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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以泰 생애와 麻疹篇 연구 = Yoo Itae life and Marjinpyeon research /
劉喆鎬 류철호
발행사항 서울 : 慶熙大學校, 2015
형태사항 220 p. ; 26 cm
주기사항
지도교수: 김남일, 유원준
학위논문(박사) -- 慶熙大學校 大學院, 韓醫歷史學科, 2015
참고문헌: p. 179-183
영어 요약 있음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519.12 듀이십진분류법-> 610.951
Ⅰ. 서 론
Ⅱ. 연구사 범위 및 방법
Ⅲ. 유이태 인물 연구
Ⅳ. 麻疹篇 연구
Ⅴ. 결론(結論)
...............................
기억하고 싶은 조선의 참 의원 유이태
ISBN
9791195713615(1195713614)
쪽수
528쪽
크기
149 * 226 * 27 mm /968g 판형알림
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기술/공학 > 의학 > 의료인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의료인
『조선의 참 의원 유이태』는 조선 숙종의 어의를 지냈고 숙종의 병환을 치료하여 안산군수직을 받은 조선의 명의 유이태 일대기를 담은 책이다. 1984년 부터 유이태(劉以泰)와 허구의 인물 유의태(柳義泰)를 연구해온 저자는 유이태가 사대부 가문의 후예로서 입신양명의 뜻을 접고 의학에 입문하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귀천, 친소, 민관, 빈부를 구분없이 마음으로 치료하여 왔던 심의(心醫)로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는 신의(神醫)라고 말한다.
저자는 유이태가 드라마와 소설로 인하여 유의태(柳義泰)라는 인물로 바뀌어졌다고 말한다. 따라서 산천군청이 건립한 동의보감촌내에는 허구의 인물 유의태 가묘, 묘비, 동상,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유이태 장군수약수터를 이름을 바꾸어 허구의 인물 유의태 약수터로 조성하였으며 도로 곳곳에 이정표를 설치돼 있다. 이와 같이 소설과 드라마에 등장한 허구의 인물은 산청군청에 의해 실존인물이 되었으며 이 책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은 것이다.
저자 : 유철호
목차
一. 조선의 명의 유이태의 삶의 궤적
I. 유이태는 누구인가?
1. 일대기
1) 유이태가 걸었던 길
2) 나라의 부름을 받다
3) 나라에서 관직을 제수하고 상을 내리다
4) 어떤 길로 한양에 다녀왔을까?
5) 의술활동하며 방문하였던 곳은 어디일까?
6) 유이태의 지인
2. 가계
1) 친가
2) 외가
3) 처가
II. 유이태의 삶의 실천 방법
1. 학문
1) 유학
2) 의학
3) 학맥도
4) 학문 전수
2. 5도 정신
1) 정도
2) 효도
3) 의도
4) 의도
5) 수도
III. 유이태가 남긴 흔적
1. 저서
2. 유품
3. 사우 문집
4. 유적지
5. 설화 및 민속노래
IV. 인술을 편친 심의 유이태
二.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진 柳義泰는 누구인가?
I. 柳義泰와 허준은 언제 문헌에 나타났을까?
1. 유의태가 문헌에 나타난 때는 언제일까?
2. 허준이 문헌에 나타난 때는 언제일까?
3. 설화 속의 유의태와 허준의 스승 柳義泰는 어떤 현대 문헌에 나타났을까?
II. 柳義泰는 『진주유씨족보』에 등재되어 있을까?
1. 1762년 간행된 『진주유씨족보』
2. 1804년, 1845년, 1918년, 1983년 간행된 『진주유씨족보』
3. 2005년에 간행된 『진주유씨족보』
III. 산청군청에서는 어떻게 유의태를 실존인물로 만들었을까?
1. 드라마 <집념>과 『소설 동의보감』으로 산청이 널리 알려졌다
2. 한의학을 관광 테마로 결정하였다
3. 산청군청의 한방단지 상징인물을 선정되다
4. 柳義泰가 산청에 실존하였다는 논리는 무엇인가?
