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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생애[편집]
쉴레이만은 1494년 오스만 제국의 군주 셀림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경험이 풍부한 대신의 도움을 받아 소아시아 서부 지방의 마니사 총독직을 맡았다. 또한 부황이 외국으로 출정을 나가면 미래의 군주로서 최선을 다해 국가의 일을 처리했다. 이때부터 그는 나라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키워나갔으며, 관용을 베푸는 황제가 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0년 3월에 셀림 1세가 죽자 26살의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오른 쉴레이만은 남북을 오가며 대제국을 지휘하여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2]
영토확장[편집]
쉴레이만이 첫 번째 공격 목표는 베오그라드와 로도스 섬이다. 두곳 모두 부왕때 정복에 실패했었다. 당시 이 두 지역은 모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베오그라드는 헝가리인이 점령하고 있었기에 유럽을 향한 영토확장에 걸림돌이 되었다. 로도스 섬은 1309년 이래 오랫동안 성 요한 기사단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기사단은 이슬람 상선에 대한 습격과 약탈을 자행하며 오스만과 아라비아의 밀접한 교류를 방해해 왔다.[3]
베오그라드 점령[편집]
쉴레이만이 즉위한 지 1년 후, 그는 군사 10만을 이끌고 3주 동안 베오그라드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몇 번의 교전 끝에 베오그라드는 마침내 오스만군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 후 1년 뒤 쉴레이만은 직접 로도스 섬을 정복했다. 반년의 시간 동안 병사 5만 명을 잃었지만 쉴레이만은 드디어 아버지 대(代)에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수했다.[4]
로도스 섬 공방전[편집]
1522년 12월 22일, 지난 6개월간의 지리한 공방전 끝에 성 요한 기사단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며 정복에 성공하였다. 슐레이만 1세가 1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작전에 임하며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로도스 섬은 이스탄불과 알레산드리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을 지배하던 성 요한 기사단은 종교적 신념에 입각하여 이슬람 선박에 대해 습격과 해적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오스만과 이집트간 해상교역을 방해하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 동안 창립되었던 성 요한 기사단은 1291년에 무슬림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있던 그들의 마지막 요새(아크레)가 함락되자[5] 1309년, 로도스 섬에 근거지를 세웠다.[6] 이후 1444년 이집트 술탄의 침공, 1480년 메메트 2세의 침공 등을 방어하며 기사단은 섬을 요새로 만들었기에 당대에는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다. 퇴각한 성 요한 기사단은 거점을 확보하지 못하고 유럽을 유랑하다가 1530년 카를 5세의 도움하에 몰타 섬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헝가리 정복[편집]
1526년 8월 헝가리 평원으로 쳐들어가 당시 서유럽 최대 세력인 합스부르크 왕조와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는 놀랄 만한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헝가리의 젊은 국왕 러요시 2세가 직접 전투에 뛰어들었지만 승패를 뒤집기에는 그의 능력이 부족했다. 모하치 전투(1526년 8월 29일)에서 쉴레이만에게 대패한 러요시 2세는 도주하던 중 연못에 빠져 죽었고, 이로써 헝가리는 오스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쉴레이만은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1529년과 1532년 두 번에 걸쳐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을 공격하여 수세에 몰린 합스부르크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페르시아 원정[편집]
쉴레이만은 가장 힘들어 보였던 두 가지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자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이제부터 오스만 제국은 다시금 영토 확장을 하기 시작했다. 1533년 이후, 그는 수차례 페르시아를 공격하고 이라크와 쿠르디스탄 대부분과 아르메니아 서부를 점령했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또한 페르시아 수중에 있던 도시 바그다드를 빼앗아 오스만 제국에 병합했고, 그의 파병군은 아덴(1538)과 예멘 등지를 획득했다.
프레베자 해전[편집]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로마 교황청과 베네치아,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격퇴함으로써 쉴레이만은 지중해의 영웅이 되었다. 계속해서 그가 이끄는 오스만 대군은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 튀니지, 알제리를 정복했다.
