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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 꽃 / 정순복
1부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나는 집 옆에 있는 연못가에 앉아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울고 있었다.
하늘의 번개는 하늘을 가르고 천둥소리는 나의 울음소리가 되어 울부짖는다. 연못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며 원을 그린다. 연속적으로 삶의 굴레를 만들며 말한다. 만남과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은 빗방울처럼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만났다 헤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반복되는 삶 속에서 기다리며 만날 친구가 저 빗방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빗방울처럼 나만의 삶의 굴레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무작정 집을 떠나야 했다. 목적지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길을 걸어야 했다.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고 소리 지르고 싶어도 소리 지를 수가 없었다. 세상이 나의 편이 되어 주지 않고 어찌 냉혹하게 다들 매몰차게 나를 외면하는지 난 알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이 이런 막막한 삶을 살아가리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날들이 현실이 되어 나의 인생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멋진 계획과 삶을 스케치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인생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인생을 그냥 빗방울처럼 그대로 물 흘러가듯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구름 뒤에 태양이 기다리며 내일을 위해 빛을 비추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기에 그 태양을 바라보며 삶의 여정길을 찾아 떠난다.
동원이와 나는 서로가 조금 떨어진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부잣집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는 동네에 있는 중학교의 교장으로 계셨고, 어머니께서는 나를 낳고
6개월 만에 어린 나를 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온갖 정성을 다해 키우셨다. 언니와 오빠는 엄마처럼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다.
나는 어느덧 나이가 들어 라일락꽃처럼 향기를 담고 있는 숙녀가 되었다. 윗동네 아랫동네에서 모두들 나를 하늘에서 내려보낸 천사라고 할 정도로 착하고 아름다운 그런 숙녀로 자라주었다고 말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우체국에 가게 되었다. 열심히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는 동원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동원은 어느새 나를 보았는지 붉은 홍시의 얼굴을 하고 내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주희 씨! 어서 오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우편물을 부치고 우체국을 나와 집으로 향해 걷고 있는데 동원이 뛰어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주… 주희씨! 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왜 그러시는데요?”
“주희 씨와 마주앉아 차 한 잔 마셔 보는 것이 제 소원이거든요. 제 소원 들어주실 수 있죠?”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마음 같아선 얼른 대답하고 싶었다. 나도 동원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 동원이가 우체국의 유니폼을 입고 퇴근하는 모습에 반해 지금껏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먼발치에서 그를 지켜보며 혼자만의 사랑으로 집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근무시간이거든요. 오후 6시에 우체국 앞으로 나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동원은 그 말 한마디 남겨놓고 바람처럼 우체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집으로 걸어오며 자신도 모르게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길가의 꽃들은 나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에 저마다 고개를 내민다. 내가 기뻐하는 모습이 꽃들에게 행복을 준 것인지 모르지만 꽃들도 덩달아 기뻐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꽃을 보면 아름다움을 생각하는데 오늘만은 꽃들도 나의 기뻐하는 모습과 행복한 마음을 알고 저마다 고개를 내밀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조심스레 치마를 감싸며 꽃들 앞에 앉는다. 꽃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만져본다. 나는 어느새 동원이가 만나자는 말에 취했듯이 꽃들에게 입맞춤을 해본다.
‘얼른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나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으로 왔다 갔다 자신의 마음마저 붙들 수가 없었다. 약속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거울을 보고 또 보고 그것도 모자라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주희야! 너 동원 씨를 좋아하니?”
“아니.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해!”
“동원 씨가 너 좋아한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 할 건데?”
“글쎄. 뭐라고 대답해야 되니?”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
“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물어보고 입을 두 손으로 얼른 막는다.
“그건 말이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니까….”
그제야 자신이 동원을 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살며시 따라 웃는다. 나는 화장을 하지 않지만, 오늘은 입술에 약하게 엷은 감색 립스틱을 살짝 발라본다. 나의 얼굴은 한층 더 예뻐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얼른
동원을 만나 나의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동원이가 근무하고 있는 우체국이 보였다. 나의 심장 소리는 북을 치고 가슴은 음악의 악보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꽃들도 함께 춤을 추는 듯 바람에 살랑거리며 덩달아 기뻐하고 있었다.
동원은 언제 나왔는지 내가 오는 길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일찍 오셨네요?”
“아니에요. 조금 전에 나왔습니다. 이곳으로 나오라고 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나는 동원의 앞에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다가 손을 뒤로하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동원이도 조금 어색했는지 말을 하지 않고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이내 말을 꺼낸다.
“주희씨! 저녁 안 드셨죠? 우리 시내로 나가서 저녁 먹는 것이 어떨까요?”
“그래요. 우리 저녁 먹으로 가요.”
서로가 저녁 먹으러 가자는 얘기가 나오자 오랜 만에 만난 친구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주희 씨! 얼른 타세요.”
동원은 자기 옆자리의 자문을 열며 예의 있게 말을 한다.
나는 동원의 옆에 앉았다. 강줄기를 따라 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나의 긴 머리는 바람의 향기를 따라 행복으로 달려가듯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달리는 차에서 동원과 둘만의 사랑이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의 행복처럼 순탄하게 이어졌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얼마쯤 달렸을까. 강 건너에 궁전처럼 아름답게 지어놓은 집이 보였다. 나는 강 건너 있는 집을 바라보며 잠시 이름 모를 그 궁전의 집 주인이 되어본다. 어느새 입었는지 앞치마를 두르고 동원에게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맛을 보라고 하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나는 행복했다.
동원은 내가 자신의 옆 좌석에 앉아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도 못 했었는지 곁눈으로 보고 또 본다. 동원이 행복해하는 모습에 나 또한 행복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서로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행복은 이미 둘만의 공간에 있었다.
조용한 침묵 속에 강줄기를 따라 달리던 차는 어느새 조그만 마을 시내에 도착했다. 천천히 이곳저곳을 살피던 동원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주희 씨! 저녁 식사 어떤 것으로 드실래요?”
“동원 씨가 좋아하는 것으로 드셔요.”
“그래도 주희 씨가 좋아하는 것으로 드셔야죠.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요.”
“….”
“그럼 우리 저 식당으로 들어갈까요?
“그래요. 그곳이 괜찮을 것 같아요.”
우리는 함께 넓게 보이는 2층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 너 주희! 나… 나 모르겠어?”
“….”
“혹시 장주희 씨 아니세요?”
“예. 제가 장주희인데요.”
“나 민호… 김민호. 나 몰라?”
그제야 나는 민호를 기억할 수 있었다. 민호가 나에게 악수를
청하기에 나는 얼떨결에 악수했다. 그러나 민호는 악수한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동원의 눈은 휘둥그레져 나와 민호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민호에게서 강제로 손을 빼면서 동원에게 민호를 얼른 소개를 했다.
“이쪽은 고등학교 동창생이에요.”
“아. 그래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동원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민호에게 먼저 악수를 청한다. 동원은 나에게 무엇으로 드시겠느냐고 묻자 민호는 이 집에 제일 맛있는 것으로 시켜드린다고 하면서 동원의 말을 가로막는다.
민호는 이곳이 형님 집의 가게인데 잠깐 다니러왔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민호를 만나 것이 싫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때 나를 못살게 쫓아다니고 괴롭히던 동창생 중의 한 명이었다. 민호는 동원의 앞에서 나를 좋아했었다고 자랑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민호가 미웠다. 오랜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둘만의 시간을 빼앗는 것도 싫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동창생이기도 했었다. 여기가 민호의 형님 식당인지도 모르고 들어온 것이 후 해가 되었다. 이곳이 민호의 형님 식당인 줄 알았다면 나는 이곳을 가자고 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녁 식사가 나오자 민호가 자리를 양보해 주리라 믿었던 민호는 끝내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고 자기 자신의 저녁 식사까지 함께 내 온 것이다. 하는 수없이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어야 했다. 민호는 맛있다고 나에게 먹어보라고 자신의 젓가락으로 음식을 연신 집어다주는 것이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민호는 나를 만나서 반가운지 도무지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나는 동원한테 미안했다. 자신이 동원에게 해주어야 할 행동을 민호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 싫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동원이
저녁 식사 값을 지불하려 하자 민호는 억지로 떠다밀며 자신이 지불했다고 받지 않는 것이다.
식당에서 민호와 헤어져 밖으로 나왔다.
나는 마음을 졸였었다. 혹시나 민호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민호가 따라나서지 않자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민호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민호의 성격으로 보아선 끝까지 따라다니며 방해하는 성격이었는데 어릴 적의 민호가 아닌 착한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그것이 나는 정말 고마웠다.
동원과 나는 시내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변두리의 시내라 찻집도 시골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은한 불빛 아래 족두리 꽃이 그려진 장식용 호롱불이 그들을 맞이한다. 동원은 조용하고 제일 아득한 자리를 찾았다.
“주희 씨 앉으세요.”
“예.”
“동원 씨도 앉으세요.”
찻집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차를 주문받는 것이다.
동원은 나에게 먼저 묻는다.
“주희 씨! 어떤 차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홍차를 좋아하는데 동원 씨는 어떤 차를 좋아하세요?”
“저도 홍차를 좋아해요.”
찻집 주인은 주문을 받고 사라졌다.
