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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 Karl ax | ||
본명 |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 |
출생 | 1818년 5월 5일 | |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 트리어 (現 독일 라인란트팔츠 주 트리어) | ||
사망 | 1883년 3월 14일 (향년 64세)[1][2] | |
영국 런던 | ||
국적 | 프로이센 왕국 → 무국적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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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이름 표기
2.2. 생애
2.2.1. 생애 초반
2.2.2. 혁명운동에 뛰어들다
2.2.2.1. 프로이센에서의 혁명운동
2.2.2.2. 망명과 사상의 성장
2.2.3. 영국에서의 생활과 저술 활동
2.2.3.1. 신문 기고2.2.3.2. 정치경제학 관련 서적2.2.3.3. 자본론
2.2.4. 혁명운동과 인터내셔널
2.2.4.1. 제1인터내셔널의 성립2.2.4.2. 노선 갈등과 이론 투쟁2.2.4.3.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2.2.5. 죽음
2.3. 일화
2.4. 사상
2.4.1. 변증법적 유물론2.4.2. 마르크스주의2.4.3. 마르크스 경제학 (정치경제학)2.4.4. 공산주의 (과학적 사회주의)2.4.5. 사적 유물론2.4.6. 종교관
2.4.7. 예술관
2.6. 세계사적 영향
2.7. 사회과학에서의 위치
2.7.1. 인문학2.7.2. 사회학2.7.3. 정치학2.7.4. 경제학
3. 가계
4. 평가
5. 비판과 그에 대한 반박
5.1.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의문과 '과학성' 담론5.2. 오용, 그리고 비판적 계승과 발전5.3. 이론의 추상성, 폭력성 비판과 반박5.4. 젊은 시절의 백인 인종주의자의 면모
5.4.1. 인종주의자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5.5. 인성・위선자 논란
5.5.1. 위선자 논란에 대한 변론
6. 어록
7. 대표 저작
8. 대중매체에서
9. 여담
프로이센[6] 출신의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언론인
사회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사회복지학, 미술사학 등 수많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 논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이기도 하다. 2005년 영국의 방송사 BBC가 대중들에게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꼽혔다. 사회주의의 창시자이자 공산주의를 정립한 자이다.[7][8] 또 현대 독일 정치와 경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9] 독일 내에서도 가장 위대한 독일인 중 한명으로 언급되어 위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주로 독일 사회민주당[10] 또는 좌파당 지지자들, 그리고 옛 구동독 지역의 좌파 사이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존경심이 깊다. 때문에 동독인들이 정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할 때마다 켐니츠에 있는 마르크스 동상에 모여서 집회를 연다.[11] 옛 사회주의권이었던 동독지역의 좌파가 카를 마르크스를 앞세워 국가의 재정과 복지를 확대하려는 강경한 시위를 많이 하기 때문에 독일내 우파와의 충돌이 잦다.
근대 사회과학의 분과학문들을 새롭게 창시하였고[12]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 등을 저술하였으며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말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류 전체의 사상과 철학, 사회, 문화, 외교, 정치 등의 방향성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매우 중요한 사상가로 지목된다.
간혹 '원조 빨갱이' 정도로 취급받고 폄하되기도 하지만,[13] 인문과학을 공부한다면 절대 폄하하지 못할 위치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마르크스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었던 철학자 중의 한 명으로 손꼽는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순수철학 및 역사학 그리고 스스로 전문적이라 했던 사회과학에 있어서 그의 이론 자체만으로의 중요성도 있지만은,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논란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정치계와 경제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만으로도 엄청난 발자취를 남겼다고 봐야 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Karl Heinrich Marx의 이름은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가 맞다. 하지만 예전에 '칼 맑스'라는 이름으로 불려서, 요즘도 이런 표기법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표기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족이 출판한 마오쩌둥 어록에도 이 표기가 쓰이고 있다. 문서 참조.
'맑스' 표기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원음과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Marx'는 모음이 하나 밖에 없는 1음절짜리 이름인데 '마르크스'로 표기하면 4음절이 돼버리니 언뜻 들으면 일리 있는 말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발음체계도 표기도 전혀 다른 외국어를 오직 마르크스 경우에 한해 억지로 한글에 때려박은 무리수일 뿐이다. 애당초 외래어 표기법에는 다른 언어를 완벽히 재현할 순 없다는 전제가 있으며 한글과 알파벳은 음절 또는 형태소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에 일대일 대응하지 않는다. dry에서 ㄷ과 ㄹ을 겹치거나 한글과 영어발음의 음절 수를 일치시키지 않듯이 Marx가 1음절 발음이라고 외래어표기를 줄일 필요도 없고 애초 맑스라고 표기해봤자 음절의 수 통일은 안된다. 게다가 반세기 전에 맑스라 쓰였다고 표기법이 정립된 현재까지 맑스라 쓰일 이유는 없다. 세종대왕 시대 훈민정음을 현대에 쓰면서 맞는 말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발음이 이유라면 외래어 표기법 자체를 무시하겠다는 소리와 같다. film을 맑스처럼 바꾼다면 어떻게 표기해야 할까. 핆 심지어 언어에 따라선 한글표기와 달리 모음이 없는 단어도 있다.[14]
또 '마르크스'는 받침 발음을 할 수 없는 일본에서 '마', '르', '크', '스'(マルクス)의 네 음절로 나누어 표기한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도 있다. '맑스'조차 1음절을 2음절로 늘린 것이지만 일본어의 한계로 인해 1음절을 4음절로 뻥튀기한 것보다야 낫다는 말.[15] 굳이 옛한글까지 동원해 억지로 1음절로 만들려면 '마ᇌ'으로 표기할 수 있다.
'Marx'라는 단음철(單音綴)의 이름을 우리는 원음 비슷하게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맑스'라고 원고에 적으면 출판사에서는 에누리 없이 거의 일본식 표기처럼 '마르크스'라는 4음절의 표기로 바로(?)잡아 놓는 데에 나는 매번 당황하고 있다.
최정호 교수의 동아일보 기고.#
'마르크스' 표기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우선 '맑스는 옳은 한글 표기가 아니라는 것.'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받침에 'ㄱ, ㄴ, ㄹ, ㅁ, ㅂ, ㅅ, ㅇ' 만을 사용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어의 한 음절 끝에서 날 수 있는 실제 발음이 [ㄱ, ㄴ, ㄷ, ㄹ, ㅁ, ㅂ, ㅇ] 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6] 비록 표기상으로는 'ㄳ, ㄶ, ㄺ…' 등의 온갖 겹받침이 다 존재하지만, 외래어는 발음에 기반하여 표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에는 실제로 발음될 수 있는 위 일곱 받침만을 허용하고 있다. 비슷한 이유로 '맑시즘[막씨즘]' 역시 '마르크스주의' 내지 '마르크시즘'이 맞다. 굳이 한글로 '독일어 원음과 비슷한 발음'으로 옮긴다 한들 [kaːɐ̯l ˈmaːɐ̯ks](카알 마악스) 정도가 된다.
또한 표준발음법을 살펴볼 때, '맑스'라고 표기할 경우의 올바른 발음은 [막쓰]이다. ㄺ 받침은 맨 끝에 오거나 자음 앞에 올 경우 ㄹ 이 탈락되고 ㄱ 만 발음되기 때문. 그러므로 '맑스'라는 표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이유 중 하나인 '부드러운 ㄹ 발음'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ㄺ' 에 들어 있는 'ㄹ' 이라는 표기에 이끌린 착각일 뿐이다.[17] '닭', '맑다', '밝다'의 올바른 발음이 [닥], [막따], [박따]인 것과 같은 이치. 같은 맥락으로 '뷁'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어원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뷀ㄱ] 비슷하게 발음하는 경우가 있지만 표준발음법대로 발음하자면 [붹]이 맞는다.
'맑스'는 운동권 일각에서 '맑'을 이용해서 '맑음', '맑다'는 느낌을 주려는 뜻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표기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맑스 이외에도 외래어 표기법 제정 및 개정되기 전엔 마르크스 외에도 겹받침으로 표기된 외래어가 많았다. 실제로 이러한 유사성을 활동에 이용하기도 하지만, '맑음'과 비슷해보이려고 일부러 '맑스'라고 표기했던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된 마오쩌둥 어록에도 나와있고, 무용가 최승희의 싸인 사진을 보면 최소 60년 전부터 쓰였던 걸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맑스라는 번역어의 사용이 이겨저기서 자주 보이는 건,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당시부터 이어져온 전통적 번역어에 의한 경로의존성 때문이라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각 정파마다 번역어가 달랐고, 그게 일종의 전통으로 굳어진 흔적라 볼 수 있겠다. 이미 익숙해진데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보다는 "막스(맑스)"라고 쓰고 읽는 게 짧고 경제적이다 보니 대학에서도 교수든 학부생이든 '맑스'라는 표기법을 습관적으로 쓰는 경우가 잦다. 기원과 관계 없이 현재까지 맑스라는 말을 쓰는 것에 대해 이미지세탁 때문이 아니냐는 둥의 이야기도 보이지만,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자신이 배운 대로 말하고 쓰는 게 익숙해진 사람들이 대다수고. 무엇보다도 맑스라는 표기 자체가 낡아보이기 때문에 이미지세탁(...) 때문에 맑스라고 쓴다는 주장은 음모론에 가깝다. 고작해봐야 쌍팔년도식 언어유희 이외엔 딱히 고집할 필요도 없는 '맑스'란 번역어를 이미지메이킹에 쓴다는 주장은 어불성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활동한다면, 그는 유명한 학자나 위대한 현자, 또는 탁월한 문학가일 수는 있으나 결코 완전한 인간,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일 수는 없다. (중략) 온 힘을 다해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면, 그 어떤 시련도 우리를 굴복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중략) 우리는 초라하고 제한된, 이기적인 기쁨을 향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수백만 명의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나지움 졸업 논문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 (1835)
"자네는 가장 위대한, 아마도 현존하는 유일한 진짜 철학자를 만나게 될 테니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네. (중략) 나의 숭배 대상인 독토르 마르크스는 중세 종교와 정치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게 될 아직 대단히 젊은 사람(기껏해야 24살 정도)이라네. 그는 심오한 철학적 위엄과 날카로운 재기를 겸비하고 있다네. 루소와 볼테르, 올바흐, 레싱, 하이네, 헤겔이 이 한 사람에게 통합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게나.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 있다고 말했네. 자네도 독토르 마르크스를 만나게 되면 그렇게 느낄 걸세."
청년 헤겔파 모제스 헤스(Moses Hes)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1841) 中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의 트리어[18] 브뤼교로 644번지 이층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유대인 집안 출신[19]으로 당시 프로이센 내 유대인 차별 경향 때문에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전에 루터교회로 개종한 이력이 있는 변호사였으며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자유주의적 사고를 많이 물려받았고, 특히 아버지가 17~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루소, 볼테르)에 관심이 있어서 그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또한 유대인 집안이었으나 마르크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았으며, 루터교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그는 모계를 통해서 필립스와 연결된다.
마르크스는 1830년 트리에에 위치한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며 라틴어, 희랍어, 작문, 수학 등에서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 또한 자유주의 성향의 스승들을 만나며 봉건주의와 전제정에 대한 반감을 키워갔다. 또한 사회개혁의 의지도 있어서 1835년 졸업 논문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을 써서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김나지움 졸업 이후 마르크스는 법학 공부를 바라는 아버지에 뜻에 따라 트리어에서 멀지 않은 본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법학에 열심히 몰두했지만 곧 종교, 철학, 문학, 거기에 술에까지 관심을 보이는 탓에[20] 아버지는 그를 베를린 대학교[21] 법학과로 전학시켰다.
베를린에서 마르크스는 법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 공부에도 계속 열을 올렸다. 특히 베를린 대학교는 헤겔이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했던 곳이라 헤겔주의가 성행했다. 비록 마르크스가 다니던 시절은 헤겔이 사망한 후였으나 헤겔의 제자들이 아직 베를린대에 남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헤겔의 제자들은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들과 주로 어울리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38년 20살이 된 해 학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르크스는 법학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이제 그는 철학에 완전히 몰두했으며 1839년부터 철학사 연구를 시작해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비록 급진 헤겔 철학을 공부했지만 정작 연구 대상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였다. 그렇게 1841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Über die Differenz der domokritischen und epikureishen Naturphilosophie)>[22][23]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베를린대에서는 박사 논문을 내 봤자 학위를 안 줄 것이라 생각하여 당시 학위 논문 심사가 빠르고 프로이센 정부의 입김이 덜 닿는 예나 대학교[24]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해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2.2.2. 혁명운동에 뛰어들다[편집]2.2.2.1. 프로이센에서의 혁명운동[편집]
검열의 근본적인 치료법은 검열의 폐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제도는 저열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1842)의 결론
베를린 대학 졸업 뒤 마르크스는 박사 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강연을 하며 살려고 했었지만 이는 곧 좌절됐다. 당시 대학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으로 헤겔 좌파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베를린대는 수도에 있어 탄압의 영향이 강력했다. 그러다보니 베를린대에 남아있던 마르크스의 스승인 헤겔의 제자출신 학장 브루노 바우어 교수가 해임된다. 이때문에 마르크스는 교수가 되려했던 꿈을 접어야 했다. 사실 마르크스는 결코 얌전한 학생이 아니었고 '청년헤겔주의자당 사건'에 연루되는 등, 당대 자유주의 운동에 깊이 공감하여 매우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벌인, 말하자면 당대의 '학생 운동권'에 속했으니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강사의 꿈이 좌절되자 그는 점차 정치사회적 활동에 발을 들였다. 그 시작이 프로이센의 검열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1842)였다. 참고로 이 기사는 프로이센 검열당국의 탄압으로 1년 동안 출판되지 못하다가 1843년에야 스위스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1842년부터 마르크스는 자유주의 성향의 언론인 라인신문[25]의 기고가로 일했다. 그는 독일의 현 정치에 대한 기사들을 썼으며 이는 큰 반향을 낳았다. 곧 그는 신문 편집장[26]으로 일하게 되었다.[27] 편집장이 되면서 라인신문은 기고가의 범위를 늘렸으며, 라인 지역을 넘어서 프로이센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때의 프로이센은 봉건주의적 형태가 많이 남아있는 막 산업사회로 넘어가던 때였기에 봉건주의와 자유주의와의 충돌이 두드러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신문은 마르크스의 편집 아래 혁명적, 민주주의적 색채를 분명히 했으며 사회의 현실과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 마르크스는 신문에서 검열과 정부당국의 탄압을 규탄했으며, 프로이센 내의 봉건체제를 타파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들과 민중의 권익을 지지하는 활동도 펼쳤다. 예를 들어 여태까지 농노들에게 전통적으로[28] 묵인해오던 나뭇가지 줍기(즉 장작)를 금지하는 삼림도벌법을 통과시키자, 그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외에도 부르주아지들의 우유부단함과 반동적 낭만주의에 단호히 맞서며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을 외쳤다.
