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榛木) 金東出
필자가 태어나 자란 곳은 巨濟도(거제시) 장승포읍과 연초면이 경계한 산자락, ‘천지박골’아래 숨어있는 작은 산동네입니다. 1970년대 주소는 ‘경상남도 거제군 장승포읍 옥포리 3구 1반’이고, 地名은 '제석(帝釋)골'로 국도 14호선 장승포를 기점으로 아주, 옥포, 연초, 고현을 거쳐 종점인 성포를 잇는 신작로길 고개 하나 사이로 연초면 송정마을과 인접한 곳이었습니다.
찾아오는 이라고는 일주일에 서너 번 우편 낭을 메고 오는 우체국 집배원 아저씨와 마을 어귀 소나무 가지 위에 둥지를 지어놓고 새끼 치며 날아드는 산까치 가족뿐인 고적한 마을이었습니다. 태백준령의 화전마을을 연상하는 산동네로 돌밭 위에 터전을 잡고 <김해金, 김영金, 의령 玉, 순천 朴, 의령 劉. 丁씨. 全씨> 등의 형제들이 一家를 이루어 사이좋게 살아가는 마을. 남정네들은 대부분 부산 선적의 선망 어선 선원으로 종사하여 식솔을 굶기지 않고 자신들의 못 배운 한을 채찍질하듯 자식들을 공부시키며 숨 가쁘게 살았습니다.
집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처로 일하러 나간 남편 대신 부녀자들이 남편을 대신하여 집안일을 도맡아 웃어른과 자녀들을 돌보며 가장으로 살았습니다. 여느 지역의 산촌 사람들처럼 집 근처에 한 두어 마지기의 언덕 높은 천수답과 좁다란 밭뙈기를 쪼아 고구마와 푸성귀를 가꾸며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로 서로 간에 흉볼 것 없이 따개비처럼 붙어서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진달래 피는 봄이면 부녀자들은 바구니 들고, 깊은 산중을 다니며 고사리, 취나물, 산미나리, 더덕, 두릅 등의 산나물과 쑥을 캐어 장에 내고, 보리 익을 때면 산에 올라 산딸기 따고, 여름이면 대처로 돈벌이 간 남편을 대신하여 농사짓기 바쁘고, 단풍 지는 늦가을이면 또다시 산에 올라 다래 따고 알밤 줍고 산초를 따서 팔아 ‘하이타이, 성냥, 빨랫비누 등 생필품을 사고, 겨울이면 산에 올라 땔감 나무하면서 보리 베기, 모내기, 벼 베기 철에는 번갈아 품앗이로 서로 도우며 오순도순 정답게 살아가는 마을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산등성을 가로지르는 신작로 바로 아래, 제석골의 맨 꼭대기 집. 집 뒤에 열댓 그루 감나무가 언덕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고, 너른 대밭과 칡넝쿨이 함부로 휘감긴 돌담에 둘러싸인 울안이 꽤 넓은 초가집이었습니다. 본채 앞에 스무여 마지기 벼농사를 타작할 수 있는 넓은 마당과 아래채와 축사와 거름 간을 갖추었고, 집 안팎 돌담 사이에는 ‘더덕, 익모초, 골담초, 오가피, 음나무, 머위, 천남성, 도라지’ 등의 약초와 삽짝 가에는 신우대와 황매들이 무성한 비밀의 화원이었습니다. 증조부 때에는 비록 산골짜기에 살았지만 열댓마지기 다랑논을 부치고 살았기에 풍년이 들면 마당 가장자리에는 추수하여 거둔 나락을 채울 수 있는 나락뒤주가 있었고, 삽짝 가에는 마 줄기가 나무울타리를 휘감은 장독간에는 된장과 간장을 담근 장독들이 제법 넉넉한 살림살이를 보여 주었기에 춘궁기에 마을로 내려온 탁발승은 시주를 내 주지 않으면 마당을 섣불리 마당을 나서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가을 추수를 마친 동짓달이면 힘세고 손재주 좋은 이웃 장정들을 품앗이로 모아 찰밥을 지어 먹이면서 연례 행사로 햇 나락 짚단으로 이엉을 엮어서 큰 채부터 차례차례 새 이엉으로 지붕을 새로 덮었습니다. 철이 들면서 남자는 지게 지고 여자는 머리에 짐을 이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이 척박한 환경의 산비탈 마을. 