“죄송해요. 제 동창생 때문에 많이 불편하셨지요?”
“아니에요. 동창생이 주희 씨를 만나니 너무도 반가웠나 봐요.”
동원은 오히려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다른 말로 얼른 돌린다.
“주희 씨! 오늘 저와 약속을 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이렇게 주희 씨 앞에서 차를 마셔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지요?”
나는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고 ‘그래요. 우리 앞으로 계속 만나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입안에서 맴돌 뿐 말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나는 꺼질 듯 말 듯 하는 호롱불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동원도 호롱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서로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호롱불도 우리 앞날을 밝혀주고 있듯이 동원과 나의 앞날에 등불이 되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동원이 먼저 입을 연다.
“주희 씨! 족두리 꽃을 아세요?”
“족두리 꽃. 그럼 알지요. 족두리 모양의 꽃인데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연보랏빛을 띠며 꽃잎은 작고 꽃은 크지요. 족두리 모양으로 아래서부터 꽃잎이 피는 족두리 꽃을 말하는 거죠?”
“어떻게 족두리 꽃을 아세요?”
“아버지께서 매년 우리 담 밑에 족두리 꽃을 많이 심으세요. 돌아가신 엄마가 족두리 꽃을 무척 좋아하신다고 하시며 가끔 담 밑에 가셔서 눈물을 훔치시곤 하세요. 그래서 저도 가끔 엄마가 생각나면 그 족두리 꽃을 보러 가곤 해요.”
“그러셨군요. 제가 어머니 생각나게 해서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아니에요. 이렇게 동원 씨와 만난 것을 알면 엄마도 기뻐하실 거예요. 엄마가 살아계신다면 자랑하고 싶어지는데요.”
“그래요. 정말 영광입니다. 어머니도 지금 기뻐하고 계실 거예요. 주희 씨! 주희 씨만 좋으시다면 이다음에 제가 주희 씨 머리 위에 족두리를 올려드리고 싶어요.”
나는 동원을 처음 만났는데도 아주 오래 전서부터 만난 친구처럼 다정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동원이가 했던 말이 자꾸 나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주희 씨만 좋으시다면 족두리를 주희 씨 머리 위에 올려드리고 싶어요.’ 그 이후의 만남으로 계기가 되어 동원과 나는 바라보는 사랑에서 만남의 사랑으로
서로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하고 동원과 나는 어느 부부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무엇보다도 시어머니께서 당신의 딸처럼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다. 나는 마치 친정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했다. 그런데 내가 뱃속의 아기가 생기자 어머님께서는 변하기 시작하셨다. 이상한 일이었다. 당신의 손자가 생기면 더더욱 기뻐해야 하시는데 어머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셨다. 아마 그것은 내가 아기를 잉태하자 동원이가 나에게 잘해주며 변하자 아마 어머님도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도 또한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자 혼자서 다섯 살 된 동원과 동원의 누나를 키운 것이다. 그런 아들인 동원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아들일까.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아들을 며느리가 왕자처럼 모시고 살아도 시원치 않을 텐데 그 반대로 나를 위해서 온갖 가진 정성으로 공주를 모시고 살고 있듯이 살고 있으니 마치 나를 옥에 티처럼 미워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나는 안타까웠다. 동원의 생각이 조금만 변하여 어머님을 위해 생각해 주면 좋으련만 동원의 고집 또한 꺾을 수가 없었다.
동원은 자신이 기뻐서 도와주고 아껴주고 하는데 그리고 어머님한테도 똑같이 잘해드리는데 무슨 이유가 있느냐고…. 오히려 동원이 큰소리를 치니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동원은 어머님 말씀이라면 다 듣는 그런 효자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생기고 자식이 생기자 동원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사랑을 어머님에게 쏟으며 살았지만 지금은 아내와 아들이 있지 않는가. 그러기에 사랑도 자연히 나누어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어머님은 서운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시 어머님께서 그러시다 말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첫아이가 돌이 되었는데도 어머님은 여전하셨다. 동원이가 나를 도와주면 도와줄수록 나는 더더욱 힘이 들었다. 그렇게 힘들 날들이 계속될 때쯤 동원의 입영 영장이 나온 것이다. 입영 영장이 나오자 동원은 나와 헤어져 있어야 하는 그 마음이 너무 힘들었는지 더더욱 나와 아이에게 잘해주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하루일과는 노예처럼 일을 해야 했고 동원이 집에 들어오면 나는 잠시 다리를 펴고 앉을 수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지금은 힘들어도 동원 씨가 군에 가면 어머님은 조금 나아지실 거야. 그때 어머님은 다시 나에게 사랑으로 더 잘해 주실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나의 생각은 빗나가는 화살이 되어 자신의 마음에 와서 꽂히고 말았다.
동원이 입대하고 나서 어머님은 누군가에게 통화를 하고 계셨다.
“야야 네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살아야겠다. 동원이가 군에 입대하고 나서 집안이 썰렁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어서 짐 싸가지고 집으로 들어오너라….”
나는 전화를 걸고 계시는 어머님을 바라보며 숨이 막혀 옴을 느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당연히 상의해야 할 부분인 것을….
나는 물끄러미 어머님을 쳐다보았다.
“뭘 보냐? 어서 저기 창고로 쓰던 방을 치우고 너는 거기서 살고 명자 오면 네가 쓰던 방을 비워줘라! 동원이가 없으니 어쩌겠냐? 내가 허전할걸. 그래도 명자가 와있으면 내 마음이 조금 덜 허전할 것 같은데… 왜 내가 잘못했냐?”
어머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나에게 물으신다.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하는 말은 모두 말대꾸하는 것으로 보시기에 더 이상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양이 앞에 쥐가 되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작은 창고 방에 들어와 울고 또 울었다. 그동안 서운한 마음이 작은 방으로 가득히 모여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갈등과 동원을 사랑한 죄가 나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방을 치우고 자신의 짐을 옮기며 다시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형님이 오시면 좀 나아지실 거야. 또 외손자도 있으니까, 나와 같은 여자 입장이고 또한 며느리 입장이니까 조금은 달라지리라’ 기대를 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누가 그랬던가.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낮에는 밭일과 밤에는 한복을 만드는 바느질까지 해야 했다.
형님이 들어오자 나는 더 힘이 들었다. 집안 살림은 살림대로 더 많아졌고 빨래 청소 모두 나의 일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시고 취미로 화투를 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화투를 치고 돈이 없으면 며느리가 돈을 줄 거라고 하면서 화투를 치셨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취미로 하시는 돈도 챙겨드려야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취미로 하시던 화투치기가 놀음으로 이어져 나를 시누 친구인 혜숙의 집으로 보내어 가정 일을 도와주고 돈을 벌어오라고 시키셨다. 또한 밭일도 나의 일이 되었다.
하루는 무더운 땡볕에서 고추를 따다가 쓰러졌다. 꼼짝도 못하고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점심을 안준다고 밭으로 오신 것이다.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발로 엉덩이를 내리 차며 일하기 싫어 이렇게 팔자 좋게 누워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신다.
“고추 따라고 했더니 여기 누워 자빠져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해! 빨리 못 일어나!”
“어머님! 저 아파요! 물 좀 주세요!”
“뭣이! 하라는 일은 안하고 자빠져 있으면서 나를 시켜! 그래. 너 잘 만났다!”
어머니는 화투치시다 돈을 잃었는지 발로 나의 발목을 있는 힘껏 밟고 나서 나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머님! 저 정말 아파요!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어머님!”
“뭐 살려달라고? 내가 널 죽였니? 네년 때문에 항상 재수가 없어. 재수가 없다고!”
살려달라는 말도 못들은 척하고 어머니는 집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아픈 몸을 일으켜 세워보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동원 씨! 내가 살아야 하나요? 우리 아이 어떻게 해요? 나 혼자라면 차라리 죽고 싶어요. 그냥 이렇게 이 고추밭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동원 씨를 생각하며 그냥 죽고 싶어요, 하지만 동원 씨 아이 불쌍해서 가여워서 어떻게 해요?”
나는 아기를 생각하며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얼마를 울었을까 명자가 달려 나와 쌍심지를 키고 따 놓은 고추를 나에게 집어 던지며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야! 얼른 일어나! 얼른 못 일어나? 울 엄마한테 너 뭐라고 그랬어? 살려달라고 그랬다면서? 울 엄마가 널 죽였니? 죽였냐고!”
“….”
“울 엄마가 널 죽이지도 않았는데 살려 달라고 했으니까 그래. 너 오늘 죽어봐.”
도끼를 품은 명자는 고추밭에 고추가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지지대로 세워놓은 것을 뽑아 주희의 넙죽 다리를 푹 찌른다.
“아야…아가씨! 왜 그래요?”
“왜 그러는지 몰라. 가르쳐 줄까?”
명자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고추를 따다 상처 난 부위에 비벼대기 시작했다.
나는 온 몸을 떨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상처에 매운 고추를 비벼댄 아픔이 숨을 멈추게 했다.
