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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論文
사도 바울의 율법과 복음
- 다른 복음은 없다 -
이 덕 휴*
* 필자 이덕휴(李德休)는 조선대학교 화공과(2년 수료), 방송대학교 법학과(법학사), 인천대학교 대학원(법학석사: 법철학),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성서신학)을 나와서 현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從僕으로 헌신하고 있다.
* 본 논문을 읽고 의문사항이나 반론이 계시면 연락 주십시오.
2001년 1월 5일
목 차
Ⅰ. 서론 --------------------------------------------------1
제1절 연구의 의의와 목적 -------------------------------- 1
제2절 연구의 범위와 방법 -------------------------------- 5
Ⅱ. 바울의 율법관 ---------------------------------------- 6
제1절 바울의 율법관 개관 -------------------------------- 6
1. 율법에 대한 바울의 용법과 개념 ------------------------ 6
2. 율법의 목적 ----------------------------------------- 7
3. 율법의 기능 ---------------------------------------- 11
제2절 칭의와 율법의 관계 --------------------------------- 16
1. 의인론의 배경 --------------------------------------- 16
2. 칭의 ------------------------------------------------ 19
3.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칭의 ------------------------------ 22
4. 칭의에 의한 은택 ------------------------------------- 24
제3절 율법과 은혜 --------------------------------------- 25
1. 은혜의 원천 ----------------------------------------- 25
2.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율법과 은혜의 상반성 -------------- 27
3. 율법과 은혜에 따른 오류의 양상 -------------------------- 29
Ⅲ. 바울 복음의 진수(眞髓) --------------------------------- 32
제1절 복음의 어원과 용법 ---------------------------------- 33
1. 헬라문화권의 용법 ------------------------------------- 33
2. 유대교의 용법 ----------------------------------------- 34
3. 구약성서 --------------------------------------------- 34
4. 신약성서 --------------------------------------------- 35
제2절 바울 서신에 계시된 복음 ------------------------------ 36
1. 복음의 내용 ------------------------------------------- 36
2. 복음의 효과로서 구원의 정복(淨福) ------------------------ 38
3. 복음의 사도성 ----------------------------------------- 39
Ⅳ. 다른 복음은 없다 -결론에 갈음하여 ------------------------ 40
* 국문요약 ---------------------------------------------- 44
* 참고문헌 ---------------------------------------------- 46
Ⅰ. 서론
제1절 연구의 의의와 목적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신약적 이해에 대한 바울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하나님과 더불어 의(義)에 놓여지는 방법에 관심을 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칭의(稱義)란 율법으로 말미암이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발생한다. 루터 이후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움(Righteousness, Justification), 즉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발견한지 500년이 가까워졌어도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아직도 교회의 관심사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목회의 현장에서 많은 설교자들은 오늘도 율법준수를 역설하고 있다. 또한 현대 구약신학은 신약신학과의 만남이라는 등위론(等位論)적 관계에서 율법과 복음의 종속(從屬)적이면서 보완(補完)적 관계를 운위(云謂)하는 가운데 구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에 의하여 완성되었다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갈라디아서의 주제이자,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며 기독교 자체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일컫는다'(sola fide)라는 말이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순히 믿는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접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이에 대해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것이 복음의 진리이다. 이는 또한 그 안에 모든 경건(勁健)의 지식이 담겨있는 기독교 이론의 중요부분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부분을 잘 깨달아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며 계속하여 그들의 뇌리에 박히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소위 칭의의 교리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어서 말하기를 "칭의의 부분이 없어진다면 이는 모든 기독교의 교리를 잃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을 나타내고 인간의 헛된 영광을 뒤엎는다. 이를 부인하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적수(Anti-Christ)가 되며, 인간의 헛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주된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된 유대주의 순회전도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찾아와서 바울 자신의 사도직(使徒職)과 복음의 진정성을 훼손시키고, 그리고 신도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할례(割禮)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거짓된 복음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신적(神的) 기원을 말하고, 또 다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詛呪)받게 하리라고 반박하였다.
