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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비구들의 스승, 태국 숲속의 대선사 아잔 차(Ajahn Chah 1918-1992) 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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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관광의 천국이다. 아시아에서는 아마도 태국을 찾는 관광객이 가장 많지 않을까 한다. ‘연기 없는 굴뚝’을 일찌감치 깨달은 나라가 태국이 아닌가 한다. 외세의 지배를 받아 보지 않았기에 태국인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유럽의 열강이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를 먹어 치울 때, 태국왕실은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서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용케 피해갔다. 게다가 버마 말레이시아는 대영제국이 차지하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필리핀은 스페인이 다음은 미국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가 적당히 나눠먹고 태국마저 식민지화 하려고 하니 열강들끼리 대결이 불가피 하자,
이들 열강은 완충지역이 필요했다. 태국은 동남아의 스위스가 되기를 원했다. 동시에 모든 열강에게 항구를 개방하지 않을수
없었고, 서구 문물을 급속하게 받아 들였다. 왕실은 그 나름대로 근대화를 빨리 이룩한 셈이다.
유럽의 열강들은 자연스럽게 태국을 완충지역으로 삼아서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나고, 태국은 유럽인들에게 더욱 주목 받는 나라가 되었다. 더욱이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태국의 해안가는 미군들의 휴양지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점점 일반인들 에게도 태국은 관광의 대상으로 매력적인 나라로 변모해 갔다.
온갖 부류의 군상들 가운데는 항상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빵(물질적)만으로는 살수 없는것이 인간이다. 정신적 자유와 미지의 정신세계에 대한 궁금증은 철학자와 종교가 그리고 히피와 같은 격외(格外)의 방외지사(方外之士)들을 생산하게 되어 있다. 60년대와 70년대 많은 서구인들은 인도를 찾기도 하고 동남아를 배회하면서 뭔가 정신적인 허무를 탈피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시기가 있었다. 대개 이들은 인도로 몰려들었다.
물론 18세기부터 유럽인들은 인도에 왔고, 19세기에는 브리티시 인디아 식민제국을 세워서 통치했는데, 이때의 유럽인들은
식민지 관료 군인 국영회사원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일부의 학구적인 사람들은 이른바 인도롤지(Indology 印度學)에 관심을 갖게 되고 오리엔탈리즘(東洋學)으로 확대시키는 선구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태국은 인도나 스리랑카 버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과는 다소 다른 시각에서 유럽인들이 접근하게 된다. 19세기부터 태국인들은 유럽의 백인들을 ‘파랑(Farang)“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미국인도 이 파랑의 개념에 포함되는데, 지금은 모든 서구인들에게 통용되는 용어로 개념화되었다.
60-70년대 인도로 몰려든 서구의 젊은이들은 인도의 정신에 흠뻑 빠져들게 되는데, 그것은 힌두의 요가 구루(Guru)들이었다.
물질주의적 이고 개인주의적 이면서 반인간주의적인 서구문명에 염증을 느낀 젊은 세대들이 인도에서 영적 위안을 찾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비틀즈가 인도를 여행하고 음악적 영감을 얻은 것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아무튼 이런 흐름은 70년대에 절정을 이루고, 서구의 젊은이들은 힌두의 요가에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서, 불교란 종교에 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망명해 있던 달라이 라마에 주목하게 되고, 티베트 불교만이 아닌 테라와다(상좌부)라고 하는
버마 태국 실론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물론 학술적으로는 서구의 불교학이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해서 20세기 중반이면 상당한 진척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소수의 유럽 출신 승려들이 실론이나 버마에 와서 비구계를 받고 수행을 하고 있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60-70년대에 이르러서다.
