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순교 성지를 다녀와서.... [성지순례 후기]
“해미” 소리만 들어도 가슴 설레 이는 내 고향이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집안(가문)에서 쫓겨나셔 고향에 가시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증조부와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가톨릭 집안 3대가 아직도 그곳에서 멀지 않은 순교자 압송로 로 알려진 한티 골에 묻혀 계신다.
지금은 해미읍성이 공원화, 되었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읍성 안에는 초등학교, 면사무소, 우체국, 그리고 주민들도 그 성안에 많이 살던 곳이며, 내가 살던 집은 창문을 열면 바로 길 건너에 지금도 서 있는 호야(회화) 나무가 보였고 아주 어린 시절 그 호야 나뭇가지를 보면서 우리 선조들 원망도 많이 했던 곳이다.
그 호야 나뭇가지에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매질도 하고 목을 매달아 죽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어른, 들로부터 자주 들어, 천주교 신자들은 언제든 다 순교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알고 자랐으니 증조부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해 교황님께서 해미를 다녀가신다는 소식이 나에게는 설레 임보다 가슴 벅찬 감동이었지만 가지 못한 아쉬움으로 지내다 한참 후에야 찾게 되었다.
온 동네 길이 말끔히 다시 포장되었고 매일 여러 대의 관광버스가 줄을 잇는다는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해미 순교자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내리셨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뭉클해진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지금의 해미 성지에 무명 순교 탑이 처음 세워졌다. 허허벌판 하천 뚝 너머에 초라한 탑 하나, 그게 해미 성지의 전부였고 축성식 날 웃지 못할 일 하나가 있었다. 축성 미사에는 수많은 교우들이 미사에 참여했고, 비신자 구경꾼도 꽤 많았는데 그중 한 친구가 나중에 하는 말이 “너네, 천주교 신자들 웃기더라.” 하얀 옷 입은(신부님) 사람이 하얀 조각(성체) 주면서 “그러믄유(그리스도의몸)”(충청도 방언) 하니까 “아멘” 하고 받아먹던데 그게 뭐냐?
그 소리를 들으며 그 당시엔 웃었지만, 오늘 “여숫골” 기념비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당시 순교자들이 수없이 외쳤던 “예수 마리아” 그 말이 그들에게 “여수 머리”로 들렸고 그 말이 전해져 “여숫골” 되었다 한다.
해미 성지에서 빼놓지 말고 묵상해야 할 곳이, 진둠벙이다. 당시 생매장터로 하천 정비나 농지개간을 위해 하천가를 파다 보면 묵주 알과 함께 비스듬히 서 있는 뼈들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어르신들로부터 종종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또 하나는 “자리개 돌”로 그 돌 앞에 가면 “무릎 꿇고 기도하세요”라고 적혀 있다. 원래 그 돌은 해미읍성 서문 밖, 예전에는 성을 끼고 개울이 흘렀는데 그 개울의 다리 역할을 한 넓고 큰 바위다.
서울 도성에서도 사형수를 서소문 밖으로 끌고 갔다는데 당시, 해미읍성에서도 순교자들을 서문 밖으로 끌고 가, 묶인 채로 여러 사람이 사지를 들어, 다리 위에 내리쳐 죽였다 하니,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 고통을 당하신 분들 앞에, 무릎 꿇는 정도로 될까 싶어 몸이 옴 추려 든다.
그 외, “이름 없는 집”(무명 순교자를 기억)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순교하신 무명 순교자 분들의 합장 묘, 그리고 유해 참배실 앞에 서면, 저절로 묵상에 잠기게 된다.
『그 고통을 오직 하느님 사랑으로 견디신 당신들이 부럽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 성경에서 누차 들어 지금 당신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천국 열쇠를 맡기신 교종(교황) 님이 다녀가신 뒤로, 구름같이 몰려드는 순례객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찾아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한국의 순교 성인들과 복자, 무명 순교자들이시여!
나약한 저희 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