5. 『선비의 고장 산청의 명소와 이야기』간행
6. 실존인물 柳義泰의 완성
IV. 진주류씨는 柳義泰를 어떻게 족보에 등재하였는가?
1. 진주류씨 류근모 문의
2. 진주류씨 족보전문가 류보형
V. 유철호가 밝힌 柳義泰의 진실은 무엇일까?
1. 노정우가 밝힌 柳義泰의 진실
2. 허준은 어떻게 내의원 의관이 되었을까?
3. 이은성은 柳義泰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나?
4. 최완규는 柳義泰를 어떻게 말하였을까?
5. 『선비의 고장 산청의 명소와 이야기』에 등장하는 柳義泰
6. 柳義泰는 진주유씨일까?
7. 산청군청이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柳義泰는 누구인가?
8. 柳義泰는 각종 문헌에 등재되어 있을까?
9. 유의태(류의태)는 유이태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10. 유이태와 柳義泰에 대한 산청군청에 지원
11. 언론에서 말하는 柳義泰
12. 역사적 인물 유이태와 허구의 인물 유의태
13. 유의태(류의태, 柳義泰)의 가묘, 묘비문, 동상, 기념비, 약수터 이름 변경 요구
VI. 柳義泰의 진실
맺으면서
부록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조선 명의(名醫) 유이태(劉爾泰) 인명
2009. 10. 31. 10:27
https://blog.naver.com/kwank99/30072696780
[출처] 조선 명의(名醫) 유이태(劉爾泰)|작성자 틀
유이태(劉爾泰.1652.효종 3∼1715.숙종 41)
조선 후기 명의(名醫). 호는 신연당(新淵堂)ㆍ원학산인(猿鶴山人). 자는 백원(伯源).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서마리 출생. 어린 시절 고향인 거창에서 외가가 있는 산음(지금의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으로 옮겨와 그곳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숙종(肅宗) 때 어의(御醫)를 지냈으며, 안산군수로 임명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조 때, 두진(痘疹: 천연두)ㆍ마진(痲疹: 홍역) 등이 한창 유행하여 이에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것을 보자 그는 마진에 대한 연구에 몰두, 가전(家傳)하여 오던 의학서 <마진경험방(痲疹經驗方)>을 참고하여 1786년(정조 10) 홍역 전문치료서인 <마진편(麻疹篇)> 1책을 써서 병의 치료에 앞장섰다. 이 책은 마진에 대한 전문의서로서 오랫동안 필사본으로 전해져왔으나, 1931년 경상남도 진주(晋州)에서 박주헌(朴周憲)에 의하여 출간되었다.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전념하였으며, 의술이 신기에 가깝다 하여 중국의 명의(名醫)인 편작에 비유되었다. 주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순산비방(順産秘方)> 등 그와 관련된 설화가 전승된다. 그의 묘소는 경남 산청군 생초면 갈전리에 있다.
조선 후기 명의(名醫)⋅어의(御醫).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원(伯源)이고, 호는 신연당(新淵堂)⋅인서(麟西)⋅원학산인(猿鶴山人) 등이다. 정유재란 때 함양의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의병장 유명개(劉名盖)의 현손이고, 나라로부터 복호를 받은 효자 유유도(劉有道)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유윤기(劉潤祺)이고, 어머니는 경상좌수사를 지낸 이의립(李義立)의 손녀 강양 이씨이다. 가문과 왕실 기록에는 劉以泰, 저서에는 劉爾泰로 기록되어 있다.
40여년 동안 향의(鄕醫)로 백성들을 치료하고 어의로도 활동하였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의(儒醫)로 우리나라 최초의 홍역치료서 <마진편(麻疹篇)>을 저술하였다.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류의태·柳義泰)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생애】
소년기(1652∼1670)에는 학문을 배우며 부모에게 극진한 효행을 실천하였다. 어릴 때부터 앓고 있던 자신의 병을 스스로 고친 후 의학에 입문하여 3년 만에 의술을 터득하여 의원이 되었다. 청년기(1671∼1690)에는 의술이 널리 알려져 영호남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술을 펼쳤고,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의창(義倉)을 주관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하였다.