이런 투쟁 속에서 라인신문은 1842년 1월 정기 구독자 400명의 작은 신문에서 1년 만에 3400여 부를 찍는 대형 신문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과 검열은 계속되었다. 일반 검열관은 물론이고 주 장관까지 검열을 시행하는 이중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신문이 제대로 발행되지 못한는 일이 빈번했다. 프로이센 당국은 라인신문을 매우 위험하게 바라봤고[29] 마르크스가 계속 저항하자 이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러던 중 라인신문이 일련의 사설에서 러시아를 신랄히 공격하는 일이 있자,[30]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맹렬한 탄핵문들이 실린 신문 한 부를 우연히 보고는 깜짝 놀라 프로이센 대사에게 노여움을 표시했다. 이를 기회로 여긴 프로이센 정부는 힘이 강한 러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1843년 4월, 결국 라인신문은 폐간되었고 마르크스는 다시 한 번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라인 신문에서 보낸 1년 동안 마르크스는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정부들에게 거침없이 비판을 하는 탁월한 정치 평론가로 변신했다. 게다가 이 시기 그의 평생 동지가 되어 줄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만났다.[31]
폐간 이후 크로이츠나흐로 향한 마르크스는 귀족 집안 출신의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기로 했다.[32] 예니의 집안은 극심하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베를린대에서 교수로 재직할 정도로 출신성분도 좋고 학구적 가풍까지 여러 모로 좋은 집안의 딸이 왜 하필 사회에 불만 많은 청년과 결혼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지적인 마르크스의 풍모에 반한 예니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43년 6월 결혼을 강행했다. 신혼 생활을 하면서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이라는 원고를 틈틈히 썼고, 헤겔의 사상에 대해 재고하며 그의 관념론적 사상을 비판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도 혁명운동을 위한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모든 혁명은 낡은 사회를 해체시킨다. 그런 한에서 혁명은 사회적이다.
모든 혁명은 낡은 권력을 전복시킨다. 그런 한에서 혁명은 정치적이다.칼 마르크스의 메모 中
"마르크스는 대단히 정력적이고 의지가 굳세며 흔들림 없는 사람이다. 그는 확신을 품고 있는 인물형에 속했다. 머리카락은 숱이 많고 검었으며 손에는 털이 무성하게 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구불구불하게 단추가 달려 있는 프록코트였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풍모가 있었다. 그의 행동거지는 굼뜨기는 했지만 자신에 차 있었다. 그는 사교상의 관례적인 예의범절을 무시했다. 그의 태도는 오만했으며 거의 남을 깔보는 듯했다. (중략) 그의 거친 목소리는 사람들의 정신을 뒤흔들어서 그들의 존재 법칙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굳은 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러시아 자유주의 문인 폴 안넨코프(Paul Annenkov)의 마르크스 평가
라인신문 폐간과 결혼을 거치고 1843년 10월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망명하기 전부터 프랑스와 독일의 혁명가들 간의 교류를 꿈꾸고 있었고, 그들의 협력을 모아 1844년 <독불 연보>를 발행했다. 이 책에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여러 기고자들의 논문과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불 연보는 계속 발행될 수가 없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를 돕고 있던 아르놀트 루게(Arnold Ruge)와의 갈등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루게는 청년 헤겔파 출신으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적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혁명성이 과격하다고 생각했다. 생각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둘은 결별하고 말았다.[33] 대신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다시 만나 둘의 우정의 초석을 쌓았다.
<독불연보>는 비록 실패했지만 마르크스는 다시 혁명가들과 함께 <전진!>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행했다. 마르크스는 잡지에서 슐레지엔 지방 방직공들의 봉기를 기점으로 시작된 프로이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지지하였다. 또한 자신과 결별한 루게를 비롯한 부르주아 사상가들과도 대립하였다. 이런 활동은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획득에 대한 필요성을 마르크스에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다가 잡지를 준비하면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짐에 따라 둘은 정기적인 서신 교환과 만남을 시작했다. 둘의 교류는 계속 이어져 1844년 말 헤겔 청년파를 겨냥하여[34] 비판하는 <신성가족>(1848)을 공동으로 저작하였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며 헤겔의 주관적 관념론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한편 파리에 망명한 동안 마르크스는 많은 철학자, 혁명가, 사상가들을 만났다. 당시 파리는 피에르 조제프 푸르동이 이끄는 푸르동주의, 샤를 푸리에를 포함하여 이상주의자들의 사상을 따르는 공상적 사회주의,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주장한 블랑키주의, 미하일 바쿠닌이 말하는 아나키즘 등의 다양한 혁명적 사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상가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자유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의인동맹'[35]이라는 독일의 혁명적 클럽과도 관계를 맺었고, 문학가들과도 접촉하면서 이들의 문학에 혁명성을 띄게 영향을 미쳤다.[36] 또한 연구 활동도 계속하여 프랑스 혁명 당시의 지롱드파와 자코뱅파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비롯한 고전학파 경제학에 대한 공부도 했다. 이때의 경제학 연구 성과는 <1844년 경제 철학 수고>(1844)에서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37]
하지만 파리에서의 활동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의 잡지 <전진!>이 곧 정부와 반동적 언론으로부터 광범위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으며, 곧 프로이센 정부도 마르크스를 노렸다. 1844년 7월 프로이센 대사는 <전진!>이 프로이센 국왕의 시해를 설파한다면서[38] 프랑스 정부에 정식으로 고발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세금을 빌미로 탄압에 들어갔고 잡지가 이를 교묘히 빠져 나가려고 하자 마르크스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에게 추방을 선고했다. 프로이센의 요구에 밀린 프랑스의 이같은 조치는 프랑스 지성계에 큰 항의를 가져와 일부는 추방령이 해제되었지만, 마르크스는 여전히 추방 대상으로 남아야 했다. 결국 마르크스는 1845년 2월 벨기에 브뤼셀로 가족과 함께 망명하였다.
비록 프로이센 정부가 벨기에 정부에게 그를 추방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마르크스는 시국에 대해 아무것도 발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계속 체류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자 했다. 비록 프랑스에서 추방당했음에도 파리의 혁명가들과의 서신 교류는 계속 되었으며,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 전역의 혁명가와 진보적 인사들이 그를 계속 찾아와 주었다. 거기에 더불어 엥겔스가 브뤼셀까지 따라와 자신과 합류하면서 마르크스는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39]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도 시행했으며, 동시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이론 또한 공부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물론을 전수해 준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철학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것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45)이다. 이 책은 비록 다섯 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소책자지만 마르크스의 주요 철학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제11번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이후, 마르크스는 동시대 독일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철학 이론을 담은 저서를 발행하고자 했다. 그는 엥겔스와 함께 1845년부터 <독일 이데올로기>[41] 집필을 시작하여 1년만인 1846년에 완료하였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훗날 과학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기초를 닦았다. 기존 독일 철학에 만연하던 헤겔 철학의 관념성과 비과학성을 비판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철학을 새로이 세웠다. 또 과학적 이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역사에 유물론을 적용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순환적 상호작용이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된다고 봤다.
혁명운동을 위한 실천적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겼고 이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그 정당은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를 결집시킬 수 있도록 국제주의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망명지 브뤼셀에서 브뤼셀 공산주의 연락 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타 사회주의 조직과의 연락과 연대를 지향했다. 또한 독일의 혁명적 클럽 의인동맹이 점차 과학적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이며 마르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정식으로 의인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의인동맹은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같은 해 독일의 망명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자 동맹의 도움으로 독일 노동자 협회를 결성하였다.
이런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은 곧 다른 혁명가나 사상가들과 충돌했다. 브뤼셀 공산주의 연락 위원회 때에는 사회주의자 빌헬름 바이틀링과 공산주의와 노동자 계급의 혁명 참여를 놓고 대립했다. 바이틀링은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에 큰 기여를 했지만 정작 노동자 계급의 혁명에 대해 줄곧 회의적인 입장을 취해 왔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바이틀링에 대해 마르크스는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없었다!"라고 일갈했고 그렇게 둘은 결별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도 견해 차이가 두드러졌다. 처음에 마르크스와 프루동은 서로를 좋게 여겼으나 프루동의 개혁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는 소시민적 경향을 극복하지 못한 이상론이었다. 프루동이 1846년 <빈곤의 철학>을 쓰자, 마르크스는 프루동주의를 비판하고 자신의 철학관과 경제관을 다룬 <철학의 빈곤>(1847)을 집필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공산주의자 동맹의 기관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1847년 말부터는 사회주의 신문 <브뤼셀 독일어 신문>을 장악하여 1848년 2월까지 비공식적 기관지로 신문을 발행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주관하는 국제 자유 무역 회의에 참가했지만 회의 주최자들의 독단적 진행으로 발언을 하지 못하자 언론을 통해 크게 비난했다. 이때 그가 작성한 기사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통한 사회 질서 전체의 근본적 변혁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의 규합에서 힘써서 1847년 11월 '브뤼셀 민주주의회'를 발족시켰다. 공산주의자 동맹도 성장하여 노동자 정당을 위한 대회를 개최하였고 각지의 내로라하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이 참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원리를 정리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미 공산주의자 동맹의 대회에서 문답 형식의 글을 써서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지만 아직은 부족한 편이었다. 엥겔스는 문답 형식을 버리고 선언의 형식으로 공산주의의 신조에 대해 논해보자고 제안했고 마르크스는 이에 동의했다. 마침 1847년 11월의 대회에서 참가자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마르크스가 강령 작성을 위탁 받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함께 선언 집필을 시작했다. 1847년 말부터 시작된 집필은 1848년 초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의 강령을 담은 <공산당 선언>(1848)이 출판됐다. 공산당 선언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옹호했으며 그 전위로서 공산당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제 안녕, 이제 안녕, 너 투쟁하는 세계여,
이제 안녕, 너희들 격투하는 군대여!
이제 안녕, 너 포연으로 그을린 전장이여,
이제 안녕, 너희들 칼과 창이여!
이제 안녕 - 허나 영원히 이별은 아니지!
정신이 파멸되지 않았으니, 형제들!
이제 곧 떨치고 일어나,
전열을 가다듬어 돌아가리!
(...)
말로, 칼로, 도나우 강가에서, 라인 강가에서-
언제나 신성한 동반자는
왕자를 파괴하는 군대가 되리
파문당한 자, 반란자!<신라인신문> 폐간호에 실린 시
공산당 선언이 집필된 1848년은 유럽에 있어서 혁명의 해였다. 그 해 2월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랑스 2월 혁명이 발생하여 루이 필리프가 폐위되고 공화정이 선포됐다. 또한 3월에는 독일에서도 혁명의 바람이 몰아쳐 메테르니히가 실각해 빈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외에도 유럽 전역에서 대대적인 혁명이 발생했다. 마르크스는 이 일련의 혁명들에 열광하였고, 특히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역할을 중요하게 바라봤다. 그는 유럽의 여러 혁명 조직을 모아 민중의 비조직성을 극복하려고 했으며 조직 간의 통일 또한 도모하였다. 또한 이 시기 혁명을 겪은 프랑스가 보다 관대한 태도를 취함과 동시에 벨기에가 브뤼셀을 떠날 것을 명령하면서 마르크스는 파리로 되돌아 왔다. 파리에 돌아온 후에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새로운 중앙위원회 창설에 착수하며 독일의 혁명가들과 접촉했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의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1848년 5월 조국으로 향했다. 그는 쾰른에서 주거 허가를 받아 그곳에 거주하며 혁명운동에 동참했다. 1848년 6월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뒤를 잇는 <신라인신문>을 발행하였다. 민주주의 기관지라는 부제를 단 이 신문에서 마르크스는 편집장이 되어 1848년에 발생한 유럽 전역의 혁명들을 상세히 보도하고 분석했다. 또한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민족해방 운동을 지지했으며 그 안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입장을 반영하였다.[42] 특히 독일 혁명에 있어서 그것이 지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정신조차도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했다며 혁명을 두려워하는 수구 세력과 타협주의적 자세를 보이는 반동 부르주아지를 비난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도록 민중이 새로운 혁명적 권력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개량주의적 자세를 보이는 공산주의자 동맹 내 분파들을 공격하며 혁명의 투쟁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1848년 혁명의 기운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꺼져갔다. 그해 6월 파리에서는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봉기가 있었지만 부르주아 공화정에게 패배했고, 10월에는 빈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변혁명 세력은 혁명 세력에 대한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도 공세가 시작되어 노동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이 탄압을 받았다. 이에 맞서 마르크스와 <신라인신문>은 대중 집회, 반정부적 논조, 납세 거부 등으로 맞섰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계엄령, 체포, 신문 정간, 고발 등의 갖가지 방법으로 언론 탄압을 일삼았다.[43] 그럼에도 <신라인신문>은 자신의 혁명적 논조를 포기하지 않으며 독일의 혁명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849년 5월에 들어서자 독일 남부 지역의 여러 도시에서 혁명 세력의 봉기가 발생했다. <신라인신문>은 혁명 세력을 응원하며 봉기를 진압하려는 프로이센 당국의 야만적 처사를 낱낱이 폭로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프로이센 정부는 일련의 봉기들이 진압되고 나자 <신라인신문>을 폐간하려고 들었다. 마르크스는 24시간 내에 프로이센을 떠나려는 요구를 받았으며 그의 동지와 조력자들도 기소되거나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에 마르크스는 정부가 강제로 폐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끝내버리자며 1849년 5월 19일 <신라인신문> 마지막 호를 발행했다. 폐간호에서 마르크스는 "노동하는 계급의 해방!"이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노동자들에게 전했으며, 페르디난드 프라일리그라트라는 시인의 고별시를 붉은 잉크로 인쇄하였다.
<신라인신문> 폐간 이후 마르크스는 쾰른을 떠나 독일 남서부를 떠돌다가[44]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파리에서의 승리가 유럽에서의 혁명 승리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래서 그곳의 비밀 조직들과 접촉했지만 이들의 6월 중순에 일으킨 봉기는 실패했다. 프랑스 정부는 대탄압에 들어갔고 마르크스는 8월 경 파리를 떠나 브르타뉴로 떠나라는 명령을 전달받았다. 결국 마르크스는 1849년 8월 24일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1848년 2월과 3월에 걸쳐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혁명이 발발(1848년 혁명)하였으나 늦어도 가을 쯤에는 모두 진압되고 만다. 혁명의 좌절에 실망한 마르크스는 1849년 독일 쾰른에서 추방되어[45]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다. 그렇지만 밑천을 까먹은 채로 추방당해서인지 이전까지 풍족하게 살았던 마르크스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치게 되었다. 신문 기고를 비롯한 여러 활동을 펼쳤지만 생계는 여전히 어려웠다. 런던에 살면서 낙후된 주택에서 주거하고 그 자신도 질병에 시달리는 등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서 결국 자식 6명 가운데 3명이 죽는 비참한 경험을 하고 만다.[46] 이후 경제적 어려움은 엥겔스의 지원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상황의 변화[47]를 통해 겨우 개선되었다. 그렇게 마르크스는 런던 중심부에 있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34년 동안 거주하며 지속적인 저술 활동을 펼쳤다.
