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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제왕편
제왕에 응하다.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
①유가 수기안인修己安人
②불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자기 논리에 갇히지 않은 순수한 마음
③장자 虛心=心齋=坐忘=無爲而無不爲=無爲之治
1.분별심 없는 마음으로 응하라(왕 순임금(성심,인), 제왕 태씨(허심), 皇帝王覇⇨진시황?)
1.등장인물 설결vs왕예vs포의자
2.내용 ①유우씨(순임금)
어짊을 감추고 사람을 대한다.
장인이요인藏仁而要人
처음부터 사람들을 비난하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함
미시출어비인未始出於非人
②태씨(복희씨)
잠잘 때 편안하고 깨어 있을 때는 바보(소나 말)같았다.
와서서 각우우臥徐徐 覺于于
처음부터 사람들을 비난하는 입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미시입어비인未始入於非人
3.현상
유우씨는 사람들이 인의 경지에 들어오지 않으면 비난하고 멀리함(人爲)
복희씨는 자기를 낮추고 지혜와 덕을 쌓아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바보처럼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일이 없음(無爲)
4.교훈
인의 굴레를 씌워 다스리려 하지 말고 지도자가 스스로 낮춰 분별하지 않으면
세상은 저절로 돌아간다. 이것이 제왕에 이르는 길
설결(齧缺)이 왕예(王倪)에게 물었다.
①“선생께서는 만물이 제 나름대로 옳은 바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아십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②“선생께서는 선생이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③“그렇다면 모든 존재에 대해 안다는 것이 없습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시험 삼아 말해보겠다.
④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실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며,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실은 아는 것이 될지도 모를 일이지 않느냐?”
예<사람과 미꾸라지, 사람과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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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백치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가령 설결(齧缺)과 문답하는 왕예(王倪)가 그렇다. 설결이 묻는다.
“선생께서는 모두가 다 옳다고 동의할 무언가를 아십니까?(子知物之所同是乎)”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소.”
“그럼 선생은 선생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십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그렇다면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말입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불변의 자아 같은 것이 없음을 안다면
모른다는 대답은 그 본성에 대한 답변
선사들도 백치의 ‘모른다’를 자주 구사
왕예는 세 번의 질문에 모두 ‘모른다’고 대답한 것이니, 아는 것이 없는 자, 머리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백치라 하겠다. 그러나 마지막 대답에 이어 왕예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하지만 시험 삼아 말해보자면,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알지 못함이 아닌지 어찌 알 것이며,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닌지 어찌 알 것인가?”(‘장자 1’, 108)
안다는 게 거꾸로 무지가 아닌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게 아닌지 반문하는 왕예의 대답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이 거꾸로 세상을 아는 대로만 보기에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안다는 생각을 접을 때 오히려 세상의 실상에 다가갈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닌지 묻는 말이기도 하다. 왕예의 말이 이어진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이 생기고 반신불수가 되는데,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은 소와 양, 개와 돼지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소리개와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이 네 가지 중에서 누가 올바른 맛을 아는 것인가? 모장과 여희를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 속 깊이 도망치고 새는 하늘로 높이 날아가고 사슴은 힘껏 달아난다. 이 네 가지 중 누가 천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인가?”
이 놀라운 생각이 왕예가 했던 ‘모른다’는 말의 숨은 뜻이었던 것이다.
백치가 머리가 텅 빈 자라고 한다면, 머리 속이 비어 있음을 뜻하는 이 ‘모른다’는 답은 백치의 일반적인 응답형식이라 할 것이다. ‘장자’의 ‘제물론’에 나온 이 얘기는 ‘응제왕’편에 다시 언급된다. 설결이 스승인 포의자(蒲衣子)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자 포의자는 또 다른 백치 얘기를 해준다.
“유우씨(有虞氏)는 자기 마음 속에 인(仁)을 품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니 또한 백성들을 얻었지만 애초에 사람 아닌 자연의 경지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태씨(泰氏)는 누워 잠잘 적에는 느긋했고 깨어있을 때는 어수룩해서, 어느 때에는 자신을 말이라고 여기고 때로는 자신을 소라고 여겼다.”(‘장자 1’, 315)
여기서 태씨는 어수룩하고 우둔하여 자신이 사람인지, 말인지, 소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이는 때론 사람이 되고, 때론 말이, 때론 소가 되었음을 뜻한다. 사람이 사람인 채로만 있다면 사람 아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왕예 또한 때론 미꾸라지가 되고, 때론 사슴이 되는 식으로 자신이 선 입장을 바꾸어갈 수 있었기에 그 다른 것들이 느끼는 맛이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치는 머리가 비어 다른 것의 생각이 들어올 여백을 갖는 자일 뿐 아니라, 몸 또한 비어 다른 것이 들어올 여백을 갖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이 되는데 능숙한 자라고 해도 좋겠다.