나는 고추밭에서 그런 아픔으로 잠시 실신했다 깨어보니 다시 상처 부위가 쓰리고 아팠다. 도움을 청하려 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아픈 상처에 통증을 줄이기 위해 침을 발라 닦아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어나려 해도 발목의 통증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래도 당신의 손자에게만은 나에게 대하듯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마음 같아선 아버지를 찾아 다시 친정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친정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아버지와 오빠 언니에게 짐이 되기 싫었다.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사랑으로 키웠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힘들어도 참아야 하고 슬퍼도 참아야 하고 아파도 참아야 했다. 그렇게 힘들면 힘들수록 이를 악물고 군에 가있는 동원이 제대하기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동원의 편지는 계속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 편지는 언제나 어머님과 집에 들어와 살고 있는 형님에게 압수되어 동원이 뭐라고 썼는지 동원의 글씨체 하나라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남북이 가로막아놓은 그 삼팔선처럼 나와 동원의 사랑까지 가로막고 있었다.
동원이 군에 입대하고 나서 식구는 늘어나고 일하는 사람은 없고 남의 삯바느질을 해서 살아가기란 더더욱 힘이 들었다. 밤늦게 옷을 만드는 일도 나는 벅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원을 기다리는 유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사이 이상하게도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꼈다. 힘든 일에 소화가 안 되어 그러거니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동원의 둘째 아이가 뱃속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째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어머님과 형님은 이때다 싶어 나를 더 괴롭히기 시작했다.
“엄마! 어제 저 여시가 한밤중에 석준이 재워놓고 나갔다 오던데… 저 미친 것이 어디 가서 어떤 짓을 하고 왔는지 알게 뭐람.”
시누는 나를 내쫓기 위한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요사이 이상하다 했더니 네가 한밤중에 밤이슬을 밟고 다녀. 너는 이제 도저히 내 집에 둘 수가 없다. 이 집에서 당장
나가거라! 우리 동원이가 바람난 너 같은 년은 잘 내쫓았다고 할 거다. 당장 나가!….”
“어머님 아니에요. 제가 한밤중에 석준이를 두고 어디를 나가겠어요. 아가씨가 잘못 보신 거예요. 저는 나가지 않았어요.”
“엄마 거짓말이야! 속지 말아요!”
나는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다. 동원을 만나기 위해서는 여기서 죽어도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가서 살아간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친정아버지께서 알게 되신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걱정이 되어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어머님과 형님은 시집살이를 더 심하게 시켰다.
시누인 형님이 들어오고부터는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께서 부침개를 부치라고 하시는 것이다.
저녁상은 다 차렸는데 부침개를 부치는 사이 어머니와 형님은 내가 먹을 저녁까지 벌써 다 먹고 나서 부침개까지 욕심을 부리며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식사 시간은 나에게는 없었다. 아니 배가 고파서 배를 채우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먹을 것까지 욕심을 부려 먹고 나서 끝내 토하고 만다. 밖에 나가서 토해도 되는데 방에다 토해놓고 치우라고 하는 것이다.
배가 고파 뜬눈으로 물로 배를 채우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새벽 아침 닭장에 가서 닭이 낳아 놓은 알을 가져다가 먹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달걀을 먹다가 그만 시어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머니는 화를 이기지 못해 밀가루를 가져다가 나에게 뒤집어씌우며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참을 수가 있었다. 이 집에서 나가라는 말만 안 한다면 그 어떤 모욕도 어떤 힘든 일이라도 다 참을 수가 있었다.
석준이가 9개월이 되자 나는 친정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불효를 하고 말았다. 어느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를 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한 사람을 사랑한 죄로 인하여 부모에게 큰 불효를 하고 말았다.
어머님과 형님이 친정아버지를 찾아가 내가 동원을 군에 보내놓고 밤이슬을 밟으며 바람을 피워 아기를 가졌다고…. 그러니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결국 그것으로 인해 교장 선생님으로 정직하게 살아오신 친정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시고 오빠와 언니도 나와 등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동원을 사랑한 죄가 이처럼 참혹하게 한 집안의 가족까지 헤어짐으로 몰아내고 말았다.
나는 죽고 싶었다. 그러나 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죽고 없으면 이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은 결국 내가 바람을 피워 아버지를 죽게 한 것이 되고 말지 않는가. 그리고 동원을 꼭 닮은 어린 아들을 두고 내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친정아버지를 따라 죽고 싶었다. 아버지를 따라 가면 친정어머니도 만나게 되고 무엇보다 이렇게 나의 육체에게 고통도 주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 마음도 편안해 질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뱃속에 있는 아기 때문이었다.
어머님께서 큰아이인 석준을 동원의 자식이라 생각하고 계시기에 동원이 제대 후라도 잘 길러주실 것이다. 하지만 동원이 입대하면서 작은 아이를 가진 것을 모르고 입대했으니, 어머님께서 동원에게 어떻게 말씀을 하실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죽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동원이 제대하는 날까지만 참자. 그러나 참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어머님과 형님은 밥도 못 먹게 하는 것이다. 죄를 지어 형무소에 가도 밥은 주는데 말이다.
“너는 밥 먹을 자격이 없어! 염치도 없이 밥을 먹으려고… 왜 우리가 남의 자식까지 먹여야 하니? 이 못된 것!”
“엄마! 얼른 내보내!”
어머님과 형님은 이미 결심한 듯 했다. 동원이 제대하기 전 나를 쫓아내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다.
나는 먹은 것이 없어 물이라도 배를 채우려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어머님과 형님이 대화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엄마! 동원이 오기 전에 내쫓아야 돼. 그래야 동원이가 저기 뒷마을에 사는 내 친구 혜숙이와 결혼할 수 있어. 그 집이 얼마나 부자인지 알아. 그 집 재산 다 우리 거야. 혜숙의 아버지가 혜숙이한테 다 준다고 했어. 하긴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있어야지. 부자보다도 혜숙이가 동원이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알아. 내가 주소 주었는데 답장이 오나봐. 혜숙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명으로 주희로 쓰라고 했어. 아이 이야기는 절대 쓰지 말라고….”
“그래. 잘했다! 우리 명자가 똑똑하지. 암 똑똑하고말고.”
“엄마. 그러니까 동원이 제대하기 전에 얼른 쫓아내야 돼. 저년이 바람나서 나갔다고 하면 동원이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혜숙이한테 갈 거야. 처녀이고 재산도 많겠다. 마다할 일이 없잖아.”
나는 얼른 창고 방으로 들어왔다. 머리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것을 알고 있는 이상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석준을 안고 울고 또 울었다. 더 많은 일들이 닥칠 것이 분명한데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동원이 보고 싶었다. 내 말을 안 믿어 준다 해도 이 상황을 말하고 싶었다. 나에겐 아무도 없는데….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래도 견디어보자. 두 눈에 눈물을 닦고 석준을 바라보았다. 아빠를 꼭 닮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두 발을 붙들고 발을 빨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가슴이 메어지기 시작했다.
동원이 입대하기 전 얼마나 석준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예뻐했는가. 그날이 다시 오지 않을까 두려움이 어둠을 몰고 오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엄동설한 추위보다 더할까.
보고 싶다. 꼭 한 번만….
나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우당탕하는 소리에 함께 형님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여시야! 잠이 와? 지 자식이 없어졌는데도 잠을 자는 것을 보니 대단한 여자야! 흥! 밤이슬을 밟고 남자 홀리러 다니니 자식이 눈에 보이겠어?”
나는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있어야 할 아이 석준이가 없었다.
“형님! 우리 석준이… 우리 아이 어디 있어요? 주세요! 제발….”
“이 미친것아! 아이를 왜 나보고 달래?”
언제 들어오셨는지 어머님께서 놀랜 듯이 말씀하신다.
“밖에서 먼 애기 우는소리가 나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아이는 집 앞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얇은 이불에 싸여 울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안고 일어서려 하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엄마! 얼른 대문 잠그세요! 얼른 저년 들어오기 전에….”
나는 아이를 안고 뛰어가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번 닫힌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일부로 걸어 잠그고 있는 대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어머님 용서하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형님 한 번만 용서하세요!….”
아침까지 나는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 다시 문을 두르려 보지만 집안의 고요는 여전했다.
시댁에서 쫓겨난 나는 오라는 곳도 갈 곳도 없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그래도 희망의 빛을 찾았다. 얼마 전 엿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뒷마을 혜숙이라는 여자가 생각났다. 그곳에 가면 혜숙이라는 여자는 동원의 주소가 있지 않는가. 나는 걸음이 바빠졌다. 뒷마을에 도착하자 혜숙의 집이 보였다.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나도 저런 기와집에서 알아주는 교장 선생님의 딸로서 부러울 것이 없이 자랐는데 지금 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를 울리고 또 울렸다.
“저기 여기가 혜숙 씨 집인가요?”
“예. 그런데요.”
“저… 동원 씨 집사람이거든요. 동원 씨 주소 좀 알려고 왔는데요. 좀 가르쳐주세요.”
혜숙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두 팔을 깍지 끼고 위아래를 한번 훑어보고 한마디 내뱉듯 말을 한다.
“진짜 웃기네. 남편주소를 왜 나한테 가르쳐 달래요? 명자가 미쳤다고 그러더니 정말 미쳤나 보네. 가세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남의 남편주소를….”