당시 세계 최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신문사[48]이자 공화당 지지 성향의 진보 매체인[49]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런던 특파원으로 취직하면서 벌어먹는 돈으로 그런대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고, 미국에서도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다만 이때 벌어들인 수입은 단순히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지[50] 잘먹고 잘살았다는 얘기는 아니기는 했다. 이때 마르크스는 유럽 각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기에 대영도서관에서 영국과 유럽 각지의 신문들을 살펴보면서 유럽에서 벌어지는 주요 소식에 대한 칼럼을 썼고, 때때로 미국 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기사를 작성했다.
남북전쟁이나 아편전쟁에 대해서 서술한 마르크스의 글도 이 시기에 작성된 것이었으며 현대 기준에서 보았을 때 현장성이나 객관성은 부족한 편이지만[51] 그럼에도 마르크스 자신이 가지고 있던 풍부한 역사적인 지식과 경제적인 지식, 엥겔스가 가지고 있는 군사학적인 지식 등을 백분 활용하면서 칼럼과 기사를 작성했기에 유럽 정치의 주요 사안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52] 여하튼 미국 신문 특파원을 지냈던 인물이었기에 후에 미국에서 일어난 매카시즘 광풍이나 미국과 소련이 대립한 냉전시기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하다.[53] 당시 마르크스는 남북전쟁에 있어서 당연히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링컨 대통령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이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념을 위해 싸운다고 말할 때, 링컨은 이념을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라면서 호평했다. 이후로 특파원 일을 때려친 이후로도 링컨과 여러 번 서신 교환을 하면서 노예해방선언과 재선 당시에 축하편지를 내보냈다. 물론 링컨의 모든 면모를 다 호평한 건 아니고 무덤덤한 어법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좀 불만을 가지기는 했다. 사실 냉전기 때의 일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지만 이 당시에는 마르크스가 미국 식자층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물이었던 데다가 링컨이 보호무역론자였던 면도 있었다. 즉, 21세기 기준에서 이상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당대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마르크스와 링컨이 사상 면에서 통하는 면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공화당이 보수주의 정당이 아니라 진보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으로 인식되었을 때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뉴욕 트리뷴 지가 1857년 경제 공황과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재정이 흔들거리기 시작하면서 유럽 특파원들을 잇따라 해고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저명한 칼럼니스트였기 때문에 짤리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의 입지는 좁아졌고, 결국 1862년에 뉴욕 트리뷴지와의 관계도 끝났다.
여하튼 이때 기사 작성 등의 이유로 대영도서관에 틀어박혀 하루 10시간 이상을 공부한 흔적이 담겨있는 노트 등이 여전히 유품으로 남아있다. 이때 매일같이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써낸 게 '정치경제학 요강', '정치경제학 비판', '잉여가치론' 등.[54] 영국 체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중 특히 중요한 인물들에는 그의 맹우 엥겔스 이외에도 카를 카우츠키, 폴 라파르그 등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중요 사상가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마르크스와 이들의 활동은 훗날에 세계 최초의 국제노동자연대 운동으로 발전할 "인터내셔널"을 낳게 된다.
당시 전유럽에 퍼진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적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1867년 《자본론》을 내놔 이후 100년도 넘는 오랜 시간 두고두고 떡밥이 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화두로 던졌다.
2.2.4. 혁명운동과 인터내셔널[편집]2.2.4.1. 제1인터내셔널의 성립[편집]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유럽 전역에는 산업혁명의 물결이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사회주의 이념 역시 점차 발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의 성장은 여전히 미약한 상황이어서 기껏해야 같은 직종에 국한되고 있는 판국이었다. 또한 어렵사리 파업과 같은 계급 투쟁 운동이 성사된 경우에도, 자본가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쉽사리 어려움을 극복하곤 하였다. 이에 따라 보다 효율적인 계급투쟁을 위하여 국제적인 단위의 사회주의 조직을 결성할 필요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1863년 1월 발생한 폴란드의 독립 항쟁을 기념하기 위한 명분으로 같은 해 7월 영국 런던에서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회합을 갖는다. 칼 마르크스에서 부터 오언주의자, 푸르동주의자, 블랑키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파의 좌파 세력이 모인 이 회합을 통하여 마침내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가 탄생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 앞글자를 따서 인터내셔널이라 부른다.
제1차 인터내셔널(1864-1876)은 마르크스 생전에 이루어진 만큼 마르크스가 직접 창립선언을 비롯한 주요 문서를 작성하였다. 1872년까지 6차례 대회를 열며 노동, 보통선거권 쟁취 운동, 민족 자결주의 지지등 계급주의 투쟁의 기본방향이 정립되었다. 하지만 1871년 파리 코뮌의 등장을 목도한 유럽의 각국들은 공산주의 체제의 등장에 대해 진지하게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탄압을 실시하였다. 마르크스 본인도 인터내셔널 내부 좌파집단의 헤게모니 충돌, 기존 정치세력의 탄압등으로 초창기만큼의 열정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여러 좌파세력이 충돌하며 후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탄압 등 여려 요인으로 인해 1876년 1차 인터내셔널은 해체되고 만다.
독일사회주의노동당[55]을 결성하면서 채택한 1875년의 고타 강령에 대해 마르크스는 통렬히 비판하였다.
고타 강령은 독일노동동맹 소속의 라살레[56]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작성되어 1891년의 에르푸르트 강령이 성립될 때까지 당의 지침이 되었는데, 이는 라살레파의 국가사회주의[57] 와 아이제나하파의 마르크스주의를 타협적으로 절충시킨 것이었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해석한 것이다. 이 이론의 주요 주장은 임금철칙의 철폐이지만, 이론상의 모순을 내포하였으며, 정치적인 요구로서도 일관성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통렬히 비판하여 《고타강령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이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에 수정주의적 해석에 반대하였다.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계급투쟁과 혁명 노선에 반대하면서 분배를 주장한 사회민주주의 역시 자본가의 돈이 없으면 분배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본가 그룹이 붕괴되면 같이 무너지게 되어, 마르크스는 사회민주주의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본가의 손을 들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간의 "정치적인 과도기"에서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 이외의 그 무엇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또한 민주주의적 공화제라는 부르주아 사회의 '최후의 국가형태'에서 계급투쟁이 철저히 펼쳐진다는 것을 고타강령비판에서 서술하였다.
"코뮌이 이러저러한 미숙함은 있었지만 코뮌의 가장 큰 업적은 코뮌이 존속했다는 것 자체였다. 그것이 자라나는 토양은 근대 사회 자체다. 아무리 살육을 한다 해도 그것을 짓밟아 없앨 수는 없다. 이를 짓밟아 없애고자 한다면, 정부들은 자기 자신의 기생적 존속 조건인,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제를 짓밟아 없애야 할 것이다."
1871년 파리 코뮌이 좌절된 이후 마르크스의 회고
영국 런던에 위치한 마르크스의 흉상 추모비[58] |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 |
On the 14th of March, at a quarter to three in the afternoon, the greatest living thinker ceased to think. He had been left alone for scarcely two minutes, and when we came back we found him in his armchair, peacefully gone to sleep-but forever.
3월 14일 오후 2시 45분,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겨우 2분 동안 혼자 남겨져 있던 사이, 우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안락 의자에 앉은 채 평화롭게, 영원히 잠들어 있었습니다.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한 연설에서 발췌
저리 꺼져! 유언 따위는 살아있을 때 말을 다 못한 얼간이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1870년대 이후로는 이렇다 할 만한 주요 활동이 없으며 대중적인 저술만 가끔 하는 등 조용히 살았고 1881년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병을 얻은 후에 알제리로 요양갔다가 알제리에서 병이 악화되어 1883년에 사망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는 최우선 발생국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과 프랑스를 꼽았고, 정치적으로 사회주의가 득세했던 조국 독일 역시 후보로 보기는 했다.몇십년 뒤에 민족사회주의란 게 득세하기는 했다[60][61] 그런데 세계 정치의 흐름 및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말년의 마르크스는 자신의 초기 이론에 약간의 수정/보완을 가미하여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낙후된 조건에서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했으며, 러시아를 공부하는 등 흥미를 드러냈다. 그리고, 실제로 1905년과 1917년, 총 세 차례에 걸쳐 혁명을 통해 마침내 러시아 땅에서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중국도 마찬가지고...한편 미국에서 성행하던 사회주의 운동은 좌초되었고 1948년 선거를 마지막으로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이 하원에서 의석을 확보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아직 내공을 쌓기 이전인 1848년에 프랑스의 알제리 침략을 지지하는 글을 남기는 흑역사스러운 면이 있지만, 내공이 쌓인 이후로는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나 인도의 세포이 항쟁에 대해 적극 지지했으며, 아일랜드의 독립도 영국 노동자들의 손으로 이뤄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연구를 거듭하면서부터는 아일랜드인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입장을 바꾸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마르크스의 정치스탠스나 정국을 보았을 때 마르크스가 심적으로 편치 못한 삶을 살면서 좌절감을 느꼈을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섰던 1848년 혁명은 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 결국 실패로 돌아서면서 해외로 망명을 가야되는 신세로 전락한 데다가, 그 프랑스에서도 의회를 우파가 장악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나폴레옹 3세였으며 그나마도 몇 년 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제국이 되었으며, 이후로 미국 신문 기자로 일했을 때 칼럼을 쓰면서 링컨과 공화당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고 남북전쟁에서도 북군이 승리하면서 미국이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서 대 트러스트의 시대가 열렸고, 미국에서 인종차별정책은 다시 부활하고 말았다.
또한 영국에서 살았을 때는 그나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기는 했고, 하층민들이 선거권을 쟁취하는 모습도 지켜 보았지만, 영국이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을 주도하던 나라라서 노동자와 식민지를 열심히 착취해대는 더러운 꼴을 많이 보았고, 식민지에서의 독립운동 또한 좌절되는 모습도 지켜보았으며, 파리 코뮌이 일어났지만 이것도 좌절되었다. 이후로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철권통치를 하면서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모습을 보았고 사회주의자들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는것을 못보고 사망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요 정당이 되는 걸 보고서라도 갔던 엥겔스보다는 심적으로 편치 못한 삶을 살았다. 마르크스의 서적이나 문집을 연도별로 보면 생각 외로 스탠스가 변모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한데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사후 그의 유해는 절친한 친구 엥겔스와 자식들, 친구들이 거두어서 장례를 치러주었고 런던의 하이게이트(Highgate) 공동묘지[62] 동편에 안장되었다. 직접 찾아가려면 런던 지하철 노던 선을 타고 Archway역에 내려서[63] 하이게이트 방면으로 걸어가면 된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측에서는 아예 입구에서 마르크스의 묘비 사진을 붙여놓고 홍보하고 있고, 매표소에서 입장권[64]을 구매하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표를 건네주면서 마르크스의 묘지 위치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묘하게도 마르크스 무덤 맞은편에는 허버트 스펜서의 무덤도 있다.
이원복 교수의 시사만화 <현대문명진단> 초판 2권 '그대의 눈길을 부드럽게...' 편에 따르면[65] 1933년 타계 50주기를 기념해 흉상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했으나, 1948년 British Pathe 영상을 보면 가족묘 형태였고 현재의 것은 1955년에 만들어졌다. 묘비 위에 있는 흉상은 조각가 로렌스 브래드쇼(1899~1978)가 만들었다.
원래는 묘지 주 도로보다 좀 더 안쪽에 묻혔었는데, 마르크스 묘지를 방문하는 참배객과 관광객이 늘자 접근성 문제로 지금의 자리로 이전 안장되어서 훨씬 찾아가기가 쉬워졌다. 예전 무덤 자리에도 석판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금가고 흐릿해져서 읽기 힘들다. 묘비에는 마르크스 얼굴 동상과 함께 그가 남긴 두 가지 유명한 말이 적혀 있다. 묘비 상단에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하단에는 상술한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의 글귀가 적혀 있다. 냉전 시대만 해도 세계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성역시했던 곳이었으나 1989년 동구권 붕괴 후 순수 관광객이 전체 참배객의 99%를 점하고 있다.
그의 딸 엘리노어에 의하면 매우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가족끼리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거나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엥겔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많이 얻곤 했는데, 이는 기자 생활을 했을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월급이 들어오기는 했고, 당대 기준으로 수입이 썩 나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고정적인 것은 아니라서 들쭉날쭉했는데 부족분을 엥겔스의 재정지원으로 메운것인데 그런데 엥겔스가 자신의 아내(정확히는 정부인은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의 여자)가 죽었다는 편지를 보냈을 때도 이에 대한 답장에 돈 좀 부쳐달라는 글을 남기는 엄청난 결례를 했는데 격분한 엥겔스는 절교를 선언했고, 마르크스의 친지들이 애걸해서야 겨우 화를 풀었다. 이때 마르크스가 사과 편지를 썼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진지한 사과 편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당시에 재정적으로 굉장히 궁핍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성격으로 보아 그 사과조차도 절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출처 그 외 일화들
어머니인 헨리에타는 네덜란드 네이메헌(Nijmegen) 출신인데, 친척이 그 유명한 필립스였다. 물론 외조부 리온을 제외하면 마르크스를 무개념이라고 꽤 싫어했다.
아내가 사망할 당시 둘 다 병은 걸렸으나 돈이 없어서 골골거렸을 때 자기 아픈 건 끝까지 숨기면서 아내의 임종을 지켰다. 평생 혁명 생각만 하면서 아내를 고생시킨 마르크스가 유일하게 아내에게 잘한 일로 꼽힌다. 그나마 자식들에게는 잘해준 편이지만 반대로 형제자매나 모친을 멀리했다고 한다. 부친은 예외로, 죽는 날까지 아버지 사진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낭비벽이 심하다보니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특히 파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행했던 사치와 향락의 파티를 했던 돈은 그가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은 바로 그 아버지의 재산으로 이루어졌다.[66] 그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예술작품을 팔려 할 때 그의 어머니가 반대하자[67] 엥겔스를 찾아가 "어머니가 죽는 게 더 나은 때가 온 것 같다"며 망언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거기다가 아버지 유산을 다 팔고 돈이 없자 역시 귀족 딸이었던 부인이 물려받은 유산(주로 예술품)까지도 다 팔아버렸다. 그래도 사치를 감당못해 파산을 했다. 경제관념은 역대 경제학 관계자 중 최악이다. 그리고 그렇게 써댄 재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까지 가난하게 살게 되어버렸고 그들은 카를 마르크스를 미워하고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인생 후반기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주식으로 돈좀 벌기도 할정도로 좀 살림살이가 펴지기는 했다.