장년기(1691~1709)인 1680년과 1692년에 대홍역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홍역치료서 <마진편>(1696)을 저술하였다. 그밖에도 경험방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1709), <실험단방(實驗單方)>(1709), 1940년대 초반 화재로 소실된 침구방과 부인방, 1975년 분실된 의서 2권 등을 저술하였다. 노년기(1710∼1715)에는 한양에서 의술활동을 하다가, 1710년과 1713년 의약에 동참하여 어의가 되었다. 어의로 숙종의 병을 고친 후 숭록대부 안산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향리인 산청으로 돌아왔다.
유이태는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경전과 역사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아 사회에 헌신하는 길을 걸었다. 바른 길을 걷는 정도(正道), 부모를 공경히 모시는 효도(孝道),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시도(施道), 병의 근원을 탐구해 증세에 따라 처방하고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도(醫道), 절제를 통해 건강을 관리하는 수도(壽道) 등을 실천했다.
“계절에 따라 음식을 섭생하여 몸을 튼튼하게 하며 소식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라. 병을 예방하되 발병 초기에 신속히 치료하고 완쾌한 이후에는 철저하게 건강을 관리하라. 마음을 다스리고 노여움을 경계하라. 약의 오남용을 경계하고 의원의 처방에 따라 약을 복용하며, 기존 처방에만 따르지 말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처방하라.”는 건강관리법을 백성들과 의원들에게 주창했다. 일생동안 백성들의 삶의 애환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에 중국의 화타, 편작과 함께 「강강술래」에 채록되어 있으며, 치험 사례들은 ‘유이태탕’, ‘순산비방’ 등과 같은 명의설화가 되었다.
【의학사상】
유이태의 의학사상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인생관은 ‘사친지의(事親知醫), 제중인심(濟衆仁心)’으로 요약되는데, 이는 어버이를 공경하기 위해 반드시 의학을 알아야 하며, 자손들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돌보아 질병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둘째, 정신관은 ‘무귀무천(無貴無賤), 무친무소(無親無踈)’로 요약되는데, 이는 남녀노소⋅귀천⋅친소⋅민관⋅빈부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백성들을 보살피며 사랑하는 위민(爲民)⋅애민(愛民) 정신을 펼치는 것이었다.
셋째, 수기관은 ‘존양천리(存養践履), 성실불구(誠實不苟)’로 요약되며, 이는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여 편안하게 하고 본심을 잃지 않고 의로운 일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었다.
넷째, 학문관은 ‘공리후세(功利後世), 보상일신(補償日新)’으로 집약되는데, 이는 후세에 공(功)과 혜택을 넘기고 후학들이 새로운 치법을 만들어 의학이 날마다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다섯째, 치병관은 ‘미병절선(未病節宣), 선조후치(先調後治)’로 집약되는데, 이는 건강할 때 절제하는 생활로 병을 예방하고, 발병하면 근원을 찾아서 신속히 치료하며, 완치 후에는 철저히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의약관은 ‘향정비약(鄕井備藥), 단방수록(單方隨錄)’으로 요약되며, 이는 자연환경에서 구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향약재를 이용한 치료법을 개발·채록하고, 치험 사례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전통적인 향약의학의 성격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평가】
유이태는 전염병 홍역이 창궐하자 퇴치에 공헌하였으며, 홍역치료서 <마진편>을 최초로 저술하여 조선의 홍역 치료의 문(門)을 열었다. 의학 발전과 예방으로 질병 없는 세상을 꿈꾸고 환자 치료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여 한국 유의의 전범(典範)을 제시하였고, 참된 의사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의술의 윤리도덕을 확립한 인물이다.
【저서】<마진편>(麻疹篇)> <실험단방(實驗單方)>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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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의(名醫) 유이태.