그래도 자그마한 희망을 걸었다.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단 말인가. 철저하게 혼자되어 하루 종일 한없이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고 걷다 보니 어느 한적한 천막 교회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 들어가 몸을 숨긴다. 어둠이 깔리는 저녁이라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이 이곳에서라도 잠시 쉬어가라고 안내하는 듯했다. 교회 안은 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앉아 예배를 드린 흔적만 남아 있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가마니를 깔아놓은 곳에 무릎을 꿇었다. 갈 곳도 없는 나는 이곳에서라도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선 하나님께 기도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아 먼저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가 아이들 데리고 오늘 하루 저녁 이곳에서 이슬을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룻밤 이곳에서 이슬을 피하게 하시고 제가 살아오면서 지은 죄가 있다면 모두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우리 가족을 버리지 마소서….”
기도가 끝나자 업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어두워서인지 울기 시작했다. 나는 가마니에 털썩 주저앉아 아이에게 젖을 찾아 물렸다. 아이에게 먹일 것이 없으니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젖뿐이었다. 아이는 젖을 빨다 젖이 나오지 않자 또다시 울기 시작한다. 엄마가 먹은 것이 없으니 젖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아이는 나의 빈 젖통을 빨다 지쳐서 울다가 잠이 들었다. 잠자리 대신 조그마한 천막 교회 안에서 초조하게 새벽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 되어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눈물로 아침을 먹는다. 반찬도 없이 눈물이 입속으로 허기진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눈물로 아침을 먹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짙게 깔린 안개가 나를 이름 없는 무대에 서게 하고 새벽교회 종소리가 나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무도 나의 아픈 마음을 모른다. 단지 새벽안개와 새벽이슬이 나의 아픈 마음을 달래려고 안개가 이슬이 되어 또르르 나의 발등에 내려앉는다. 나의 눈물도 이슬과 섞여 발등에 내려앉는다.
나의 마음을 알고 있듯이….
오늘은 또 어디를 가야 하는가 동원은 우리나라 어느 하늘 아래에서 나라를 위해 씩씩한 군인이 되어 다시 우리 가족이 만나는 그날을 생각하며 제대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다시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나에게는 배부른 생각이었다. 허기진 이 몸을 끌고 다시 되돌아 간단한들 누가 반겨주겠는가. 나는 되돌아가는 것을 포기 했다. 배고프면 남의 밭에 버려진 무를 주워 먹고 또 걷다 보면 고구마 캐어간 자리를 다시 흙을 파고 고구마 이삭줍기를 해서 먹고 걸었다.
잠은 어느 한적한 곳 바람을 막아주는 묘지 옆에 아이를 안고 쪼그리고 선잠을 자야 했다. 그래도 묘지 위는 잔디가 있어 차가운 냉기가 다른 곳보다는 덜했다. 나는 무서움도 사치로 보였다. 두 아이를 위해 나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것보다 내가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내 곁에 항상 나를
사랑하던 남편이 있었고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어디로 흘러왔는지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배고픔을 이기려 마냥 먹을 것을 찾아 걸어온 기억만 생각날 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그것이 나에겐 중요하지가 않았다. 다만 내가 중요한 것은 오로지 뱃속에 있는 아이와 남편을 닮은 아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석준이가 배가 고파 젖을 빨아댈 때 내가 먹어야 석준이을 먹일 수 있었고 내가 울면 석준이는 이다음에 엄마가 우는 모습만 생각할까 두려워 웃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모성본능 그것이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어디에서 어떻게 바람을 피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을 걸었다. 산길이라 그런지 집이 없었다. 그런데 나무를 쌓아놓은 곳이 보였다. 저기에서 바람을 피하자 그래도 다행인 것은 늦가을이라 바람만 피하면 그리 춥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나무 밑으로 석준을 데리고 들어갔다. 잠시 눈을 부치며 잠이 사르르 들 때였다.
“엄마! 배 아파.”
그동안은 하는 수 없이 석준에게 젖을 물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뱃속에 아이가 있어 젖을 물리지 않고 젖을 떼려고 음식을 먹인 것이 탈이 난 것 같았다. 먹을 것이 없어 묘지에서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묘지 근처에 던져 놓은 것을 먹인 것이 화근이 되었다.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후회한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처럼 철저하게 버려진 마음이 들기는 처음인 것 같다. 나는 아카시아 가시를 제일 큰 것을 골라 손에 쥐었다. 급한 대로 가시를 가지고 석준의 손끝을 바늘로 따듯이 땄다. 검은 피가 나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나는 석준을 끌어안았다.
“석준아!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나는 엄마로서 석준이에게 가장 소중한 먹을 것을 제대로 공급해 주지 못하면서 석준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이 미안했다.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었다. 먹을 것이 없어 고민해야 하는 삶이 싫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슬프게 하고 앞으로의 아이에게 아빠가 있으면서 아빠가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나를 못 견디게 힘들게 했다. 이대로 이곳에서 아이와 잠들고 싶었다. 따뜻한 곳 겨울이 닥쳐오는 추위 속에 있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이 따뜻하고 같이 있다는 것으로 행복을 알 수 있을 때 이대로 나의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늘의 별이 되어 동원을 바라보고 싶었다.
석준은 이제 괜찮은지 잠이 들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지는 해를 바라보자 눈물이 눈치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석준이가 깨기 전에 먹을 것을 구해야 되는데…. 마음이 급해졌다. 이곳은 산속이라 먹을 것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나무 덤불을 찾았다. 그래도 덤불 속에는 다래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무 덤불만 찾았다. 다행히 나무 덤불 속에 다래나무가 있었다. 다래나무에 열린 다래들은 풋다래였다. 익은 다래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수확인가. 나는 원숭이가 나무에 매달려 재주를 부리듯 나무에 매달려 다래를 땄다. 많은 다래를 땄지만 익은 다래는 많지 않았다. 나는 얼른 다시 석준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런데 잠자고 있어야 하는 석준이가 없었다. 세상이 까맣게 먹물로 막아 버렸다.
“석준아! 석준아!….”
아무리 불러도 석준은 없었다. 순간 나의 뇌리에서 ‘밑을 봐!’ 하는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나는 미끄러져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석준은 나무를 쌓아 놓은 곳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져 있었다.
나무에 찔리고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안고 목이 메어져라. 들짐승이 되어 울부짖었다. 들짐승이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와 그들의 밥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이런 슬픔과 고통은 지금 이 순간 사라지지 않겠는가. 남편인 동원도 소중한 내 자식인 석준도 이제 이대로 내 소유가 아닌 나에게서 떠나보내고 싶다. 가장 소중한 삶이 왜 험난한 생명의 목숨에 매달려 연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손가락을 입속에 넣고 나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토해내고 싶었다. 억지로 내 속에 있는 더러운 삶에 의욕을 끄집어내어 날아가는 새들에게 던져주고 싶었다. 살아있음에 부끄럽고 살아있음에 그를 미워할까 죽고 싶었다. 끊임없이 시작되는 이런 삶의 고통에서 나를 해방 시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삶이 끝이 아닌 시작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석준을 안고 산비탈을 기어 올라온다. ‘그래. 이렇게 사는 거야. 그래 이렇게 사는 거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바람 피하는 나무를 쌓아놓은 밑으로 다시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풀벌레 소리와 희미하게 지나가는 달그림자가 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하룻밤을 그렇게 보내고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이제는 마을을 찾아가기로 했다. 나는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산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물줄기를 찾아 내려가면 마을이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물줄기를 찾아 내려가기로 했다. 맑은 산속에 물을 보자 어린아이의 생명이 보이는 듯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연을 따라 흘러가는 물은 나에게 새 생명을 잉태하게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언젠가는 흘러가다 보면 우리는 만나겠지. 지금 이렇게 흘러가다 보면 동원도 만나고 또 나를 미워했던 시어머니와 시누도 만나게 되겠지. 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의 진실도 이 물이 되어 동원을 만나게 해줄 거야. 기다려보자. 이 물줄기를 따라 마을에 들어가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삶에 도전하겠지.
그래 이런 것이 삶이야. 누가 가르쳐 주지 않고 그 삶 속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삶이야.’ 어느덧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다 보니 정말 마을이 보였다. 마을은 너무 고요했다. 자유와 평강이 그대로 보이는 그런 아늑한 마을이었다. 나는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이 마을로 들어감으로 이 편안한 마을이 시끄러워질까 두려웠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마을로 걸어 들어가 쉴 곳을 찾아 어느 커다란 정자나무 아래 걸터앉았다. 석준은 내가 앉자마자 엄마의 젖을 찾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에겐 젖을 떼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지금 젖을 떼었다면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해서 줄 수 있단 말인가. 빈 젖을 물린다고 할지라도 잠시 잠깐의 배고픔은 빈 젖통을 빨면서 위로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저 마치에서 어떤 나이 드신 아주머니께서 고추를 따가지고 들어오시다 나의 옆에 자리하고 앉으시며 말씀하신다.
“애기 엄마는 어디서 왔어요?”
“아이들 데리고 살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아니 집이 없어요?”
“예. 먼 곳에서 살 곳을 찾아왔어요.”
“그럼 밥도 못 먹었겠네. 어서 우리 집으로 가서 식은 밥이라도 먹게 어서 따라 와요!”
아주머니께서는 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서둘러 집으로 향하셨다.