특히 어머니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유명하다.[68] 그의 어머니는 집 재산을 다 날려먹은 아들이 책을 써서 꽤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전한 사람에게 책의 이름을 물어봤다고 한다. 그 사람은 그녀에게 그 책 이름이 자본론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그의 어머니는 "자본론을 쓸 시간에 자기 자본이나 벌 것이지...."라고 했다 카더라
마르크스의 천재성과 반신분주의적 성향은 일찍부터 싹이 보였다. 이미 고등학교 졸업 직전 만 17세였을 때 '어느 젊은이의 직업 선택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젊은이는 직업 선택을 할 때 젊은이의 의무와 자기 희생과 인류의 미래를 모두 심사숙고를 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결국 젊은이의 직업 선택이 모여 인류의 진보가 일어나고 그 직업 선택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과정 자체가 인류의 진보 과정과 닮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 상황은 신분주의가 다 가시지 않았던 시절이라 대부분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는 걸 당연히 여겼을 때였는데 마르크스는[69] 그 어린 나이에도 이미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직업 선택은 정해진 것을 따르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는 거시적 관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아가 단순한 사회 개념을 넘어 그 직업 선택이 전인류 진보사에 영향을 준다는 범인류적 사상까지 보이고 있었다.[70]
뛰어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생활에서의 경제관념은... 이었다고 한다. 매일 대영도서관에서 책 읽고, 책만 쓰고, 가끔씩 신문사에 기고하는 글로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71] 그런데 여기에 부잣집 출신 엥겔스의 지원금까지 포함하면 당시 노동자의 세배 정도로 벌이가 괜찮았다고 한다. 그는 집에 하녀를 두고[72], 종종 온가족이 예쁘게 차려입고 소풍을 가며, 집안의 가구를 수시로 바꾸었으며 자주 친한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했다고 한다.
베를린의 고위 관료의 1년 평균 수입이 800탈러였고, 부잣집의 돈 잘 쓰는 한량도 1년에 500탈러 이상을 쓰는 일은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1년 지출은 700탈러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에 진노한 아버지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아이가 여섯 명이 있었는데, 밥은 못 먹여도 춤과 피아노 교습은 시켰다. 어쨌든 세명이 일찍 죽었는데. 딸이 죽었을 때 외상으로 관을 사려 했는데, 외상을 못해서 절망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자녀들 중 유명한 인물은 여섯 번째 자녀인 엘리노어 마르크스(Eleanor Marx)이다. 카를은 그녀를 가리켜 사내아이로 태어나야 했어야 했다고 자주 농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면은 다정하고 인간을 그대로 사랑할 줄 알아 적들도 인간적으론 존경했다 한다. 부전여전이라고 딸도 영국에서 진보적 활동을 많이 했다. 사회민주연맹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활동. 43살의 나이에 독약으로 자살했다.
그나마 부인이라도 금전 관념이 있었다면 이렇게 상황이 최악은 아니었을 것이나 마르크스보다 4살 연상이었던 그의 부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도 남편처럼 사치스러웠다. 특히 밥은 굶어도 '폰 베스트팔렌 남작부인'(베스트팔렌 남작의 영애)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금박달린 비싼 편지봉투만 애용했다고 한다.
노동자의 해방을 외치던 그도 집에선 헬레네 렌헨 데무트란 이름을 가진 가정부를 고용해서 생활했는데 예니 마르크스가 생활비를 마련하려 유럽으로 떠난 사이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1851년 6월 23일 프레더릭 데무트란 아들을 보았지만 그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아이를 처리하는 데도 엥겔스가 도움을 줬다.[73] 엥겔스가 그 아이는 사실 내 아이라고 둘러대주고 자신의 세례명인 프레더릭을 쓰도록 했다.[74] 마르크스는 이스트 런던에 사는 어떤 노동자 부부에게 프레더릭을 입양보냈다. 프레더릭은 성장한 후 재단사와 선반공 일을 하면서 살았고 연합기술자회의(노조)회원이었다. 후일 엥겔스는 런던으로 이주했는데 마르크스가 죽은 후 데무트를 가정부로 고용했다. 프레더릭은 아들 해리를 데려가 엥겔스의 집에 있는 "지하실"에서 생모인 데무트를 만나곤 했고. 그럴 때마다 앵겔스는 조용히 자리를 뜨곤 했다. 이 일은 내내 비밀에 붙여지다가 엥겔스가 임종의 자리에서 마르크스의 딸 엘리노어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엘리노어는 프레더릭과 남매처럼 지내면서 프레더릭의 정신적 고통을 보상해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고 한다.
카를 마르크스.
올해로 탄생 200돌을 맞은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인간 해방의 위대한 투사 목록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아버지에게는 평생 감추어야 했던 비밀이 하나 있었다. 1851년 여름 망명지 런던의 누추한 딘 스트리트 28번지 비좁은 집에서 태어난 남자아이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가 결혼할 때 데려온 하녀 헬레네 데무트였고 아버지는 마르크스였다. 사생아의 존재는 마르크스에게도 다른 가족에게도 함구의 대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할 경우에도 이 사실은 암호문처럼 모호하게 처리됐다. 예니는 훗날 쓴 회고록에서 이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여기서 자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1851년 초여름에 우리의 걱정을 가중시키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
일부일처제의 부르주아 미덕 안에서 산 마르크스에게 이 아이는 가족 안으로 난데없이 들어온 이방인, 자신이 만들어냈지만 받아들일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완전한 타자였다.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마르크스의 영원한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독신이었던 엥겔스는 사생아를 자기 아이인 것처럼 꾸며 다른 노동자 가정의 양자로 보냈다. 마르크스의 가족은 엥겔스의 도움으로 부르주아적 정상성의 울타리 안으로 안전하게 돌아갔다. 헬레네는 그 집의 하녀로서 평생을 살았고 마르크스 가족이 묻힌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에 함께 묻혔다.
과거 사회주의 진영에서 나온 마르크스 전기들은 이런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을 기리는 ‘성인전’이 인간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추문을 입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마르크스의 신성한 지위가 무너지고 난 뒤에야 ‘인간 마르크스’를 조명한 전기 속에 이 비밀이 편입됐다. 마르크스가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예니와 헬레네는 또 어떻게 했을까?고명섭 한겨레 논설위원#
이렇게 빈민촌에서 고생한 시절도 있지만 그래도 유산 받은 것과 엥겔스의 도움 등으로 교외 괜찮은 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고로 흔히 알려진 마르크스가 가난해서 노동자들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그도 천생 기자인지라 마감이 닥쳤을 때만 능력을 발휘했다. 만화가, 소설가, 기자들의 창작 욕구는 마감에서 나오는 듯하다(출처). 반면에 마감에 대한 거부감은 당연히 강해서, 자본론의 경우도 엥겔스는 빨리 낼 것을 독촉하였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초저속 마감 시스템을 추구했다. 그래서 자본론 2, 3권은 아예 끝을 못냈다!
심각한 악필로도 유명하다. 아내와 엥겔스 정도만 그의 글씨체를 해독할 수 있었다고.
자기가 의도한 바였는지 모르겠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로 또다른 떡밥도 만들어놨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도 아편을 애용했는데, 당시엔 이게 진통제로 쓰였기 때문. 엉덩이 종기 때문에 먹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은 오늘날 뉘앙스처럼 무시무시한 게 아니라 그냥 '진통제'란 의미였던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혈통은 유대인이다. 하지만 아버지 대에 기독교로 개종했기에 당시 분류로는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인 사회에서도 유대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 마르크스처럼 후대 사회주의자 중에 유대인 출신으로 알려진 인물들(레프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등)도 유대인이라는 의식이 없던 건 마르크스와 마찬가지였다. 이론상으로는 국가나 민족같은 개념은 종국엔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란 자각이나 민족 의식, 해방 같은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그의 사상에 대한 반대자들이 유럽서 수천년 동안 천민 취급을 받은 유대인 드립과 엮어서 "조국과 민족이 없는 유대인의 사회주의"라고 디스했다. 물론 가장 많이 울궈 먹은건 나치다.
자신을 전혀 유대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로를 향해 "폴란드 유대인은 모든 종족 중에 가장 천박한 족속이다"라고 유대인 드립으로 디스한 적도 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라살로를 "진정한 폴란드 유대인"드립을 하면서 또 한번 디스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좌파 세계주의자답게 마르크스는 유대인 차별에 반대했다. 아직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인 1843년에 이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써서 유대인 차별에 반대했다.
시대를 초월한 포스 넘치는 명언을 여럿 만든 사람 아니랄까봐, 유언[75]에 대한 일화에서도 상당한 포스가 느껴지는 양반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길 유언이 뭔가?"라는 친구이자 동지인 엥겔스의 질문에 대한 이 양반의 대답이다.
"꺼져! 유언이란 살아서 말을 충분히 하지 못한 얼간이들이나 남기는 거야..."
(Hinaus! Letzte Worte sind für Narren, die noch nicht genug gesagt haben...)
주식에도 투자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죽기 1년 전에 엥겔스가 요양여행 보내주려고 보내준 돈으로 자신의 경제적 인식이 얼마나 맞는지 한번 시험해보려고 투자해본 것이라고 하던데 미국 철도회사와 철강회사 주식을 사서 2주만에 4000파운드라는 상당한 거액을 벌어들였다고.[76] 위에 나와있는 것과는 상반되어 보이지만[77] 어쨌든 경제학자 가운데서는 주식으로 돈을 번 흔치 않은 사람이다. 이런 일화는 케인즈도 비슷하다.[78]
인생 후반기 들어 드디어 자기의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하고,[79] 재정적으로도 어느 정도 돈을 벌며, 각지의 추종자가 도움을 주면서[80] 어느 정도 삶이 펴서 자기가 그리도 까던 부르주아 라이프를 누리다 죽었다. 특히 자신의 언변을 이어 받은 로라와 라파르그 커플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이 노년의 낙이었는 듯 하다.
많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실제로도 많은 혁명을 꿈꾸는 이들이나 개혁주의자와도 자주 교류를 나누웠지만, 정작 마르크스 자신은 당대의 혁명론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스탠스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는 마르크스가 젊었을 적에 참여했던 1848년 혁명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철저하게 경험했기 때문이었고, 1857년 경제 공황이 일어났지만 혁명으로까지 연결되지 못하면서 경제 공황이 반드시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르크스는 1857년 경제 공황이 일어나자 조만간 혁명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실제 혁명이 일어나지 않자 경제학에 대해서 공부를 매진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자본론 1권이다.
마르크스 이론의 독특성은 그의 정신적 원류라 할 수 있는 헤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과격한 일부는 마르크스와 헤겔에는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띤다는 헤겔의 관점을 가져오되 이성의 발전과 종착역을 설정한 헤겔의 관념론과 차별점을 두면서 생산 양식의 발전과 그에 따른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경향적 이행을 주장했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의 다양한 사상적 면모들 중에서 그가 핵심으로 삼았던 과학적 공산주의의 측면을 아주 극히 단순하게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사상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공부가 요구된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자면 '과학적 사회주의'를 제외하고,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니 '마르크스주의'니 '사적 유물론'이니 하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쓴 적이 없었다. 이 용어들은 그의 저서와 철학, 정치, 경제 사상 등을 정리하면서 체계화된 것이다. 이러한 체계화는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특히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최고봉이었던 소련에서 주로 많이 수행됐다. 그래서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접하는 사실들은 주로 소련 시절의 교과서에서 들여온 것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이 주도한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연구에는 스탈린주의 등의 사상이 많이 유입됐다는 비판이 있다. 즉 혁명가들과 지도자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정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81]#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의 핵심이다. 마르크스는 학창 시절 헤겔 철학에 매료되었으며 그 중 변증법을 매우 선호했다. 그는 변증법에서 세상이 정반합의 원리를 통해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 원동력이 세상 밖에 존재하는 절대정신(관념)에 달려 있다는 대목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마르크스 당대 최고의 유물론자는 포이어바흐였는데,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이 '관조적 유물론'이라 비판한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실천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실천적 유물론이다'. 기존의 기계적인 유물론의 한계를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넘어선 것, 즉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비판 및 계승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물질이 정신에 우선하며, 변증법적 운동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을 만들게 된다.
2.4.2. 마르크스주의[편집]2.4.3. 마르크스 경제학 (정치경제학)[편집]2.4.4. 공산주의 (과학적 사회주의)[편집]2.4.5. 사적 유물론[편집]2.4.6. 종교관[편집]
종교는 모든 인민들의 아편이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고 종교가 인간을 만든 것은 아니다.마르크스의 명언 中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계도 짚어볼 만하다. 처음 엥겔스는 영국 자본가의 아들이었지만 변혁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라인신문>에서 특파원을 하다가 그곳의 편집장인 마르크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렇게 이어진 관계는 마르크스가 프로이센에서 추방당하고 망명 생활을 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둘은 사상적으로 아주 잘 맞았고, 평생 서로의 동지가 되었다. 1848년 출판된 <공산당 선언>은 그런 둘의 공동집필이 낳은 역작이다.
또한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든든한 경제적 지원자였다. 그가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그 어려운 망명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82]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이러한 협력관계는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도 우정은 이어져서, 엥겔스는 그의 유고를 모아 <자본론> 제2권과 제3권을 출판하였다. 또한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혁명운동에도 꾸준히 참여하였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본격적으로 퍼져 나가기까지 수백 년, 온 세계에 퍼지기까지 1천 수백 년이 걸렸음을 생각할 때, 본인이 살아있는 당대에 이미 유럽에서 저명한 사상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83] 그의 사후 40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그의 이론을 추종하는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생겨났다. 마르크스가 19세기 이전에 태어났더라면 종교의 창시자나 성인으로 취급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사람이 세계에 미친 영향은 이렇게 정리하면 된다. 제2세계는 그를 찬양해 마지않았고, 제1세계는 그를 못 끌어내려 안달이었다고. 이러한 사회적인 영향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분야에서도 많은 영향력과 발자취를 남겼다.
마르크스의 행적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근대 인문학 전반과 그 기본 개념을 전부 재정립하려 시도했으며, 나아가 새로이 도래한 자본주의 시대라는 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애초에 '자본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맑스가 만든것이며,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대척점에 있는 자유시장경제라는 사회과학적 현상을 철학 사상적으로 정립하려다 보니 무리하게 '주의'라는 용어를 넣게되었다. 때문에 현대에도 자본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비문(非文)이다 라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허나 어찌됐거나 용어는 현대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니 마르크스가 현 시대 사회과학 용어정립에 끼친 영향이 상당히 크다 하겠다.
그 시대에서 핍박받던 "노동자"라는 계급이 존재한다고 한 뒤 그 계급 전체의 중대한 각성을 일으켰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또 그들과는 다른 입장에 있는 인텔리/지식인 및 중간적 위치의 계급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그들이 어떠한 사회적 의무가 있는지를 일깨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를 마르크스 외에도 유명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가 중 상당수는 프롤레타리아와는 거리가 먼 쁘띠부르주아-중산층 지식인 출신이 많았다. [84] 이러한 혁명가들과 운동가들에게 마르크스의 이론은 귀감이 되었고 투쟁전선에 뛰어들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즉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에릭 홉스봄이 정의한 "혁명의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다.
마르크스의 이상향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서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20세기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실험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비록 그 이상향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변질되어 버린 경우가 태반이고 수 많은 이념분쟁의 씨앗이 되어 버렸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발전과정은 봉건주의-자본주의-공산주의로 이어진다고 생각했고 각 사회가 한계점과 모순이 발생하여 갈등이 극의에 이르었을때 갈등-혁명-진화의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봉건제가 무너지고 왕을 사형시키며 부르주아의 자본주의가 형성이 되었고 마르크스가 생존하던 19세기는 그러한 자본주의의 안좋은 이면이 사회에 팽배해져 있을때였다. 하나 20세기에 이념대립을 펼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이 되었는데 미국과 서유럽의 자본주의는 공산주의 진영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세력이 파괴되어 버리는 것을 알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식으로 변화하였고 소련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시장논리가 최악에 이르었을때 등장한다는 마르크스의 논리와는 달리 러시아라는 봉건주의체제의 정점인 나라에서 등장해버리는 태생부터 괴리가 생겨버리는 상황이 생겼다.
