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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내용과 표현 ㅡ강 돈 묵
가. 무엇을 쓸 것인가. 전통적인 장르론에서는 서정 ․ 서사 ․ 극으로 가르고, 이들은 전환적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근에 와서 여기에 제4장르로 교술을 보태면서 그 대표적인 것으로 수필을 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교술은 비전환적 표현을 한다는 것이 태생적 특징으로 되어 있다. 즉, 수필은 허구를 넣을 수 없는 비전환적 표현을 하여야 한다는 멍에이다. 어디까지나 작가가 경험한 체험의 세계를 소재로 하여 글을 써야 한다는 제약이다. 굳이 여기서 수필의 허구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뒤로 미루고, 상상적 체험(想像的 體驗)은 가능한데도 그마저 나태하게 게으름만 펴는 글이 많다는 데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진정 수필이 문학이라고 믿는다면, 적어도 상상적 체험은 해야 한다는 점이다. 수필의 소재는 작가의 삶 속에서 취택한다는 태생적 특징을 우리는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삶 속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그것의 본질을 찾아 작가의 시각으로 해석해낸 바를 참신하게 형상화하는 것이 수필이다. 그런데 작가의 삶 속에서 소재를 가져온다 하여 있는 현상을 그대로 적으면 수필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한국 수필이 가지고 있는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가 바로 현상을 적고서 수필을 썼다고 하는 점이다. 체험의 기록으로 인식한 나머지 현상만을 적고 있다. 남들이 봐서는 별것도 아닌 것을 대단한 자기만의 체험으로 여겨 줄글로 기술해 놓고 수필을 섰다고 믿는다. 이러한 현상은 그 어느 장르보다 많은 작품이 발표되면서도 폄훼되는 단초를 제공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긴 잠에서 깨어 다시 잠에 들 때까지 시야로 들어오는 모든 물상과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단순한 현상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모든 것들이 다 현상이다. 이 현상은 단순한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단순한 소재는 작가의 삶이 들어가 재해석하여 다시 태어나야 한다. 소재의 본질은 작가의 시각에 따라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작가의 소재를 받아들이는 수용 자세에 따라 그것은 다른 모든 문학이 현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본질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수필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의 삶에서 건져 올린 소재로 글을 쓰되, 있는 그대로 적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 적어가야 하는 것이다. 수필을 씀에 가장 유념해야 할 사항이 바로 이 점이다. 한국의 수필문단의 현재 모습에서 가장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라 여겨진다. 소재에 따라 시로 써야 할 것과 소설로 써야 할 것이 구분되지만, 수필은 어느 것이든 다 수용해서 사용할 수 있다. 즉 ‘생각나는 대로’는 우리의 머리 속에서 생각한 모든 것들이 수필의 내용이 될 수 있다는 다양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소재에 불과하다. 이것을 그대로 적는 것이 아니고 본질을 찾아 적어야 한다.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수필에는 예시 단락이 있고, 일반화 단락이 있는 까닭도 여기서 비롯된다. 그대로 소재만을 소개하는 부분은 예시 단락이고, 이 소재가 갖는 의미를 찾아 의미화, 주제화, 형상화하는 일반화 단락이 있어야만 진정한 한편의 수필이 된다. 물론 글을 씀에 참신한 소재를 가지고 쓰면 성공하기가 쉽다. 그러나 참신한 소재를 찾아낸다는 것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다. 많은 시간을 두고 소재의 해석에 전념해야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늘 참신한 소재를 찾아내고, 참신한 해석이 가능하다면야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여하튼 작가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나름 자신의 존재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소재의 본질 찾기에 매진해야 한다. 습을 하게 된다. 같은 소재라 해도 작가마다 다르게 인식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 어떻게 쓸 것인가. 참신한 소재에, 참신한 해석이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을 기록하는 문장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 글은 실패한다. 