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교회의 거룩성
381년에 제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의하면 “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 신조에 의하면 교회는 거룩하다. 우리가 지금도 매 주일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조에도 교회는 거룩하다고 언급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신학자의 교회론 속에 교회는 거룩하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정말로 거룩한가에 있다. 교회의 역사가 죄로 물들어 있는데 어떻게 거룩한 교회일 수 있는가? 수많은 종교재판과 종교전쟁으로 무고한 피를 흘린 교회가 어떻게 외람스럽게 거룩하다는 말을 쓸 수 있는가? 오늘의 교회를 보아도 교회의 부패한 모습이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교인도 거룩하지 않고 교회도 거룩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러나 이와 같은 수많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거룩하다고 신학자들은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 왜 교회가 거룩한 것일까? 교회를 거룩하다고 규정하는 첫 번째 이유는 교회의 현실적인 도덕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의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라고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를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고 있다. 고린도 교회가 도덕적으로 정말로 거룩한 무리인가? 그렇지 않았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분열해서 싸우고 있던 교회였다. 그뿐만 아니라 성적으로도 상당히 타락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를 거룩한 무리라고 부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선택되고 부름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원래 거룩이라는 단어의 성서적 의미는 ‘구별되었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구별했을 때 그 대상이 되는 사물에 거룩이라는 형용사가 붙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 거룩한 도시, 거룩한 산, 거룩한 성전, 거룩한 제사장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제사장이 거룩한 일차적 이유는 그들의 도덕적 거룩성에 있지 않았고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만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라는 성스러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데 있었다.
고린도 교회를 거룩한 무리라고 사도 바울이 부른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 사업을 위해 특별히 선택되어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신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기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모든 직분(목사, 장로, 집사, 권사 등)은 성직이다.
교회는 거룩하다고 규정하는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규정되어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진 무리이다.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속죄와 칭의가 그 중심에 들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결과 속량을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고전1:30). “여러분은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고전6:11).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그러나 거룩한 성도들의 공동체는 사실상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고 있는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거룩성에 대한 오만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오히려 거룩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기도해야 한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가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통해 한 형제 된 공동체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의 오만을 버리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통해, 곧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
교회는 왜 거룩한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무리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 때문에 교회는 도덕적 부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교회라고 불린다. 동시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무리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 이 두 개의 관점은 교회의 거룩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그런데 위의 두 관점은 교회의 도덕적 부패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주어져 있는 객관적인 거룩성의 요소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교회라고 할 때 교회의 현실적 도덕 수준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 앞에 도달해 있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가는 공동체이다. 교회의 거룩성을 언급할 때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만 언급하면 아직 부족하다. 교회의 영인 성령이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에 의해 인도받고 있다(롬8:14). 교회 안에는 거룩하게 만드는 은총이 존재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기자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벧전1:2)라는 매우 중요한 말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의 능력이 죄에 빠져 있는 교회를 성화시키고 있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 성화 되고 있다. 물론 교회의 역사 속에 부패와 죄악의 역사가 무시할 수 없이 존재한 것이 사실이기는 해도 전체로서의 교회의 역사는 세상의 빛이었다. 세계가 미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인권이 신장되고 자유와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증진에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죄악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변화시켜서 거룩한 일을 하도록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 때문이다.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참회하게 하고 거룩한 일을 행하도록 만든다. 교회의 참회는 교회의 거룩성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1945년 10월 19일 독일 교회가 선언한 슈투트가르트 참회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 독재에 용기 있게 저항하지 못함을 회개하는 선언으로 지난날의 죄 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독일 교회의 새로운 결단의 표지였다. 이 참회 선언 속에서 독일 교회의 성화의 표지를 읽을 수 있다. 이 참회 선언은 아직도 한반도와 중국의 강제 점령과 비인간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일본이 뉘우침도 없이 자신들의 역사를 정당화시키는 행위와 큰 대조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거룩성을 언급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관점은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이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교부 칼 바르트는 교회의 거룩성의 핵심은 교회가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반사하는 데 있다고 정의했다. 교회는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반사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훈과 말씀과 복음을 들을 수 있는가? 광장에서 들을 수 있는가 아니면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들을 수 있는가? 거룩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서를 통해, 그리고 교회의 설교를 통해 전달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영광 속에 싸여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주를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다. 모든 전도인은 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말씀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누구나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는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의 인격을 반사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을 직접적으로 나누어 맡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12. 교회의 보편성
교회는 만민의 교회이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라는 말은 교회는 계급, 인종, 지역의 차이가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교회를 찾을 수 있고 누구나 교회에서 기도할 수 있고 누구나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다.