이제 와 추억하니 그 시절이 그립지만, 중학교 3년 동안 대처에서 공부하고 온 뒤부터 내가 태어나 자란 ‘제석골’이 너무 싫어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 고향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척박하고 열악한 산골짜기에서 筆者의 <金海 金 家>는 5대째 뿌리박고 살았지만 제 고향 ‘제석골’에 대한 지명의 유래와 마을 역사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된 緣由를 생각해 보면, 조선조 시대의 행정구역으로 대동여지도 등에 기록된 여느 고장의 마을과는 달리, 섬 지역의 외진 산골짝 마을로 갖은 사연을 가진 민초(民草)들이 출생 배경을 숨기고 들어와 살았던 것이 그 첫째 까닭이요, 또 마을이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외진 곳의 빈촌이었던 까닭이요, 셋째는 그 시대적 민초의 대부분이 글을 모르고 살았으며, 마을 이름은 물론 일상의 모든 말이 구전으로 전해 들어 기억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예부터 화전민이나 약초꾼이나 굿 당을 지키는 무당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수많은 산골짝 작은 마을 이름(地名)은 대개 구전으로 이어져 왔기에 정확한 지명의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지명유래집’에 나와 있는 지명 중 ‘제석(帝釋)’이란 낱말을 앞머리에 둔 지명을 찾아가 보면, 그곳에는 제석신(帝釋神)을 모신 무당들이 마을 사람들의 부름을 받아 천신제나 기우제를 지냈던 흔적이 있는 지리산의 "제석골"의 지명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필자가 고찰한 가장 타당한 견해는 예부터 전해오는 우리 마을의 정서를 미루어 볼 때 필자의 생가 인근 바위틈에서 사시사철 맑은 샘물이 솟는 근처에 ‘제석(帝釋)신’ (네이버 검색 자료)’을 모신 곳(골짜기)이 있었기에, 外地 사람들이 이곳을 ‘제석신(帝釋神)께 제사를 지냈던 골짜기’로 불렀던 ‘제석골’이란 지명이 구전으로 전해져 오면서 제석골> 제서골> 제시골>의 과정으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씨까밭’, ‘시루봉’, ‘천지박골’, ‘개밑골’, ‘쪽박골’, ‘삼천원고개’, ‘보름뫼(보름달이 떠오르는 뫼의 아랫마을)’, 등지의 정겨운 우리말 지명을 가진 들로 산으로 쫓아다녔던 내가 태어나 자란 산동네 ‘제석골’」 筆者가 태어나 자란 그곳, 幼年의 추억이 서려 있는 한 많고 돌 많았던 ‘제석골’의 역사도 1970년 초 거제 대우조선소 배후도시 터로 편입되어 옛날의 그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가끔 고향을 찾아가면 주위의 산세를 가름하여 ‘이곳은 어디쯤이네’ 하는 생각으로 짐작해 보지만 이미 파헤쳐진 땅거죽으로 ‘지맥과 수맥’은 이미 끊어진 지는 이미 오래전이라, 그 시절 윗마을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대주었던 筆者의 집 뒤 찬 새미(샘)터도,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이 쉼 없이 흘러내려 산길을 지나는 길손들과 집짐승과 산짐승의 목을 축여 주었던 넉넉했던 ‘물꼬랑’의 물길도 이미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필자가 고향을 떠나온 1970년 그 시절로부터 반세기의 세월이 지난 지금. 정든 고향의 터전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우리를 키워주신 동네 어르신들도 모두 세상을 떠나셨지만, 고향의 정기를 받고 자란 후손들은 인근 마을의 여느 곳보다 교육열이 각별하셨던 부모님들의 덕택으로 하나같이 올곧게 성장하여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음은 내 고향 <제석골>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아름다운 전설이 되었습니다.<청계문학.제36집/봄호(2022)>
첫댓글 개발로 추억을 잃었다니 아쉽네요.
고향은 어머니 품 같은 곳인데요.
다행이 저의 고향은 아직 건장합니다.
가끔 추억살리기를 하곤 하지요.
그러나 이제는 별 연고가 없는 곳으로 변하여 아주 가끔씩이랍니다.
고향을 들춰 주시니 감사합니다.
또 가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