나는 배가 고파 사양하기보다 얼른 아주머니 뒤를 따라 나셨다. 아주머니 뒤를 따라가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두려웠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싫었다. 아주머니 모습에 나이 드신 시어머님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 집을 따라 들어오는데 집 근처에 족두리 꽃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으셨다. 나는 친정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시어머니의 모습으로 보였던 아주머니가 내가 족두리 꽃을 보자 어느새 친정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기쁘고 마음이 편안했다.
아주머니께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엌에 들어가시더니 호박을 넣고 끊인 된장찌개와 김치 그리고 손수 만드신 두부와 깻잎을 가지고 나오셨다.
“여기 물 먼저 조금 마시고 이것으로 우선 배고픈 허기라도 달래요.”
“고맙습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을 조금 마시고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울음과 함께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지난날의 힘들었던 날들도 함께 넘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먹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살기 위해 먹어야하고 자식을 지키기 위해 나는 먹어야 했다. 한없이 먹을 것 앞에서 작아지는 내 자신이 되어있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목구멍을 청소하듯 밀어 넣었다.
묵묵히 말없이 나를 지켜보시던 아주머니께서는 한참 후에 말을 걸었다.
“애기엄마 있을 곳을 어디다 정했어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이곳에 어디 마땅히 제가 아이들 데리고 살아갈 곳이 있을까요?”
“애기 엄마가 좋다면 멀리 찾을 것 없이 나와 함께 의지하며 살아가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애기 엄마 한번 생각을 해봐요.”
“예. 알겠어요. 제가 생각해 볼게요.”
나는 저녁에 아주머니와 잠자리에 누워 족두리 꽃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족두리 꽃은 우리 친정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꽃이지.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이 족두리 꽃을 보면 어머니가 웃고 계시는 것 같아 해마다 이렇게 집 주위에 족두리 꽃을 심지. 어머니는 그래서
나와 항상 같이 계시지.”
“우리 친정어머니께서도 족두리 꽃을 아주 좋아하세요.”
“거참 애기 엄마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연인가 보네. 어디 가지 말고 내가 친정엄마라고 생각하고 함께 살면 안 될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는 너무 고맙고 감사하지요. 하지만 아주머니께서 많이 힘드실 텐데요.”
“애기 엄마 그것은 걱정하지 말고. 혼자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 난 혼자가 싫어. 혼자가….”
“왜 아주머니께서는 혼자라고 생각하세요? 자녀분들도 있잖아요.”
“우리 아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주머니의 긴 한숨 소리가 왠지 모르게 나의 마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 모르세요?”
“내가 잘못을 했지. 내가 아주 큰 잘못을 했지.”
“아주머니께서 아드님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아주머니께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아들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와 재혼을 하시면서 아들을 아주머니의 시어머니께서 길러 주시기로 했는데 시어머니께서 그 아들을 기르기 힘들어서 다른 곳으로 입양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들이 두 돌이 지나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아들마저 홍역을 앓다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머니께서는 혼자가 되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 유일하게 이어지는 핏줄의 아들이 어디로 입양이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아들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계신다는 것이다. 혹시나 아들이 찾아주지나 않을까 하는 그런 기약 없는 삶을 그 아들 한 번만 보았으면 하고 희망으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질긴 목숨을 아들이
이어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음에 한을 나에게 토해내고 계셨다.
나는 속으로 아주머니의 아들이 꼭 아주머니를 찾아주길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아주머니와 함께라면 서로가 위안이 되어 잘 살아가리라 생각하며 아주머니와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아주머니께서는 나를 친딸처럼 사랑해 주고 또한 아들을 당신의 손자처럼 사랑해 주었다. 나는 너무 감사해서 아주머니를 어머니처럼 서로가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에게는 아픔도 슬픔도 없을 것만 같았다.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또 다른 가족이 있다는 것이 나는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머니께서 몹시 아프셨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아주머니와 나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했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아주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해 간호를 해 드렸다. 아주머니 또한 내가 없으면 불안하신지 항상 나의 손을 잡고 말씀하신다.
“새댁이 나의 며느리야! 내 아들 돌아오면 나는 말 할 거야 새댁은 하늘이 내려준 나의 며느리라고… 세상과 바꿀 수 없는 나의 며느리라고….”
나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의 시어머니는 어떻게 나를 했는가. 가장 처참하게 나를 내 쫓은 시어머니가 아니던가. '그래 나의 시어머니는 그 옛날 나에게 아픔을 준 그 시어머니가 아니고 지금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이분이 나의 진정한 시어머니야.' 마음속으로 최면을 걸며 옛일들을 하나하나 내 기억 속에서 지우개로 지우듯 지우고 있었다. 그런 생각 속에 아픔과 슬픔을 지우개로 지우고 나니 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아주머니만 건강하시면 된다는 생각에 아주머니를 더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드렸다. 그런 정성 어린 마음에 감동을 했는지 아주머니는 깨끗이 나았다.
이제 아주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어머니만 건강하시면
된다는 생각에 어머니를 더 정성껏 보살펴 드렸다. 그런 나의 정성으로 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하였고. 나는 지난날들을 깨끗하게 잊을 수 있었다. 지금의 어머니의 사랑으로 인하여 더 큰 행복을 알게 되었고, 배부른 몸으로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그렇게 어머니와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새 뱃속에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나는 예쁜 딸아이를 낳았다.
어머니는 당신의 친손녀처럼 기뻐하셨다.
“야야 아가야! 우리 이제 식구가 넷이다! 식구가 넷이여… 고맙다 고마워!”
“어머니! 제가 고맙지요. 어머니가 왜 고마워요. 갈 때도 없는 저와 우리 아이들을 거두어 주셨잖아요.”
“아니다. 혼자 살아가는 외로움을 네가 알기나 하냐? 그건 아무도 몰라 아무도….”
그동안 어머니는 얼마나 외로우셨는지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어머니와 절대로 헤어지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살아가리라고 다짐 또 다짐하며 자신과 약속을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아이의 탯줄과 아이 낳는 모든 산바라지를 손수 해주셨다. 몸조리도 많이 해야 한다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당신의 딸처럼 그렇게 손수 모든 것을 해주셨다. 그런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우리 가족은 한마음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만나 행복하게 살아온 지 16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에게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나는 편지를 들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혈관 속의 혈액들은 자기가 가던 길을 잃고 이리저리로 서로 뒤엉켜 있었고, 자유롭게 뛰놀던 심장은 누군가에게 쫓기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뒤뜰로 뛰어갔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이동원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렇게 그리워하고 보고
싶고 또 만나야 할 사람의 이름 이동원이란 말인가. 이름만으로도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 나는 뒤뜰에 앉아 많은 생각을 했다. 남편이었던 동원이가 정말 맞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내가 만나고 싶어 했고 또 아이들 아빠라 해도 이제는 나의 남편이 아니지 않는가. 벌써 거의 16년이란 세월이 흘러 서로가 다른 길을 선택했을 그런 날들이 아닌가!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한참을 울다가 나는 주위를 한번 쓱 둘러보고 편지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편지의 내용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편지였다. 동원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오신 분이 어머니가 아니라 양어머니고 지금 편지를 보내주신 분이 친어머니라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그것은 지금의 아내 혜숙씨가 아니었다면 몰랐다고 적혀 있었다.
친어머니와 누나인 줄 알고 살아온 사람들은 양어머니와 동생이었고 그 사람들은 아내를 구박하여 떠나게 하고 자신이 걱정을 할까 헤숙이를 통하여 편지를 하게 했다고 하면서… 아내가 바람을 피워 도망간 것처럼 내쫓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하고 제대 후 혜숙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혜숙이가 양어머니와 누나인 명자 씨의 그런 이중적인 마음에 시달리고 고생하다 혜숙 씨는 동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친 어머니를 찾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여 이제 알게 되어 소식을 전한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편지를 몰래 뜯어보고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였다. 가슴으로 묻어두었던 그림자가 이제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또한 자신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꾸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편지를 뒤뜰에 돌담에 끼워놓고 마음이 불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갈등이 시작되었다. 동원 씨를 만나야 된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동원 씨 옆에는 혜숙 씨가 있기에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편지를 숨겨놓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가장 소중하신 어머니이고 남편이자 아이들 아빠만을 생각하기로 하고 용기를 내어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기로 했다.
“어머니 편지 왔어요.”
“아가! 누구한테 온 편지냐?”
“이동원이라고 이름이 씌어져 있는데요. 아시는 분이세요?”
“이동원. 모르는 사람 이름인데 누굴까?”
“어머니 얼른 읽어 볼까요?”
“그래 얼른 읽어 보거라. 무슨 편지인지.”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어머니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나도 또한 눈물로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나자 어머니는 오열하며 울고 계셨다. 가슴에 묻어두고 보고 싶었던 아들을 만나게 된다는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만나는 날을 기다렸다.
동원은 어머니를 찾아뵈러 혜숙 씨와 함께 집으로 왔다.
집 앞에서 동원은 어머니를 크게 불러본다.
“어머니! 어머니 어디 계셔요!”
“네가 동원이냐? 네가….”