이러한 편린은 끝내 공산주의가 독재와 부패, 국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버려진 사회가 되어버리는 태생적인 결말을 맞이하였으며[85] 노동자의 투쟁 그리고 세계대공황을 거치며 형성된 현대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권리를 어느정도 보장받는 당시 카를 마르크스가 생각하던 사회에 좀더 가까우나 자본주의의 형태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상이 되어있다. 어떻게 보면 현대자본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의도치않게 만들어낸 이념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인류역사상 손꼽히는 영향력이 큰 학자인지라 수능 사회탐구 영역, 그리고 그를 넘어 대학교의 사회과학, 인문계열 학과의 거의 모든 과목에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단적으로 현대 역사에서 시대구분론은 마르크스의 시대구분론과 완전히 같다. 시대구분론이 기본적으로 경제사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다. 마르크스와 현대 역사학의 차이는 공산주의를 현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뿐으로, 애초에 큰 틀에서 역사분류할 때는 고대-중세-근대로 현대나 근세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하다. 그나마 현대를 구별하는 경우도 2차대전 종료가 기점이지만, 이 역시 근대자본주의의 틀에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기록하는 경우는 드물다. 2차 대전 이후의 시기에 대한 가장 흔한 표현은 에릭 홉스봄이 주창한 장기 19세기를 포함한 세기별 분류. 같은 이유로 최초의 시대구분론이 등장해서 스스로를 근대라고 선언했던 르네상스 시대를 현대 역사학에서 근세로 만들어버린 것 역시 근대의 상징인 자본주의 발달의 부족 때문.[86]
마르크스는 인문학계에서는 근대 철학의 방법론 및 그 내용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고 역사학계에도 유물론적 사관을 남겼다. 또한 마르크스는 막스 베버(Max Weber)[87]와 함께 근대 사회학의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가 좌파적 관점에서 거시적인 인문사회의 제반을 해석한다면, 베버는 대체로 우파적 관점을 가진 인문사회 연구자들의 미시적인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다. 물론 둘을 단순한 좌우 대립관계로 간주하는 것은 극도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오히려 베버가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더욱 정교한 형태로 발전시켜 연구하였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사실, 베버 본인이 '마르크스와 니체의 이론적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는 사기꾼'이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배버 항목 참조.
마르크스나 베버나 한결같이 글쓰기 스타일이 독일인 학자다운 악랄한 만연체라 학문적 토대를 만들어야 하는 대학원생들이 둘 중 하나의 저서를 읽다가 수없이 학을 떼면서 사상적 기반을 만들기 때문에 둘의 이념을 다 포섭하여 자신의 사상적 토대를 만드는 인문사회계열 연구자는 보기가 힘들다. 우파적인 학문으로 알려진 경제학을 봐도 사정은 사실 비슷하다. 경제학의 대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만 해도 제대로 완독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사상은 현대 공산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다.[88] 그러나 정작 그는 사회주의가 성립한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 말한 것이 많지 않다. 프랑스 내전 같은 저술에서 과도기적 사회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그나마 구체적으로 묘사해 둔 정도다.
마르크스주의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 [89]사이에서 토론과 논쟁으로 분파가 세분화[90]된 이유가 여기에 기인한다.
그가 미친 영향을 인문학 영역 요소요소 별로 뜯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문학에서는 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사조가 형성되는 데 영향을 끼쳤으며, 비단 문학사조만이 아니더라도 그의 토대와 상부구조론은 문학 해석에 있어서의 반영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장 모더니즘에서도 마르크스의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학은 어떠한가? 그의 사적 유물론(즉, 유물사관)은 역사를 보는 중요한 관점이자 연구방법론을 제시했다. 즉, 사회의 이념이나 관념, 가치관이 역사를 추동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적 생산양식의 변화나 과학적 발견에 따른 기술 혁신 등이 우리 삶을 뒤바꿔 놓았으며 사상이나 이론은 그 뒤를 쫓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역사구분(원시, 고대, 중세, 근대)은 오늘까지도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나아가 철학에서는 그의 저작이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독일 이데올로기』나 다양한 저서에서 엿보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은 오늘날 철학자들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다. 그리하여 칸트를 통해 집약된 근대사상은 헤겔을 통해 한층 발전되고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철학의 열매가 자라는 사상적 토양을 완벽하게 일궈놓게 되는 것이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과 함께 사회학의 3대 거장이라 불리는 그는 사회학에서 갈등론 패러다임을 열어놓은 장본인이며, 경제학에서는 고전경제학의 비판인 『자본』을 집필했다.[91] 또한 경제환원론(경제결정론)을 정립하여 후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특히 신좌파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고도산업사회 변증법적 비판이론도 마르크스의 노동소외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정치학에서도 그의 관점은 중요하게 다뤄지며 특히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섬세한 통찰이 드러나 있어 정당이론과 국가론의 중요한 분석서로 여겨진다. 당장 그의 정치사상이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다양한 학문뿐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르크스 등장 이전까지 고전경제학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자본주의는 완전한 시장방임주의다 보니 비판받을 점이 많았다.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영국만 봐도 뒷골목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의 숫자가 수천 명이었고[92] 죽음을 면한 아이들도 제대로 된 교육이나 기본적 수준의 의식주 보장도 없이 공장 노동자로 내몰렸으며, 가난한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인권은 물론이요, 제대로 된 노동권의 행사나 복지, 참정권 등은 보장받지 못한 채 자본가들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근근히 살아가던 형편이었다. 또한 자본가들은 이와 같은 노동 착취에 관해, 그것이 일할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하는 것이자, 자본가들이 그들을 필요한 만큼 부려 먹을 자유 역시 보장하는 것이라 여겼으며, 당시는 사회적으로 그런 생각이 팽배한 시대였다. 자본론 1권에는 이런 자본가들이 미성년자들의 노동시간을 제한하자는 법을 어떤 식으로 반대하는지에 관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보고 매력을 느낀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은 것이라곤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공산당 선언』 中
마르크스 이전까지는 "가난한 사람이 고통받는 이유가 그들이 게을러서 그런 거지 사회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자본가와 다수 대중은 생각했지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러시아 혁명, 국공내전 등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자 "빈부격차가 큰 데에는 사회적 책임도 있다는 걸 인정하겠다"로 입장이 바뀌게 된 것. 그 후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이론을 일부 받아들여 사회적 책임과 분배에 대한 의무를 인정하게 된다.[93][94]
父 하인리히 마르크스 (1777 ~ 1838) / 母 헨리에테 (1788 ~ 1863)
카를 마르크스 (1818 ~ 1883) / 妻 예니 베스트팔렌 (1814 ~ 1881)
장녀 : 예니 카롤리네 (1844 ~ 1883) / 사위 : 샤를 룽게 (1839 ~ 1903) 저널리스트
외손자 : (1873 ~ 1874) 요절
외손자 : 장 룽게 (1876 ~ 1938) 저널리스트
외손자 : (1878 ~ 1883) 요절
외손자 : 에드가 룽게 (1879 ~ 1950) 의사
차녀 : 예니 로라 (1845 ~ 1911)[95] / 사위 : 폴 라파르그 (1842 ~ 1911) 사회주의 운동가
외손자 2명, 외손녀 1명 : 어려서 요절
장남 : 에드가르 (1847 ~ 1855) 요절
차남 : 헨리 에드워드 가이 (1849 ~ 1850) 요절
3녀 : 제니 에벌린 프란세스 (1851 ~ 1852) 요절
4녀 : 제니 줄리아 엘레노어 (1855 ~ 1898)
성별 불명 : 요절 (1857)
사생아 추정 : 프레데릭 데무스 (1851 ~ 1929) 가정부 헬렌 데무스(1820 ~ 1890) 소생
우리에게 카를 마르크스는 도덕적, 정신적 생활의 거장이지 지팡이를 휘두르는 목자는 아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게으른 자들을 때려 깨우는 이이며, 반쯤 잠들어 있기에 선의의 전투를 위해 자각돼야 할 훌륭한 에너지들을 깨워 일으키는 자이다. 그는, 관념들의 저 선명함과 통합성을 달성하기 위해, 그리고 만일 우리가 추상들에 대해 헛되이 이야기를 늘어놓길 원치 않을 경우 필요한 저 건실한 문화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강렬하고 끈질긴 성격의 작업에 대한 한 사례이다. 그는 의식적이며 사색적인 인간[이라는 건축물]의 한 벽돌 조각이다. 말하면서 자신의 혀를 살피거나 심장의 떨림을 느끼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거나 하지 않으며 현실을 그 본질에서부터 포괄함으로써 이를 지배하는, 즉 민중의 심성에 침투하여 편견의 생장을 분쇄하고 관념들을 일정하게 명징화하며 도덕적 성격을 강화하는, 견고한 논법(syllogism)을 건설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세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술한 것처럼, 그가 창시한 학문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오늘날 인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그의 영향력 위에 있으며, 마르크스를 빼놓고는 오늘날의 학문을 서술하기란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베버 역시 앞에서 언급되었듯 마르크스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기꾼이라고 주장한 바 있을 정도로 그의 학문적 업적은 견고하다. 그가 제시한 여러 학문적 개념과 이론들은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 비판,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5. 비판과 그에 대한 반박[편집]5.1.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의문과 '과학성' 담론[편집]
칼 포퍼 등의 과학철학자는 이론의 모호함에 대해 비평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의 몰락이 도래할 것임을 반증할 수 있는가, 즉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포퍼가 마르크스에게 제기하는 비판이다.[97] 더 덧붙이면 포퍼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라는 체계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어떤 점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그것을 실제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비판가의 자질을 타고 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과학이 아니며 형이상학적이며, 이상론이기 때문에 위험한 이론이거나 좋지 않은 이론이라 주장했다. 애초에 마르크스가 스스로가 기존의 여러 다양한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자신의 이론과의 차이점으로 내세운 것이 "과학적 사회이론"이었으며, 마르크스 스스로의 정의한 바 "공산주의"는 곧 "과학적 사회주의"이기에 포퍼의 비판은 바로 그 지점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포퍼는 마르크스 이론의 또다른 독특성을 마르크스 자신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 도덕적 경향이 이론 가득 묻어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자본을 읽으면서 앞 부분의 선험적 명제들을 검증하는 내용을 지나 현실을 비판하고 사실의 목록을 구성하는 측면 쯤에 도달하면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분노하고 참여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폭로를 전술적으로 기술하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이끌어내는 것이 마크르스 이론이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라는 것이다. 분명 이 점에서 포퍼의 비판은 일견 중요한 지점을 가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자신은 이론의 도덕성을 배격했고 철저하게 현실을 바꾸고자, 독일 이데올로기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바처럼, 해석이 아닌 실천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의도까지 그의 죄과로 씌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알튀세리언을 비롯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포퍼를 비롯한 과학철학자의 비판에 대한 몇 가지 반박을 제시해 왔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말한 과학은 생시몽과 푸리에의 공상론과의 차이점에 기반한 것이기에 포퍼 등이 사용하는 '과학'과는 쓰임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마르크스 시대의 '철학'이 재현된 현상을 분석한 것인데 반해, 마르크스주의는 현상의 허위와 표면을 파헤쳐 그 내부를 관찰하는 이론이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기존의 사회과학은 (지배) 이데올로기이며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정리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 특히 알튀세리언이 말하는 과학은 기존 과학철학에서 논의하는 과학이 아니기에 비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포퍼가 비판하는 과학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과학이 아니고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이며, 따라서 포퍼가 내세운 기준들은 통용될 수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다만 자연과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이 다르다는 주장은, 어찌됐든 자본을 공저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엥겔스부터 포물선 운동 등의 자연법칙을 그대로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데 인용하였고, 그 후의 소련에서 과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보면 설득력이 부족한 편이다. 그리고 현상이 아닌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주장 역시, 많은 과학철학자들이 동의하는 테제임은 인정하나, 포퍼 등의 비판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새로운 기준을 내세워 회피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러한 논쟁은 모두 마르크스가 과학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식화하지 못했으며, 과학을 정의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본격적인 논의에는 접근하지 못했기에 발생한 것이다. 충분히 비판받을 만하다.
일단 마르크스의 '과학성'에 의문을 제기하려면 과학의 정의를 내려야한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과학을 엄밀히 정의하려 했던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 오늘날 과학철학에서의 주류의견은 과학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의미가 계속 변화하는 개념이기에 그 기준을 명확히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토마스 쿤 이후로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확정하려던 여러 도전들은 모두 좌초되었으며, 그렇기에 사실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인가, 비과학적인가 하는 질문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는 20세기의 과학에 대한 엄밀한 기준을 19세기 인물에게 들이대는 것은 무의미할 뿐더러, 사실 그러한 기준들 또한 현재에 와서는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과학적 사회주의'나 '마르크스 비판과학'에 대한 시비는 이미 무의미해진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데이비드 하비의 '지리학에서 혁명적 이론과 반혁명적 이론: 게토 형성의 문제'나,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살펴볼 것.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향성에 대한 설명은 곧잘 필연적인 예언으로 둔갑하여 독단주의로 이어지고, 혁명가로 하여금 그의 이론이 묘사하는 필연적인 종착역에 도달하기 위한 폭력을 정당화하도록 부추기기도 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어떻게 운영할지에 관한 그림을 선명하게 그리지 않고 추상적으로만 묘사했는데, 이 점 역시 혁명가가 제멋대로 마르크스이론을 해석하고 변형하면서 정치적 야욕을 정당화하는데 쓰이기도 했다[98].