흔히 이야기할 때, 작가라면 이미 문장은 완성된 것으로 간주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문장을 씀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것은 한국어의 특질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분명 한국의 수필 문장과 서구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 이유는 두 언어의 다른 특질에서 비롯된다. 즉, 서구의 언어는 수동형이 발달되어 있지만, 한국어에는 수동형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말은 대부분의 문장 주체가 인간으로 되어 있고, 서구의 언어는 다양한 성분의 어휘들이 이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서구의 언어에서는 사물이 주체가 되는 문장이 다양한 데 반해 우리에게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데 수필은 태생적으로 작가의 삶의 고백이다. 그래서 문장의 주어는 ‘나’라고 독자와 약속되어 있는 셈이 된다. 주어인 ‘나’를 밝히지 않아도 독자가 혼돈 없이 쉽게 받아들인다면 굳이 지면을 할애할 일이 아니다. 수필을 문장은 짧게 써야 함유한 뜻이 크다. 문장의 기술 방법은 앞의 문장과 연상에 의해 이어져야 무리가 없다. 그런데 문장을 길게 써서 함유한 뜻의 범위를 좁혀놓고 허덕일 필요가 있겠는가. 넓은 뜻으로 가야 뒷문장이 이어지기가 수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장은 짧게 써야 함이 당연하다. 문장에는 몇 가지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지켜줘야 문맥이 선명해진다. 음성언어는 말할 때의 분위기나 제스처와 같은 것의 지원을 받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전달하기 쉽지만, 문자언어는 그러한 것들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확실한 논리와 문맥이 잡히지 않으면 독자에게 정확한 전달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는 묶어서 처리해야 독자들에게 부담을 덜 주고, 올바로 전달이 가능하다. 아무리 현대 문장이 운율을 요구한다 해도 산문은 산문인 것이다. 여기에는 형태단락의 개념이 확실해야 한다. 최근 문장에 더러 독자들에게 시각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구실로 형태단락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한 문장이 한 단락이 되는 글을 쓰는 경우도 눈에 띄는데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문장을 쓰고 나면 다음 몇 가지를 점검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첫째 주어와 서술어가 올바로 되었는가. 설마 이런 경우가 있으랴 할지 모르나 많이 어긋나고 있다. 이것은 문장을 길게 쓸 때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길게 끌고 가다보니,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이 어긋나고 만다. 씀에 있어 주어인 ‘나’는 최대한 생략하는 것이 경제적인 문장일뿐더러 문장의 리듬에도 공헌한다. 문장은 짧게 써야 함유한 뜻이 크다. 문장의 기술 방법은 앞의 문장과 연상에 의해 이어져야 무리가 없다. 그런데 문장을 길게 써서 함유한 뜻의 범위를 좁혀놓고 허덕일 필요가 있겠는가. 넓은 뜻으로 가야 뒷문장이 이어지기가 수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장은 짧게 써야 함이 당연하다. 문장에는 몇 가지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지켜줘야 문맥이 선명해진다. 음성언어는 말할 때의 분위기나 제스처와 같은 것의 지원을 받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전달하기 쉽지만, 문자언어는 그러한 것들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확실한 논리와 문맥이 잡히지 않으면 독자에게 정확한 전달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는 묶어서 처리해야 독자들에게 부담을 덜 주고, 올바로 전달이 가능하다. 아무리 현대 문장이 운율을 요구한다 해도 산문은 산문인 것이다. 여기에는 형태단락의 개념이 확실해야 한다. 최근 문장에 더러 독자들에게 시각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구실로 형태단락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한 문장이 한 단락이 되는 글을 쓰는 경우도 눈에 띄는데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문장을 쓰고 나면 다음 몇 가지를 점검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첫째 주어와 서술어가 올바로 되었는가. 설마 이런 경우가 있으랴 할지 모르나 많이 어긋나고 있다. 이것은 문장을 길게 쓸 때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길게 끌고 가다보니,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이 어긋나고 만다. 