바울 당시의 율법주의(legalism)는 율법이 가르친 대로 사람이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따라서 충분한 선행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율법주의는 자기숭배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면 그들은 칭찬과 영예와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는 하나님보다는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은 바울의 신학과 윤리에 있어서 여러 다른 주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심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소론의 주제인 참된 복음과 거짓된 복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심사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울의 율법사용에 대한 구분을 함으로써, 예를 들면 율법주의적 율법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 제의(祭儀)적 율법과 도덕적 율법, 혹은 모세의 '토라'(Torah, ; Nomos, : 율법)와 메시야적 토라를 구분함으로써 율법에 대한 바울의 어떤 불일치한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바울이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할 때, 그는 전체로서의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아무도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워질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주장한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진정한 복음을 위한 전형이다. 바울은 단순히 종교적 이론이나 사상적 갈등 때문에 칭의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이 서느냐 쓰러지느냐 하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사활의 문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바울의 율법과 복음에 관한 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율법관을 포괄적으로 탐구하여 특수한 상황에 따른 개개의 율법 주제를 파악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제의 난해함과 방만함을 극복하기가 쉽지가 않다. 따라서 바울이 율법의 문제를 처음으로 다루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거짓복음에 대한 바울의 반격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되, 오늘날 일부 퇴색되어 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비신앙(非信仰)적 요소를 담고 있는 극단적인 기독교회 집단의 이단적 행태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참 복음의 실천적인 내용을 알리는 데, 작은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제2절 연구의 범위와 방법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전개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는 구원사(historia salutis)적 관점에서 개진하였다. 즉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믿음의 길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간파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였다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소론에서 전개되는 사도의 율법사상을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미 유대교적 전통 위에서 형성된 율법사상의 원천을 복음과의 관계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참 복음의 진수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거짓복음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참 복음의 변증을 위해서도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여, 본고의 부제를 갈라디아서 1장 6-9절에서 취하여 거짓복음의 내용을 참 복음과 대조하여 사도의 가르침을 살펴봄으로써 소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다만, 본 연구를 위하여 부제(갈 1:6-9)에서 제시하는 범위를 가지고는 한정된 논의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진술된 사도의 사상적 흐름을 귀납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Ⅱ. 바울의 율법관
제1절 바울의 율법관 개관
1. 율법에 대한 바울의 용법과 개념
루터가 말한 대로 바울의 율법( , Law)과 복음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의 진수를 아는 데 중심 요건이 된다. 바울이 일반적으로 말할 때 율법은 5가지 범주 내에서 사용된다. ① 모세의 율법(갈 3:13) ② 구약성경(롬 3:19) ③ 일반적 의미의 규범 또는 원리(롬 3:27) ④ 필요(롬 7:21, 23, 25) ⑤ 명령(갈 6:2) 등이다. 그런데 루터는 성경에 나타난 율법의 용도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 일반적 용도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억제하기 위하여 주셨다. 둘째, 신학적 용도로서 인간에게 그의 죄성을 보여 주어 회개를 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의 이중용도 외에 한가지를 더 추가한다. 그것은 도덕적 생활을 위한 용도로서 이것은 멜랑히톤(Phlip Melanchthon, 1497-1560)에 의해서도 지적되고 있다.
헬라어 " "(nomos, Law: 율법)는 갈디아서에 32번 나오고 로마서에서는 무려 72번이나 나온다. 정관사가 첨부된 ' '와 관사가 없는 ' '사이에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전자를 모세의 율법으로, 후자를 일반법으로 보는가 하면, 전자를 모세의 율법으로, 후자를 모든 종류의 율법주의로 보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서신의 경우에서 처럼 갈라디아서에서도 의미상의 차이가 없이 상호 교횐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갈 3:11-12, 23-24),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2. 율법의 목적
바울의 율법관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아직 요원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서신을 통하여 바라보는 일상적 의미에서의 율법의 제반 모습을 살펴 볼 수는 있다. 최소한 바울은 그 자신만이 가지는 독특한 율법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자기 자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교회들에게 새로운 계약으로 적용되는 것에 유념하여야 한다.
율법의 구약적 의미인 '토라'는 '나무 조각의 제비를 던진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으로서, '가르치다, 인도하다, 훈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신약에서의 의미는 '분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신약적 용법이나 구약의 용법 모두가 가르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사람들을 그들이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의무로 구속(拘束)하는 모든 교리, 교훈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신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빌드버거(Wildberger)가 적절히 지적한데로율법이란 신명기 17:1에서 볼 수 있듯이 반드시 신앙적인 지침만을 의미하지 않고, 무엇이 법적으로 옳고 그른 것인가를 판별하여 주는 교훈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과 하나님 앞에서 행할 적절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율법이란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그것이 인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될 것을 뜻한다
바울에 있어서 율법은 언약의 백성에게 주신 생활의 규범일 뿐이지 의인의 규범은 아니었다. 율법은 언약에 대한 그의 일반적 태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옳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에 대한 안내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은총을 밝히신 것과 분리되어, 인간의 의무에 근거하여 제시된 순전한 도덕률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의 표지(標識)된 선, 곧 이 선에 따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백성이나 그들의 생활 자체를 공개하는 선(線)이다.
이상의 설명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과제를 설정할 수 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약속된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를 드러내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개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갈 3:19)라고 바울 사도는 율법의 제정 경위와 그 의의를 간명하게 말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그릇된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로 받아들이지 아니 하였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율법 존재론의 근거이다.
율법 존재론이라는 용어는 바울 서신과 야고보서 그리고 사도들이 사용하였던 의미에서, 율법은 당시의 이스라엘과 여러 민족들의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이 열어 놓고 설정해 놓은 생활질서에 대한 문제이다. 이 생활질서라는 표현은 인간에게 향한 하나님의 의지표명인데 이것은 준수될 수도 있고 침해당할 수도 있으며, 성취될 수도 있지만 멸시 당할 수도 있다. 따라서 생활의 안녕 질서와 생활규정, 저주와 축복이 공동으로 율법의 생활질서에 포함된다.
그리스도인들을 규정하는 생활질서는 더 이상 제의적 희생율법에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의 멍에가 없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율법에서 존립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예수 시대 이후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예수의 율법이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2중 계명에 관한 전승(참조. 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28)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근원적인 의지에 따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에게 나타나는 모세 율법의 비판은 예수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 내는 메시야로서 율법의 메시야적 완성자이다. 이 말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변증되는 "그리스도의 법"(갈 6:2; 고전 9:21)이 그에게는 "율법의 마지막"(롬 10:4)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서 신앙을 위한 "율법의 마지막"을 보고 인식하였다. 바울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율법 비판적인 의인의 복음이었고 그의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계명 안에서 율법의 영적 의도가 목표에 이르게 된다.