20세기 후반, 소련 및 동유럽을 위시로 한 스탈린주의는 국제적 정세, 냉전적 패권 경쟁, 현실 정치에 매몰되어 본래의 사회주의적 이상, 마르크시즘 이론 등과 전혀 관계없는 압제적인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아직 헤겔과의 접점 등이 보이곤 하던 초기의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이 인간본질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 서유럽의 학자들 사이에서 등장했는데, 이를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하고 이들의 사상을 비판이론이라고 부르는데, 20세기 사회학 및 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루카치 죄르지, 막스 호르크하이머 등 어마어마한 라인업의 학파다. 최근에는 악셀 호네트 등이 이를 계승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저작이 전기와 후기가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르크스 후기 이론들보다 오히려 전기 이론들이 더 중요하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해석/비판에 따르면, 보통 마르크스를 논할 때 등장하는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비판 등은 마르크스 후기 저작들의 이론들이며, 마르크스가 '과학적 이론', 현실 정치에서의 변혁 등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단순한 정치투쟁이론이 되어 버렸다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많은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실패한 경우가 부지기수한데 그것은 과거와 달리 질서가 잡히지 않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 선동이 곳곳에 일어나거나 노동자들이나 하층민들 가운데 좋은 사람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서로 물어뜯기에 바빠 결국에는 더 가난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99][100]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가 그럭저럭 굴러가는 사회들 중, 혁명, 내전, 패전(총력전에서의) 등 국가가 거의 무너졌다 재건될 정도의 사건을 겪지 않은 곳이 드문 이유 또한 생각해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만 해도 한국전쟁, 개발독재 등을 통해 전통적 공동체들이 거의 산산조각 나고 나서야 전근대적 불평등이 철폐될 수 있었고, 수 차례의 혁명을 겪은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안정된 사회를 유지한 영국에서는 아직도 사회 곳곳에 신분제가 잔존해있다. 이를 고려하면, 진보가 굳이 혁명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부정의한 구체제를 완전히 와해시킬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인 것도 있다. 같은 논리로 공론장에서의 합리적 발화 산출을 통해 자본주의를 '교정',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 하버마스가 비판받는 것을 보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앞 문단에서 "착한 사람" 운운은 유치한 이분법에 불과하며,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혁명의 당위성은 '불합리한 체제가 빚어내는 현실'에서 나오지' 부르주아가 나쁘고 프롤레타리아가 착하니까 혁명하자는 게 아니다. 위의 내용은 인종차별을 철폐하자는 주장에 "백인을 나쁜 사람 취급한다. 유색인종도 나쁜 사람 있다." 수준으로 유치하게 투정하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혁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왕과 귀족이 다스리는 시대를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를 성립시킨 것은 미국과 프랑스에서의 폭력혁명이었으며, 두 역사적 사건이 없었더라면 민주주의적 가치가 이렇게까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만이 폭력혁명을 주장한 것도 아니고, 현대 민주주의의 정초자라 불리는 루소 등의 철학자들 또한 무력을 동반한 혁명을 외쳤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자들에게만 폭력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당장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무력을 동원한 폭력적인 독립혁명 또는 전쟁을 주장하지 않았나? 당장 '평화로운 자치운동' 같은 것을 주장한 이광수 등이 한국사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만 봐도 이는 어불성설이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의 비판적 계승자[101] 중 하나인 막스 베버는 마르크스의 계급이론 등 이론은 물론이거니와, 방법론에 대해서도 전방위적인 비판과 수정을 시도했다. 베버는 마르크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기민하게 파악하여 계급의 유형과 그 사이에서 매개되는 힘에 대해 정교한 분석을 시행했고, 사회과학에서 가치와 사실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방법론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학술적 논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 뒤로 베버는 맑스주의자 루카치한테 비판받고, 루카치도 다시 비판받았으며 그 비판자들 또한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급진적 혁명 자체가 가지는 파괴성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진보성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단순히 폭력적 과정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철학과 사상을 배제할 수는 없다.
라인신문 시절의 젊은 날의 마르크스는,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를 역사발전 단계론에 근거해서 자연스럽다고 옹호하기까지 하는등 당시의 식민지들에 대한 인식에서는 계몽주의적, 유럽중심주의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후의 저작에서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식민지배에 대해서 일관적으로 비판적인 논조를 보였으며, 후에 1차 인터내셔널에서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행하기 위해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전 민족을 초월하여 노동자들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아직 사상이 완전히 정립 되지 못했을 젊은 시절에는 유럽주의적사고 방식이 있었을지 모르나 이론의 체계가 잡힌 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중농국가, 예컨대 아시아의 중국, 유럽의 러시아 등에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적이 있었고 마르크스에게 혁명 발생 유력지는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이는 인종주의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민족적인 문제를 떠나서 아시아 국가들은 당시 산업화가 진행되지 못한 국가들이 많았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혁명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에 따라 해석한 것일 뿐 이를 백인인종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추후에 마르크스는 농경국가에서도 노동시위가 발생하는 것을 지겨보고, 농경국가에서도 급격한 산업화와 생산성 증대, 노동자 계급의 계급의식 구축 등이 선제된다면 혁명이 가능하다고 입장을 변경하였다.
우파들은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예로 들면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선동하여 폭력적 투쟁을 주장하였으면서, 정작 자기는 친구 엥겔스의 후원으로 살았으며, 따라서 이 자의 공산주의 철학은 마르크스 자신의 일생 행적에 비추어보면 모순덩어리인, 인간의 탐욕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라는 주장이다.
또한 자본가와 악질지주들을 그렇게 비난했으나, 자신의 인생의 모습은 마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까라마조프와 비슷한, 전형적인 구체제 귀족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상당히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한 예로 마르크스는 자기가 부리는 가정부한테 제대로 된 월급을 거의 안 주고 사실상 무보수로 부려먹었다...
비슷한 내로남불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루소는, 평생을 거쳐 반복된 궁핍한 삶속에서 현실과 싸우며 자수성가한 인생사와 스스로의 추태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반성적 면을 숙고해 동정의 면이 많이 있다. 인간으로서 완벽한 삶을 산다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며, 어떤 인간이든 일생동안 무수히 많은 추태를 저지르며 살아간다. 문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수많은 대중을 계몽시켜야 할 입장에 서 있는 사상가라는 직종의 인간들에게 정말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것은 바로 이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자아성찰이며, 이것이야 말로 자아 발전의 원동력이며, 철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 중요한것이 마르크스의 경우엔 없었다.
예컨대, 금수저물고 태어나서 노동계급의 고통을 일생동안 단 한번도 공유해본적 없으며, 인격적으로 귀족에 가까운 마르크스가, 자기반성이 결여된 편협되고 자기중심적인 인성의 소유자인 그가, 대체 무슨 공감능력이 생겨나 사회 약자 노동자들의 고통을 통감할 것이며, 또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한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할 수 있겠느냐,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노동자 계급을 선동해 이용해먹은것 아니냐" 라는 비판이다.
이에 대한 변론으로는 '개인의 인성'과 '사상가로서의 이론'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102] 굳이 따진다면 어느 시대든 간에 기본적으로 놀고 먹고 하는 유희와 옳고 그름 등을 생각하거나 공부를 하는 등 사색 등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 24시간 먹고 사는 것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는 삶의 여유가 필요한 것이라서, 굳이 마르크스뿐 아니라 세계사에서 중대한 변혁을 주도하거나 불의에 항거하거나 한 지도자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대개는 그 시대의 중산층 이상의 신분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대거 등장한 좌파 사상가 및 행동 양식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다. 역시 유대계 중상층 출신이었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마르크스 동시대 인물이었으며, 후대 아나키즘과 민주 사회주의, 그리고 러시아 대중적 사회주의의 도덕적 지향성을 놓은 알렉산드르 게르첸도, 국제 아나키즘의 선각자이자 1차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대차게 싸운 후 공산주의와 결별한 미하일 바쿠닌도 해당된다.
소련의 탄생을 이끌어낸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또한 중산층의 삶을 사는 집안이었으며 그 아버지는 공로로 하급 귀족위를 받을 정도의 집안이었다. 실제로 당시 사회주의 운동가 중에는 중상층 출신자가 다수였으며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생활양식에 익숙했고, 관용적이었다. 룩셈부르크 시절 숱한 이론가들과 혁명가들이 모여있던 독일 사민당은 왈츠 파티를 열고 와인을 마시는 등의 세련된 모습을 보였다. 재밌는 것은 이런 중상층 출신 운동가들이 하층 출신 운동가에 비해 변절하는 일은 적었다.
많은 독서량과 사고력은 물론이고, 당원들 앞에서 상대방의 논리를 논파해 가며 설득할 웅변력, 게다가 외국의 활동가들을 만나 사상적 교류를 하고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는 외국어 능력까지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론가들은 어렸을 때부터 공장에서 노가다 하는 대신 부모님이 사준 책 보고 자란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 게 당연하다는 주장도 있다.[103]
마르크스가 한 말 부터가 "이론은 곧 무기다"인데, 실로 '이론'은 불의에 항거하는 대중활동, 체제를 전복시키는 혁명투쟁의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지만 정작 그 불의와 부조리의 피해자인 노동계급에서 "왜 내가 핍박을 받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 부조리에 항거할 방법들을 발견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 시대의 계몽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은 당대 근대사상은 어쩔 수 없이 계몽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성향을 띌 수 밖에 없다. 당대 수 많은 사상가, 활동가, 혁명가들은 심한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충분히 공부할 수 있었던 여유, 그런 여유를 통해 획득한 지식, 그러한 지식을 개인의 영달에 쓰기 보다는 스스로는 일어나 싸울 수 없는 대중들 앞에 서는 "선봉(vanguard)"이 되어 부조리를 혁파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뭉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105]
마르크스, 엥겔스, 바쿠닌, 게르첸, 등 19세기 좌파 사상적 조류의 큰 이름들 치고 진짜 노동자 계급 출신인 경우는 없거나, 설령 집 자체는 가난 했어도 자신의 명석함을 눈여겨 본 주변인들이 지원을 해주는 등 집안 형편과는 별도로 공부 하면서 자랄 수 있었던 경우들이 대다수다. 심지어 주변에서 무식하다고 비웃었던 스탈린도 신학교 다니면서 지식인으로 필요한 교양과 독서는 그래도 다 기본적으로 하고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또한 이러한 중상층 출신 운동가들의 사상에 대한 충성심도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가는 현상이다.
당장 사람이 이상을 품고 그에 투신한다는 거 자체가 어렸을 때부터 눈 앞의 물리적 이익을 넘어 뭔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믿는 습관이 있어야 하는데, 당장 배가 고프고 추우면 이상이고 철학적 지향성이고 뭐고 눈에나 들어 오겠는가? 단순히 자기 처지에 기반하여 자연스러운 계급적 증오심으로 좌익에 투신한 사람들이야 "먹고 살기 위해서 했는데 알고 보니 걍 체제에 충성하는 게 더 밥벌이가 된다"라고 철면피만 깔면 쉽게 전향 할 수 있지만, 중상층 출신의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구상 내고, 서술하고, 선동해 온 일생의 가치관 자체를 버리는 일이니 더 우직하게 자기 사상을 관철할 수 있는게 당연하다.
게다가, 생활수준에 있어서 여유를 갖고 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론적 고찰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나중에 상황이 변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공부하고 배운 것에 비추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 보다 확고한 중심이 자리잡았기에 쉽게 변절하지 않는 반면, 탄탄한 이론적 기초 없이 정의감과 정열, 순간의 열혈한 증오심으로 투쟁을 시작한 사람들은 소련 붕괴, 고난의 행군과 같은 상황이 닥치면 기존의 입장을 180도 바꾸어 정반대의 뉴라이트 정치적 세력에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다. 아니면 폴 포트처럼 크메르 루주와 같은 더 극단적인 노선으로 나가며 기존 사회 계층들을 다 절멸시키던지.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해 오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t, es kommt aber darauf an, sie zu verändern.)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106]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글귀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中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이 국가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그 자신이 민족적이다.
한 시대의 지배사상은 늘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루이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18일>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Segui il tuo corso, e lascia dir genti!)
1842년 24살 이래 계속 책을 썼고 65세로 죽고 나서도 책이 나왔다. 자본론의 경우, 마르크스가 직접 교열하고 출판한 것은 1권 '자본의 생산과정' 뿐이고 나머지 2권, 3권은 엥겔스에 의해 편집, 출판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마르크스의 저작은 단행본 이외에도 전집의 형태로 나와있는데 영어나 독일어를 잘한다면[107] 이쪽을 보는 편이 마르크스의 집필 활동을 전반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마르크스가 당시의 사상가들과 교류했던 편지부터 낙서까지 정말 세세하게 실려있다. 정본으로 여겨지는 전집은 크게 MEW(Marx-Engels Werke/메프)와 MEGA(Marx-Engels-Gesamtausgabe/메가)로 나뉘는데 메가만 해도 총 114권짜리 기획이다.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발간 현황 'MEGA' 내는 강신준 교수
대표 저작 (1818~1883년)
1839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108] -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
1842년, The Philosophical Manifesto of the Historical School of Law
1843년,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전문 보기
1845년, 《신성가족》
1845년,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Theses on Feuerbach)전문 보기
1846년, 《독일 이데올로기》
1847년, 《임금 노동과 자본》(Wage-Labour and Capital)전문 보기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Napoleon)
1862년, 《잉여가치론》(Theories of Surplus Value), 3권
1865년, 《임금(혹은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Lohn, Preis und Profit/ Value, Price and Profit)전문 보기
1867년, 《자본 I》(Das Kapital)
1875년, 《고타강령비판》(Critique of the Gotha Program)
사후 저작 (1883년 이후)[110]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Marxists Internet Archive)에서 제공하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출간연도 별 저작
영화 - 청년 마르크스
애니메이션 - 领风者(영풍자, The Leader)
소설
디어 맑스, 손석춘
마르크스 서울에 오다, 박홍순
케인즈 학파를 형성한 20세기 경제학자 케인즈는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론을 가르켜 "이것은 꾸란과 같다, 왜 이것을 맹신하는 사람이 있는지, 왜 이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는지도 알것 같다, 나는 내용이 전혀 이해가 안가지만" 이라 평한적이 있다. 그리고 공교로게도 마르크스가 사망한 해에 케인즈가 태어났다.
빅데이터 인문학의 저자들이 구글 엔그램 뷰어를 이용해 지난 200년 동안 가장 유명했던 사람을 선정했는데 마르크스가 2위였다. 1위 아돌프 히틀러, 2위 카를 마르크스, 3위 지그문트 프로이트, 4위 로널드 레이건, 5위 이오시프 스탈린, 6위 블라디미르 레닌, 7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8위 찰스 디킨스, 9위 베니토 무솔리니, 10위 리하르트 바그너순이었다.[111]
한국의 문과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꼭 한번 마주치는 사람. 법과 정치나 지리 과목들을 제외한 모든 사회탐구에 등장하는 빌런이다. 물론 고교과정에서 다루지 않을 뿐 대학에서는 마르크스 정치학과 성문법 체계[112]을 배우고 연구하고[113] 심지어 순수 철학과 관련이 적다고 여겨지는[114] 지리학에서 조차 지리학과에서 70~80년대에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지리학에 대해서도 배운다.[115] 그만큼 현대 사회의 역사에서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겠지만.
뿐만아니라 동서 분단 시절 동독에 위치해 있었던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1953년 동독 정부에 의해 강제로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로 개명을 당했다가 통일 이후 옛 이름을 되찾게 된다.
딸이 아빠는 어떤 색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빨간색이라고 대답해서 빨간색이 공산주의자들의 상징색이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그 이전부터 빨간색은 좌파 내지는 진보의 이미지로 차용되었다. 대표적으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때 시민들은 빨간색 깃발을 휘날리며 혁명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2018년 중국에서는 카를 마르크스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었고 중국이 마르크스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임했다.# 하지만 미국, 유럽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19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일대기를 그린 애니메이션인 领风者가 7부작으로 제작되었다.