주후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우리는 보편적 교회를 믿는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에서 보편적이라는 말의 뜻은 만민의 교회라는 뜻이다. 로마 가톨릭은 이 신조를 “우리는 가톨릭교회를 믿는다”로 번역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고 있다. 이 신조에서 가톨릭이라는 말의 의미는 로마 천주교를 뜻하는 말이 아니고 보편적 교회, 즉 만민의 교회를 믿는다는 뜻이다. 사도신조에서도 “거룩한 공교회”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때의 거룩한 공교회는 교회는 거룩한 만민의 교회라는 뜻이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이어야 하는 이유는 우선 구원의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여기에서 보면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구원에 제외되는 인종은 없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3:6).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기”(히2:9) 때문이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만민을 향한 선교의 요청 때문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이상의 성구 속에서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잘 읽을 수 있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여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교회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형제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그리스도 안에서는 지위, 인종, 지역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만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것이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라는 것은 사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오랫동안 내려오는 선민사상 때문에 이방인들을 한 형제로 인정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이 개나 돼지같이 취급했던 이방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버리고 한 형제로 같이 일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주인에게 있어서 노예는 물품 목록에 들어갈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인과 노예가 한 형제가 되고 같은 목적을 위해 일하는 동역자로 손잡고 일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이 만민의 교회 정신은 초대교회 상황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정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이 정신을 실천했다.
그러나 2천 년 기독교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인권이 세계에서 가장 앞선다는 미국에서도 20세기 중엽까지 흑인교회가 있었고 백인교회가 있었다. 흑인은 백인의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교회가 이러했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의 흑백차별은 심각했고 학교도 흑인학교 백인학교가 있었다. 이를 철폐하기 위한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노력은 가히 눈물겨운 것이었다.
나치 시대 때 히틀러는 독일에서 민족교회 운동을 일으키면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외국인을 독일 교회의 예배에서 몰아냈다. 독일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1940년대 초 독일이 폴란드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 민족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하면서 감사예배를 드렸다. 폴란드와 프랑스의 그리스도인들은 나치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무고하게 죽어 가는데 감사예배가 도대체 무엇인가! 교회는 세계의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정신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만민의 교회 정신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정신으로 세계 평화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하는 정신이다.