만년의 쉴레이만
내치[편집]
쉴레이만은 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국가 통치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쉴레이만이 국내 통치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오스만 제국은 번영과 번성을 이루었다. 쉴레이만의 능력과 안목이 가장 돋보인 것은 그가 구상한 입법에서였다. 《군하총회》, 《이집트 법전》, 《쉴레이만 법전》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7]
나라의 경제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평한 법률 계약으로 사유재산의 보호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은 쉴레이만은 저명한 법학가들에게 법률을 조정하여 제정하도록 위탁했다. 그 중 《군하총회》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최대의 법전으로 이 법전이 발효된 후 귀족 계층 내부의 혼란이 사라졌고, 제국의 봉건 제도를 안정시키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쉴레이만 법전》은 토지, 전쟁, 군사제도, 지방 치안과 형법 등 각 방면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완벽한 법률을 바탕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계층과 광활한 영토의 대제국을 질서정연하게 통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쉴레이만이 오랜 기간 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원성을 높이지 않았고, 사회 질서가 확립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예술후원[편집]
또한 쉴레이만은 중요한 예술 후원자이기도 했다. 건축과 그림, 서예, 조명, 병기, 타일과 직물, 목제품, 금속제품 그리고 문학 등 모두가 그의 통치 기간 중에 꽃을 피웠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시와 노래를 무척 좋아했으며, 출정 중에도 매일같이 일기를 써 훗날 《전쟁일록》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더불어 집정 기간 동안에 건축가 시난을 시켜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등 많은 모스크를 건축했다.
마지막 원정과 사망[편집]
1566년 5월 초,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원정을 위해 이스탄불을 떠났다. 이 원정은 쉴레이만에게 있어 13번째 원정이자, 최후의 원정이다. 이미 70대에 접어든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였는데, 특히 20년 가까이 괴롭힌 통풍이 문제였다. 때문에 원정에서 쉴레이만은 대부분을 마차에서 지냈고, 원정로 상의 도시에 입성하는 의식을 치룰때만 말에 올랐다. 원정을 시작한지 50일째 되는 날에 파디샤와 대재상 소콜루 메흐메드 파샤가 이끄는 5만 명의 오스만 군대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오스만 군대는 헝가리 서남쪽 시게트바르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시게트바르 성채는 오스만-합스부르크 국경 지대에 위치한 요지로, 당시 2,300명 가량의 병사가 니콜라스 즈리니의 지휘 아래에 수비중이었다. 오스만 군대는 시게트바르 성을 8월 초에 포위했고, 공성전은 약 1개월 가량 지속되었다. 쉴레이만의 건강은 이 기간에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1566년 9월 5일 1시 30분 경 죽음을 맞이했다. 오스만 군대가 시게트바르 성을 함락시키기 직전의 일이었다. 니콜라스 백작은 해질녁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휘하의 군대와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8]
결혼[편집]
한편, 쉴레이만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전통적으로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8남 1녀의 자식을 두었던 쉴레이만은 사랑에 빠져서 결국 자신의 애첩 중 한 명인 록셀라나, 훗날 사람들에게는 휘렘 술탄이라고 알려진 여인과 결혼했다. (수정 이전의 문서에는 쉴레이만이 일부일처제를 고수했다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훗날 셀림 2세가 되는 셀림과 황위다툼을 벌이다 처형되는 무스타파는 록셀라나의 아들이 아니다) 배우자는 3명이다.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술레이만 1세
오스만투루크 제국 최대 전성기를 이룩한 술탄
[ Süleyman I ]
출생 - 사망
1494.11.6. ~ 1566.9.5. |
메메드 2세 시대에 전성기로 들어선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바예지드 2세, 셀림 1세 치세를 거쳐 제10대 술탄 술레이만 1세 시대에 최전성기를 이룩했다. 재위 46년 동안 13차례의 원정을 통해 헝가리를 정복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페르시아를 압박한 술레이만 1세는, 문화를 융성하게 하고 내치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선대(先代)가 못 이룬 정복 사업 마무리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군주 솔로몬의 이름을 따른(술레이만은 솔로몬에 해당) 술레이만 1세는 아버지 셀림 1세에 이어 1520년 26살 때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10대 술탄이 되었다.
셀림 1세가 술탄의 지위를 넘볼 가능성이 있는 술레이만 1세의 동기뻘들을 모두 제거했기 때문에 즉위 때부터 통치 기반이 굳건했다.
즉위 초에 그를 본 한 베네치아 사람은 이렇게 기록했다.
“술탄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인물로,
표정에서 단호함이 느껴지는 강인한 인물이다.