둘째, 수식어의 남용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글을 쓸 때에는 아름다운 문장을 쓰려는 욕심은 갖지 않는 것이 좋다. 미문을 쓰려는 욕심은 글을 그르치는 지름길이다. 한 문장에서 수식을 받는 말은 강조해야 할 문장성분 하나에 국한해야 한다. 문장성분마다 모두 수식을 하게 되면 부분은 아름다울지 모르나, 독자가 올바른 문장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 셋째, 부사의 남용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부사란 어찌 보면 강조의 의미가 들어 있다. 한 문장 안에서 두 개 이상 부사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두 개의 어휘를 강조하게 되는 셈이 된다. 그러면 어느 것을 강조한 것인지 모호하다. 또 부사를 남용하면 나중에 제대로 강조해야 할 때에 부담이 될 수가 있다. 흔히 말하듯 ‘약을 남용하면 약발이 받지 않게 됨’과도 흡사하다. 넷째, 접속부사의 남용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접속부사는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을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이러한 접속부사를 많이 사용하지 열거에도 질서가 있다. 물론 공간적 구성이나 시간적 구성에서는 그에 타당한 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화단의 꽃을 열거해도 질서는 유지되어야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순서가 정해질 수도 있고, 초본과 목본으로 정리한다든지, 꽃이 피는 순서에 맞춘다든지, 크기에 따라 정리한다든지 하는 질서를 잡아 주어야 한다. 또 문맥을 매끄럽게 할 수 있는 문장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습관적으로 접속부사를 남용하면 문맥을 따라가는 독자에게 긴장감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다섯째, 열거를 할 때는 각별히 점검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열거되는 어휘들이 통사론적으로 같은 것인가를 점검해야 한다. 명사의 열거에 느닷없이 동사가 끼어든다면 그 문장은 잘못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열거되는 어휘의 신분이 같아야 한다. 사물을 열거하다가 느닷없이 사람이 나오면 안 된다. 특히 열거할 때는 수식어의 사용에 각별한 조심을 해야 한다.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가 열거하는 모든 어휘에 걸쳐서 영향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이상 수필을 쓸 때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을 정리해 보았다. 아무리 이런 주장을 한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이런 지적의 글을 보고도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밀어 버리는 사람이 많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상황이 바로 나의 경우라고 받아들이는 겸손이 있어야 작가의 발전은 가능하다. 보다 많은 수필가들의 끝없는 노력이 이어져 한국 수필문학이 제대로 대접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누름돌 최원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확실해 지는 것이 있다. 앞서 세상을 사신 분들의 삶이 결코 나만 못한 분은 없다는 생각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서가 아니다. 그 분들이 살아왔던 삶의 날들은 분명 오늘의 나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과 조건의 세상살이를 하셨다. 그런 속에서도 묵묵히 그 모든 어려움과 아픔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몫을 아름답게 감당하셨던 것이다. 요즘의 나나 오늘의 상황을 살펴보아도 그분들보다 어렵다고는 할 수 없겠고, 특히 그분들이 처해 있던 시대는 지금에 비교도 할 수 없이 열악한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대였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보다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엄격하게 당신들 스스로를 절제하고 희생하셨다. 그분들의 어느 한 삶도 결코 오늘의 우리만 못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저 잘났다는 표를 지나칠 만큼 서슴없이 해댄다. 향기도 지나치면 역겨움이 되지 않던가. 멋을 낸답시고 호화로운 옷에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녀도 그런 모습이 부럽고 아름답게 보이기보단 거스르고 거들먹대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명 적삼 내지 무명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은, 어린 눈에도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던 앞 세대 어른들 모습은 지금에 생각해도 훨씬 더 아름답고 품위 있어 보이고 위엄 넘쳐 보인다. 