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죄인입니다(부분)(문익환)
오늘도 우리는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니
따뜻한 밥을 먹었습니다.
그 쌀 한 톨 한 톨에는
이 땅의 가난한 농부들의 피땀이 배어 있는데
허리 꼬부라진 할아버지들의 한숨이 서려 있는데
갈퀴가 된 손으로 땅을 후비는 아낙들의 한이 배어 있는데
피어 보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릴 조무래기들의
가슴 메어지는 애타는 염원이 하늘에 사무치는데
언제나 남의 밥그릇이 내 밥그릇보다 커 보여서
상을 찡그리는
우리는 어이없는 죄인입니다
빚진 죄인입니다
이 땅의 억울한 저 농민들은
그 끝도 없는 고생을 어디 가서 보상을 받을 겁니까
그들에게 섬으로 진 빚
누가 우리 대신 갚을 겁니까
어촌에 가면 독수공방의 외로움 같은 건
차라리 사치인 청상과부들이 많다더군요
찢어지는 가난 속에 처자를 남겨 두고
저희의 무덤 출렁이는 파도를 헤치고 나가
죽어 돌아오지 않는 어부들에게 진 빚은
얼마나 크다고 하면 될까요
그 과부들의 행복을 차압하고 받아 온
조기로 갈치로 대구로 삼치로 오징어로 입맛을 돋우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빚진 죄인이 되는군요
이 땅의 헐벗은 산을 푸르게 옷 입히는 데
제일 큰 공을 세운 것은 아무래도 연탄이지요
그러나 그게 어디 그냥 연탄인가요
그건 광부들의 붉은 목숨입니다
쿵 하고 한번 무너지기만 하면
천 길 땅속에 묻힐 줄 알면서
아침마다 마지막 작별을 하고 나서는
광부들의 살덩어리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목숨으로 그들의 살점으로
방을 덥히고 밥을 짓고 조기를 구워 먹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져야 할 빚을
그들의 어깨에 지우고 있군요
그들은 우리의 빚을 지고 비틀거리며
저 깊은 갱을 내려가고 올라오는군요
40도를 오르내리는 공장에서
무좀에게 발바닥을 갉아먹게 내맡긴 채
기관지염 폐병 관절염 신경통 등 온갖
직업병에 시달리면서 손이 터지게 일하는
입을 가지고도 말 못 하는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섬으로 진 우리의 빚은 누가 갚을 건가요
꼭 13년 전이었습니다
아침에 나올 때면 어머니에게서 버스 값 30원을 받아 가지고 나오지만
그 돈으로 풀빵 서른 개를 사서
점심도 못 먹고 꾸벅꾸벅 졸며 일하는 직공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밤마다 20리가 넘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는
젊은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 전태일입니다
마침내 그는 더 줄 것이 없어
제 야윈 몸뚱어리를 힘없는 직공들에게
치솟는 불길로 주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절망을 불살라 애처로운 희망으로 치솟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서 죄인이 될밖에 없습니다
그의 사랑의 불길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인이 될밖에 없습니다
누더기를 걸치고 잿더미에 엎드려
열흘 보름 서른 날을 울어도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1970년 11월 13일. 만 22세의 청년은 서울 평화시장에서 노동자들의 고통을 짊어지고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어두운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당시 평균연령 15세의 시다 여공들이 100원 정도의 돈을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하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그는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쳤지요. 윤동주의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는 전태일의 죽음 이후 자신을 ‘늦봄’이라 부르며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에 뛰어들게 되는데요, 이 시는 1983년에 그가 쓴 기독교장로회 30주년 기념시의 일부입니다.
올해 2020년 11월 13일은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지 5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를 잘 모르지요. 우선 그는 기독 청년이었어요. 그의 묘비에는 “기독청년 전태일의 묘”라고 쓰여 있어요. 직장에서 해고되어 삼각산 기도원 공사장 인부로 일할 때, 그는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지요. 또한 그는 대구 사람이었어요. 1948년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고 15세때 대구 명덕국민학교 안에 가교사를 두고 있던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녔지요. 1년도 채 안 되는 이 학창시절을 그는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어요.
지금 대구에서는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전태일이 세들어 살던 집을 매입하여 기념관을 건립하려고 하고 있어요. 50인의 작가가 참여하는 기부 전시회 ‘아름다운 사람들’과 후원 콘서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진행되고 있고요, 12일에는 그가 살던 집에 문패를 다는 ‘전태일 문패 달기’ 행사, 13일에는 경북대학교에서 50주기 기념 학술 심포지엄 ‘지금 여기 전태일’ 등이 예정되어 전태일의 뜻을 기리려고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예수를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명명했는데요, 50년 전의 ‘작은 예수’ 바보 전태일을 대구의 기독 청년들이 기억하고 함께 추모했으면 좋겠습니다.(김형태)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청옥시절 동창들에게 보내는 전태일의 유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