허준(許浚·1539~1615)만큼이나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이름이다. 조선시대 유명한 정치가 혹은 사상가도 아닌 일개 의원의 지위로 허준에 버금가는 유명세를 타고 있으니 이 모두가 <소설 동의보감> 덕분이고, 또 이를 대본으로 만들어 MBC에서 방영된 사극의 인기몰이 결과이다. 허준의 스승으로 처음 유이태를 언급한 논문은 어느 한의학자의 수십 년 전 글이다.
그는 산청을 답사한 결과 명의 유이태(혹은 유희태, 유의태)에 관한 전설이 널리 유포되어 있음을 알았고, 이 정도의 명의(名醫)라면 허준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여겼다. 추측은 허준의 고향과 성장지를 산청으로 설정한 가설로부터 출발한다. 허준의 할아버지 허곤(許琨)이 진주의 대성이었던 진주 유씨(晉州 柳氏) 가문의 부인을 얻은 사실과 경상도 우수사로 오랫동안 재직한 사실에 주목한 결과였다. 허준이 친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따라 산청에서 성장했으리라는 구상이었다.
여기에 야담 속의 유이태를 진주 유씨 가문의 한 사람으로 보아 허준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으로 덧붙인 것이다. 허준이 산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측되자, 산청에서 유명한 의사로부터 의학 수업을 받았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되었고, 예전부터 산청 일대에서 유명한 유이태 혹은 유의태라는 의사의 전설을 끌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설명은 훗날 소설 '동의보감'의 작자 이은성에게 전해져 소설의 기본적 뼈대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이태를 허준의 스승으로 굳게 믿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유이태는 누구인가? 전설상의 유이태를 만나보자. 일찍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전국의 야담류를 채록하는 방대한 작업을 수년에 걸쳐 진행하였다. 그 결과 경남 지방의 명의 유이태의 전설 여러 편을 수록하여 전할 수 있었다. 전설 속의 유이태는 의술이 뛰어나 중국의 황제를 고쳤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혹은 조선 왕조의 공주를 치료하기도 했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유이태가 숙종대 의약동참(醫藥同參: 내의원 의사가 아니지만 의술이 뛰어나 특별히 임금의 진료에 참여한 이들)으로 임금의 진찰에 참여했던 역사적 사실이 전설로 꾸며지는 과정에서 살이 붙은 결과이다.
또한 유이태는 산부인(産婦人)에 뛰어난 효과를 보였던 '유이태 탕' 혹은 침으로 유명하다. 유이태 탕은 거꾸로 출산하는 위험한 태아를 바로 낳을 수 있도록 하는 데 효험이 큰 약물이었고, 유이태의 침 역시 아이가 거꾸로 나오려 할 때 발바닥에 놓으면 역산(逆産)을 방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유이태의 홍역 치료에 관한 전설이다. 그가 두진(痘疹) 즉 천연두와 홍역을 치료하는데 매우 기이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는 내용인데, 역시 유이태의 홍역 치료서인 <마진편(麻疹篇)>에 대한 후인들의 신화 만들기 결과이다.
전설이 아닌 역사 속의 유이태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실제 그에 관한 역사적 자료가 전무하다시피 한 작금의 사정으로는 유이태의 실체를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거창유씨 세계(巨昌劉氏世系)'에 전하고 있는 유이태 관련 내용과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 그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다.