강원도 정선엘 갔다. 다들 냇가로 나간다고 해서 나도 따라 나갔는데 그곳에서 수석(壽石)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그저 돌일 뿐이었다. 다들 의미를 부여한 돌 한 두 개씩을 가져가는데도 나만 빈손이다가 문득 어린 날의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께선 한 해에 한번쯤은 부러 냇가에 나가서 납작 동글 손바닥 만 한 돌멩이를 한 두 개씩 주워오셨다. 그걸 무얼 하려느냐고 물으면 누름돌이라 했다. 누름돌, 나는 그때 그게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용도를 알게 되면서 부터는 나도 학교에서 돌아오다 냇가에 들러 그런 돌을 주어다 드리면 할머니께선 매우 좋아하셨다. 그 어린 날이 생각나 뒤늦게 마음이 급해져 누름돌로 쓸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어쩌면 그건 순전히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겠지만 내 삶에도 그런 누름돌이 필요하단 생각도 했을 것 같다. 누름돌은 모나지 않게 반들반들 잘 깎인 돌이어야 한다. 그걸 깨끗이 씻어 김치 수북한 김칫독에 올려놓으면 그 무게로 아주 서서히 내리누르며 숨을 죽여 김치 맛이 나게 해주는 돌이다. 그런가 하면 조금 작은 것은 때로 밭에서 돌아와 저녁을 지을 때 돌확에 담긴 보리쌀을 쓱쓱싹싹 갈아내는 돌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 돌은 어두운 부엌에서도 금방 알아볼 만큼 빛이 났다. 밤낮 없는 할머니나 이모의 쓰임에 따라 더 닳고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다 나도 손에 쥐어보면 돌의 차가움이 아닌 왠지 모를 따스함이 감지되기도 했다. 요즘 내게 부쩍 그런 누름돌이나 돌확용 돌이 하나쯤 있었음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뭔가 모를 것들에 그냥 마음이 들떠있고 바람 부는 대로 휘둘리는 키 큰 풀잎처럼 좀처럼 내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어렵다. 이런 때 그런 누름돌 하나 가져다 독안의 김치 꾹 눌러주듯 내 마음도 눌러주었으면 싶다. 거친 내 마음을 돌확에 넣고 확돌로 쉭쉭 갈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스쳐가는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 욕심내지 않아도 될 것에 주제넘은 욕심을 펴는 날카롭게 결로 깨진 돌 같은 감정들도 지그시 눌러주거나 갈아내 주었으면 싶다. 아니다. 그보다 짜고 맵고 너무나 차가워 시리기까지 한 김장독 안에서 보아주는 이 없어도 자신을 희생하며 곰삭은 김치 맛을 만들어내는 누름돌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옛 어른들은 다 누름돌이거나 최소한 누름돌 하나씩 품고 사셨던 분들 같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누가 그렇게 하라고 안 해도 아주 자연스럽게 누름돌이 되었고, 또 상대를 자신의 누름돌로 인정도 해주었다. 내뻗치는 기운도 억누르고, 남의 드센 기운도 아름답게 받아 안는 희생과 사랑의 마음들이 서로 나눔으로 이해로 살아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그 어려운 삶의 현장, 차마 견디어낼 수 없던 시대의 질곡에서도 아픔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으리라. 우리 집에선 그때 내가 정선에서 가져온 누름돌이 단단히 한 몫을 했다. 베란다의 항아리 안에서일 때도 있고, 오이지를 담글 때도 곧잘 사용했다. 요즘이야 보리쌀을 갈아 밥 짓는 일은 없어졌으니 확돌이 될 일은 없지만 어쩌다 제 몫의 일이 없어 바닥에 놓여 있거나 항아리 뚜껑에 올라와 있어도 어린 날을 추억케 하면서 내 삶의 누름돌을 생각게 한다. 두 동강이 나버린 누름돌을 보며 안타까워하시던 외할머니 모습도 생각난다. 단순히 못 쓰게 된 돌 하나가 아니었으리라. 웃자라는 욕심에도 성급한 마음에도, 서운함으로 파르르 떨리던 마음, 시집살이 고된 삶의 눈물도 누름돌을 씻으며 삭이던 친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 설운 마음 꾸욱 누르고 누르고 하셨던 그 마음이 담겨있었을 텐데 깨져버리자 마음이 찢기는 안타까움과 헤어짐의 슬픔을 느끼셨을 것이다. 내 나이도 이젠 들만큼 들었는데도 팔딱거리는 성미며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서는 당돌함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누름돌이 없어서일까. 이제라도 그런 내 못된 성질을 꾹 눌러 놓을 수 있도록 누름돌 하나 잘 닦아 가슴에 품어야겠다. 그게 나뿐이랴. 부부간에도 서로 누름돌이 되어주는 것이 좋겠고, 부모 자식 간이나 친구지간에도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도 훨씬 더 밝아지고 마음 편하게 되지 않을까. 김장을 처가에서 해와서인지, 김치 냉장고 때문인지 지난겨울 내내 베란다 바닥에 누름돌이 하릴없이 놓여있었다. 나도 그게 특별히 쓰일 데가 없어 그냥 본 체 만 체 했다. 그러나 내일은 마침 집에 있게 되니 아내 몰래 저 두 개의 돌을 깨끗이 씻어 뚜껑 덮인 항아리 위에라도 올려놓아야겠다. 그걸 보며 왠지 모르게 들떠있는 내 마음도 꾹 누르면서 말이다. 아니다. 그러기도 전에 정성껏 김장독에 올려놓던 할머니 모습이 먼저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