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0 대림 12월 20일 – 133위 004° 권철신 암브로시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6).
133위 004° ‘하느님의 종’ 권철신 암브로시오
이름 :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출생 : 1736년, 양근 감호(楊根 鑒湖)(경기도 양평군·읍 양근리), 양반
세례 : 1784년 음력 9월
사망 : 1801년 12월(66세), 서울 의금부 옥중 杖毒死
묘지 : ①양근 한감개(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②천진암(1981년 이장)
父 : 권암(權巖)
母 : 풍산 홍씨(豊山洪氏)
妻 : 의령 남씨(宜寧南氏, 南墩의 딸)
丈人 : 안정복(安鼎福)
스승 : 성호 이익(정약전·정약용·권일신·이덕조 등과 1779 기해년[정조 3] 겨울부터 주어사에서 천주교 강학)
子 : ①福者 권상문 세바스티아노(권일신 二子 입양), ②딸(李寵億의 妻)[0]
弟 : 권일신(1742-1791,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弟子 : 이존창 루도비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는 경기도 양근의 한감개[大甘浦, 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본관은 안동으로, 자(字)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菴), 당호는 ‘감호’(鑒湖)였다.[1] 1791년 순교자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그의 동생이고, 1801년에 순교한 복자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은 그의 조카이며 양자였다.
암브로시오는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이름 있는 학자가 되었다. 그 결과 1776년을 전후로 젊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들어와 학문을 닦게 되었으니, 1785년의 순교자 이벽(요한 세례자), 1801년에 순교한 복자 홍낙민(루카)과 윤유일(바오로), 1801년의 순교자 이승훈(베드로)과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등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1779년 겨울 암브로시오는 제자인 이벽 등과 함께 경기도의 주어사(走魚寺, 현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주어리)[2] 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해 토론한 뒤 천주 신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784년 가을에는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자신의 집을 방문한 이벽과 함께 다시 한번 교리에 대해 연구하였다. 같은 해 겨울에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으니, 그때는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식이 거행된 직후였다.[3]
이때부터 암브로시오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지만, 드러나게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천주교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그는 언제나 교회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게다가 1791년 신해박해로 아우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체포되어 모진 형벌 끝에 유배형 판결을 받고 길을 떠나던 도중에 사망하자, 문밖출입은 물론 신자들과의 교류도 삼갔다.[4] 뒷날 황사영(알렉시오)도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권철신은 ……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되자 온 가족이 이를 믿어 따랐습니다. 본디 명문 집안이었으므로 남들의 비방이 심했는데, 그의 아우 권일신이 신해년 박해 때 사망하자 이후로는 감히 드러내 놓고 수계하지 못하였습니다.”[5]
이러한 상황에서도 암브로시오는 1795년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자신의 집을 방문하자, 양자인 권상문과 함께 성사를
받고 교리에 대한 강론도 들었다.[6]
1799년에 암브로시오는 양근 관아에 고발을 당해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 이듬해인 1800년 6월(음력)에는 양근 지역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이 체포된 뒤 양근 관아에 갇혔다가 경기 감영을 거쳐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7]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직후인 3월 24일(음 2월 11일)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체포되었다. 곧바로 의금부로 압송된 그는 문초가 시작되자 시종일관 의연하게 대처하였고, 신해박해 이후로는 신자들과 상종한 일이 없다는 사실만을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8] 특히 박해자들이 주문모 신부의 종적이나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를 질문할 때면 입을 굳게 다물고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4월 4일(음 2월 22일) 다섯 번째의 문초와 형벌 과정에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65세였다.[9]
[註]__________
[0] 권철신, 권일신 족보
[1]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15-16, 472; 정약용, 『여유당전서』, 제1집 15권, 녹암 권철신 묘지명; 『안동 권씨 족보』.
[2] 이때 암브로시오가 제자들과 만난 장소를 주어사가 아니라 천진암으로 보기도 한다.
[3] A. Daveluy, Ibid., ff. 6, 15-17;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f. 102-103; 정약용, 『여유당전서』, 제1집 15권, 녹암 권철신 묘지명과 선중씨(정약전) 묘지명.
[4] 정약용, 『여유당전서』, 제1집 15권, 녹암 권철신 묘지명.
[5] 황사영, 「백서」, 11-12행.
[6] 『추안 및 국안』, 1801년 3월 15일 주문모 신부의 진술.
[7] 『사학징의』, 1권, 정법죄인질, 권상문; v 12-13행.
[8]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103, 108; 『추안 및 국안』, 1801년 2월 11일∼22일 권철신의 진술. 의금부에서의 첫 문초 때 권철신은 “사학(邪學)에는 오륜이 없다.”고 답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학은 ‘천주교’가 아니라 ‘사악한 학문’을 의미하는 일반 명사로 보아야 한다.
[9] 황사영은 암브로시오의 죽음이 착한 죽음, 곧 ‘순교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며 널리 탐지하여 알아낼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황사영, 「백서」, 52행). 다블뤼 주교는 암브로시오를 ‘매우 훌륭한 순교자’로 기록하였다(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 104). 순교한 뒤에 암브로시오의 시신은 고향인 한감개 뒷산에 안장되었으며, 1981년에 발굴되어 천진암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