율법에 대한 해석은 사도의 신학사상 가운데 가장 복잡한 교의 단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1과 갈라디아서 6:2에서 그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 율법과 동일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7:19, 갈라디아서 5:14, 로마서 8:3, 13:8-10에 있는 대로 시내산 율법의 의도가 목표에 이르고, 원수 사랑에 이르기까지 심화된 사랑의 계명이 십계명의 근본 요구들과 다함께 타당한 하나님의 뜻으로 요구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법"은 예수가 시내산 율법의 성취에서 속죄의 죽음을 당하고 그래서 그 율법을 타락 이후 죄인들과 그 율법에게 지워지는 저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가 이끌어 온 시온 율법이다.
예수의 속죄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참된 피조성에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율법도 종말론적으로 변경되어서 교회가 엄수해야 하며 생활의 질서로서 엄수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31:31이하의 새 계약 의무의 생활질서로서 종말론적으로 변경된 모세 율법은, 이제부터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며 바울에 있어서 땅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미하는 성령의 선물에 의해 자발적인 사랑의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그러한 종말론적 시온의 율법이다.
따라서 바울은 단순히 그리스도 교회를 위해서 모세 율법을 새롭게 윤리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최종적으로 수립된 하나님의 뜻, 곧 시내산 율법과 종말론적으로 일치되며 또 그것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로 그들을 부르는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진 생의 영적 생활질서 안에 있다(롬 8:2). 이는 그가 결코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의 법"으로 세운다고 할 때(롬 3:27-31)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에서 드러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한다.
3. 율법의 기능
하나님의 백성이 범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죄를 드러냄에 의하여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타락한 인간의 저주받은 본성에 한계를 설정하기 위하여 율법이 선포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율법은 죄인들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어도, 그들을 구속할 수는 있다. 그것은 죄의 상처를 치유하고 낫게 할 수는 없어도 그들을 구속할 수는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는 죄가 왕 노릇을 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어떤 죄를 짓는 성향을 물려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바는,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범했다는 그 사실이 모든 사람들을 죄인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아담 안에서 범죄 했다는 이 사상으로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죄와 관련되어 있다. 즉 아담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도 죄인이 되었다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를 증거 하였다. 즉 율법이 죄를 유발시킨다는 사상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에서 발견된다. 그는 통상적인 유대교적 견해와는 반대로 율법의 목적이 죄를 제한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율법을 통해서 증가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죄를 '더하다'라는 동사가 죄의 본질을 소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바울의 논증 가운데는 확실한 기본적인 단계들이 있다.
먼저, 바울의 논증의 기본은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죽음은 죄로 인해 왔다는 것이다. 죄가 없었다면 죽음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롬 5:12, 6:20-21, 23).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 곧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그것으로 아담은 하나님 앞에 범죄 했고, 또 그 때문에 죽어야 할 존재가 되었다(롬 5:12, 6:23; 참조. 창 2:16-17, 3:17-19; 히 9:27). 그러나 바울은 아담의 이 특별한 죄 안에서 모든 사람들도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 이전에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었다"고 논증하였다(롬 5:13-14).
그러면 왜 율법도 없었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는데 사람이 죽어야 했나, 하는 것이다. 그 답변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 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의 죄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했다 하였다(롬 5:17,21; 6:12).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함이니라"(롬 5:21)고 하였다. 이는 갈라디아 3:22, 24에서와 마찬가지의 내용을 이어받아서 하나님이 행하는 궁극목적을 구원에 있음을 예시하고 있다.
바울의 논지는 율법이 존재하기 전, 따라서 죄가 성립될 수 있기 전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온전한 의와 온전한 순종을 드렸다. 그래서 아담의 죄 안에 연관 되여 있던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악하고 끝없이 계속되는 죄와 죽음의 결박 속에서 해방케 하였다(참조. 롬 8:1-2; 히 5:8-9). 즉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죄 안에서 죄인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의로운 자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증가운데는 영원한 진리가 내재해 있다. 즉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이 될 수 없는 상황에 연관되어 있다. 아담 안에서 죄로 인한 사망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이 의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참조. 롬 3:23-24; 갈 3:16; 빌 3:9). 율법은 사악한 인간의 심령을 사슬로 묶어놓음으로써 그들이 감히 그들의 심령에서 발견되는 방종한 경향대로 살지 못하게 한다. 만일 율법에 의한 이러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것은 누구나 다 자기 아우를 죽인 가인, 자기 누이동생을 욕보인 암논, 아비에게 반역한 압살롬, 스스로를 파멸시킨 사울,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가 될 것이다.
다음, 율법은 범법함을 폭로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주어졌다. 율법은 죄를 드러낸다고 하였다. 율법은 거울처럼 죄를 드러내고 죄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율법 자체가 죄입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아니었더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않았더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롬 7:7)라고 바울 사도는 고백하였다.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시지 않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은 결코 아니고,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는 확실히 율법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그 믿음으로 약속된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참조. 갈 3:21-22).
갈라디아서 3:24-25에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으로 비유하였다. 몽학선생이란, 학교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집에서 훈육을 담당하기도 하는, 철들기 전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년 감시자이다. 즉 언약백성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감시자는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임을 알게 하여 그를 믿게 하시려고 율법을 준 것이다. 전적 타락 때문에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죄만을 증가시켜 결국 절망에 이르게 하여 완전한 율법 준수자를 갈망하게 하는 직무만을 수행할 뿐이다.
