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영화 “영웅” 관련.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 당시 하얼빈역 찻집: 안중근이 이 찻집에서 이토가 오기를 기다렸다.
▲ 현, 하얼빈 역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은 열한 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를 조직하여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할 것을 맹세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대장대신과 회담하기 위해 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이토의 포살을 계획하였다. 안중근은 이토가 한국에 와서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한국인을 기만하고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이토를 제거하는 것만이 비탄에 빠진 한국을 구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한국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 이라고 생각했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유동하(劉東夏),조도선(曹道先)과 함께 이토의 제거를 모의하고,10월 24일 하얼빈 역으로 갔다. 그들은 이토의 도착 지 역 인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에 저격 지점을 설정하였다.
이토가 채가구 역에서 기차를 갈아탈 경우에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를 저격하기로 하였다. 만약 그것이 실패하면 종착지인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기로 하였다. 10월26일 오전 7시경,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9시 15분, 안중근은 역 구내의 찻집에서 이토가 탄 열차를 기다렸다. 9시쯤 이토가 탄 특별 열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고 군악대의 소리가 들렸다. 이토와 러시아 대장대신이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졌다. 9시 30분쯤 회담을 마치고 하차하여 러시아군을 사열한 뒤 환영객들과 인사를 나누려는 순간, 러시아 의장대도열, 뒤쪽에 있던 안중근은 이토 향해 권총을 쏘아 명중시켰다. 이토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러시아 당국의 조사를 받고 나서 그날 오후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 인계되었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령이었으나 러시아당국은 안중근을 일본 측에 넘겼다.
안중근은 일본 검찰관에게 이토의 포살 이유를 15가지로 지적하였다. 즉 명성황후의 시해, 고종의 폐위,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한국 침탈 등을 이토의 죄라고 하였다. 11월 3일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유동하 등과 같이 여순 형무소로 이송된 후 열한 번의 신문(訊問)을 받았다.
1910년 2월 7일 관동 도독부 지방 법원장 마나베의 심리 아래 첫 공판이 시작 되었는데,일제는 정당한 권리인 변호권마저 박탈하여 국내외 변호사들을 불허 하고,일본인 관선 변호인만을 허용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포살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대한 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 전쟁 중에 수행한 정당한 행위로, 이토의 포살은 한국 독립 전쟁의 일부이고, 동양의 평화를 위한 행동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포로가 되었다고 밝히면서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공판은 2월 14일까지 6회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결국 2월 14일에 열린 제6차 공판에서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 에게는 각 각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쯤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하였다.
안중근이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인 안정근(安定根,치 릴로, 1885〜 1949) 과 안공근(安恭根,요한,1889〜?)이 옥바라지를 했다. 그리고 빌렘 신부가 3월8일부터 11일까지 안중근을 면회하고 그에게 성사를 주었다.
안중근은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자서전인《안응칠역사)〉를 집필했다. 그리고《동양평화론》의 저술에도 착수하였지만 끝맺지는 못했다. 그는 예수 수난일(성금요일)인 3월 25일에 자신의 사형이 집행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안중근은3월 26일에 순국하였다. 일제는 유해를 가족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여순 감옥의 죄수묘지에 매장 하였는데,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안중근의 애국 애족 정신은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드러난다.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날 그는 동포들에게,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해서, 내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목숨을 바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사람, 그가 바로 안중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