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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의 한 섬에 암자를 설립하여 불교학파를 형성한 냐나티로카 마하테라 (Nyānatiloka Mahāthera(1878-1957) 대장로 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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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버마에서 유럽출신 비구제자들과 함께 가운데 앉은 분이 냐나포니카 마하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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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단두와 섬 암자 불교학파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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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암자 불교학파의 제 2세대이신 냐나포니카 마하테라 (Nyanaponika Mahathera(1901–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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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암자 불교학파의 3세대이신 비구 보디(Bhikkhu Bodhi(1944-현재) 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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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리랑카를 실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영국 식민지 시대, 영국인들이 스리랑카를 실론(Ceylon)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4세기 말 중국의 동진(東晋) 시대에 법현(法顯) 법사가 서역구법승으로 서역과 천축(인도)을 거쳐서 이곳에 갔다 온 기록인
《法顯傳》또는《佛國記》에서는 사자국(獅子國)、상가라(僧伽羅)、능가도(楞伽島)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명대(明代)에는 석란도(锡蘭島)라고 했다. 하지만 현재 공식 명칭은 스리랑카 민주사회 공화국
(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이다. 줄여서 스리랑카라고 부르는 것이 순리이다.
다만, 여기서 내가 실론이라고 호칭한 것은 불교적인 관점에서다. 지금 다루고자 하는 ‘섬 암자 불교학파’를 소개하려면 아무래도 실론이라고 불러야 실감이 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대한민국’으로 대치한다면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리랑카 대신 실론 불교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방문했던 ‘80년대 초에는 스리랑카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적 이었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물론 스리랑카 분들도 실론이란 표현을 서슴없이 할 때이다.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섬 암자 불교학파’는 실론 시대에 전개됐던 역사이다. ‘섬 암자’란 내가 의역한 말인데, 영어권에 알려진 명칭은 'Island Hermitage'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 섬을 도단두와(Dodanduwa Island)또는 폴가스두와(Polgasduwa)섬 이라고 부른다.
1911년 이 섬에 조그마한 숲 속 암자를 세운 이후에는 도단두와 ‘섬 암자(Island Hermitage)’로 통칭되고 있다.
이섬에 Island Hermitage를 세우신 분은 독일 출신 비구인 냐나티로카 마하테라(Nyānatiloka Mahāthera(1878-1957)란 인물이다. 동남아 불교에서 유럽인으로서는 매우 이른 시기에 구족계를 받아서 비구로서 일생을 마치신 분이다. 냐나티로카 대장로의
일생을 이야기 하자면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의 뒤를 이은 제 2세대 분은 역시 독일 출신 유태계인 냐나포니카 마하테라 (Nyanaponika Mahathera(1901–1994)이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이 분도 많은 역서를 남긴 대장로 스님이시다. 특히 그의 저서《불교명상의 핵심(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은 마스터 피스로서 영어권 독자들의 필독서이다. 제 3세대는 현재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시고 계시는 비구 보디(Bhikkhu Bodhi(1944-현재)큰 스님이 이어가고 있다. 이 분의 대표적인 저서
《아비담마의 종합 입문서(A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는 마스터 피스로서 필독서이다. 이밖에도 섬 암자
불교학파의 멤버였지만, 일찍 서거한 냐나몰리 비구(Ñāṇamoli Bhikkhu,1905–1960)가 있다.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으로 그는
붓다고사(Bhadantācariya Buddhaghosa)의 《위수디마가(Visuddhimagga)청정도론》를 영역(The Path of Purification)하신 분이다. 영어권 불자들에게는 필독서가 된 책이다. 이런 분들이 섬 암자 불교학파를 형성하신 분들이다. 이 섬 암자 불교학파들의 저서만 제대로 공부해도 상좌부 불교는 완벽하게 마스터할 수가 있다. 차례로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창립자인 냐나티로카 대장로
스님부터 소개하기로 하겠다.
냐나티로카 대장로의 일생을 간단히 요약하면, 아버지는 교수요 어머니는 음악가였고 그는 엘리트 코스인 그리스 로마
고전교육을 주 커리큘럼으로 하는 왕립 비스바덴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당대 유명한 음악가에게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전공했으며, 프랑크푸르트와 파리 음악학교를 졸업한 음악가였다. 음악가로서 활동하면서도 철학에
매료되었다. 그는 플라톤의《파이돈》, 데카르트, 칸트의《순수이성비판》, 하르트만과 쇼펜하우어에 열중했다.