바울은 이 말을 고린도전서 4:15에서도 같은 뜻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일만의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를 훈도 할 사람은 많다. 그러나 너희를 사랑할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또한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라고 하여 마치 소년 감시자처럼 매를 가지고 너희 앞에 나아가야 되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할 일과 행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말해 줌으로써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며 우리에게 경고한다. 율법의 이러한 입장은 우리에게 죄를 발견하게 하고 죄를 깨달아 스스로를 낮추게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령께서 사용하는 도구로서의 율법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제2절 칭의와 율법의 관계
1. 의인론의 배경
바울의 의인론(義人論)은 그것이 발현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의인론이라는 올바른 사상적 관점을 근거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권리를 침해당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편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의'( )라는 용어는 단지 하나님의 속성만을 나타내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내적이며 현실 변혁적인 행위명사이며 동작명사이기도 하다. 의(義)는 대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은 세계(世界)이다. 하나님의 의는 의롭지 못한 세계를 향해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는 사건이며, 심판의 사건이다. 바울은 의롭게 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의'에서 찾는데 여기서 의(義)라는 명사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의 신비를 나타내는 정적(靜的)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동적(動的)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法廷的, forensic)인 의미로 사용한다. 구약성서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왜곡된 인간관계를 정상적인 인간관계로 회복시킨다.
이른바 바울의 의인론,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는다는 교설(敎說)은 바울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모든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개신교회들은 의인론을 교회의 존망이 걸려있는 '신앙조항'(articulus stanti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여기고 있다. 바울의 의인론은 안디옥 사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바울이 그의 최초의 의인론을 안디옥 사건과 연결시켰다는 것은 의인론의 삶의 자리를 밝혀내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기록된 안디옥 사건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식탁 예식과 정결법을 주장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평등한 권리를 상징하는 밥상공동체가 파괴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즉각 침해당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15-21절을 통해 의인론을 전개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에게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무기로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하였다. 바울은 이런 차별기능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로 인해 차별 당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인론은 더 이상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멸시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의 의인론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보호법이며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하나의 인권선언문이다. 또한 바울의 의인론은 모든 불평등과 불의, 착취, 수탈로 점철되는 왜곡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모순된 구조를 해결하려는 인권에 대한 구체적이며 치열한 하나님의 해방사건 이다.
바울의 의인론은 긍정적 명제와 부정적 명제로 구성된다. 먼저 긍정적인 면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면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명제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주장을 부정한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의 대립관계에 있어서 양쪽의 핵심어를 각각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의인론의 핵심은 달라진다.
2. 칭의
바울의 칭의교리(稱義敎理)는 '하나님의 의'( )를 전제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바울의 칭의교리의 핵심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 할 것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법정적(法廷的, )인 개념 이상이라는 것이다. 즉 칭의란 죄의 용서를 선언한다는 것보다 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죄의 용서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칭의라는 말은 생명이라는 말과 판단이라는 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대리인, 그리고 구세주(救世主, Saviour)로 믿는 사람들에게 의롭다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의 총체이다. 우리가 이 단어의 용법을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칭의는 司法的인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인을 의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는 죽음, 즉 유한한 인간실존의 한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되어졌음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또한 생명의 말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믿어 구원받은 인간존재의 마지막 사건은 사망이 아니라 부활이다. 비록 부활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그림자를 통하여 도달하는 길이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걸었으며, 그의 길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죽음이란 인간이 실존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는 두 번째 사건이며 죽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인간은 유한성과 필멸의 인간 실존을 초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세 가지 있다.
첫째,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롬 8:3)하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우리의 죄를 정죄할 수는 있지만, 그 죄를 사하여 줄 수는 없다. 율법은 우리의 더럽혀진 죄를 거울처럼 비추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깨끗하게 씻어 줄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너나없이 죄인들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 6:23)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죽여왔다. 칭의는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둠'을 뜻하는 데 율법은 그 일을 행할 수 없다. 둘째, 율법은 전혀 자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격한 규범이다.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전히 지켜야만 한다. 결국 율법은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초래하였다. "무릇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한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셋째 이유는, 율법이 과거를 교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오염시킨 내적인 죄성을 정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새 삶을 시작하고 율법을 흠 없이 지켜나간다고 하여 지나간 삶의 여정이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한 이후의 한 부분의 삶이 아닌 그의 전체적인 삶에 대한 교정이어야 한다. 설령 그의 전 생애동안에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본성의 내재적인 근본적인 죄성은 제거하지 못한다. 다윗이 그 안에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창조해 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로 그의 내부적인 결핍 때문이었다(시 51:10).
사실상 율법은 어느 누구도 의롭게 해주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고 주어졌다(롬 7:13). 그렇다고 율법이 악한 것은 아니다(cf 롬 7:12). 악함은 인간에게 있을 뿐이다. 다만 율법은 인간에게 악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의 칭의가 불가함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율법으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cf. 롬 3:20),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개인교사로 표현하였다
기독교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실존상황에 침투하여 우리에게 의롭다하심을 선물로 주심으로 인하여 인간의 실존상황은 인간의 외적 행위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 자신은 무능력하여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변화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복음은 타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선물로서 진정한 존재가 주어지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진정한 존재란 우리가 선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현존재를 판단함에 있어서 진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질책하고, 우리 인간의 진정한 존재 방법으로부터의 우리 소외됨을 없이해 주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자기 만족적 추구를 포기하고 일시적인 세상 물질에 의존함을 버리게 하며 대신에 우리의 존재를 영원무궁하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약속에 기초를 두도록 초대받는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의 회복은 인간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정 즉 노력에 의한 칭의(稱義)나 자기 칭의의 입장을 거부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환상적인 자기 충족성에 기초를 둔 모든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자에 의하여 인간의 실제 상황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진정한 존재로 변화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 역
에 친히 개입하신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사역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힘으로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3.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칭의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이 단어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며, 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단어의 뜻을 간단히 말하면, '의롭게 되다'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바로 삶, 참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갈 3: 26)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구원사건(cf. 갈 3:25-27)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사도 바울의 무차별 의식은 믿음에 의한 義의 완성이다. 이신칭의의 본질을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인간은 원죄의 결과로서 모든 인류는 그들의 신분이나 시대나 또는 어느 곳에 살든 막론하고 칭의를 필요로 한다.