행장과 사적에 의하면 유이태는 1651년에 태어나 1715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경상도 거창 지역에서 태어나 문장과 의학을 겸비한 유의(儒醫)로 활동하였다. 그의 먼 선조는 의병장을 지낸 경력이 있으며, 외가로도 역시 병조판서와 경상좌수사를 지낸 인물들이 있다. 이로 인해 경남 산청과 의령, 그리고 거창 등지에서 향반(鄕班)의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이태를 추모하는 제문을 보면 '문장(文章)하는 나머지 시간에 부업(父業)을 계승했다'든지 '집안의 가업을 전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대로 의업을 이어간 집안임을 드러낸 표현으로 적어도 아버지 대부터는 의술에 종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산청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던 그는 1710년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갔다. 숙종이 머리가 아프고 열이 가시지 않으면서 머리 오른쪽의 종기가 부어 올라 연일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내의원 의원들의 처방이 신통치 않았다. 여러 가지 약물을 사용했으나 별 소용이 없자 전국의 유명한 의사들을 불러 모아 진찰을 의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때 경상도 산음(山陰:지금의 산청)에 살고 있던 유이태는 아산현감 신우정(愼禹定), 안동의 선비 박태초(朴泰初)와 함께 의술이 정밀하다는 이유로 서울로 불려가게 되었다. 얼마 후 숙종의 병세가 호전되자 유이태는 귀가하였다. 이후 1713년과 1715년에도 숙종의 진찰에 의약동참으로 참여한 바 있다.
당시 의약도제조였던 이이명은 유이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유이태가 호남과 영남에서 유명한 의사이기 때문에 의약동참에 참여시켰다. 그의 의술이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함부로 약을 쓰지 않으며 사람됨이 순후(淳厚)하여 부릴만 하다. 다만 지금 나이가 연로하고 담열(痰火)로 고생하는지라 밤새도록 신음하므로 특별히 그를 귀향시켰다."
는 것이다. 유이태는 숙종 치료의 공로를 인정받아 다른 의원들과 함께 새끼 말 한 마리를 하사받았다. 이후 고향에 돌아온 유이태는 1715년 그의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서(醫書) 지었나】
▶조선 첫 홍역 관련 <마진편> 다양한 증세별 치료법 담아
유이태는 집안의 가업을 이어 의학을 공부하였고, 경상도 지역에서 산부인과와 역병 치료에 두각을 나타내던 향의(鄕醫)였다. 특히 그가 지은 '마진편'이라는 홍역 전문 치료서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마과회통(麻科會通)'에 앞선 것으로, 조선의학사상 최초의 전문 홍역 치료서라 불릴 만하다.
유이태의 '마진편'은 홍역에 대한 개론에서부터 예방법, 그리고 여러 가지 증세를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홍역의 치료법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처방전을 사전식으로 구성한 것은, 대개 18세기 후반부터 나타나던 의서들의 편집 방식으로 참고에 용이하도록 한 의도였다.
유이태는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이 갑자기 약을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가능하면 단방(單方) 위주의 처방을 활용하였다. 특히 마진의 원인이 태독(胎毒)에 있지 않고 일반적인 열독(熱毒)에 있음을 주목하고, 당시 감기 치료에 널리 쓰이던 승마갈근탕(升摩葛根湯)처럼 저렴하고 실용적인 약물을 주로 처방하였다.
처방 가운데는 유이태가 산청의 한 절에서 효험을 보았던 내용도 있다. 1692년 겨울 산청의 한 절에서 중들이 마진을 앓게 되었는데 이들에게 계속해서 샘물을 먹게 하여 병을 치료한 것이다. 마진이 양(陽)에 속하여 열이 많으므로 물로 그 열을 식히는 방법이었다. 이밖에 유이태는 열독의 증세와 회충과의 연관성에 주목하였다. 후일 다산 정약용도 이를 흥미롭게 관찰한 바 있다.