이제 태국의 불교계로 눈을 돌려보자. 태국의 불교승가에 대해서는 전회(前回)에서 대강 소개했듯이 주류는 빨리어 경전어
(經典語)에 의한 상좌부 삼장(三藏) 중심의 교학 불교로서 율장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비구승가 공동체이다. 빨리어 교학 시험을
중시 여기고 법계(法階)가 분명하며, 비구승가 공동체를 위주로 한 비구 중심의 불교이다. 비구승가 공동체는 법랍이나 법계에
따른 위계질서가 분명하며, 하위법이긴 하지만, 승가법 이라는 법규에 의해서 승가는 규율 통제된다. 아무나 마음대로 출가하여 비구가 된다든지, 비구가 된 다음에 마음대로 아무데서나 주처(住處)를 한다든지 또는 비밀리에 가족을 둔다든지 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승가공동체에서 철저하게 수행위주의 생활을 하면서 비구로서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이렇게 통제되고
규율된 공동체이지만, 개인이 정 견디기 힘들면 언제라도 계를 반납하고 세속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따라서 3회에 걸쳐서
출가하여 비구가 될 수 있도록 승가법은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두 번까지 환속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새로 출가하여
비구가 되면 법랍은 다시 기산한다. 10년간 비구생활을 하다가 환속해서 다시 재출가 한다면 법랍은 새로 시작된다.
이런 절차나 과정을 거쳐서 비구생활을 하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태국의 비구들 가운데에는 이런 기본적인 과정을 거쳐서 두탕가(Dhutanga)라고 하는 숲속의 수행자들이 있다.
이 말은 빨리어의 두탕가(dhutaṅga)란 용어인데, 방기(放棄)란 뜻으로 세속을 버린다는 의미로서 출가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부처님이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출가한 것도 두탕가이다. 우리는 이런 두탕가의 전통을 태국 불교에서 찾을 수 있으며,
태국 출신 비구들보다는 외국인들 즉 파랑 출신의 두탕가 비구들에 의해서 오늘날 태국 불교의 두탕가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고 하는 점에 주목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인도나 동남아를 떠돌면서 영적 위안을 찾던 일부 구도자들은 불교에 입문하는데,
특히 태국의 두탕가 전통에 매력을 느끼고 출가의 길을 걷게된다.
여기에는 태국 숲속의 대선사로 알려진 아잔 차 큰 스님이 계셨다.
그의 문하로 입문한 파랑 비구들은 지금 아잔 차의 법맥을 이어서 세계 도처에서 불법을 전파하고 있다.
숲속의 명상가들로 부처님처럼 수행
사진 1: 태국의 삼림수행 전통을 세운 프라 아잔 사오 칸타실로 대장로 스님 (Phra Ajahn Sao Kantasilo Mahathera (1861–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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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태국의 삼림수행전통의 2대에 해당하는 아잔 문 부리다토 대선사 (Ajahn Mun Bhuridatta Thera 1870-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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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태국 전통 삼림수행전통의 3대에 해당하는 대선사로 외국인 비구들인 파랑의 스승으로서 태국의 삼림수행전통을 서구에 보급하신 아잔 차(Achaan Chah, 1918-1992) 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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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아잔 차 선사의 수제자로서 태국 전통 삼림명상 수행 제 4대에 해당 하는 루왕 포 아잔 수메도 비구
(Luang Por Ajahn Sumedho 1934-현재, 미국 시애틀 출신),
영국 아마라와티 불교사원의 조실 겸 주지로서 서구출신 비구와 태국 납자들을 제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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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회에서 잠깐 소개한 바와 같이 태국에는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연중무휴로 찾는다. 태국에 가본 분들은 알겠지만,
태국은 외국인들에게 매우 친절한 곳이면서도 피로에 지친 심신을 풀어주는 나라이기도 하다.
89년 해외여행 자유화의 여파로 한국인들도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국가들을 찾는 기회가 많아져서 태국과는 익숙해졌다.
특히 방콕에 거주하는 교포들만 해도 만 명이 넘을 정도고 태국의 유명 관광지에서 한국인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단순한 관광객의 차원을 넘어서 태국에 대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서서히 생겨나고 있다. 태국의 전문가란 여러분야가 있을 수 있는데, 태국의 불교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분들도 숫자가 늘어나는 추세인 것 같다.