그는 이름대로 총명하고 판단력이 뛰어나다.”
술레이만 1세는 즉위 전부터 증조부 메메드 2세가 마무리 짓지 못한 정복 사업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헝가리의 관문 베오그라드 요새 점령과 로도스 섬 점령이었다.
즉위한 지 열 달도 안 되어 그는 베오그라드 성벽 앞에 섰다. 3주에 걸친 공격 끝에 베오그라드를 함락시킨 그는 1521년 9월 10일 로도스 섬을 지배하고 있던 구호기사단 단장 필리프 드 릴라당에게 편지를 보내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구호기사단은 약 500명의 기사와 1500명의 용병으로 로도스 섬을 요새지로 만들어, 지중해 동부에서 오스만투르크의 제해권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듬해 6월 16일 술레이만 1세는 진군을 개시했다. 당대 최고의 공성(攻城) 전력을 갖춘 술탄의 군대와 당대 최고의 수성(守成) 기술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한 기사단의 전쟁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양측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끝에 1522년 12월 20일 기사단이 항복 문서에 조인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이로써 술레이만 1세는 ‘백해(지중해)와 흑해(동유럽)’의 진정한 패자가 될 기반을 마련했다.
서쪽과 동쪽으로 진군한 술탄의 군대, 지중해의 패자(覇者)가 되다
1526년 8월 29일 국왕 루트비히 2세(로요슈 2세)가 이끄는 헝가리군과 술탄의 군대가 도나우 강 근처 모하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헝가리군의 완패와 국왕의 전사.
이제 술탄의 군대를 막을 이는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에스파냐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였다. 합스부르크가 대공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왕위를 차지하려 했지만 술탄은 트란실바니아의 야노슈 자폴리아를 왕으로 봉하려 했다.
헝가리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1529년 술탄의 군대는 빈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보급선이 길고 악천후가 괴롭혔으며 저항도 강력했다. 결국 철수해야 했지만 술레이만 1세는 전 유럽에 위명을 떨치게 되었다. 1532년에도 술탄의 군대가 빈을 향해 진군했지만 국경 지대의 전투에 머물렀고 이듬해 술탄은 평화협정을 맺었다.
1554년 여름, 술레이만 1세가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나히체반에서 진군하는 모습. | 헝가리 왕 아노슈 지그몬트가 술레이만 1세 앞에 무릎 꿇은 모습.(1556년 오스만투르크 예술가의 작품) |
이후 야노슈가 죽고 신성로마 군대가 헝가리 지방에 진출하자 술탄의 군대는 1541, 43년에 걸쳐 원정에 나섰고, 그 결과 헝가리는 합스부르크가 통치 지역과 술탄 통치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이후에도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진 끝에 1562년에야 안정적인 평화협정이 이루어졌다. 술탄의 군대는 동쪽으로도 진군했다. 1534~35, 1548~49, 1554~55년 세 차례의 원정을 통해 술레이만 1세는 아덴, 예맨, 바그다드와 이라크의 대부분, 아르메니아 서부, 소아시아 동부 등을 점령했지만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를 패망시키지는 못했고 1555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런 가운데 1538년 9월 28일에는 하이르 앗 딘이 이끄는 술탄의 해군이 그리스 서부 프레베자 근해에서 로마 교황령,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의 연합 함대를 격파했다. 술탄의 해군은 트리폴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지역도 장악했다. 이로써 오스만투르크는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패할 때까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했다.
문학, 예술, 공예, 건축 등의 분야에서 오스만투르크 문화를 융성하게 하다
술레이만 1세 치세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누렸다. 황실이 후원하는 많은 예술가 집단이 활동했다. 도제식으로 수련을 마친 예술가와 장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정해진 등급을 부여 받고 연간 네 차례 급료를 받았다. 1526년의 경우 40개 집단에 속한 600여 명이 활동했다. 당대에 가장 재능 있는 예술가와 장인들이 이러한 집단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단 이슬람권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많은 이들이 왔다. 이를 통해 유럽 예술과 이슬람 예술의 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황실을 위해 일하는 예술가들은 화가, 보석세공사, 금세공사, 모피공, 건축가, 직물 제조공, 제책 장인 등 매우 다양했다. 술레이만 1세 이전의 술탄들은 대체로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술레이만 1세부터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고유의 예술 전통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술레이만 1세의 명에 따라 미마르 시난이 건축한 술레이만 모스크.