2) 크리스챤은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선물로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 구원에 이를 희망이나 칭의를 위한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한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의 전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놓여 있다.
3) 칭의 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값없는 사역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아무 것도 우리 칭의의 근거나 토대가 된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조차도 신적 선물이며 우리 속에서의 신적 역사로서 인식되어져야 한다.
4) 칭의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포되며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그의 면전에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 칭의에서 우리가 복음에 인격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효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또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성례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만남으로써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인다.
5) 의롭다 함을 받는 자는 누구든지 뒤따라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어지며, 선행을 행하도록 자극 받고 또한 가능하게 되어진다. 이것은 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선행들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니 이는 영생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제공된 선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의 회복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자기 충족성에 기초를 둔 모든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자에 의하여 인간의 실제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진정한 존재로 변화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역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힘으로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칭의는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환상을 드러내어 파괴하며, 우리 인간이 죄악으로 인하여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온당치 못한 산물들임을 폭로해 준다. 칭의라는 말은 그것이 죽음, 곧 유한한 인간실존의 한계이며 마지막 사건에 이르렀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되어졌음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제공한다. 믿어 구원받은 인간존재의 마지막 사건과 경계는 이제 사망사건이 아니라 부활이다.
4. 칭의에 의한 은택
칭의란 그리스도의 은택(恩澤)이 무엇과 관계되는가의 포괄적 모습을 형성하기 위해 특히 바울의 서신에서 사용된 몇 가지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칭의의 개념은 우리에게 정죄의 제거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및 신분의 확립에 간하여 말해 준다(롬 3:22-27, 4:5, 5:1-5). 양자 됨의 사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새로운 신분을 가리킨다. 화해와 용서의 개념은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지적해 준다(고후 5:18-21, 엡 2:13-18). 구속과 해방의 개념은 속박과 노예상태로부터의 구출을 가리키는 것이요 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지불된 값임을 가리킨다(막 10:45, 엡 1:7). 여기서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무엇과 같은가에 대한 중요하기는 하나 철저하지 못한 기술이다. 즉 죄가 없이는 칭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은혜 없이는 칭의의 가능성도 없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적, 변화적 임재가 믿는 자들 속에 선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칭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이 문제에의 신약성경의 진술들을 초월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그 교리의 중요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칭의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 통찰을 확증 시켜주는 하나의 슬로건이요 암호이며 속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제3절 율법과 은혜
1. 은혜의 원천
갈라디아서는 비교적 간략한 서신이지만,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보여 주는 교리 가운데 중요하고 실제적인 진리로 가득 차 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교훈을 알지 않고서는 아무도 율법과 은혜, 믿음과 행위,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서신의 핵심단어는 "은혜"이며, 은혜의 결실은 "평화"이다(cf. 갈 1:3).
"은혜와 평화"( )라는 표현은 축복을 바라는 기도의 형태로서 사도의 서간문에서 인사의 형식으로서 다른 서신에서도 발견된다. "은혜와 평화"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내용은 첫째,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해서 둘째,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는 목적으로 셋째,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원천으로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주어진 것이다(cf. 갈 1:3-4).
하나님의 은혜를 적절히 정의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은혜란 가장 천(賤)한 죄인을 하늘나라의 지극히 높은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디모데후서에서 말씀하신 은혜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므로 이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름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사이다. 조그마한 행위나, 공적이나, 인간의 노력 등을 은혜에 덧붙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2.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율법과 은혜의 상반성
무엇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있는 은혜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익숙한 구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은혜는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그분 곧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분 자신 안에서만 머물러 계셨다면, 결코 은혜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은혜라는 단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에 이르러 하나님은 육신이 되셨고 그 육신은 은혜가 되셨다.
진리의 말씀 가운데 가장 뚜렷한 구분은 율법과 은혜이다. 사실상 상호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이 원리들은 가장 중요한 두 시대, 곧 유대교시대와 기독교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율법이 모세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은혜와 진리가 없었다는 뜻이 아닌 것처럼 모세 이전에도 율법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아담에게 금한 것은 율법이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범죄 한 그 죄인들을 찾으며 가죽옷을 입히는 일은 확실히 은혜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신 그리스도를 잘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의미에 있어서의 율법과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난 의미에서의 은혜는 언제나 있었던 것이고. 또한 성경은 그것을 곳곳에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어느 시대에서도 이 두 원리를 결코 혼합시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율법은 언제나 은혜와 구분되며 전적으로 이질적인 입장에 있고, 또한 그렇게 역사(役事)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금하고 요구하는 것이며, 은혜는 하나님께서 권하고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율법은 정죄 하는 일을 하고 은혜는 용서하는 일을 한다. 율법은 말하기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한다. 은혜는 말하기를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가르친다. 은혜의 가장 특징적인 본질은 가장 악한 사람이라도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다.