어머니와 동원 그리고 혜숙 씨는 함께 얼싸 안고 울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런 광경을 아이들과 함께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작은아이를 옆 산으로 데리고 갔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보고 싶어 했던 날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작은아이를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닭똥 같은 눈물이 굴러 떨어진다. 큰아들은 석준은 벌써 17살 어엿하고 씩씩한 고등학생이 되어 학교에 가서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기에 다행한 일이었다.
밤이 어두워지자 나는 어둠이 밀려오는 것처럼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었다. 집으로 가면 동원 씨와 혜숙 씨가 자신을 알아볼 것이기에 갈 수도 없고 그냥 산에 있기로 했다. 15살 된 딸아이 효선이가 엄마의 행동에 이해가 되지 않아 투정을 부린다.
“엄마 우리 집으로 들어가요. 엄마가 잘못도 안 했는데 왜 우리가 여기 있어야 해요? 할머니가 지금 엄마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엄마 그러니까 집으로 가요?”
“효선아! 우리 조금 늦게 들어가자. 손님들 집으로 되돌아가거든 가자.”
“엄마 그 손님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우리 집을 우리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나는 울고 싶었다. 그렇다. 효선이의 말대로 우리가 피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피해주어야 할 것 만 같았다.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가장 소중한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자리에 또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소중한 자리가 아닌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야 옳은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효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효선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효선은 할머니에게 여기 있다고 대답하려 하자 나는 딸아이의 입을 막는다.
“효선아! 효선이가 먼저 할머니한테 가거라. 대신 엄마는 여기 있다고 얘기하면 안 돼. 알았지?”
“엄마 같이 가요. 왜 안 되는데요?”
“엄마가 이다음에 얘기해 줄게. 그냥 할머니 걱정하시니까 엄마는 옆 동네에 다녀오신다고 하고… 대신 지금 오신 손님들이 가시면 엄마에게 와서 알려줘. 엄마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효선은 엄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산에서 내려갔다.
나는 그곳에 서서 아무 곳도 갈 수가 없었다. 효선이의 얼굴을 보고 동원의 얼굴을 보고 벌써 어머니는 알고 있을지 모른다. 효선의 얼굴이 동원을 꼭 빼어 닮아서 벌써 눈치를 채고 알고 계실 것이다.
효선이 집으로 내려가고 얼마 있지 않아 어머니가 효선이와 함께 산으로 올라오셨다.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울고 계셨다.
“아가야 내가 네 마음 안다.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집으로 가자. 아무 말 하지 말고….”
“어머니 저 갈 수가 없어요. 지금은 갈 수가 없어요.”
“걱정하지 마라. 동원이 내외는 저녁을 먹여 집으로 돌려보냈단다.”
나는 그제야 어머니 품에 안겨 소리 내어 울었다.
효선은 무슨 뜻인지 몰라 자꾸 할머니와 엄마의 얼굴만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저녁을 먹고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앉았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다른 방으로 돌려보내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니? 네가 진짜 내 며느리라니… 그리고 손자들이 진짜 내 손자라는 것이 믿을 수가 없구나. 어쩌면 좋겠니? 내 마음 같으면 그냥 같이 함께 살았으면 좋을 텐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동원이는 아이들 만나기 전에 내가 보내야만 했단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구나. 동원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지금 결혼해서 살고 있는 며느리와 어떻게 헤어지라고 할 수 있겠니?”
나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동원이가 집에 들어와서 산다고 하는데 들어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쩌면 좋으니? 내 욕심인 것은 알지만 내 생각인데 네가 떠나가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어머니! 그럼 떠날게요. 그동안 저를 거두어 주신 것도 감사한데 어떻게 또 아들과 떨어져 살아가라고 할 수 있겠어요. 대신 아이들은 제가 데리고 가게 해주세요.”
“안 된다! 아이들은 안 된다. 내 손자들인데… 네가 혼자 떠나거라.”
“어머니 저 혼자 못살아요. 아이들 없이는 못살아요. 말도 안 돼요. 말도 안 된다고요….”
“동원이 아내가 잘 돌봐주고 키워 줄어야. 걱정하지 마. 아이가 없으니까 오히려 잘 된 거 아니냐? 잘 키워 줄 거야.”
“어머니 그것만은 안 돼요. 차라리 나를 죽으라고 하세요.”
“그래도 안 된다. 우리 동원이를 위해서 할 수 없어. 동원을 위해서….”
어머니는 딴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통하지 않았다.
나는 한겨울 칼바람 속에 서있는 것만 같았다. 시어머니에게 버려진 것처럼 또다시 사막에 혼자 알몸으로 벼려져야 한다는 것이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자신이 버려져야 할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지 않는가. 동원 씨를 사랑한 죄로 인하여 버려져야 한다면 동원 씨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누구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 동원 씨에게만은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다음날 새벽 아침 몰래 동원의 주소를 들고 동원의 집을 찾아갔다.
동원 씨의 집은 부잣집이었다. 화려한 정원과 3층의 집이 나의 자존심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동원의 집 앞 골목에서 동원 씨가 출근하기만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동원 씨와 혜숙 씨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행복해 보였다. 동원 씨가 운전하여 출근을 하자
혜숙 씨가 집으로 들어가자, 나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에서 차의 앞을 가로 막았다.
끽하는 소리와 함께 차는 멈췄다. 동원은 나를 보자 당황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차에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나는 동원의 차에 타고 흐느껴 울었다. 집에서 멀어지자 동원은 차를 세웠다.
“주희 씨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제 와서 왜 내 앞에 나타나 왜 무엇 때문에?”
나는 숨이 막혔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동원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동원 씨! 내가 갑자기 나타난 것 죄송해요. 하지만 할 얘기가 있어 왔어요. 동원 씨가 알아야 할 일들을 알려주고 싶어서요. 동원 씨는 아주 편하게 살았지요? 나를 원망하면서 그리고 미워하면서 말이에요.”
“그래. 알면서 왜 이제 와서 내 앞에 나타나? 무엇 때문에 무슨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동원 씨! 저 동원 씨 아내였어요. 동원 씨를 사랑하는… 그러나 지금은 아니지요. 하지만 동원 씨와 나는 아직 끊을 수없는 인연이 있어요. 그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동원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동원 씨는 지난날의 주희를 사랑했었나요? 동원 씨가 군에 가 있을 때 저는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한테 쫓겨났어요. 그런데 한번이라도 나를 찾았었나요? 그래요. 내가 바람나서 집을 나갔다고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찾아주었으면 안 돼요? 그것도 힘들었나요? 내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단 한 반만이라도 생각해 봤나요? 왜 당신 어머니와 동생 말은 믿고 내 입장에서 나를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왜…?”
“아니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주희 씨와 할 말이 없어. 그냥 돌아가 다 끝난 일이야. 다 끝난 일이라고!”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동원 씨도 알잖아요. 우리에게 아들이 있는 것도. 궁금하지도 않아요?”
동원은 무엇인가 잃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눈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동원 씨! 동원 씨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지금 마음도 알고요. 동원 씨 친어머니 만났다는 소식 들었어요.”
“주희 씨가 그걸 어떻게….”
“동원 씨 친어머니 너무 좋으신 분이에요. 그분이 우리 아이들 키워 주셨어요. 어제 동원 씨와 혜숙 씨가 우리 집에 다녀간 것 저 알아요. 내가 시어머니한테 쫓겨나고 갈 곳이 없어 헤매다 동원 씨 친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어요, 동원 씨의 친어머니라는 것은 전혀 몰랐었는데 얼마 전 동원 씨가 편지를 보내와서 알게 되었어요. 동원 씨! 지금 와서 동원 씨와 내가 같이 만나서 살 수도 없다는 것 너무도 잘 알아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살아요. 내가 동원씨를 떠날게요. 친어머니 곁에서 떠날게요. 그 대신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아이들만 내게서 빼앗아 가지 말아요. 우리에게 아이가 둘 있어요. 아들 석준은 동원 씨도 잘 알지만 석준이 동생 효선이도 있어요. 조금만 더 그 아이들을 기다려 주세요. 동원 씨가 친어머니를 찾은 것처럼 아이들이 동원 씨를 찾으러 갈 때까지만 기다려줘요. 그렇게 해 줄 수 있지요?”
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하고 소리내어 울었다.
동원은 또 한 번 놀란다. 아들 석준이만 있는 줄 알았는데 또 딸이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주희와 석준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던가. 많이 보고 싶고 그리움으로 그 많은 세월을 흘려보냈는데 동원은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희를 찾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 단말인가. 너무 많이 돌아와 있었다. 동원은 주희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니 더더욱 마음이 아프고 감사했다.
동원은 주희를 품 안에 안아본다. 따듯했다. 그리워한 만큼 더 간절하게 안아 본다.
“주희 씨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 좁은 생각 때문에 주희 씨가 많이 힘들었구나. 용서해 줘. 하지만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른 것은 바라지 않을게요. 친어머니한테 아이들 못 기른다고 하세요. 아이들은 언젠가는 아빠를 찾아 갈 테니까 지금 나하고 살게 해 주세요. 나 혼자 못 살아요. 아이들 없이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주희 씨!”
“어머님이 우리 아들과 딸을 보고 동원 씨가 아빠라는 것을 알았을 거예요. 아이들이 동원씨를 똑같이 닮았거든요. 그래서 아이들 두고 나보고 떠나래요”
나는 울음을 토해냈다.