미국인을 포함한 유럽인들은 우리보다는 더 일찍 동남아나 태국에 발을 디뎠다. 서구의 젊은이 사회에서는 대학을 마치면 대개 인도나 동남아를 한 1년 정도 여행하는 경험을 한다. 직장잡고 결혼하면 여행을 다니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20대 때, 여행을 하는데, 이 여행과정에는 몇 개의 이로운 목표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물론 이국에 대한 경험이겠지만, 비영어권 친구들은 1년 동안에 영어회화를 마스터하게 되고, 영어권 젊은이들에게는 인도나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문화나 언어 등을 익혀 전문가가 되는 좋은 기회가 된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테마는 태국에서 불교 수행을 하는 외국 비구(승려)들에 대한 ‘파랑 비구들’에 관해서다. ‘파랑’은 유럽 백인을 의미하는 태국어인데, 불교 수행하는 서구 출신 비구들도 ‘파랑’이라고 호칭한다.
이들은 왜, 태국에서 불교승려가 되는가이다. 전회에서도 소개했지만, 내가 80년대 초, 방콕의 왓 보워니웻 사원에서 수행할 때다. 왓은 절(사원)이란 뜻이다. 태국의 모든사원의 이름은 ‘왓’으로 시작한다. 중국이나 한국의 한자문화권 에서는 ‘00사(寺)’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 보다는 더 먼저 태국에 왔기에, ‘왓(Wat)’을 일본 발음으로 ‘와트’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일본 정보를 통해서 ‘와트’라고 발음하는데, 그냥 ‘왓’으로 발음하면 된다. 한글의 우수성이 이럴 때 나타난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이라도 현지의 음(音)대로 발음을 정확하게 할 수 있어서다. 이 때 나는 오직 비구로서의 수행에 몰두하면서 영어에 매진하고 있었다. 영어를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영어의 위력은 너무나 컸다. 특히 내가 머무르는 기숙사가
국제관 이었는데, 호주 영국 미국 캐나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 비구와 재가(在家)수행자들로 항상 만원이었다.
외국인 비구들, 이른바 ‘파랑’들은 태국불교 그것도 명상에 관심이 많았다.
태국의 비구들은 사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승가 고유의 비구승가 생활에 전념한다.
이를테면 227계목의 율장을 준수하면서 빨리어 삼장을 공부하고, 아침이면 탁발을 나가고 점심공양에 초청되어 신도들의 공덕 짓기에 찬팅(chanting염불)을 하고 생활필수품과 약간의 보시금(돈)을 받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면서 자기발전과 향상을 위한
시간을 갖는다. 40만 승려가운데 90%는 이런 과정을 밟는다. 방콕이나 중소도시 시골도 마찬가지이다. 태국불교는 교육 제도가 잘되어 있다. 입문하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두탕가(Duthanga 숲속의 수행자)의
길을 오로지 밟는 비구들도 있다. 이 두탕가 비구들도 탁발을 하고, 계율을 준수하는 것은 도시의 비구들과 똑같지만,
이 비구들은 명상 수행에 더 몰두한다는 점이다. 삼림수행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아잔 차 대선사로 부터이다.
아잔 차 큰 스님은 시골 태생이기도 하지만, 그는 젊어서부터 명상 즉 위빠싸나(Vipassanā)라고 하는 명상 수행을 주로 해왔다.
아잔 차 큰 스님은 1918년 6월 17일 태국의 북동부 우본 라자타니에서 가까운 시골 마을에서 출생, 십대 때 사미승으로 3년간
절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집에 와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다가 20세 때 비구가 될 것을 결심하고 사원으로 가서 1939년 4월 26일 우빠삼바다(비구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다른 비구들과 마찬가지의 수행과정을 5년간 밟다가 부친이 심하게 아픈것을
보고, 고통에 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품고 빨리어에 의한 경전 공부를 접고,
28세 때, 한국불교로 보면 만행 즉 운수납자의 길인 두탕가의 수행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는 서울서 부산까지의 정도의 거리인 400km를 걸으면서 잠은 숲속에서 자고 마을에서 탁발을 해 가면서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 사원에서 아잔 문 부리다토 (Ajahn Mun Bhuridatto 1870-1949)라는 숲속의 도인 스님에 관하여 듣게 되었다.