따라서 백치는 확고한 자아를 찾고자 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맞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믿는 이들과 정반대 편에 있다. 그들에겐 자아 같은 게 없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백치는 매우 불교적인 인물임이 드러난다. 자아란 없으며 그때마다 연기적으로 다가오는 것에 따라 자신의 본성이 달라진다고 하는 게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선승들은 백치들의 ‘모른다’를 자주 구사한다. 무엇보다 ‘벽암록’의 가장 첫 번째 나오는 달마의 ‘모른다’가 그렇다. 달마에게 무제가 물었다.
“짐은 사찰을 일으키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내렸는데, 무슨 공덕이 있습니까?”
“공덕이 없습니다.”
“무엇이 근본이 되는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십니까?”
이에 대한 달마의 대답은 “모르겠습니다.”이다. 다시 무제의 얼굴에 덮쳐왔을 당혹감이 눈에 선하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묻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놀랍게도 ‘모른다’고 대답한 것이다. 아마도 ‘누구냐’를 묻는 흔한 질문이었을 무제의 물음에 ‘모른다’고 답함으로써 질문 자체를 ‘본성’에 대한 질문으로 승격시킨다. 불변의 자아 같은 것은 없음을 안다면, ‘모른다’는 대답은 그 본성에 대한 대답이다. 또한 그것은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자신에게 다가온 것들이 들어설 수 있는 텅 빈 존재, 무규정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대답이다.
이를 안다면, ‘모른다’고 답한 것은 앞의 두 질문 역시 같은 대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제의 공덕이란 사실 불교도의 입장에서 판단한 것이다. 절을 짓기 위해 베어진 소나무들에게 그게 무슨 공덕일 것인가? 성스런 진리를 묻는 질문 또한 그렇다. 소는 풀을 먹으며 사람은 소를 먹는다는 사실은 누구든 다른 것의 신체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는 진리를 표시하지만, 먹히는 토끼나 풀, 소나 돼지에게 그 진리란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두렵고 잔혹한 것일 뿐이다. ‘속제(俗諦)’가 이러하다면, 진제(眞諦)는 그 모든 존재자들이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궁극의 본성은 텅 빈 무규정성을 가질 뿐이다. 그렇게 텅 비어 있기에, 사람이 다가가면 사람의 진리를 비추어주고 소가 다가가면 소의 진리를, 풀이 다가가면 풀의 진리를 비추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디나 있는 것이다.
꿰매고 잇댄 자국이 없는 무봉탑(無縫塔)이란 이런 궁극의 진리를 뜻한다. 꿰매고 잇댄 자국이란 꿰매고 이은 자들이 만들어낸 경계다. 그에 따라 밝음과 어둠이, 좋음과 나쁨의 경계가 그려진다. 그렇게 나름의 그늘을 갖는 탑이다.
“스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필요한 물건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당 황제 대종(代宗)의 물음에 충국사는 말한다.
“노승에게 무봉탑을 만들어주십시오.”
“스님께서 탑의 모양을 말씀해주십시오.”
충국사는 만들 수 없는 탑을 부탁하니, 대종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달라고 한 셈이다. 충국사는 되돌아온 난문을 받아들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묻는다.
“알았습니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유마힐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황제가 답한다.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모른다’는 대답을 듣는다. 말해보라, 앞서 달마와 같은 백치의 대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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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교화시키려는 것은 덕을 속이는 일(유위의 치는 덕을 속이는 일)
1.등장인물
견오(일중시)vs접여
2.내용
견오 “군주가 모범, 법도에 따라 일 처리, 누군들 교화?”
군인자이기출경식의도 인숙감불청이화제
君人者以己出經式義度 人孰敢不聽而化諸
접여 “덕을 속이는 일. 시기덕야是欺德也”
성인의 다스림이 어찌 바깥만 다스리는 건가?
자신이 바르게 행동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확실히 할 뿐
정이후행 확호능기사자이이의 正而後行 確乎能其事者而已矣
3.현상
법과 원칙에 의한 통치를 하면 백성들은 교화될 것이라고 믿음(유가적 사고)
-물길을 뚫어 바다를 건너는 일과 모기가 산을 짊어지고 가는 것과 같음(불가능)
법과 원칙에 의한 통치는 덕을 속이는 행위라고 봄(도가적 사고)
성인의 다스리는 방식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인데 일중시(견오)의 말은 내성은 사라지고
외왕만 존재, 성인의 다스림은 無爲自然에 입각해야 한다.
-새가 높이 날고 두더지가 굴을 깊이 파듯이(본능적인 행동)
4.교훈
백성을 교화시키려 하지 말고 자신을 바르게 하고 스스로 그러하도록 내버려두라.
