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경궁(昌慶宮)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었다.
창경궁의 역사는 성종 13년(1482) 창덕궁의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비전의 세 어른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폐허처럼 남아 있던 수강궁 수리를 명하면서 시작된다. 이때의 확장공사는 성종 15년(1484)에 명정전·문정전·통명전 등 주요 전각을 완공하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되었으며, 그에 즈음하여 이름도 창경궁으로 새로 지었다. 이듬해 보완공사를 거쳐 궁궐다운 규모를 갖추게 된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기능을 일정 부분 보완하는 궁궐로서 자리잡게 된다. 즉, 창경궁은 궁궐로서 독립적인 규모를 갖추기는 했으나 당시에 왕이 기거하면서 정사를 보는 궁궐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 뒤 창경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도성 안의 모든 궁궐이 불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궁궐 복구가 시작되어 1615년(광해군 7)에 광해군이 중건된 창덕궁으로 임어하면서 바로 다음해에 이웃해 있던 창경궁 중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창경궁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과 함께 또다시 소실되었다. 그후 인조는 경덕궁(경희궁)에서 9년간 머물다가 완전히 복구도 되지 않은 창덕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인조 11년(1633) 창경궁을 수리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광해군 때 인왕산 밑에 지어놓은 인경궁의 전각을 헐어 옮겨 지었기 때문에 짧은 시일 안에 손쉽게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와 수리가 이어지다가 순조 30년(1830) 다시 한번 큰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경춘전·함인정·빈양문·숭문당 등 많은 전각이 재가 되었다. 창경궁의 복구는 순조 33년(1833)에 이루어지는데 이때의 공사는 정조 14년(1790)에 소실되었던 통명전을 비롯해 환경전·경춘전·숭문당·함인정·양화당·영춘헌·오행각 등을 중건하는 것으로, 이듬해 마무리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내전의 전각은 대부분 이때 세워진 것들이다.
창건 이래 끊임없는 소실과 복원을 거듭하면서도 궁궐로서의 격과 위상을 지켜왔던 창경궁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훼손된 것은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부터이다. 순종은 즉위하자 거처를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 일을 계기로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그해부터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융희 3년(1909)에 개원하였다.
그리고 내친김에 1911년에는 궁궐의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어 궁궐이 갖는 왕권과 왕실의 상징성을 격하시켰다. 또한 중궁전인 통명전 북쪽 언덕, 즉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이 있던 터에 일본풍의 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며1), 1912년에는 지금의 율곡로 개설을 시작하여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시켜놓았다. 일반인에게 개방된 창경궁은 해방 후 1970년대까지 줄곧 서울의 대표적 유원지로 이용되었다. 그 유명한 창경원 벚꽃놀이 한번 못해본 사람은 낭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는 공사는 1984년부터 시작되었다. 창경원에 있던 동물원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일본인이 고의적으로 심어놓았던 벚나무도 뽑아내었다. 1986년에는 명정전 회랑과 문정전 등 일부 전각을 복원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시대 왕실의 도서를 관리하던 장서각의 이름으로 남아 있던 자경전터의 박물관은 그 기능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넘겨준 뒤 1992년 헐리고 지금은 녹지가 되었다.
현재 창경궁에는 정문 영역의 홍화문과 옥천교가 있고, 외전 영역으로는 동쪽의 명정문과 서쪽의 빈양문을 경계로 명정전·문정전·숭문당이 있으며, 내전 영역으로는 함인정·경춘전·환경전·통명전·양화당·영춘헌·집복헌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창덕궁에 속한 부용지 일대까지 아우르던 후원 영역에는 춘당지와 관덕정, 그리고 일제 때 세워진 식물원이 남아 있다.
오늘은 제20대 대통령 이취임식이 있는 날이라 입장료가 무료다.
●홍화문(弘化門)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弘化)는‘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건물이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라는 기록화에 그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춘당지(春塘池)
이 연못은 춘당지라 부르는 연못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렇지만 이 두 연못이 전부 춘당지는 아니었다. 아래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로 국왕이 궁궐 안에서 직접 농사짓는 의식을 행했던 곳이었다. 1909년에 일본인들이 이곳에 연못을 만들었고, 1986년에 우리 전통양식에 가깝게 재조성한 것이다. 위쪽의 작은 연못이 원래의 춘당지로, 백련지/백련담 등으로 부른 기록도 있다.
●백송(白松)
소나무 종류 중 하나로 하얀 껍질이 특징이다. 어릴 때는 초록색이 들어간 푸른빛이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흰 얼룩 무늬가 많아진다. 원래 고향은 중국 베이징 부근이며, 조선시대 사신으로 간 관리들이 귀국할 때 솔방울을 가져다 심은 것이 여기 저기 퍼졌다. 재동 백송(헌법재판소 내), 서울 조계사 백송, 고양 송포 백송, 예산 용궁리 백송,신대리 백송등이 문화재(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온실(大溫室) (등록문화재)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었다. 일본인이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하여 완성하였으며,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層石塔) (보물)
춘당지를 따라 왼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팔각칠층석탑이 보인다.