3. 율법과 은혜에 따른 오류의 양상
사도 바울이 오직 은혜로써만 구원받음을 전파한 후에 이 율법주의적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 끌어들였던 것은 다름아니라, 율법과 할례를 보존시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에 격분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은혜에 대한 자기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글을 쓴 것이다. 바울 당시에 은혜와 율법에 대한 오류는 크게 보아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율법주의는 의식과 규례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써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영혼을 해치는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해답을 위해서 신약성서 중 한 권이 완전히 할애되었다. 그것은 로마서인데,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요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둘째; 반율법주의 또는 무법주의는 신자들에게는 이제 자유만이 있고 아무런 율법적 제한이 없다고 주장하는 주의로, 이는 신자가 자신의 선행 없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들이 하나님을 입으로는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선한 일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분명히 책망하고 있다. 이러한 그릇된 교리에 답하기 위한 말씀은 야고보서 2:17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라고 요약된다.
셋째; 갈라디아인주의(Galatianism)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소위 "다른 복음"을 쫓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율법과 은혜의 혼합주의로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일부는 은혜, 일부는 율법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거짓 복음을 가리킨다. 갈라디인주의의 오류에 대해서 바울에 의한 갈라디아서의 엄숙한 경고, 대응할 수 없는 논리 및 강력한 선언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종적인 답이다.
구원은 은혜로써 얻지만, 그 다음에는 율법에 의해서 보존되며 우리의 궁극적 구원도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가르치는 그릇된 교리가 소위 '갈라디안주의'의 그릇된 교리이다. 이러한 오류와 싸우기 위해서 성령께서 바울을 택하시고 '갈라디안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쓰게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은혜로써 구원받고 보존되며, 궁극적으로 구속(救贖)된다는 가장 강력한 논조를 시사하는 사도의 가르침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육체로써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다(갈 3:3). 신자가 은혜로써 구원받은 후에는 오직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갈 2:19). 구원에 있어서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그 이유는 그러한 거짓 교사들에게 저주가 선포되었다는 사실(갈 1:7-9)과 그들은 거짓 복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쓸데없이 희생시켰다고 비난하는 이 엄청난 사실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이미 믿는 갈라디아 지방의 이방인들을 위해서 쓰여졌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오늘날도 당시와 같이 절실할 정도로 필요하며, 은혜와 율법이 뒤섞인 복음이 주장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냥 주여! 주여! 하는 오늘날에는 더욱더 필요한 것이다. 이 갈라디아인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율법 행위의 위치를 그릇되게 가르치는 모든 잘못된 가르침 중에서 가장 미묘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러한 갈라디아서의 메시지의 궁극적 목적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구원이란 율법과 은혜(Law and Grace)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이냐 은혜이냐(Law or Grace)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그 양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cf. 롬 11:6).
Ⅲ. 바울 복음의 진수(眞髓)
갈라디아서 1:11-12절은 독점적이지는 아닐지라도 사도 바울의 복음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그 주장인즉 바울의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란 바울이 갈라디아를 첫번 방문했을 때 갈라디아인들에게 전한 복음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의 복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의 복음의 기원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내가 전한 복음"이란 분명히 갈라디아의 거짓 선동자들이 선전하는 복음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만일 바울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원사도들의 복음과 일치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치성에 따르는 논리적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 적대자들의 주장은 사도 바울의 복음이 원사도들의 복음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바울의 복음을 적대한 것이다.
이하에서 복음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봄으로써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겠지만, 바울의 사유 가운데 있는 복음의 내용은 결코 그 자신이 창작해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다만 그가 다메섹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바울은 갈 1:1과 병행되는 갈 11:12절에서 바울이 전파한 복음이 왜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인지, 왜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지를 갈 1:11-12절과 갈 1:1절과 똑같은 병행 구절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파한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한다. 우리가 바울 자신의 서신과 사도행전을 통하여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모든 생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하였고 그 복음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그 복음 때문에 순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1절 복음의 어원과 용법
1. 헬라문화권의 용법
복음( , evangelium, gospel)이라는 말의 사전적(辭典的) 정의(定義)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일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말한다. 헬라언어권에서 사용된 복음은 '유안겔로스'( ,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라는 명사에서 유래하였다. 다시 말하여 유안겔로스가 도착했다고 하는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이 도착했다는 뜻이며,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준 대가로 주어지는 상(償)이 '유안겔리온'( )이었다. 이런 식의 표현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이에게 주어지는 상'의 개념은 사라지고 단지 '기쁜 소식'만을 의미하였다. 헬라어 문화권에서의 용법은 '승리의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의 기술적(技術的) 용례가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종교적으로 사용될 때는 다만 '제의를 축하하다' 또는 '신탁의 말씀'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2. 유대교의 용법
칠십인(LXX)역에서는 복음이라는 단어의 단수형은 등장하지 않고 '유안겔리온'의 복수형인 '유안겔리아'( )가 단 한번 나오는 데(삼하 4:10), 그 뜻은 '기쁜 소식에 대한 대가'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전혀 종교적 용법이 아니므로 신약성서의 '복음'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유대 랍비들(Rabbinic Judaism)의 문헌에는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의 '바사르'( )가 있지만, 종말론적으로나 하나님 나라를 뜻하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3. 구약성서
구약성서에서는 명백하게 복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는 없다. 유대인들은 단지 사생활(私生活)에서나 공생활(公生活)에서 벌어진 경사스런 일들, 즉 여호와의 승리(cf. 시 68:12), 유대의 광복(cf. 나훔1장) 등에서 일반적으로 기쁜 소식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사야서 40-66장에서의 이 단어는 엄밀한 의미로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 기쁜 소식의 사자(使者)는 유배 생활의 종말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시온으로 돌아오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은 산에서 울려 퍼지고(사 40:9) 이 복음은 그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고 이제 유배지에서의 귀환이라는 경사스러운 사건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승리와 통치의 안전한 성취를 예고한다.