아잔 문 부리다토 대선사는 라오스 출신의 태국 비구로서, 프라 아잔 사오 칸타실로 마하테라
(Phra Ajahn Sao Kantasilo Mahathera(1861–1941)의 지도를 받았는데, 프라 아잔 사오 칸타실로 마하테라 장로 스님은
태국 승가의 보수 개혁파인 담마유티카 니까야 소속으로서 태국의 삼림수행의 전통을 세우신 큰 스님이다.
아잔 차 비구는 아잔 문 부리다토 도인으로 부터 명상 수행 테크닉을 배우고 지도를 받으면서 7년간 집중 명상수행을 했다고
한다. 1954년 그는 그의 고향 마을 사람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파퐁’이란 토굴을 짓고 수행을 계속하면서, 차츰 차츰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나중에 ‘왓 파퐁’ 사원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아잔 차 선사가 도인이라고 소문이 나자 1967년 미국 출신
비구 수메도 스님이 라오스 국경 근처의 절에서 혼자 명상 수행을 하다가 이곳에 오게 되어 안거를 하면서부터 명상 수행에는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아잔 차 선사에게서 본격적으로 명상 지도를 받게 되어 오늘날 많은 서구출신 비구들(파랑)이 이곳 왓 파퐁 사원에서 명상수행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수메도 비구는 5년간 아잔 차 선사 문하에서 명상 수행을 집중해서 한 후, 아잔 차 선사는 수메도 비구가 다른 서양 출신 비구들에게 명상을 지도할 수 있다고 인가하여 비로소 파랑 비구들이 태국 전통 숲속 면상 수행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아잔 차 선사의 허락을 받아서 파랑비구들만이 모여서 수행할 수 있는 국제 삼림사원인 왓 파 나나찻 사원
(Wat Pah Nanachat: International Forest Monastery) 이 1975년 왓 파퐁 사원에서 그리 멀지 않는 거리에 설립되게 되었다.
이 국제 삼림사원이 문을 열면서 수백 명의 파랑 비구와 재가 수행자들이 집중적으로 명상 수행을 할 수 있었고,
많은 파랑 출신 선사들을 배출하여 세계 도처에 불법을 전파하는 모태가 되고 있다. 내가 방콕의 왓 보워니웻 사원에서
비구생활을 할때, 대부분의 파랑비구나 재가 수행자들이 이곳 국제 삼림사원을 가기 위해서 내가 머무는 가나숭 국제관에서
짧게는 2-3일에서 일주일 때로는 한 달간씩 머물렀다. 그때 나는 이 분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눌수 있는 찬스를 잡게 되었고,
3개월 만에 귀가 열리고 입이 벌어져서 영어회화가 가능했다. 영어가 통하자 이들이 왜 그곳에 가고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애를쓰나 하는것을 알게 되었고, 이들을 통해서 세계불교계의 정보에 접할 수 있었다.
당시 태국에는 북동부에 아잔 차 선사, 남쪽에는 붓다다사 비구(Buddhadasa Bhikkhu (1906–1993)를 도인으로 치고 있었다.