마르크스가 저술한 서적들은 한국에서는 공산주의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인식이 박혀버려서 순수한 공부 혹은 연구 목적으로 마르크스가 저술한 책을 소지하거나 보고 있어도 보수적이면서 사회적인 지위나 부를 쌓은 사람들은 이를 안 좋게 보거나 '쓸데없이 시간낭비 하고있네' 하며 하찮게 본다. 특히 나이 좀 있는 경찰이나 군인들은 의심스럽게 본다. 심지어 그의 이름을 주로 '맑스'로 표기하던 시절에는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성향이 완전히 다른 보수주의 학자인 막스 베버의 서적 역시 문제되기도 하였다.[116]
반대로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에서는 다른 인물들의 동상이 반달당하는 가운데, 마르크스의 동상은 보호받았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손자의 손자, 즉 현손 조셉 마르크스는 현재 파쿠르 선수이자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다.#자본주의의 단맛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친 운동권 성향의 서울권 대학 연합동아리들 중 '맑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있으며, 2000년대 초에 열린 '맑스 코뮤날레'라는 행사에서는 "날씨가 맑다"와 "맑스입니다."는 뜻을 함께 담아 "내일은 맑습니다."라는 이름의 문화 행사를 열었다.#
노동자연대에서 주관하는 연례 마르크스주의 포럼 역시 공식 표기가 '맑시즘'이다. 그리고 가판에서 파는 책을 보면 '삐딱이들을 위한 맑스 가이드'가 있다. 그런데 얘네들은 이 둘은 '맑'으로 표기하면서 나머지는 전부 다 '마르크스'로 표기한다.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맑'스
'맑'스는 맑음의 덩어리,
혹은 당원을 친 이념의 빵
칼 막 쓰지 마라
반박이 불가능한 이 빵에
입을 대는 순간
포도주보다 붉은 혁명의 밤이
촛불처럼 타오른다.
너 이념 장사꾼이지?
칼 막 쓰지 마라.
이 빵으로 인해 세상은
맑거나 맑지 아니하며
공평하거나 공평하지 아니하도다.
오, 내 몸에 흐르는
타락천사의 붉은 피
너 칼 막 쓰지?원구식, '맑'스 『시와사상』 (2008. 겨울)[117]
In America, your job determines your marks. (미국에서는 당신의 직업이 당신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In Soviet Russia, Marx determines your job.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가 당신의 직업을 결정합니다.)
여담이지만 북한에서는 막국수라고 돌려 말하기도 카더라.[118]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 치숙에서는 막걸리로 언어유희가 되었다. 국어시간에 배우는 언어유희의 예시 중 하나. 태평천하의 원본에는 '막덕(마르크스 추종자를 얕잡아 부르는 말)'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대학생 사이에 떠도는 농담 중에 레포트를 작성할 때 '맑스'라고 표기하였더라도 레포트를 제출할 때는 '마르크스'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레포트 분량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공안 당국의 학생 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성을 부리던 독재 정권 당시,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책가방을 검문하던 형사들이 막스 베버[119]가 쓴 책을 발견하곤 잡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회학 가르치는 교수님들께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중 하나다.[120]#
중국어에서는 马克思/馬克思(Mǎkèsī, 마커쓰)라고 한다. 가끔식 수사적 표현의 일환으로 이렇게 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튜버 소련여자(실제 러시아인 유학생)은 '마륵쑤' 정도로 발음한다.굉장히 빨리 말한 발음이지만 '맑스'라는 발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간판에 마르크스의 얼굴을 넣은 해장국집의 사진이 짤방으로 돌아다닌 일이 있다. 경향신문 기사
[1] 공교롭게도 러시아의 대문호인 이반 투르게네프와 생몰년도가 같다. 심지어 마르크스가 투르게네프보다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나고 6개월 먼저 사망한다.[2] 정확히 마르크스가 죽은 해에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태어났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케인스는 자본주의를 보완해서 마르크스의 전세계 공산주의화의 꿈을 좌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3]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 작가 조지 엘리엇도 여기 묻혀 있다.[4] 논문은 ‘자연에 관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철학의 차이’였고 이 중 에피쿠로스학파의 변증법을 옹호한 논문이었다.[5] 반신론적 무신론이다.[6]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 때문인지 의외로 러시아 제국 출신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7] 공산주의는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사상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창시했다는건 엄연한 착각이다. 그러나 그때의 공산주의는 다 실현 불가능한 내용이었다. 그것을 발전시킨것이 마르크스이다.[8]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점을 잘 간파하고 현대의 발전된 자본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9] 독일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의 동료이자 친구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직접 사회민주당을 후원하면서 많은 영향을 끼친 데다가 사회민주당 초기 당원들도 마르크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의 역사와 이념을 얘기할 때 마르크스는 절대 빼놓을 수 없으며, 좌파당도 계보로 따지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민당의 우경화에 반발해서 떨어져 나간 독일 공산당에서 이어지고 독일 공산당과 그 후신인 사회주의 통일당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삼은 만큼 마르크스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10] 이념의 토대인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사회민주주의를 창시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기념하고 있다.[11] 정반대로 아돌프 히틀러는 언급되는 것만으로 질타를 받는다.[12] 국내에서 반백 년 가까이 독일 사회과학과 막스 베버 사회학을 연구한 전성우는 "마르크스는 생존의 사회과학을, 베버는 자존의 사회과학을, 뒤르케임은 공존의 사회과학을 펼쳤다."라 요약한 바 있다.[13] 지금도 마르크스를 다룬 대학생 교재를 내다버린 사건이 일어난다.[14] 그리고 한글로 표기한 외국어 발음 중엔 사실 원음과 비슷하지 않은 단어가 매우 많다. 예를 들어 'dog'와 같은 쉬운 단어조차 한글으로 쓰면 '도그'지만 발음은 [dɔːɡ], 즉 '더ㅏㄱ'쯤으로 읽어야 한다.[15]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마르크스'를 배척하고 '맑스'를 우선시해야 할 이유가 될 순 없다. 어차피 현대 우리가 쓰는 말에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표현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외국어를 변환할 때 음절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어째서 그렇게까지 맑스라는 표현을 사수하고 싶은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16] 단 [ㄷ] 말음의 경우 더 익숙한 'ㅅ' 표기로 옮긴다.[17] 하물며 저 'ㄹ' 이 발음된다 하더라도 그게 [r]인지 [l]인지조차 보장할 수 없다. [마륵쓰]? [말륵쓰]?[18] 트리어는 독일과 룩셈부르크를 흐르는 모젤 강변에 위치한 독일의 서부 지방으로, 당시 독일 동부 지방은 농촌이 많고 전통적 색채가 강했으나 서부는 영국, 프랑스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산업화, 근대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의 폐단에 반대해 나타난 사상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배경이 쉽게 이해된다.[19] 성씨인 마르크스(Marx)는 구약성경의 등장인물 모르드개에서 유래한 유대계 성씨 Mordechai의 독일어 형태이다.[20] 본 대학교 시절에는 친구들끼리 술 먹고 소란 부리는 일이 잦았고, 심지어 당시 독일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이었던 결투 경험까지 있다. 그러다보니 당시 문제 학생들만 수감되는 학생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21] 마르크스가 입학하기 전인 1826년에 프로이센 국왕의 이름을 따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로 정식 명칭을 바꿨다. 그런데 보통 독일 대학들의 명칭은 예컨대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처럼 지역명에 α(대체로 설립자나 유명한 출신 인물의 이름)를 추가해서 결정하는데, 의식해서 정식 명칭을 부를 때가 아니면 지역명만 남긴 대학명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 뮌헨대, 프라이부르크 알베르트 루트비히 대학교 → 프라이부르크대) 즉 저때만 해도 그냥 '베를린대'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베를린이 분단됨과 동시에 교명을 베를린 훔볼트대로 바꾸었고, 여기에 소련을 반대하는 대학 인사들이 서베를린에 베를린 자유대를 설립하면서 '베를린대'라는 호칭이 사라지게 된다. 대체로 독일엔 도시 하나에 종합대학교(Universität)가 하나만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특이하게도 베를린은 분단으로 인해 예대 간판을 달고 있지 않은 종합대학교가 2개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베를린대'라고 부르면 둘중에 어느 대학을 지칭하는지 확실하지 않아서 '훔볼트대', '자유대'로 부르게 된 것이다.[22] 사실 후일 마르크스의 사상과는 큰 관련이 없어서 마르크스주의 공부를 한다고 해도 이 논문을 찾아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우리나라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할 때 마르크스의 인기에 힘입어 그다지 학술적 가치는 없는 이 논문까지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23] 이 논문은 문과 박사과정 학생들에게는 현대 사회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수록, 오히려 박사 논문 만큼은 더욱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써 볼 필요가 있다.는 사례로 자주 활용된다.[24] 이 대학이 있는 예나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소속이었다.[25] 이 신문은 1842년부터 발행되었으며 청년 헤겔파, 반정부 세력 등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개혁파, 이상주의자, 혁명가들이 기사를 썼다.[26] 실제로 신문의 편집장은 신문사 내에서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27] 당시 라인 지방은 개발이 본격화되던 산업도시였기에 정부와 산업 부르주아지와의 충돌이 꽤 있었던 모양인데, 아마 정부를 까려고 부르주아지들이 마르크스를 신문 편집장 자리에 앉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정부 비판적 기사를 꽤나 많이 다루었다.[28] 여기서 '전통적으로'라는 말은 중요한데, 유럽 봉건시대의 판단 기준(법)은 이전의 관례/관습에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법적 확신에 의해 지속된 관습법 수준이란 말이다.[29] 여담으로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라인신문을 '라인강의 창녀'라고 씹었다고 한다.[30] 당시 러시아 정부는 유럽에서 19세기 내내 반계몽주의와 야만적 관습 및 탄압의 대명사였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프로이센에 비해 힘이 강했다.[31] 다만 이때에는 그저 편집자와 기고자의 관계에 불과했기에 그저 스쳐지나가는 정도였다. 둘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은 마르크스가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후의 일이다.[32] 마르크스는 본 대학에서 베를린 대학으로 옮기기 전의 기간에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이미 약혼을 맹세했었다. 둘은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시절 시에 관심이 있던 마르크스는 예니를 위하여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곤 하였다. 하지만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할 것을 우려한 예니는 약혼 사실을 바로 공개하지 않았고, 약혼한 지 7년이 지나서야 둘은 결혼할 수 있었다.[33] 이후 마르크스는 루게를 두고 부르주아 적대자라고 비난해 왔으나 경찰이 루게를 잡으려고 할 때는 주의하라는 편지를 보내는 배려를 보이기도 하였다.[34] 당대의 헤겔 청년파 중에서도 기존의 반정부적 태도를 버리고 마르크스와 그의 활동에 적대적이었던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가 비판의 주요 대상이었다.[35] 1836년 조직된 단체로서 독일계 이민자 기술공들이 주축이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와 공상적 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노동자 출신의 빌헬름 바이틀링의 주도 하에 있었다.[36] 이때 마르크스와 교류한 대표적인 시인이 낭만주의로 유명한 하인리히 하이네였다. 하이네는 파리에 온 마르크스 부부와 자주 만났으며, 자신의 시를 읽어주면서 마르크스의 편집을 받았다. 그로 인해 하이네의 시는 점차 참여문학의 형태를 가지게 되어 <슐레지엔의 방직공>, <독일, 겨울 동화집> 등의 걸작이 나오게 된다.[37] 여기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노동의 소외(Alienation of Labor)를 다루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생산해내지만 정작 이들은 부유해지지 못하며 자신의 생산물인 자본의 지배하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적 존재로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해야 하지만 결국 그 기회를 상실하고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자본이 임금 노동을 자신 것으로 만듦으로써 노동자는 일하지 않는 동안만 자기 자신일 뿐이다. 이런 경향은 노동을 분업하는 생산 방식에 이르러서 더욱 극대화된다.[38] 의인동맹의 영향을 받은 분파 중 하나가 프로이센에서 국왕 암살을 기도하다 실패한 적이 있었는데, <전진!>이 그 소식에 관심을 보인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39] 마르크스는 브뤼셀 망명 기간 도중에 잠깐 엥겔스와 함께 영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한 달 반에 가까운 여행 동안 마르크스는 영국의 노동 상태를 살펴보았으며 당시 영국에 불고 있던 차티스트 운동의 열풍을 목도했다. 또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가들과 독일 의인동맹 활동가들을 연결하여 '우애 민주주의자(Fraternal Democrats)"이라는 조직을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40] <독일 이데올로기>에 수록된 내용으로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담고 있다. 중요한 건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다라는 그 유명한 문구가 여기서 나온다.[41] 원제는 <독일 이데올로기 -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 및 '진정'사회주의 등에 의해 대표되는 독일철학>[42] 이런 활동으로 인해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신라인신문>을 두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훌륭한, 비할 데 없이 탁월한 기관지"로 평가했다.[43] 프로이센 정부가 <신라인신문>을 대상으로 행한 고발과 재판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재판조차 자신의 사상을 알리고 민중의 혁명을 고취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재판정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화려한 언변으로 자신을 변호했고 그 결과는 으레 무죄석방으로 나타났다.[44] 이때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이미 발생한 봉기들을 지지하는 활동을 펼쳤지만 그 결과는 여의치 못했다. 의회 내의 좌파 세력조차도 봉기를 지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더 이상의 혁명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직 봉기가 일어나고 있는 지역으로 가서 새로운 혁명의 시기 전까지는 승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견해는 봉기자들을 격분시켰지만 끝내 마르크스의 견해대로 봉기는 진압당하고 말았다.[45] 추방되지 않으려고 국적을 포기한 것 때문에 프로이센 정부는 이를 비열한 행위로 간주하여 추방했다.[46] 다만 손씻기가 아직 보편화되기 이전일 정도로 위생관념이 열악했고 항생제도 개발되지 않아 영아사망률이 아직은 높았던 시절이었기는 했다. 애초에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절이 올리버 트위스트의 배경이 된 시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47]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기대며 먹고 사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철도 공무원이 될려고 했지만, 남루한 옷차림과 수염으로 인해 험악해보이는 외모, 그리고 악필로 인해서 결국 취직되지는 못했다. 다만 불행 중 다행이라 할수있는지 이후로는 유산을 상속받고 씀씀이도 줄어들어서 어느정도는 먹고 살 정도는 되었다.[48] 그래봐야 20만부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쇄술이나 교통의 발달이 아직 덜 이루어졌기 때문에(철도가 깔리기 시작한지 몇 년이 채 안 되었고, 증기기관차였기 때문에 현대 기준으로 보면 속도는 느리기 그지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많은 발행부수였다.[49] 1860년대 당시에는 공화당은 노예제의 적극 폐지를 주장하는 진보 스탠스의 정당이었다. 하지만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보수 성향으로 점차 쏠리게 되고 이 기조가 정착된 것. 물론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아이젠하워 같이 잠깐 진보적인 정치를 펼친 대통령은 있었지만 이것도 닉슨이 끝물이다.[50] 사실 1857년 경제 공황과 1860년대 남북전쟁의 영향을 심하게 받은 탓도 있다. 그래도 기사를 잘 썼기 때문에 편집부와의 마찰에도 꾸준히 기사를 썼지만 결국엔 결별하게 되었다.[51] 다만 이건 당시 마르크스가 정치범으로 낙인찍혔고 그리 부유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럽 각지로 돌아다닐 형편이 안되었던 탓도 있다.