4. 신약성서
신약성경에서의 복음( , evangelion)이라는 이 명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전도활동과 그들이 전했던 메시지를 언급할 때 특별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는 않았지만, 신약성경이 형성될 때부터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안겔리온의 동사형 '유안겔리쪼마이'( , evangelizomai)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나 설교를 할 때 주제 요소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상세하게 옹호하고 있는 것을 보면(갈 1:11, 2:1-14)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 4장 15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낳았다고 하는 사실에서 복음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는 은혜이다.
신약성서에서 복음이라는 말은 총 76회 나오는데 마가복음에 8번, 마태복음에 4번, 사도행전 2번, 그리고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에 각각 1번씩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바울 서신에만 60번 나오는 것을 보면, 복음이라는 단어는 사도의 애용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그 자신의 행적과 가르침을 "복음(good new, gospel)"이라고 규정하였으며(마 11:5; 막 1:14-15), 또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명하였다(막 8:35, 10:29).사람들은 예수사역에 관한 후대의 기록들 자체도 그것이 구전의 형태이든 자료이든, 역시 "복음"이라고 불렀다(막 1:1, 13:10, 14:9; cf. 고전 15:1ff).
제2절 바울 서신에 계시된 복음
1. 복음의 내용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난점 중의 하나는 바울이 '복음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한번도 개념적으로 정의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사도 바울이 복음에 대한 개념 정의를 내리지 아니한 것은 그가 이론 정립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복음의 개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복음의 실질적 내용, 실제적인 구원의 현실을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한 것이다. 바울이 수호하려는 복음의 실질적인 내용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한 분석에서 구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바울에 있어서 복음은 하나의 유개념(類槪念)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 속에서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전도활동이나 설교를 꼭 복음이라고 국한시키지는 않는다. 복음은 말씀 또는 그리스도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고린도 전서 15장 1절에서는 전통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나타난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전해 준 것을 고린도 교인들이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이 전통은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 실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6장 17절에 나타나는 전통의 내용은 교훈의 표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교훈의 표준은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일정한 윤리행위를 제시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으로 변화될 때의 상태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의롭다 함(justification), 화목(reconciliation), 구속(redemption), 성결케 함(sanctification), 택함(adoption), 유업을 얻게 함(inheritance), 부르심(calling), 구원(salvation), 건짐(deliverance), 새롭게 함(to create a new), 화평케 함(make peace) 등이다.
신약성서에서 유안겔리온이라는 낱말을 제일 처음 사용한 것은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이 말을 다만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것은 서신을 읽는 독자들이 이 낱말에 익숙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그 뜻은 쉽게 파악될 성질이 아니다. 복음의 내용을 일별하여 보면 먼저, 유안겔리온이란 복음을 전파한다는 전도활동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를 일컫는다. 다음으로 바울이 사용한 복음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롬 1:3). 따라서 바울이 사용한 복음의 실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관을 살펴봄으로써 복음의 구체적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다(롬1:3).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구약을 성취한 것(롬 1:1ff; 고전 15:1ff)에서 구약성서 자체는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 주는 책이다. 나아가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고전 15:3-4) 그리고 재림(살전 1:10)은 사실상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수(眞髓)이다. 여기서 육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요, 영으로는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됨을 보인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는 증거이다.
2. 복음의 효과로서 구원의 정복(淨福)
복음에서 파생되는 효과는 구원이다. 복음의 내용, 즉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엡 1:13; 롬 1:16; 고전 15:2). 복음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은 믿음을 싹트게 만들기도 한다. 믿음은 복음을 통해 성장하며(빌 1:27), 평화를 가져오고(엡 6:15), 거듭나게(重生) 하여 새 삶을 주며(고전 4:15), 죽음을 넘어 생명에 이르게 하며(딤후 1:10), 무엇인가 미래에 희망을 보여 준다(골1:5). 사도 바울의 의인론에 맞추어 복음이 가지는 구원의 측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은 믿는 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유대인 그 다음에는 헬라인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 1:16). 복음은 유대인의 독점물이 아니고 세계인의 구원정복으로 확장되면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지니는 보편성을 분명히 한다(cf. 롬 3:25, 4:25; 고전 6:11). 둘째, 모든 인간이 율법 아래에서는 죄인이었지만(롬 1:18ff), 이제 이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움이 선물로 주어졌으므로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폐기된다. 셋째, 바울은 인간을 육( ), 죄, 죽음의 세력에서 종살이하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인간은 이러한 힘에 의하여 짓눌려 있는 존재로 파악하였다. 이 때 복음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예수 안으로 옮겨 앉게 만들어서 죄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3. 복음의 사도성
바울 서신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도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그의 사도직(使徒職)과 깊이 연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신의 서두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사람임을 거듭 밝히고(갈 1:1; 롬 1:1; 고전 1:1; 고후 1:1), 나아가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롬 15:14-21). 이토록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을 예민할 정도로 밝히고 있는 것은 그가 받았던 사도직에 대한 도전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다를 바가 없는 단 하나밖에 없는(갈 1:16) 우리들의 복음(고후 4:3; 딤전 1:5; 딤후 2:14; cf. 고전 15:1; 갈 1:6)이라고 함으로써 복음의 단일성을 그의 사도직과 연계시키고 있다.