아잔 차 선사와 아잔 붓다다사 선사 두분 다 숲속에서 명상 수행을 하시면서 태국 제자와 외국인 제자들을 문하에 제접하고
있었지만, 두 분의 성격과 스케일은 조금 달랐다. 아잔 차 선사가 순수 선사로서 태국의 삼림 수행의 전통에 충실했다면,
아잔 붓다다사 선사는 교학을 겸비한 선사이면서 불교의 대사회적인 활동에 관심이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도 비구 붓다다사 선사가 주석하셨던 남쪽의 왓 수안 목(Wat Suan Mokkh 해탈의 정원)을 방문하여 친견할 수
있었던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편, 80년 대 초인 이 무렵 외국의 파랑 비구들과 재가 명상 수행자들은 버마의 큰 스님인 마하시 사야도
(Mahasi Sayadaw U Sobhana 1904–1982)선사가 주석 하였던 마하시 사야도 명상센터 에서 신 버마식 위빠싸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 수시로 드나들었다. 하지만 비자문제가 쉽지 않아서 파랑비구 들과 재가 수행자들은 내가 머무르던 왓 보워니웻 사원의 국제관에 머물면서 대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태국의 비구 붓다다사 대선사와 버마의 마하시 사야도 대선사 태국남부지역에서 활동하셨던
붓다다사 비구(Buddhadasa Bhikkhu (1906–1993) 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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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양곤 마하시 명상센터에서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명상을 지도하셨던 선교 겸수의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U Sobhana1904–1982)대선사
mahasi sayadaw.jpg [ 30.24 KiB | 70 번째 조회 ]
태국에서 명상 수행하는 외국인 비구들(파랑)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분이 태국 남부 지역에서 도인으로 추앙받았던 붓다다사 비구(Buddhadasa Bhikkhu (1906–1993) 큰 스님이시다. 또한 명상 수행하는 외국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던 버마(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U Sobhana 1904–1982)대선사를 함께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방콕의 왓 보워니웻 사원에서 비구 생활할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 아잔 차 선사를 비롯해서 붓다다사 선사와 버마의
마하시 사야도 선사님이었다. 외국인 비구들인 파랑들을 비롯해서 재가 명상 수행자들은 남방 상좌부의 위빠싸나 수행계에 대한 정보가 훤했다. 내가 영어가 통한 다음, 나눈 대화를 통해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들 대부분은 유럽에서 19세기부터 시작된
인도학 불교학의 연구 축적으로 불교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다. 학술 분야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한번 더듬으면서 소개하기로 하고, 지금은 명상 수행에만 분야를 좁혀서 말해보려고 한다. 이들은 대승불교 쪽, 이른바 티베트와 일본의 젠(Zen)불교에
대해서도 빠삭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송광사 구산(九山)대선사님을 언급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 무렵 송광사에는 외국인 승려들이 간화선을 닦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숭산(崇山) 대선사에 대한 이야기도 막 입에 오르고 있었다.
일본 출신 선사들에 대해서는 꾀나 많이 알고 있었다. 공부 좀 했다는 친구들, 특히 독일에서 온 학구적인 사람들은 실론의
아일런드 허미티지(Island Hermitage)를 말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말미에서 소개하겠다.
가나숭 국제관 2층 마루에 앉아 있으면 매일 새로운 인물들이 찾아왔다. 내가 한국에서 경험한 불교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물론 내가 나이가 아직은 더 배워야 하는 학승 정도의 수준이기도 했지만, 이들 서양 사람들은 하나
같이 명상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나에게 간화선에 대해서 묻기도 했지만, 이들은 이미 일본의 젠(Zen) 서적을 많이 읽어본 후여서, 별로 흥미가 돋지 않은듯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 불교에는 도인들이 많이 계셨었다.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아무리 열을
올려서 이들에 대한 소개를 해도 별로였다. 한국의 선불교에 대한 영어로 된 책이 있느냐고 했지만, 있을리가 만무했다.
때마침, 걸레 중광스님의 기행이 영자신문에 소개된 것이 돌아 다녔다. 읽어보니, 기행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히피 멍크(hippie monk) 정도로 생각하는 친구들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 정도로 이들에게 한국불교는 변방이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붓다다사 비구는 20세기 태국의 은둔 철학자로 불릴 정도로 선교겸수(禪敎兼修)에다가 서양 철학사상에도 정통한 분이었다.