3. 자신을 다스리고, 사사로운 욕심을 용납하지마라.(무위의 치란 어떤 건가)
1.등장 인물
천근vs무명인
2.내용
천근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달라”
무명인 “질문이 좋지 않다. 無何有之鄕과 曠埌之野에서 머물려고 한다”
천근이 다시 묻자
“마음을 담박한 곳에 노닐게 하고 기를 막막한 곳에 모으고
사물을 자연에 따르도록 해서 사심이 없게 하면 된다.”
유심어담 합기어막 순물자연이무용사언 이천하치의
遊心於淡 合氣於漠 順物自然而無容私焉 而天下治矣
3.현상
천근이 무명인에게 천하를 다스리려는 방법을 묻자 속물로 보고 차갑게 응대한다.
(다스리는 것은 인위, 유의의 행동이다)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 무명인은 정신이 수고롭지 않는 마을과
사방 탁 트인 들판에서 머물려는 꿈을 말한다.
천근이 다시 묻자 하는 수 없이 말한다.
마음은 담박하게 기는 막막한 곳에 사물은 자연에 따르도록 해라
(사심이 끼어들지 않게)
4.교훈
군주(삶의 주인)가 되어서 바깥 보다는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우선하고
사심이 끼어들지 않도록 하라
4.명왕의 정치는 공적이 세상을 덮어도 자신이 하지 않은 것처럼(무위의 치)
1.등장인물
양자거(양주)vs노담
2.내용
양자거가 평가한 인재의 세 가지 덕목
“민첩하고 굳센 것, 만물을 잘 꿰뚫어 보고 분명히 아는 것, 부지런히 도를 배우는 것”
향질강량 물철소명 학도불권 嚮疾强梁 物徹疏明 學道不倦
노담이 볼 때 잡일이나 하고 재앙을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폄하
서역기계 노형출심자야 胥易技係 勞形怵心者也?
양자거 “감히 명왕의 정치를 묻겠습니다” 감문명왕지치 敢問明王之治
노담“공적이 세상을 덮어도 자신이 하지 않은 것처럼, 만물에 영향을 미쳐도
백성이 명왕에 의지할 줄 모르게 한다.
공이 있어도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만물이 스스로 기뻐하도록 하네”
공개천하이사부자기 화대만물이민불시 유막거명 사물자희
功蓋天下而似不自己 化貸萬物而民弗恃 有莫擧名 使物自喜
*명왕은 소요유편의 무기(지이) 무공(신인) 무명(성인)
3.현상
양자거가 추천한 사람은 살쾡이 같은 사람이다.
(몸을 움츠리고 있다가 먹잇감 발견하면 이리저리 다니지만 언젠가는 덫에 걸려 죽고 만다)
*노자 46장 남이 욕심낼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
(罪莫大於可欲) 적나라 사람이 여우와 표범가죽을 진나라 문공에 상납 하자 이들은 아름다운 가죽을 가졌기 때문에 화를 초래한 것이다.<한비자 유로편 해로>
명왕의 정치는 神人과 같은 無功을 추구하고 無名을 추구하는 聖人과 같은 자세.
명왕은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한 경지에 있어 무하유마을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다.
4.교훈 무용지용의 도를 추구하고 공적을 이루어도 하지 않은 것처럼 하는 사람이
명왕(지인, 신인, 성인)이고 제왕이 될 수 있다.
====행동에는 결단력, 지혜는 만물을 꿰뚫고, 도는 배우는데 게으르지 않는다.
지혜만 앞서고 재주에 얽매여 몸을 지치게 하고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자다
만물에 교화를 베풀지만 백성은 의지 하지 않는다.
선정이란 베풀어지고 있으나 뭐라고 나타낼 수 없으며 만물을 각기 만족하게 하고 있다===
5.껍데기만 보고 달도한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스스로 밝다는 계함 혼내고, 신통력을 밝음으로 착각한 열자에게 허구임을 증명)
1.등장인물
계함vs열자vs호자
2.내용
계함은 신통한 무당(생사, 행불행, 장수와 단명 등 족집게 점쟁이)
열자는 스승 호자로부터 피상적인 지식만 습득하고 달도한 것처럼
(껍데기가 알맹이 행세) 未旣其實而固得道與
*암탉이 아무리 많아도 수탉이 없으면 알을 낳을 수 없다.
衆雌而無雄 而又奚卵焉
호자는 열자의 스승으로 신통한 능력 보유자(계함을 시험하다)
①죽을 운명(濕灰)地文-杜德機덕이 막혀 있는 조짐
②솟아나는 모습(杜權)天壤-善者機덕이 열리는 조짐
③차별이 없는 큰 비움(太沖莫勝)衡氣機기가 조화된 조짐
④근본이 나타나지 않는 상(未始出吾宗)
나부끼는 바람에 의해 생겨난 사람, 출렁이는 파도에 의해 생겨난 사람.