Ⅳ. 다른 복음은 없다 -결론에 갈음하여
갈라디아인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항상 되풀이되는 두 가지의 주제, 즉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에 관하여 언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도적 지위와 복음을 맞물려 있는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지위를 복음에 종속시키려 한다. 반면에 반대자들은 일차적으로 바울의 사도직에 자신들의 공격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가 이 갈라디아에 있는 도시들을 방문한 이후, 그가 창설한 교회들은 거짓선생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의 권위와 복음에 대하여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복음에 반대하였다. 선동자들은 바울의 복음을 원천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축소된 것이라고 소개하였다. 본래 바울은 그의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받은 복음, 곧 자신의 전통적인 유대종교의 구호인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로써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파 한 것이다. 갈라디아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칭의교리는 이미 바울의 회심사건에 함축되어 이었지만, 이제 그 교리는 바울의 손에서 전투적인 교리, 즉 단순히 변증하고 전파하는 주의(主義)가 아니라 적과 싸우는 병기(兵器)가 된 것이다.
적대자들 곧 거짓 형제들의 문제점은 교회를 교란시키고 복음을 곡해하는데 있었다. 이들은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선동하고 있었으며,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들을 율법주의자, 혹은 유대주의자로 말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도덕적 방종주의(放縱主義)로 빠지는 열광주의자들 혹은 율법 폐기론자들을 향해 싸우는 바울의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다(cf 갈5:13).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은 끝장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행함이나 도덕적 행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도덕적 방종주의에 빠지도록 이끄는 유대 기독교적 "영지주의자"가 바로 이들이다.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적인 도덕적 방종주의에 대한 공격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때에 더욱 온전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즉 거짓복음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굳게 붙들라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권유는 다음과 같이 논쟁과 권면 부분에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1)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라고 권면 한다(3:1-14, 5:1-12, 2:14b-17).
2) 율법 아래 종노릇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 됨을 선택하라고 권면 한다(3:23-4:7, 4:21-31, 2:18-21).
3) 육체에 복종하지 말고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 한다(5:13-6:10).
4) 그리고 마지막 결어 부분에서 바울은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택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면서 끝을 맺는다(6:12-16).
갈라디아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침투해 들어오는 거짓 복음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다. 이 점은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논지에 본질적인 통일성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서신의 본론이 시작되는 곳에서 바울은 자신의 논지에 대한 명제를 제시한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1:6-10). 뒤따라오는 이야기 부분(narrative section)에서 바울은 자기의 복음, 즉 복음의 신적 기원을 주장한 후 그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두 개의 논지를 발전시킨다. 하나는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과 다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더 이상 율법의 노예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논쟁에 기초하여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지 말 것을 촉구하고(5:1-12), 다른 편으로는 육신으로 행하지 말고 성령으로 행하라고 권면 한다(5:13-6:10). 이 두 개의 논지와 그것들에 대응하는 권면은 하나의 기초, 즉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구속에 터를 두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갈라디아의 교회에서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거짓된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위기에 처해있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야흐로 벌이고자 하는 투쟁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임을 알 수 있다.
6-9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핵심을 예리하게 표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단호하게 표명한 것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하여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의 중심문제를 올바로 파악하는 관건이 된다.
비록 바울 자신이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하더라도 그 전하는 내용이 이미 확인된 복음에 배치된다면 그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그릇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한다.
국문요약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율법문제로 인하여 복음을 놓쳐버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하여 성령에 의한 성숙한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서신이다. 당시의 유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12제자가 아닌 바울이 전한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율법과 함께 할례를 받고 그들의 절기를 지켜야 변화된 생활, 즉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하고 바울은 경탄하였다.
사도의 서신 중에는 무엇이 복음이라고 정의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복음은 그 복음의 출처인 "신적 기원"(cf. 갈 2:3-4, 21)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모세의 율법과 아울러 유대교의 전통인 할례를 곁들여야 온전한 복음이 된다고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빠져 들어간 갈라디아 교인들은 혼란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듯이 사도의 제1차 전도 여행이 끝난 후, 안디옥 교회에서 논쟁하다가 결국 예루살렘 총회에 상정되었다. 거기서 모든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주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율법의 강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행 15:19-20). 바울은 바로 이 결정을 모든 교회에 알려줌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굳건한 복음 위에 세울 수 있었다.
생각컨데 사도 바울의 논쟁적 서간문인 이 갈라디아서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그리스도교의 진정성은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한낱 당시 유대교의 한 종파로 머무를 수도 있었다는 비판적 신학자의 말을 되새겨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도의 갈라디아서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위기의 상황에서 구축하였다는 제1차적 공헌과 함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의 교리를 확립시킨 제2차적 효과,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참 신앙을 적 그리스도로부터 쟁취하고, 나아가서 현실의 교회에 만연하고 있는 갖가지 신앙적 오류를 극복하는 데 갈라디아서의 진정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갈라디아서 본문을 언어적으로, 문학비평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서는 달성할 수 없다. 그것은 갈라디아서의 배후에 놓여있는 삶의 정황과 관련시켜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칭의론은 중세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요 바울신학의 핵심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수(精髓)로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관념론적 성서해석의 저변에는 정작 사도가 칭의론을 말하려는 복음과 거짓 복음(갈 1:6-9)에 대한 극명한 대립적 구도의 범주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과 단독자 인간사이에 일어나는 추상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로 해석하는 결과로 칭의론의 역사적 정황을 지나쳐 버렸다.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칭의론의 본래적 의미를 구명(究明)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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