“조용히 어머니 곁을 떠날게요. 동원 씨가 모르는 척 해 주세요. 마지막 부탁이에요.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말 안 해도 동원 씨는 알고 있을 테니까…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나는 동원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고 내가 떠나는 날까지만 어머니한테 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천천히 짐을 꾸렸다. 어머니와 함께 살수가 없기에 떠나기로 했다. 아니 어머니와 같이 살고 싶어도 떠나야만 하기에 떠나기로 했다.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어머니를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떠나기로 했다.
동원이가 지금의 아내와 헤어질 수도 없는 일이고 내가 아이들과 떠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떠나면 빨리 떠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을 방으로 불렀다.
할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하자 무슨 영문이진 모르고 떠나려면 엄마 혼자서 떠나라고 하며 어머니를 미워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핏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끊을 수 없는 것이 핏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만이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더 이상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우는 아이처럼 그렇게 그 자리에서 울고만 있어야 헸다.
한참을 울다 자신의 손을 보았다. 거칠어진 손은 마치 어머니의 손처럼 그렇게 보였다. 자식을 기다리며 땅을 파고 농사를 짓고 그 손으로 얼마나 많은 사연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손톱 끝의 아픈 상처처럼 언제나 동원의 아픔으로 손끝에 내달려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마음처럼 그렇게 아니 많이 살아왔을 것이다. 과일 하나 채소 하나 밥 한 끼에도 언제나 아들을 두고 떠나온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고 살아 있음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나는 다른 날처럼 새벽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었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시던 분이 오늘은 기침을 하지 않으신다. 마음이 많이 힘드셔서 내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그러시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자는 척 눈을 감고 계셨다.
“어머니 진지 드세요. 얼른 일어나세요.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가 제 마음 알잖아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일어나셔서 식사 같이해요.”
“아가야! 내가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네가 떠나서는 나는 살 수가 없단다. 우리 그냥 같이 살자. 내 욕심 채우자고 내 손자 엄마를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 것 같구나. 아가야 내가 잘못했다. 내 며느리를 어디로 가라고 하겠니. 아무리 아들이 중요해도 나는 그렇게 못한다. 손자가 잘 자라 주기만을 바라며 살았었는데 그렇게 잘 자라 주었는데 여기에다 욕심을 부리면 그것은 안 되는 일이야.”
“알았어요. 어머니 마음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내 마음에서는 이미 어머니를 떠나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학교를 가는 석준을 불러 세웠다.
“엄마 왜 그러세요?
“아니다 석준이 오늘 공부 열심히 하고 와”
“알았어요!”
석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대로 있는데 석준의 모습은 자꾸 멀어져가고 있었다.
효선이도 학교로 가려고 나오자 효선을 얼른 안아보았다.
“엄마 갑자기 왜 그러세요?”
“엄마가 우리 효선이 그냥 안아보고 싶었어. 공부 열심히 하고 와야 해.”
“엄마 알았어요. 내가 학교 갔다 올 때까지 할머니랑 기다려요.”
효선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뒷모습을 잊지 않으려 마음속에 각인시키고 멀어져가는 효선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바빠졌다. 갈 곳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간단한 옷가지를 챙겨 어머니 몰래 밖으로 나왔다. 바람은 스산하게 바쁘게 어디론가 떠나듯 함께 따라나서고 있었다. 무작정 버스를 탔다. 집과 멀어지려 몇 번을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얼른 차를 세워 더듬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굴속에 혼자 버려지는 것 같았다. 눈을 더 크게 떠보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든지 가야 했다. 집을 최대한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어나 걸어가는데
순간 무언가 내 머리를 쾅하고 때렸다.
2부
주희는 한참 후에 눈을 떴다. 희미하게 안개가 걷히며 나는 어디엔가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귀에는 “괜찮으세요?” 묻는 소리와 함께 심한 두통과 다리의 통증이 나를 수렁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황급히 의사선생님을 부른다.
의사선생님은 주희를 보며 묻는다.
“괜찮으세요? 어떻게 병원에 오셨는지 기억은 나세요?”
희미하게 눈을 뜨자 다급한 목소리만이 주희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주희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는 하얗게 백지만이 놓여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다리의 통증과 심하게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의사는 진통제 주사를 놓으라는 말소리와 간호사의 바쁜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왜 제가 여기에 와 있는 거예요?”
“교통사고로 이곳에 오셨어요. 다른 병원에서 우리 병원으로 급하게 이송되어 오셨어요. 머리를 다치셔서 큰일 나실 뻔했어요.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요.
“그럼 이름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누구예요?”
간호사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주희를 바라본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들은 심각한 얼굴로 조용히 밖으로 나가신다.
주희는 하얀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자꾸 웃는다.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 생각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어린아이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주희는 병원에서 한 달가량 치료를 받고 있는데 같은 병실로 환자 한 분이 수술을 막 끝내고 들어오셨다.
한참을 옆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동원과 혜숙은 옆의 침대에 있는 주희를 보고 깜짝 놀라 묻는다.
“혹시 주희 씨 아니에요?”
먼저 혜숙 씨가 물었다.
“주희 씨 몰라요.”
주희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말한다.
“주희 씨! 주희 씨! 나 몰라 동원이… 석준이와 효선이 아빠라고….”
“동훈이… 석준이 아빠….”
주희는 동훈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를 다쳐서 기억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동훈은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주희에 대해 물어보았다. 주희가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에 걸려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죄책감에 빠졌다. 동원은 병원에서 주희와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혜숙은 마음이 불편했다.
혜숙은 어머니가 주희를 알아보기 전에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지만 동원은 그런 주희를 다른 곳으로 보낼 수가 없다고 하자 혜숙은 자꾸 불안하기 시작했다. 혜숙은 하는 수 없이 어머니가 주희 씨를 보지 못하게 병실을 옮겼다. 혜숙은 또한 아이들이 엄마를 만날까 마음을 졸이며 병원에도 오지 못하게 했는데 아이들은 할머니의 병원을 몰래 찾아온 것이다.
할머니 병실을 찾아 가는데 환자복을 입고 휴게실에 앉아 있는 엄마를 보고 효선은 달려간다.
“엄마! 엄마! 나 효선이야 효선이….”
효선은 엄마를 끌어안았다.
주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빙그레 웃기만 한다.
“엄마! 나야 나. 엄마 딸 효선이라고!”
주희는 또 웃는다.
“오빠! 우리 엄마 왜 그래? 우리 엄마 맞잖아. 그런데 왜 우리를 몰라봐?”
“글쎄 우리 엄마 맞는데 왜 병원에 와있어? 왜?”
효선은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간호사는 울고 있는 석준이와 효선을 데리고 소파에 앉아 주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아니에요. 우리 엄마는 그럴 리가 없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엄마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니에요. 엄마는 나를 알아 볼 거예요.”
“엄마! 나 좀 봐요. 나 효선이에요. 효선이. 엄마 딸 효선이라고요. 엄마가 아빠 때문에 나 모르는 척 하는 거 알아요. 엄마 내가 엄마 옆에서 있을게요. 엄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엄마 말 좀 해봐요. 효선이 한 번만 불러봐요 한 번만….”
“나는 너를 잘 모르는데….”
주희는 웃으며 병실로 들어간다.
석준이와 효선은 엄마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 석준은 동생보고 병실을 지키라고 하고 할머니 병실을 찾아갔다.
“할머니! 할머니!”
석준은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석준아! 할머니 괜찮아. 많이 걱정했구나.”
“할머니! 엄마가 할머니가 찾는 엄마가….”
“아니 엄마가 왜? 엄마 소식 왔니?”
“할머니! 이 병원에 엄마가 있어요. 그런데… 엄마가 우리를 몰라봐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요!”
“뭐라고! 엄마가 이 병원에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할머니 엄마가 많이 아파요. 아무도 몰라봐요. 이제 만났으니까 엄마 어디가지 못하게 도와주세요, 우리랑 함께 살게 해 주세요.”
“그래. 이제 됐다. 엄마를 만났으니까 됐어. 석준아 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다른 데 못 가게 꼭 붙들게”
옆에서 지켜보던 혜숙은 놀라 아무 말도 없이 침묵하고 있었고 동원은 울고 있었다.
“동원아! 얼른 석준이 엄마한테 가봐라. 그 불쌍한 것 내 대신 가서 용서를 빌어라. 내가 잘 못했다고.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살자고. 다시는 보내면 안 된다. 보내선 안 돼.”
동원은 석준을 데리고 주희를 찾아갔다. 여전히 아이처럼 웃는다. 얼마나 많이 힘들었으면 저렇게 웃을까 얼마나 행복한 삶이 그리웠으면 웃을까. 동원은 주희의 손을 꼭 잡는다. 그러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주희는 크게 웃는다.
“나 밥 줘. 배고프단 말이야. 밥 안 줘?”
주희는 웃으며 밥을 달라한다.
효선은 간호사실에 달려가 밥을 달라고 하자 또 밥을 달라고 하시냐고 하면서 간호사는 지쳐있는 듯 밥을 건네준다. 효선이가 밥을 가져오자 얼른 빼앗아 허겁지겁 두 손으로 밥을 집어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엄마! 내가 먹여줄게. 이러지 마. 이러지 말라고….”