유이태는 이외에 ‘실험단방(實驗單方)’ 혹은 ‘인서문견방(麟西聞見方)'이라 불리는 ’경험방‘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책은 모두 16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머리부터 귀, 눈, 코, 입 등의 순서로 해당 부위의 질병과 치료법을 수록하였다. 특히 경험방 가운데 향촌에서 사용되었을 단방들을 수집·정리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경상도 일대에서 활용된 다양한 처방과 향토 약물에 대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젊은이가 머리가 모두 벗겨진 데에는 생감을 쪼개서 이삼일 계속 문지르면 머리털이 환생한다. 많이 경험한 내용이다.'(실험단방 大頭瘟·小頭瘟 조)
요컨대, 산청의 명의 유이태는 허준의 스승으로서가 아니라, <마진편>이라는 홍역전문치료서의 저자로 그리고 '실험단방'(혹은 '인서문견방')이라는 경험방 의서를 간행한 조선 숙종대의 명의로 기억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 [영남일보](2004. 12. 21) -
[출처] 조선 명의(名醫) 유이태(劉爾泰)|작성자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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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以泰
(? ~ 1715)
목차
1. 소개
2. 설화
3. 기타
4. 참고문헌
1. 소개[편집]
조선의 인물. 자는 백원(伯源). 호는 신연당(新淵堂), 원학산인, 인서.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 사람으로 1710년과 1713년에 두번의 부름을 받았다. 숙종이 병이 나 전국의 명의를 불렀다. 어의가 되어 도수환 처방으로 임금 숙종을 치료하였다. 그 공로로 말 한마리와 비단을 받았다. 그리고 종 1품 숭록대부 안산군수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았다.
유이태(劉以泰)는 일생동안 바른 길을 걷는 정도(正道), 부모를 공경히 모시는 효도(孝道),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시도 (施道), 병의 근원을 탐구하여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도(醫道), 사람들이 장수(長壽)하는 수도(壽道) 등 5도(道)를 실천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해 모친상을 당할 때 그 여막을 떠나지 않아 향리 사람들이 그를 칭찬했으며, 할아버지,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리자 기도하고 할아버지, 아버지의 병환이 완쾌되자 하늘의 도움이라 여겨 때마침 흉년이 들어 여러 일가, 이웃 등이 기아에 허덕이자 부유한 친구들에게 곡식 100여석을 얻어 이들을 구했다. 인근에서 그를 칭찬하고 효행과 선행을 알리는 행장이 전해지고 있다.
사우들과 후세 사람들은 유이태의 의술을 중국의 명의 화타와 편작에 비유하였다.
1696년 조선인 최초로 홍역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하여 홍역치료의 태두가 되었고, 그의 치법은 정약용의 <마과회통>에 영향을 끼쳤으며, 산청을 홍역치료의 발상지로 만들었다. 소식(小食)을 권유했고, 건강할 때 계절에 따라 섭생을 잘해야하며, 병든 초기에 신속히 질병을 치료해야 하고, 건강이 회복된 이후에 더욱더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야한다는 건강관리 요령을 남겼다.
그는 의학의 발전과 질병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의원 동시에 환자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여 진정으로 의원을 따르는 심의(心醬)이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실린다는 신의(神醫)라고 불렸다.
2. 설화[편집]
유이태탕과 순산비방의 설화 그리고 조선의 명의 중에서 가장 많은 설화를 남겼고, 강강술래에 채록되어 있는 조선의 유일한 명의이다.
어려서 글공부를 할 때 밤마다 미인이 나타나 유혹했지만 마음 굳게 공부했다. 그 미인이 입맞춤을 해달라고 요구하자 유이태는 이를 들어줘 그 미인의 입에서 자신의 입으로 구슬이 들어왔다가 그 미인의 입으로 구슬이 빨려들어갔다.
이 일 이후로는 유이태는 그 미인을 그리워하다가 점차 안색이 창백하고 몸이 야위어졌는데, 서당 훈장이 자초지종을 묻자 유이태를 이를 이야기하고 서당 훈장이 구슬이 입에 들어올 때 삼키라고 했다.
유이태가 그 미인을 만나 입맞춤을 하게 되자 구슬을 삼켰는데, 그 미인은 한 마리의 흰 여우로 변해 달아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이태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고 더욱 총명해져 한 번 듣거나 본 것은 잊지 않게 되었으며, 의술을 열심히 공부해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되어 국왕의 병환에 부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구슬이 사라진 후에는 평범한 재주만 가지게 되고 기억력이 줄어 건망증까지 걸릴 정도였으며, 며느리가 몸살병에 걸릴 때 콩나물을 다려 먹이려고 했다가 콩나물을 잊어먹어 비녀나물이라고 하다가 며느리를 놓쳤다고 한다.