불교교리와 태국의 전통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응용하신 분이다. 진부한 구습적인 사고를 개혁적으로 전환하여 사회화하신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철저한 태국의 삼림 전통수행 승려로 출발했지만, 불교 사상이나 철학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다른 종교 철학 사상에도 다소 개방성과 포용성을 견지했던 분이다. 붓다다사 비구는 불교안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 밑바탕에는 다원주의적인 사고를 가졌었다. 붓다다사 비구는 타이 총리와 왕국 섭정직을 역임했던 정치인이자 사회운동가인 쁘리디 파놈용(Pridi Phanomyong:1900-1983)에게 사상적 영감을 주었다. 그는 프랑스 사회주의 학파였고, 태국의 사립 명문인 탐마삿 대학교를 설립하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자유 타이 운동을 이끄는 등의 업적을 남겼던 분이다. 붓다다사 비구는 60-70년대 태국의
사회 운동가들과 예술가 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분이다. 붓다다사 비구는 1932년 태국 남부 지역인 수랏타니 주의 차이야 구에 왓 수안 목(Wat Suan Mokkh) 사원을 설립했다. 나도 가봤지만, 사원은 정글 속에 위치하고 많은 쿠티(조그마한 오두막집)들이
있어서 명상 수행자들은 이곳에서 참선하면서 수시로 붓다다사를 면담하여 지도를 받고 있었다. 붓다다사 대선사님 에게는
태국과 해외에서 지성인들이 많이 찾아와서 친견했으며, 서양의 명상 수행자들 또한 그의 문하에서 주로 아나빠나싸티(Anapanasati,수식관)를 지도받았고, 다양한 종교 성직자들과 학자, 요가 수행자들까지도 문하에 있었다.
다음은 버마의 마하시 사야도 선사를 소개해 보자. 국적은 다르지만, 당시 국제 선객(禪客)들에게는 태국의 아잔 차 선사나
붓다다사 비구 못지않게 버마의 마하시 사야도 선사 또한 친견하고 문하에서 명상수행을 하고 싶어 했던 인기 스승이었다.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대선사님은 주로 위빠싸나 명상을 지도하신 분이다.
마하시 사야도 선사님은 ‘우 나라다의 신 버마식’ 방법이라고 해서 복부의 오르고 내리는 호흡법을 지도하셨다.
우 나라다(U Nārada 1868–1955) 선사는 밍군 젯타운 사야도라고 부르는데, 버마 위빠싸나 명상수행을 재생시킨 인물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그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분으로 ‘우 나라다의 신 버마식’ 위빠싸나를 ‘마하시 방식’ 으로 전환하여 널리
보급하셨다. 마하시 선사는 빨리어 경전에 의한 삼장을 깊이 공부했지만, 1931년 교학 공부를 접고, 우 나라다 선사 문하에서
위빠싸나 명상수행을 집중해서 수련했다. 이밖에도 당대 유명한 숲속 명상스승들 문하에서 명상수행을 하고 1938년부터
명상지도를 하기 시작했고, 1947년에는 우 누 버마 수상이 양곤에 설립한 마하시 사사나 선원(Mahāsi Sāsana Yeiktha)에
주석하면서 명상 지도를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마하시 사야도 선사는 버마에서 1954년에 개최된 제 6차 경전 결집대회에서
최종 편집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후 마하시 사야도 선사는 버마는 물론 인도네시아, 실론, 태국에 마하시 명상 센터를 설립했고, 1972년경에 이르면 그의 문하에는 약 1백만 명의 명상 수행자들이 있었고, 1979년에는 미국 매사추세츠에 설립한 명상센터
개원식에 참석하여 설법하면서 세계적인 명상 스승으로 더 알려지게 됐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양곤의 마하시 명상 센터로
몰려들었으나, 1982년 그는 입적했다. 입적 후에도, 마하시 명상 센터는 명상 수행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필자는 80년대 초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있었지만, 양곤에 있는 그의 명상센터는 1990년 11월경에야 가 볼 수 있었다.