주희는 정신없이 순간에 밥을 비웠다.
“아빠! 가세요! 우리 엄마한테서 나가세요. 제발 나가라고요… 아빠가 오기 전에는 엄마 이러지 않았어요. 왜 아빠가 와서 이렇게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어요. 가요. 제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석준은 황소 같은 울음을 터트렸다.
효선은 그래도 아빠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효선의 할머니는 힘든 몸을 이끌고 주희의 병실을 찾아왔다.
“할머니! 엄마 어떻게 해요? 할머니가 얘기해 줘요. 할머니 말은 엄마가 다 알아들어요. 제발 할머니 도와줘요. 엄마가 우리 알아보게요. 제발 할머니….”
할머니는 침대 옆에 앉으며 눈물을 흘리신다.
“얘 아가야! 여기 있었구나. 얼마나 찾았는데… 용서해다오. 내가 잘못했다. 이제는 어디 가지 말고 우리와 함께 살자.”
주희는 소리를 내어 웃는다.
“얘. 아가야! 왜 그래? 어떻게 된 거야? 석준이 엄마가 왜 이러니? 동원아 석준이 엄마가 왜 그러느냐고?”
“어머니! 기억을 할 수가 없대요. 어머니도 몰라보고 우리도 몰라봐요. 어머니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저 어떻게 하면 좋아요. 석준이 엄마한테 너무 잘못을 많이 했어요. 어머니가 도와주세요. 석준이 엄마 정신 돌아오게 도와주세요.”
어머니는 자신의 아픔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도 죄스러웠다.
동원은 병실에서 나왔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알 수 있는 것은 주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가족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견디기 힘들었다.
동원은 이제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혜숙과 헤어지고 이제 한 가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 보면 혜숙의 욕심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군에 갔을 때 혜숙이만 끼어들지 않았다면 주희에게 큰 상처는 주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가족이 헤어져서 살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주희와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동원을 시켜 주희를 자신의 병실로 옮겨 달라고 하여 같은 병실에서 있게 되었다.
주희는 가족의 보호 아래 병원 생활을 하고 있지만 혜숙은 하루하루가 힘든 날들이었다. 동원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은 얼른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줌마! 아빠와 병원에 오지 마세요. 할머니와 엄마는 우리가 병원에서 있을게요.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세요!”
효선은 행복하게 살아가던 그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가 나타나기 전 할머니와 엄마와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지 알기 때문에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 아빠와 아줌마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라. 이제 너희들은 병원에 나오지 마라. 내가 아이들과 함께 주희를 잘 보살펴 주고 지켜 줄 테니까. 석준이 엄마도 이제 우리와 지내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거라.”
어머니는 동원과 혜숙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병원에서 어머니는 퇴원을 하고서도 주희 옆에서 주희를 위해 함께 병실에 있어 주고 옛 기억이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차도가 있지 않았다. 석준과 효선은 엄마의 기억이 돌아올 수 있도록 옆에서 많은 이야기와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주희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아이들과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 이웃집 아줌마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는 주희를 어머니는 바라보며 행복했다. 이렇게라도 함께 살다 보면 차츰 기억이 돌아올 것만 같아 행복했다.
혜숙은 가족이 함께 있는 모습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동원에게 이혼을 하자고 해서 동원도 주희를 위해 혜숙과 헤어지고 병원으로 매일 들린다.
병원에서 1년이 넘도록 치료를 받았지만, 주희는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퇴원을 해 집에서 함께 살기로 하고 퇴원했다. 퇴원하여 집으로 온 주희는 이상한지 자꾸 집안을 둘러보고
다닌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살던 집이라 기억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지 하는 생각으로 유심히 주희를 살핀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가 보다. 기억이 나지 않는 다해도 옆에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석준과 효선은 엄마를 위해 아니 엄마의 기억을 찾아주기 위해 엄마와 함께 살았던 이곳에서 엄마의 기억들을 찾고 있었다.
“할머니! 우리 집 주위에 족두리 꽃 많이 심어요. 엄마가 족두리 꽃은 알거에요.”
“그래 맞다! 네 엄마가 족두리 꽃을 제일 좋아했단다.”
“족두리 꽃을 보면 엄마는 꼭 기억이 돌아올 거야.”
그해 가족은 모두 족두리 꽃을 집 주위에 심었다. 족두리 꽃이 활짝 피었을 때 엄마는 족두리 꽃을 보며 울고 있었다.
“엄마! 이 꽃이 무슨 꽃인지 아세요?”
주희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울고 있었다.
“엄마 이제 됐어요. 그럼 내가 누구인지 알아요? 내가 엄마 딸 효선이에요 효선이…”
주희는 효선을 바라보며 무언가 기억하려 애쓰고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지 보고 또 보며 말을 한다.
“잘 모르겠어. 우리 병원에서 만난 예쁜 효선이잖아.”
효선은 엄마를 안고 울었다. 언제까지 엄마가 이렇게 나를 모르고 살아야 하는지 마음이 메어졌다.
동원은 그런 주희를 바라보다 말고 족두리 꽃을 꺾었다.
“주희 씨! 내가 주희씨 머리에 족두리를 얹어 줄게요.”
머리 위에 족두리 꽃을 올려놓자 주희는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갸우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주희 씨!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주희는 한참을 통증으로 땀과 씨름하다 잠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과 초조한 마음으로 가족 모두가 주희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 주희는 눈을 떴다.
“주희 씨!”
동원은 주희를 불러본다.
주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둠을 터널을 힘겹게 걸어 나와 이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을 주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원 씨!… 지금 오면 어떻게 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얼마나….”
주희는 힘없이 말 한마디 남겨놓고 동원의 품에 안겨 또 잠을 자고 있었다.
동원은 덜컥 겁이 났다.
“주희 씨! 자면 안 돼. 석준이와 효선이도 있는데 자면 안 돼. 눈떠봐 주희 씨….”
“엄마 엄마! 나 효선이야. 엄마 딸 효선이라고… 눈떠야 돼. 석준이 오빠도 있고. 할머니도 여기 계셔요 엄마….”
주희는 효선이의 말을 듣고 다시 눈을 번쩍 떴다.
“그래. 효선이 어디 갔다 왔어?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데… 석준이와 어머니….”
“아가야! 이제 됐어. 이제 됐다고. 네가 깨어났으니까 됐어. 가족을 알아보니까 됐어. 우리 이제 아무데도 가지 말고 함께 사는 거야. 알았지?”
주희는 정신이 하나하나 돌아왔다. 집 주위에 족두리 꽃도 그대로 있고 동원씨도 돌아왔고 어머니와 아이들이 자신의 곁에 있으니 세상이 다 내 편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주희는 걱정이 되었다. 동원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혜숙 씨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한 동원을 떠나보내기로 했다.
“동원 씨! 이제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와 아이들이 있어서 괜찮아요. 혜숙 씨한테로 돌아가세요. 많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주희 씨! 혜숙 씨는 내 곁을 떠났어요. 주희 씨가 정신이상이었을 때 우리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떠났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이제 우리 함께 살자.”
“미안해요. 동원 씨는 혜숙 씨한테 가세요. 나는 어머니와 아이들만 있으면 돼요. 내 행복 찾겠다고 혜숙 씨를 힘들게 해서는 안돼요. 그것은 동원 씨가 선택했던 일들이잖아요. 동원씨가 책임져야해요. 동원 씨가 선택하고 왜 혜숙 씨가 힘들어해야 해요. 그러니 동원 씨가 끝까지 혜숙 씨 지켜주세요.”
주희는 그렇게 말을 하고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 사람인지 알기에 더 가슴이 메어졌다.
주희는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동원 씨를 혜숙 씨 곁으로 보내주자고 하자 어머니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같이 살았으면 좋겠지만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주희가 힘들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는 주희와 손자들에게 힘이 들지 않게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아들을 찾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일을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했던 그런 욕심이 동원과 주희 그리고 손자들을 얼마나 힘들게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원을 어려서 자신이 돌봐주지도 못하고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엄마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동원을 보내기로 했다.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로 했다.
양어머니께서 길러주셨으니, 양어머니의 아들이 아닌가.
동원 또한 자기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힘들어했는지 알게 되었다. 양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고 군 제대 후 주희 씨와 아들인 석준를 찾았다면 주희에게 큰 상처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제 더 이상 주희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희의 말대로 모든 것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다시 혜숙 씨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혜숙 씨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다시 주희 씨와 함께 살아간다면 어머니와 아이들이 보고 싶어 찾아가게 되면 혜숙 씨는 또 얼마나 마음아파 하겠는가. 오직 한 마음으로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동원은 혼자 살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와 주희 그리고 아들과 딸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그날을 기다리며 집 주위에 주희가 좋아하는 족두리 꽃을 심으면서 그렇게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 줄 때까지 기다리며 살기로 했다.
주희는 동원의 양어머니였던 시어머니와 시누인 명자 씨도 동원을 통해 주희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 주었다. 주희는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했다. 자신을 위해서 동원 씨를 위해서 잊기로 했다. 동원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동원 씨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내가 싫다고 하면 나는 결국 동원 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랑의 힘은 위대함이 아닌가. 계절마다 피는 족두리 꽃은 주희의 큰 위로와 사랑 그리고 어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