)의 展開(전개)와 관련하여」, 동국대 국문과 박사학위논문, 2001. 강주진,『이조당쟁사연구』, 서울대 출판부, 1971. 김영진,「18세기 嶺南(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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