그 후 몇 차례 가봤지만, 항상 국내외 수행자들로 만원이었다.
태국의 아잔 차, 붓다다사와 버마의 마하시 사야도 대선사님들은 입적 후에도 계속해서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아잔 차 대선사의 경우, 미국인 제자인 아잔 수메도 비구의 활동으로 영국에 규모가 크고 많은 명상 수행자들이 참가하는
수행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마하시 사야도 대선사 문하에서 수행했던 서구의 다양한 다수의 제자들이 구미에서 명상을 지도하고 있다. 현재 남방 불교 전통의 명상하면 버마의 마하시 사야도 대선사와 태국의 아잔 차 대선사가 쌍벽을 이루면서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90년대에 들어서면 우리나라에도 이 명상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런 명상 위주의 흐름에 서양인 출신 비구들을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산맥이 있는데, 그것은 실론의 아일런드 허미티지
(Island Hermitage 섬 암자)의 불교학파이다. 이 분들도 명상을 하지만, 이 분들은 독일계와 영미국계 들로서 보다 학구적인
스타일이다. 명상도 학구적으로 접근한다. 실론(스리랑카) 갈레 지역의 바다호수 안에 있는 도단두와(Dodanduwa) 섬에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캔디 숲속 암자로 옮겨갔다. 이 섬 암자의 불교학파 비구들은 버마 승가와도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주인공은 독일 출신의 냐나티로카 대장로(Nyānatiloka Mahāthera:1878–1957)비구이다. 그의 제자는 냐나포니카 장로 (Nyanaponika Thera:1901–1994) 비구이며, 냐나포니카 비구는《불교명상의 핵심, 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 (1954)》이란 명상저서로 유명하며, 영어권 명상 수행자들 에게는 지금도 인기 서적이다. 이 분의 수제자는 빨리어 경장을 영역한 비구 보디(Bhikkhu Bodhi 1944-현재) 스님이다. 나는 태국에서 비구생활을 하다가 인도로 가기 전에 실론에 들렸을 때, 콜롬보 와지라라마 사원(Vajirarama Temple)에 주석 하시면서《아비담마입문, A Manual of Abhidhamma》등 많은 영문 저서를 낸 나라다 대장로(Narada Maha Thera 1898-1983)를 친견하고 잠시 머무른바 있었는데, 여기서 비구 보디(Bhikkhu Bodhi 1944-현재)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다음 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리서치해서 소개하기로 하고, 이제 태국의 명상 불교를 마무리 해보자.
현재 태국에서 명상 수행하는 대부분의 파랑 비구들이나 재가자들은 아잔 차 문하가 대부분이다.
이 분들은 태국승가에서 비구계를 받고 철저하게 율장을 준수한다는 사실이다. 국적과 얼굴만 다르지 태국 비구승가의 전통을
철저하게 따른다는 철칙을 지키고 있다. 태국을 벗어나서 세계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태국 비구승가의 전통과 룰을 지키면서
불법을 전파하고 있다. 버마의 마하시 사야도 대선사의 명상 지도노선을 따르는 분들은 출가 비구들 보다는 재가 수행자가
압도적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면, 많은 수의 외국인들 특히 파랑들의 출가가 있지만, 반면에 얼마가지 않아서 가사를 벗는 분들도 상당수이다. 하지만 한번 가사를 입고 수행의 문에 들어서면 10년 20년 30년 아니 종신토록 장기간 끝장을 보는 비구들도 제법 되는 것 같다. 명상 수행 위주의 파랑 비구들만을 소개했지만, 순수한 태국식 비구승가의 전통에 따라서 평범하게 비구 생활을
하는 파랑들도 많다. 그리고 비서구권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팔 인도 방글라데시 출신 비구들은 대개 태국에서 대학에
다니면서 학습에 매진하는 학승들이 많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이치란 박사
해동경전어 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