1550~57년에 건축된 이 모스크는 사원,묘,학교 등을 아우른 일종의 복합단지였다.
술레이만 1세 자신도 무히비라를 필명으로 페르시아어와 터키어로 시를 창작하는 시인이었다. 예컨대 그가 지은 시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부강(富强)을 최상의 운명으로 여기는 이들이여!
그러나 건강함이야말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일지니,
통치의 권능이라 하는 것도 세상의 다툼이자 끝없는 전쟁일지니,
신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지고(至高)의 왕관일지니,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행복하도다.”
그의 치세에 터키 시문학은 크게 융성했다. 그는 술탄으로 통치하는 기간 내내 일기를 썼는데, 특히 전쟁 중에도 매일 매일의 일과 전황을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기록했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치세에 일어난 전쟁에 관해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것도 그의 일기 덕분이다. 그 일기는 나중에 [전쟁일록]으로 출간되었다.
술레이만 1세는 이스탄불을 이슬람 문명권의 명실상부한 문화적 중심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다리, 모스크, 궁전, 신민(臣民)의 복지를 위한 공공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이러한 건축 분야에서는 술탄의 수석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크게 활약했다. 시난은 술레이만 1세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3백 여 개의 건축물을 지었다. 그 가운데는 오늘날 이스탄불 구시가지 정상에 있는 술레이만 모스크가 특히 걸작으로 꼽힌다. 그 밖에도 술레이만 1세는 예루살렘의 바위 사원(일명 오마르 모스크)과 예루살렘 성벽을 복구하고 메카의 카바를 보수했으며 다마스쿠스의 시가 건물을 새로 건설했다.
전장터에서 맞은 대제(大帝)의 최후
술레이만 1세는 내치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이슬람권의 전통적인 법률은 [코란]에 바탕을 둔 법체계인 샤리아였다 술레이만 1세는 그런 샤리아가 미처 제시하지 못한 부분까지 규정하는 ‘까눈’(일종의 행정 법규체계)을 광범위하게 체계화했다. 또한 공정하게 사유재산권을 보장함으로써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그는 광대한 영토에 걸쳐 다양한 인종과 종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법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또한 그는 유능한 관료들을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등용하여 제국을 체계적으로 다스렸다. 술레이만 1세 시대 이후 노예 출신 관료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유럽에서 록셀라나로도 불린 술레이만 1세의 노예 출신 황후 후렘. | 성 요한 기사단이 지키는 몰타 섬에 상륙한 술탄의 군대. (16세기 프레스코화) |
이렇게 내치와 외정(外征)에 걸쳐 업적을 쌓은 그를 서양에서는 ‘대제’(大帝)로 일컬었다. 또한 터키에서는 그의 법체계 확립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입법자’(까누니)로 일컬었다.
그러나 그의 노년은 평안하지만은 않았다. 서방 이교도와 동방의 이슬람 경쟁 국가와의 전쟁, 노예로 구성된 정예부대 예니체리의 불만을 잠재우는 일, 역병과 기아, 통화 팽창과 인플레, 아들 무스타파와 바예지드를 처형해야 했던 일 등이 그를 괴롭혔다.
우크라이나 사제의 딸로 노예로 잡혀와 황후가 된 후렘(일명 록셀라나)과의 사랑이 그를 위로해주었으나, 후렘이 세상을 떠난 뒤 술레이만 1세는 측근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의기소침해졌다. 1565년 몰타 섬 공격에서는 술탄의 군대가 치열한 공방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술레이만 1세는 1566년 헝가리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나섰다. 재위 46년 만의 13번째 원정이자 페르시아 원정 이후 12년 만의 친정(親征)이었다. 그러나 술탄은 통풍으로 다리를 절며 소화기능도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9월 중순 술탄의 군대는 헝가리의 시게르바트 성을 어렵게 점령했다. 그러나 술탄은 이미 9월 5일과 6일 사이 병영에서 이미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시간 전에도 그는 다음과 같이 일기를 썼다. “요새는 저렇게 불타고 있는데, 승리의 북소리는 아직도 들리지 않는구나.”
[네이버 지식백과] 술레이만 1세 [Süleyman I] - 오스만투루크 제국 최대 전성기를 이룩한 술탄 (인물세계사, 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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