-얼이 빠져 달아난 계함, 잡지 못하고 돌아온 열자. 호자가 이르기를“근본이 나타나지 않 는 상(마음 비우고 욕심 없는)을 보여주자 무언가 성난 파도처럼 밀려온다 생각하여 도망
3.현상
처음에는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가 급기야 관상이 일정치 않아 볼 수 없다.
호자는 자기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변신. 무너져 내린 계함의 줄행랑. 열자는 공부정진
①3년 동안 불출(수양) ②아내위해 밥 지으며(남녀평등)
③돼지를 기르되 사람 먹이듯(만물제동) ④친소를 따지지 않고 아무런 감정 없이 어지러이 만물과 뒤섞여 한결같은 태도로 삶을 마쳤다.
4.교훈
껍데기 지식을 가지고 사람을 비교, 평가하지 마라(자공의 담장과 공자의 萬仞宮墻)
*호자가 계함을 이기는 것은 도가사상이 민간 신앙에 아니라 철학이라는 사실.
정나라 사람vs 계함 vs 호자
상대를 보고 도망친 이유?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못한 경지
열자의 수양자세⇨ 도를 닦고 생사.시비,선악의 단계를 벗어나려는 노력
6. 보내지도 맞이하지도 마라(밝음을 개념적으로 정리)
1.등장인물 (우언) 지인=거울
2.내용
명예의 주인이 되지 말고, 모략의 창고가 되지 말고, 일의 책임자가 되지 말고,
지혜의 주인이 되지 말라.
도를 체득해서 자취없는 세계에서 노닐라.
하늘에서 받은 것을 극진히 하되 이득을 보지 마라, 오직 마음을 비울 뿐
지인의 마음 씀씀이는 거울과 같다.
보내지도 맞이하지도 않고,不將不迎 비추기만 하고 간직하지 않는다.應而不藏
만물을 감당하면서 다치지 않는다.能勝物而不傷
3.현상
명예추구하면 재앙초래,모략을 좋아하면 세상을 어지럽히고, 일의 책임자가 되면 욕심을 부리게 되고 지혜를 추구하면 위태롭다.
지인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無己 자기를 기준으로 상대를 깎아 내리거나 왜곡하지 않는다.
자신도 다치지 않고 상대도 다치지 않는 인간세의 온전한 삶처럼 自全而全人
4.교훈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거울처럼, 보내지도 맞이하지도 않는 사람이 무위의 상태에서 나도 온전하고 상대도 온전한 삶을 살자.
7.나의 친절이 이웃을 죽일 수 있다(무위의 치는 감관/심관 작용과 관련)
1.등장인물: 남해의 숙儵, 북해의 홀忽, 중앙의 혼돈混沌
2.내용: 혼돈대지심선(混沌待之甚善)
모보혼돈지덕(謀報混沌之德)
인개유칠규이시청식식-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
칠일이혼돈사-七日而混沌死
3.현상: 숙과 홀은 유위, 인위, 문명, 질서
혼돈은 무위, 자연(선악, 시비, 피아가 없음),무질서의 상태
4.교훈: 다른 삶을 사는 존재에 대한 이해
<조애족의 삶>외부문명의 접촉-질병-치료-자기 세계 상실
<논어> 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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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子貢)이 남쪽 초나라를 거쳐 진나라로 돌아오다가 채소밭에서 물을 주고 있는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땅 속으로 굴을 파고 그 물을 항아리로 퍼다가 밭작물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 힘들고 일도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를 지켜 본 자공이 하루에 백 이랑에 물을 줄 수 있는, 힘을 적게 들이고 그 효과는 큰 기계가 있는데 그걸 사용하면 아주 편할 것이라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일하던 노인이 얼굴을 들어 어떤 기계인지 묻자, 자공은 물을 퍼 올리는 두레박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노인이 말했다.
"내가 기계 같은 것을 갖게 되면 반드시 기계로 인해 꾀를 부리게 된다오. 기계에 사로잡혀 꾀를 부리는 마음이 생겨나고, 그런 욕심이 마음속에 있게 되면 순수하고 결백한 마음이 없어져 신묘한 본성이 불안하게 되지요. 신묘한 본성이 불안정하면 도(道)가 깃들이지 않는다오. 내가 두레박을 몰라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쓰지 않는 것이오."
망연해진 자공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돌아와 공자에게 물었다." 이 노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혼돈의 도를 터득한 사람이다."
나의 텃밭가꾸기와 비슷하다. 비료를 쓰지 않고 농약을 치지 않고 그러나 결과는 아무런 수확이 없다.
편리성에 익숙한 우리는 기계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효율적이고 편리한 기계일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건강한 삶과 지구환경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어야지 기계의 노예가 되어 오히려 그 반대로 되지 않도록 심사숙고해야 한다.<천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