유이태가 남긴 유적지는 산청, 거창, 함양에 산재해 있다. 산청 생초에는 인술을 펼쳤던 혜민국, 서실, 묘소, 유이태낚시바위, 매봉재. 1713년 임금이 제공한 말을 타고 출발한 관동이 있다.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장군수약수터[1]가 있고 오부면에 마음병치료약수터(찬샘이)가 있다. 거창에는 이태사랑바위, 침대롱바위,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생가, 1714년 참봉 정중원과 슬잔을 나누었던 동계고택, 선영 황산, 조부를 문안하기 위하여 넘어 다닌 다름재, 서당이 있다.
•저서 : 마진편, 인서문견록, 실험단방, 1975년 잃어버린 의서 2권, 1940년대 초반 화재로 소실된 부인방과 침구방
3. 기타[편집]
허준 관련 드라마에서 허준의 스승이라는 유의태의 모델 인물이다. 1965년 경희대 한방병원장 노정우가 전해들은 산청의 명의 유이태 이름을 진주 유(柳), 의로울 의(義), 클 태(泰)로 만들어 인물한국사에 발표하였다. 이은성이 이글을 읽고 드라마에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했다. 물론 생존연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실제 유이태는 허준보다 후대의 사람이다.
드라마 속 유의태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허준이는 보아라.
내 죽음을 누구보다 서러워 할 사람이 너임을 알고 이 글을 네게 남긴다. 나는 내게 닥쳐오는 죽음을 보았고, 기꺼이 그 죽음을 맞이하려 했다. 그것은 태어나던 순간 결정되는 모든 생명의 예정된 길이니, 서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육십평생을 살다가는 나같은 자에게, 더 이상 무슨 여한이 있을까만은, 소리없이 닥쳐오는 죽음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강보에 쌓인 어린아이로부터, 이 세상이 바라는 유용한 사람들. 평생 타인을 위해 덕을 쌓은 귀한 인물에서, 호강 한번 못해보고 고생만 하다 죽은 측은한 인생까지. 이들 모든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만병의 정체를 밝혀, 그들로 하여금 천수가 다하는 날까지 무병하게 지켜줄 방법은 없는가.
이는 의원된 자의 본분이요, 열번 고쳐 태어나도 다시 의원이 되고자 하는 이에겐 너무도 간절한 소망일 것이다. 허나, 나 또한 불치의 병을 지니게 되었으니, 병과 죽음의 정체를 캐낼 여력이 이미 없다. 이에 내 생전의 소망을 너에게 의탁하여, 병든 몸이나마 내 몸을 너에게 준다. 명심하거라. 이 몸이 썩기 전에 지금 곧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거라. 그리하여 사람의 오장과 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확인하고, 몸속에 퍼진 삼백예순 마디의 뼈가 얽히는 이치와 열두 경락과 요소를 살펴, 그로써 네 의술의 정진의 계기로 삼기 바란다.
"스승님이 영원히 사시는 길이다. 스승님이 영원히 사시는 길이다.
스승님이 영원히 사시는 길이다. 스승님이 영원히 사시는 길이다"
세상에서 의원을 높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간에, 의원의 소임은 생명을 다루는 것이니, 그 어느 생업보다도 고귀한 일이다. 허나, 아무리 귀하다 한들, 마지막 한가지를 깨우치지 못하면, 진정한 의원이라 할 수 없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병들어 앓는 이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긍휼의 마음. 진심으로 병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을 때 비로소 심의가 되는 것이야. 세상이 진심으로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심의일 뿐이다.
4. 참고문헌[편집]
•<기억하고 싶은 조선의 참 의원 유이태>
•<조선의 명의 유이태 연구>
•<허준의 스승 柳義泰는 허구다.>
[1] 산청군청에서 柳義泰약수터로 이름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