[52] 다만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기고한 기사들이 호평을 얻은 것과는 별개로 저속 마감을 했던지라 편집부에서 원고를 빨리 좀 내라고 압박을 가해서 마찰이 심했다고 한다. 뉴욕 트리뷴지에 실린 마르크스의 원고 상당수를 엥겔스가 대신 써서 내주었을 정도.[53] 케네디 대통령도 마르크스의 기자 이력에 대해 공부한 모양인지 신문 편집인을 앉혀놓고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1851년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카를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보잘 것 없는 저널리스트를 런던 특파원으로 고용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회당 5달러라는 괜찮은 원고료를 받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원고료를 올려달라고 졸랐다는군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친구는 다른 생계 수단을 찾아 나섰고, 결국엔 ‘트리뷴’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이 세상에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혁명과 냉전의 씨앗을 뿌리게 될 그 사상에 풀타임으로 자신의 재능을 바치게 되었지요. 만일 뉴욕의 그 자본주의 신문이 그에게 원고료를 조금 더 올려주고 계속 특파원으로 활동하게 했더라면 아마 역사는 크게 달라졌겠지요.”[54] 이외에도 그가 개인적으로 썼던 원고들이 많았다. 소련 말기에도 카를 마르크스나 레닌 등의 미공개 원고가 상당수 존재했는데, 소련이 해체되기 직전 완전한 전집을 출간하려 했으나, 소련이 해체되며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이들 공산주의자의 문헌은 소련 해체 당시는 물론, 현대에도 소실되고 있다. 예시를 들자면, 모스크바 사회과학정보대 도서관 3층에서 불이 난 2015년 초의 대화재가 있다. 이때 200만점 이상의 문헌이 소실되었다. 디지털 자료로 보존한 비율은 러시아측 뉴스를 참고 바란다.[55] 1890년에 독일사회민주당으로 개칭[56] 1825년 ~ 1864년 독일 출신 철학자이자 노동운동 지도자이다. 한때 독일에서 마르크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철학자로 간주된 적이 있는 사회주의자이다.[57] 그 파시즘의 국가사회주의가 아니라 오늘날의 민주사회주의와 가깝다.[58] 진짜 묘는 옆에 있다. 사진의 묘비는 찾는 사람이 많아 묘지 입구에 1954년에 세운 흉상을 얹은 추모비이다. 추모비 윗편에는 공산당 선언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가 추모비 아래에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이 적혀있다.[59]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6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름에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들어있지만 독재 국가인 것처럼 이것도 사회주의라는 단어만 들어가 있지 사회주의 사상과 관련이 없는 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엄청 탄압했다.[61] 사실 따지고 보면 후에 영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영국 노동당)이 양당을 형성할 정도의 세를 확장해나가고, 프랑스도 한때나마 공산당이 제1당 자리를 차지했을 정도고, 사회주의적인 정책도 일정 부분 펼쳐지기는 했다. 뭐, 혁명이 나서 공산당이 집권하거나 그런 건 아니기는 했지만.[62] 참고로 더글러스 애덤스도 여기 묻혀있다. 그 무덤 앞에는 참배객들이 꽂아둔 볼펜이 가득 있다.[63] Archway역 다음 역이 Highgate역인데, 이 역을 기점으로 운임 구간이 바뀌기 때문에, 런던 시내에서 출발했다면 Archway역에서 내리는 것이 유리하다.[64] 공동묘지인데도 입장료 4파운드를 받는다.[65] 해당 단행본 p116~117 수록.[66] 그의 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돈많고 잘 나가던 로펌 변호사였다. 마르크스는 엄연히 금수저였던 것이다. 그래서 수입과 재산도 굉장히 많은 편이었는데 마르크스는 10대 후반부터 주변 귀족들을 부러워하고 시기하여 기분이 나쁠 때마다 파티를 자주 하느라 그 재산들이 팍팍 줄어들 만큼 써댔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아빠는 로펌 변호사, 아들은 패리스 힐튼급 파티광이었다. 결국 그 과도한 사치로 약 20년 내외의 시기에 집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파산한다. 오죽하면 아버지가 이미 대학생 시절의 마르크스에게 "돈 좀 덜 쓰면 안 되겠냐"는 편지까지 쓴 적이 있다. 물론 마르크스는 무시하고 계속 돈 부쳐 달라고만 답장을 썼다. 마르크스는 법대나 변호사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그렇게 된 것에 불만이었다고는 하나, 누구나 알듯이 그게 집안 재산 다 날려먹을 근거는 되지 않는다.[67] 결국은 어머니 말 무시하고 다 팔았다.[68] 몇몇 작가들이 쓴 마르크스의 전기에 꽤 실려 있으나 사실 정확히 확인된 바는 아니고 유명한 소문이었다고만 알려져 있다.[69]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변호사가 되라고 요구했던게 거슬렸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70] 물론 요즘으로 보면 어린 청소년의 반항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사회는 지금과 개방적인 수준이 달랐고, 그의 글은 당시에도 체계가 있었기에 쉽게 볼 수는 없다.[71] 우리도 잘 아는 《뉴욕 트리뷴》의 런던 주재 특파원으로 송고한 기사가 남아 있다.[72]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달라고 처가에 부탁을 하니 돈 대신에 하녀를 보냈다. 처가가 귀족가문인 베스트팔렌 남작가였기 때문에 이런 당황스러운 지원이 가능했다.[73] 마르크스 부부의 결혼 생활 유지와 정치적 대의를 위해서였는데, 당시 영국에 망명온 혁명가들은 섹스 스캔들을 빌미로 정적을 매장하곤 했다.[74] 프레더릭은 프리드리히의 영어식 표기.[75] 물론 실제로 마르크스는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76] 이때가 1880년대였으니, 4000파운드를 지금 한국 돈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4억 6800만원으로 상당한 거금을 벌어들인 셈이었다[77] 사실 위에 나열된 일화들은 그의 낭비벽과 무절제함에 관한 말이므로 투자 지식과는 별개이긴 하다.[78] 물론 이렇게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주식 발행을 해본 적도 있고, 주식 자체에 대해서도 여러 번 투자를 해보았기 때문이었다. 주식으로 돈 벌려는 데 있어서 당연히 주식에 대해서 공부를 기본적으로 해놓은 상태라는 것이다.[79] 물론 그 이전에도 미국 북부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기는 했다만 이때 신문은 식자층들이 읽는 것이라 대중적으로 알려진 수준까지는 아니기는 했다.[80] 그 중에서 두 프랑스인인 샤를 롱게와 파울 라파르그는 자기 두 딸 예니와 로라와 결혼하여 사위까지 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상적으로 명석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아나키즘 논쟁에서 마르크스와 각을 새웠던 파울 파라르그를 총애했다.[81] 한편 마르크스 자신은 자신의 생각과 사상이 교조화되고 과학화되는 것을 우려했기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I am not a Marxist)"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82] 그렇지만 이러한 관계가 딱 한 번 박살날 뻔한 적이 있었다. 이는 엥겔스의 아내가 죽은 비극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애도는커녕 돈 얘기만 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자세한 것은 본 문서의 일화 항목을 참고하라.[83] 하지만 저명성에 비해서 말년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다.[84] 예를 들어 엥겔스는 공장주의 아들, 레닌은 교육자 집안 출신 법대생, 스탈린은 신학생, 마오쩌둥은 사범학교 졸업생 출신이였다.[85] 공산주의 사상은 자본주의의 경쟁체제를 완전히 갖추고 생산력이 모든 국민을 풍족하게 할 수준의 능력이 바탕이 된 뒤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다. 그렇지 못한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부를 나누자라는 개념은 모두가 똑같이 잘살자가 아니라 똑같이 죽자가 되어버리고 일부의 소수층이 부를 독점하는 형태로 변질되어 버린 경우가 많다. 당장 우리 위의 북한을 보자.[86] 애초에 대부분의 역사학에서는 근세를 인정 안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르네상스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중세의 전성기다.[87] 이 사람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관료제를 완성했다.(단 베버 이전에도 유럽의 국가기관은 관료제에 기반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베버는 그러한 관료제적인 조직의 형태를 우리가 아는 "관료제"로 개념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모든 조직은 관료제를 사용(혹은 변용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은)하지만 관료제를 부정하거나 탈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88]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 마르크스 사상에서 공산주의 혁명은 자본주의의 발달이 극한에 다다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터져버린 것에 대하여 후대 공산주의 이론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중세적 요소가 강했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르크스는 말년에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며, 실제 러시아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요상한 이론이 많이 등장했다. 참고로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로 꼽은 것은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영국이나 프랑스였고 프랑스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야 자신의 조국인 독일의 혁명이 일어난다고 했다.[89] 레닌,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로자 룩셈부르크 , 레온 트로츠키, 스탈린, 마오쩌둥, 그외 멘셰비키 및 사회주의자들[90] 수정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이즘 등[91] 고전경제학은 애덤 스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로 이어지는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이어 받았으며 그 이후 케인즈주의 혁명 이후 신경제학에 반발한 오스트리안 학파가 이어받는다. 맑시즘 경제학은 고전경제학에게도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대의 따른 학파의 경제학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92] 거기에다 영국의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아일랜드 대기근과 그 대처 방법을 생각해보면...[93]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현대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사상이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낸 사생아라고 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노동자의 각성을 촉진시켜 버리는 바람에 노동자는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게 되었고, 자본가는 이제 노동자에게 이익을 나눠주지 않았다간 한밤중에 들이닥친 노동자에게 자기 머리통이 박살나고 집이 불타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게 되었고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노동자에게 이익을 나눠주는 이론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 애초에 사회 복지 정책이나 수정 경제 체제의 탄생의 근본적인 원인은 빈부격차 증대에 대한 반발이 확산된 탓이지만, 이렇게나 퍼진 이유는 자본주의의 맹점을 열렬하게 까면서 급속도로 확산되는 공산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몸부림이라는 평이 있을정도. 단적으로 복지국가로 이름높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복지정책은 공산화를 피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라고 평가받는다.[94] 또한 단순히 사회적 책임이나 분배에 관한 문제와 더불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법적인 틀을 정립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오히려 맑스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소련과 동구권은 그 특유의 폐쇄된 체제의 한계로 무너졌지만 서구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95] 차녀가 태어난 이후 영국으로 이주해서 살았으므로 차녀 이후 자녀들의 이름은 영국식으로 지어졌다.[96] 그람시 본인이 당시 경영을 맡았던 이탈리아 논설지 '일 그리도 델 포폴로'에 1918년 기고한 글로, 이른바 '주의주의적 공산주의자'로서 노동 계급의 견실한 의식 각성을 중시했던 그 특유의 관념론적 특징이 강하게 드러난다.[97]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인가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심도 있는 철학적 논쟁을 요한다. 이에 대해서는 마르크스 경제학/비판 항목 참고.[98] 이는 에드먼드 버크와 러셀 커크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상당히 견제되는 사상이기도 한데 우리가 아는 보수주의와는 달리 보수주의는 선동으로 무장한 이념을 상당히 경계한다.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인물은 점진적 보수주의를 추구했지 선동을 일으키면 오히려 민중이 폭동과 무질서함 및 도적이 되어 혼돈으로 가득차기에 인간이 더 무지해진다고 생각하여 폭동을 왠만하면 자제하는 방향의 철학자다. 물론 이러한 보수주의에는 결국 모순적인 사회에 대한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데 소극적이고, 프랑스 대혁명이나 미국 독립 혁명 등의 역사적 변화의 순간들을 부정하며, 구체제를 옹호하는 경향성이 깊게 베어 있다는 비판이 상존한다. 그들이 경계하는 '선동' 또한 민주주의적 정치를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고 말이다.[99] 로마도 이런 혁명 운동을 잘하지 않았고 계속 시민들이 국가의 주체였어도 데모만 하는 정도에서 스스로 선을 그쳤다. 혁명은 그야말로 나라를 뒤집어 엎어버리기에 외세의 침략의 위험도 있어서 정치인들이나 시민들도 잘 알기에 서로 타협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었다.[100] 이는 로마가 귀족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우자마자 수도 로마가 갈리아인들에게 빼앗긴 원인도 작용한 것이 클 수도 있다. 공화정이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행정체계가 혼란스러웠기에 갈리아인을 나중에 겨우 몰아내긴 했으나 그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101] 냉전 시기, 마르크스와 베버를 대립적 위치에 놓고 '베버가 마르크스를 극복했다'라는 식의 프로파간다적 담론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시각으로, 베버는 마르크스의 연구성과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근대화라는 주제를 더욱 깊이 파고들어간 사회학자라 할 수 있다.[102] 다만 이는 위키러 개인의 의견이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판단은 각자가 할 것.[103] 근대 이후로 큰 인구 이동이 없고, 전통적으로 사회 구조 자체가 상당히 정적인 동양, 특히 사방이 바다와 국경 아닌 국경으로 막힌 한국식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유럽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다양한 문화와 국가들이 국경 하나 두고 갈라져 있어 스페인에서 옳은 소리 하다 찍히면 프랑스로, 프랑스에 찍히면 영국으로 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발상이 별 의미를 가지지 않고, 자기의 사상적 신념에 따라 국적을 바꾸는 일도 흔하다.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 같은 인물도 우리나라에서야 '조국을 러시아에게 팔아먹은 매국노' 같은 소리를 듣지만, 서양에서는 '폴란드인이 공산주의를 신봉해 소련군을 끌고 조국에 진주했다'라는 사실 자체는 그리 욕 먹지 않는다.[104][104] 이 사람은 인쇄소 일을 하며 독학으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였다.[105] 단 북한에서는 여기에 쓰여진 이른바 "리론가"들은 경멸의 대상이다.[106] 이 글귀는 마르크스의 무덤 묘비에도 적혀 있다. 그가 쓴 독일 이데올로기 서문에도 나온다. 하단의 사망 문단을 참조.[107] 다행히도 메가의 경우 동아대 강신준 교수를 중심으로 한국어 판본에 대한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108] 이 논문은 훗날 알튀세르에 의해 '우발성의 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재해석되게 된다.[109] 공상적 사회주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프루동이 쓴 저작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저서다.[110]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그의 유고를 정리하여 출간했다.[111] 출처[112]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제2세계의 성문법이 이에 해당한다.[113] 물론 법학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지 않는 이상 비중 있게 다뤄지지는 않는 편이다.[114] 물론 그렇게 여겨질 뿐, 지리학도 철학과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115] 데이비드 하비 참조.[116] 이 시기 검열을 피하기 위해 중국어 사회과학 서적이 슬금슬금 들어오기도 하고, 계급 투쟁(class struggle) 같은 내용을 '학급 문제'와 같은 내용이라고 검열원에게 둘러대는 일도 있었다.[117] 참고로 학동역 하행선 5-3 개찰구 근처 스크린도어에 적혀 있다.[118] 돌려 말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북한에서 레닌-마르크스주의는 이미 폐기된 사상이므로 주체사상에 어긋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공공연히 말하다가는 끔살이기 때문이다.[119] Max Weber. 마르크스와 함께 근대 사회과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학자이다. 문제는 이 사람이 마르크스와는 정반대로 대표적인 보수 우파 학자다. 사실 철자도 다르다. 전술했듯이 이쪽은 중간에 r이 없는 Max. 그리고 이쪽은 막스가 이름이고 베버가 성이다.[120] 이것은 영화 변호인의 중심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으로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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