어느 날 신지학(神智學)의 강연에 갔다가 불교 강의를 듣고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그 무렵 그는 파리에서 당대 유명한 작곡가로
부터 개인수업을 받고 프랑스 알제리와 터키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다. 그렇지만 불교가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는 인도에서 비구가 되기를 서원하고, 연주해서 번 돈으로 카이로 팔레스타인과 인도 봄베이를 거쳐서 스리랑카를 여행했다.
실론에서 비구가 되려했으나, 영국 출신으로 역사상 두 번째로 상좌부 비구가 된 아난다 메떼야(Bhikkhu Ananda Metteyya 1872– 1923)를 만나기 위해서 버마 행을 감행했다. 26세 때인 1904년 그는 우빠삼바다(Upasampada 구족계)인 비구계를 수지
하고 냐나티로카(Ñāṇatiloka)란 법명을 받았다. 그의 계사(戒師)는 당대 버마에서 유명한 아비담마(구사론)의 대가였다.
그는 문하에서 빨리어와 아비담마를 수업하고 인도출신 비구인 코삼비 담마난다와 만달레이와 사가잉 등지의 북 쪽 지역 불교를 견학하고 당시 아라한으로 추앙받는 대장로에게 명상 지도를 받았다. 비구 코삼비 담마난다는 환속한 후에 하바드 대 교수가 된 분이다. 빨리어와 삼장(三藏)을 집중해서 공부하고 그는 스리랑카로 향했다. 그 때가 1906년이다.
당시 시암(태국)왕자 출신 비구인 지나와라 왕사와 함께 작은 실론 섬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섬에서 함께 명상에 몰두했는데,
시암 왕자는 나중에 환속하여 초대 유럽 태국대사를 역임했다.
냐나티로카는 그의 부모를 만나러 독일을 방문하고 나서 바로 스리랑카로 돌아와서는 본격적으로 번역 작업을 하게 된다.
이때 번역한 것이《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이고 독일에서 출판했다. 그는 독일에서 상좌부 사원을 세우려했지만, 여의치 않자 스위스에서 사원을 창건할 인연이 생겼으나 건강상 문제가 발생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조그마한 사원을 건립하게 되었고 제자도 생겼다. 그리고는 실론으로 와서 남쪽 해변 도시인 갈레의 한 사원에 머무르게 된다. 여기서는 그는 도단두와에 버려진
정글 섬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고, 드디어 탐험 끝에 암자를 세우게 되는데, 이 섬은 그야말로 숲이 울창한 버려진 정글 섬이었고 뱀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는 암자를 세우고, 10여명의 유럽출신 비구들과 함께 승가 공동체를 이루어서 수행과 역경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번역서를 남겼는데, 독일어로 번역된 역서는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aya 增支部))》 《담마빠다(Dhammapada 법구경)》 《밀린다빵하(Milindapañha 밀린다 왕문경)》
《뿌갈라바나띠(Puggalapannatti 人施設論)》 《위수디마가(Visuddhimagga 청정도론)》
《아비담마따상가하(Abhidhammatthasangaha 摂阿毘達磨義論)》이며
영역서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말씀(Word of the Buddha)》 《아비담마 삐따카 입문(Abhidhamma-Pitaka 論藏入門)》
《불교용어 교리 사전(Manual of Buddhist Terms and Doctrines)》 《열반을 향한 부처님의 길(Buddha's Path to Deliverance)》
《불교의 근본(Fundamentals of Buddhism)》 이밖에 Nyanatusita and Hellmuth Hecker에 의한《냐나포니카의 생애》가 있다.
나는 이《냐나티로카의 생애(The Life of Nyanatiloka Thera)》를 너무나 감명 깊게 읽었다. 다음에는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 1,2차 대전 발발로 인하여 브리티시에 의하여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고 1926년부터 1939년 사이에 이른바 섬 암자 ‘불교학파’ 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냐나티로카 대 장로스님은 독일 출신이었지만, 실론 버마는 물론 아사이의 어느 큰 스님 못지않게 영향을 크게 끼치신 분이다. 특히 구미인들에게는 대조사(大祖師)와 같은 존재이다. 젊은 나이에 발심하여 모든 악 조건을 무릅쓰고, 섬 암자 불교학파를 형성하신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파라면 도시의 상아탑에서 이루어 진다고
생각 하겠지만, 이 분들의 경우는 다르다. 오지의 외딴 섬 암자에서 수행과 학문을 통해서 서구의 엘리트들이 이룩해 낸 결실이다. 이것은 냐나티로카 대장로 스님이 독일에서 고전교육을 받으면서 학문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모국어인 독일어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했고, 고전 그리스어인 헬라어 나전어에 능통했으며,
빨리어와 싼스크리트어인 불교 경전어(經典語)에 능했다. 그리고 스리랑카어인 싱갈라어를 구사했다.