이 탑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라마식 탑으로 중국 명나라(1470년)때 만들어졌다는 글귀가 탑신에 들어있다. 기단은 사각형의 지대석과 팔각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영춘헌은 ‘봄을 맞는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순조 30)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재건되었다. 집복헌은 1735년(영조 11) 1월에 사도세자, 1790년(정조 14)에 6월 순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춘헌은 정조가 즉위 후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자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이다. 정조는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 하였다.
●양화당(養和堂)
통명전 옆의 양화당은 ‘조화로움을 기른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이후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은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간병을 받다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화재로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통명전(通明殿) (보물)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통달하여 밝다’라는 뜻이며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통명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
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되고, 희빈 장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나가게 된다.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1757년(영조 33)에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여 열천(冽泉)이라 하였다. 통명전 서쪽의 연지는 샘이 마당으로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1485년(성종 16)만들었다.
●경춘전(景春殿)
경춘전의 경춘(景春)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이다. 1484년(성종 15) 창건 당시에 건립된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다.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다.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하였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환경전(歡慶殿)
환경전의 환경(歡慶)은 ‘기쁘고 경사스럽다‘라는 뜻으로 창경궁의 내전(內殿) 건물 중 하나로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성종 때(1484년)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가, 1830년(순조 30)에 화재를 당한 후 1834년(순조 34)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는데, 빈전은 왕 또는 왕족의 시신이 들어 있는 재궁(관)을 모신 건물을 말한다.
●함인정(涵仁亭)
함인정의 함인(涵仁)은 ‘인을 간직한다’라는 뜻이며 함인정 자리에는 1484년(성종 15) 인양전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후, 함인정은 1633년(인조 11)에 건립되었고, 1830년(순조 30)에 불타 없어졌다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되었다.
함인정은 국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영조가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19세기 궁궐기록화인 <동궐도> 에는 지금과 달리 삼면이 막혀 있다.
함인정 내부의 사면에는 사계절을 노래한 중국 진나라 화가 고개지의 사시(四時)라는 시가 걸려있어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정자에 운치를 더해준다.
●숭문당(崇文堂)
숭문당은 글자 그대로 문(文)을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왕의 경연(經筵)을 벌이던 곳으로,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했다.
숭문당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으며, 순조 때(1830년) 화재로 불탄 것을 그 해 가을에 재건하였다.
숭문당 현판과 내부에 걸려있는 일감재자(日監在玆)라는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일감재자는『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빈양문(賓陽門)
명정전 뒤쪽에는 빈양문이 있는데, 이 문은 국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이다.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밝음인 양은 국왕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문을 지나면 왕의 사적 생활공간으로 통하기 때문에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지금의 빈양문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던 것을 1984년 발굴을 통해 1986년 중건 공사 때 재건한 것이다.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문정(文政)이란 ‘문교(文敎)로서 정치를 편다‘라는 뜻이다. 국왕이 관리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 다시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정전은 왕실 가족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고,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뒤주는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 안뜰로 옮겨졌고,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명정전(明政殿) (국보)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으로, 명정(明政)이란 ‘정사를 밝힌다’라는 뜻이다.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다.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영조 35)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또는 가례(嘉禮))가 치러지기도 했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廷)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정전 마당 양옆에 늘어선 돌들은 품계석이라 하는데, 행사 때 문무백관들이 품계석에 새겨진 각자의 품계에 맞춰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신, 좌측에는 문신이 선다. 또한 삼도 가운데 중앙에 있는 어도는 국왕이 이동하는 길이었다.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있는 경사진 돌을 답도라 하는데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갔다.
명정전 건물 내부에는 국왕이 앉았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있다. 해와 달은 국왕과 왕비 또는 양과 음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의 산은 전국의 오악 또는 오행을 상징하여, 국왕과 왕비가 전국토를 잘 다스림을 뜻한다고 한다.
명정전 앞 양 옆에는 ‘드므’라 불리는 큰 청동그릇이 있다. 드므에는 물을 가득 담아두어 화재예방의 의미가 있지만, 화마가 불을 지르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품계석
조선시대 문무백관의 벼슬 높고 낮음에 따라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등급으로 품계를 나누었다. 그 품계에 따라 돌에다 품계를 새겼으며 그것을 궁궐의 정전(正殿) 앞 마당에 품계의 순서에 따라 나열하였다. 나라의 조회나 하례, 국왕탄신 등 중요한 행사시에 문무백관이 정렬할 때 자신의 벼슬 품계석 앞에 정렬하였다. 정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동쪽인 오른쪽에는 문관(文官), 왼쪽에는 서쪽인 무관(武官)이 정렬하였다.
●명정문(明政門) 및 행각(行閣) (보물)
명정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옥천교(玉川橋) (보물)
1484년(성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하여 옥천교라 하였다.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다리 양쪽 아래에 아치(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