이밖에도 버마어 티베트어 중국어 일본어의 기초를 알았다.
냐나티로카 대장로 큰스님은 인문학이라면 언어가 기본이 되고 역사를 알고 문학적 소양을 기른 다음 깊은 철학적 사유에
들어가야 한다는 독일식 학문 방법론을 알고 있었다. 버마어 티베트어 중국어 일본어를 제외하고는 그가 구사하거나 능통했던
언어들이 인도 유럽어 족의 언어들 이라는 학습상의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그의 인문학관은 어문사철(語文史哲)에 투철해야
학문이라고 봤던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불교학파 가운데 이 ‘섬 암자 불교학파’는 경전어(빨리어 싼스크리트어 등) 학습을
기본으로 했다.
대영제국은 인도 아 대륙은 물론 실론 버마 등의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다. 냐나티로카 비구는 실론 섬 암자에 근거지를
두고, 불교국가 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번역을 위한 자료수집 차, 주로 인도권 나라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엄청난 운명의 시련이 닥쳐오고 있었다. 그것은 1914년 제1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냐나티로카는 모든 독일국적의 사람들과 함께 억류되는 신세가 되었다. 처음에는 섬 암자에 연금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실론의 디야탈라와에 세워진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1915년 영국령인 호주로 추방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16년 독일로 귀향한다는 조건으로 석방 되었으나,
중국과 버마의 국경지역의 버마 상좌부 불교사원에 머무르고자 하와이와 중국을 우회하기로 하였다.
스리랑카나 버마에는 당분간 머무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중국에 있는 동안 중국은 독일과 적대국이 되어서, 중국에 억류되었다가 1919년 독일로 송환되었다.
1920년 실론과 아시아의 여타 영국령에 재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그의 유럽 제자 비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5년간 대정대학과 고마자와 대학에서 일본인 제자들에게 빨리어를
가르쳤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는 빨리어 경전을 번역했다. 그 후 태국의 상좌부 사원에 머무르기 위해서 간신히 도쿄에서 태국
비자를 받고 태국에 입국했으나 스파이 혐의로 감금 되었다가 다시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1926년 영국정부는 그와 그의 독일제자들에게 실론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이 무렵 섬 암자는 몇 년간 빈집으로
있게 되었고, 다시 정글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다시 암자를 세우고 수행과 번역에 몰두하게 된다.
1926년부터 1939년 사이의 기간이 섬 암자 불교학파의 가장 전성시기였다.
학자, 구도자, 모험가, 외교관과 고위급 인물과 왕(독일 작센 주)까지 이 섬 암자를 방문했다. 이 무렵 아나가리카 고빈다도
방문했다. 냐나티로카 비구는 고빈다와 함께 국제 불교연합회를 창립 하였으나, 고빈다가 티베트 전통에 따라서 라마로 변신하는 바람에 중단되기도 했다. 1831년부터 1939년 사이에 다수의 유럽 출신들이 비구계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 나중에 대 석학으로서 많은 저서와 역서를 남긴 냐나티로카 대장로의 후계자가 된 냐나포니카(Nyanaponika 속명 Sigmund Feniger)가 비구계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 이밖에도 나중에 번역에 기여한 다수의 유럽출신들이 수계를 했다. 냐나티로카 대장로는 이들에게 빨리어를
필수로 가르쳤는데, 그것은 테라와다(상좌부)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빨리어를 알아야 한다는 지론에서다.
1939년 영국은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냐나티로카와 다른 독일인 제자들은 그가 15년 전에 감금되었던 디야탈라와
수용소에 재수감되었다. 2년 후에는 인도 북부의 데라 둔이라는 수용소 캠프로 이감되었다. 1946년에서야 그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석방되어 실론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다시 섬 암자로 돌아가서 수행과 역경을 계속했고, 1949년 영국 출신인 냐나몰리(Nanamoli)를 비롯한 몇 명의 유럽인들이 비구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었던 냐나몰리 비구는 빨리어를 습득해서
붓다고사의 위수디마가(청정도론)를 영역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1950년 실론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그는 실론 시민권을 얻고 실론 국민이 되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1951년 전 수도였던
캔디의 숲속 암자로 옮겨가게 된다. 그는 1954년 버마 양곤에서 개최된 제6차 경전 결집회의에 초대되어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되는데, 그의 제자 냐나포니카가 대독했다. 1957년 89세를 일기로 그는 열반에 들었고,
스리랑카 정부에서는 국장으로 그의 장례식을 봉행했다.
이치란 박사
해동경전어 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