13. 교회의 사도성
주후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의하면 “우리는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도적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날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이견은 교회의 사도성에 대한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사도적 교회란 사도권의 계승자인 로마 교황에 의해 합법적으로 임명받은 주교가 다스리는 교회이다. 따라서 개신교는 합법적인 사도적 교회가 아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권한을 사도 베드로에게 위임했고 사도 베드로는 그의 권한을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위임했다. 교황은 베드로의 위임받은 사도권을 각 지역의 주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 교황에 의해 합법적으로 임명받은 주교가 다스리는 교회 속에만 사도적 교회는 존재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고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대리자이다. 이를 일컬어 베드로 수위권, 교황 수위권이라 칭한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분은 어떤 인간이 아니고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오순절에 강림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리고 이 성령을 통한 교회의 다스림은 베드로라는 한 명의 사도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바울, 요한 등 모든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면 요한도 바울도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계승하는 대리자일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베드로 수위권을 위해 마태복음 16장 16~19절을 인용한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했을 때의 반석은 베드로 개인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요 반석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으로 계승하신 분은 인간 베드로가 아니고 성령이시다. 베드로 수위권은 불가능하다. 베드로 수위권이 타당하다면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서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꾸짖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러한 꾸짖음이 과연 가능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베드로를 동역자로 생각했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결정적 권한을 가진 사도로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모든 사도가 성령을 통해 동일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베드로 수위권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교황 수위권은 더더욱 불가능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의 주교가 베드로의 권한을 이어받았다는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도 안디옥 교회도 콘스탄티노플 교회도 아무런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고 오직 로마 교회의 주교만이 천상천하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가톨릭에서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의 권한을 이어받는다고 주장하지만,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다는 것과 로마 교황 수위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죽은 장소가 중요하다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셨는데,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주교가 예수의 권한을 이어받아야 될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사도권 계승 이론은 성서적, 역사적 근거가 약한 이론이다. 로마 교회의 주교가 안디옥 교회의 주교보다,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주교보다 더 위대하지 않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도권 계승 이론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상명하복의 독재적인 교회 조직을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교황이나 주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민주적 교회는 사실상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참된 민주적 교회론은 모든 성도가 성령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고 은사를 얻고 있다는 성령론적 교회론을 만들 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분이 인간 베드로가 아니고 성령이었다는 사실은 민주적 교회론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회는 사도적 교회여야 한다. 사도적 교회란 무엇인가?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에 의해 통치되는 교회가 사도적 교회가 아니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통치하는 교회가 사도적 교회이다.
사도적 교회란 사도들의 정신이 통치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사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더 이상 사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지도자인 사도들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사라졌지만, 사도들이 전한 복음, 교훈, 말씀은 남아 있다. 따라서 사도들이 남긴 복음, 교훈,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는 사도들에게 순종하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사도적 교회란 교황의 통치 밑에 있는 교회가 아니고 사도들에게 순종하는 교회인데 곧 사도들이 남긴 말씀인 성서에 순종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사도적 교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터전은 사도들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 교회 안에는 사도들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한다. 사도들의 정신이 교회 안에 살아 있을 때 교회는 참된 의미에서 사도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바로 이 사도성이 교회 됨의 유일한 표지이다.
사도적 교회란 교회의 유일한 권위가 사도들의 말씀이라는 것과 동일하다. 교회 안에는 사도들의 말씀 이상의 권위는 없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정신 밑에 있는 교회가 참된 의미에서의 사도적 교회이다. 성경을 제쳐두고 다른 인간적인 이념이나 철학이 지배하는 교회는 사도적 교회가 아니고 따라서 참 교회도 아니다. 문선명의 원리강론이 지배하는 통일교는 참 교회가 아니다. 몰몬경이 지배하는 몰몬교도 참 교회가 아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이 있는 교회는 이미 사도성을 상실하였고 참 교회도 아니다.
사도적 교회란 사도들의 정신이 지배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사도들의 정신이 교회의 표준이 되고 권위가 되는 교회는 사도적 교회이다. 그런데 사도들의 정신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면 교회는 실천적으로 사도들의 삶을 계승하는 교회가 된다. 이때 교회는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한 사도들의 고난도 계승하게 된다. 사도적 교회란 복음을 위한 사도적 고난 속에 있는 교회이다. 복음을 위한 고난이 참된 사도성의 표지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사도직의 수행은 필연적으로 박해와 고난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사도적 교회는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이다. 몰트만(J. Moltmann)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서 사도직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받은 행위로 규정하고 교회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사도적이 된다고 언급했다.
순교자들의 피는 참된 사도적 교회가 걸어왔던 발자취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직은 감옥 속에서 계승되고 있다. 교회의 사도적 계승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계승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도적 교회는 주교가 다스리는 교회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 속에 있는 것이다.
14. 교회와 국가
교회는 국가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교회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정치적 책임의 첫 번째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통해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야 한다. 즉 교회는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통치를 국가 속에서 실현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교회가 직접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다.
중세 가톨릭 신학의 교부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정정치를 위한 이론을 세웠다. 이 이론은 교회가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교황이 군주 위에서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가능하게 만든 이론이었다. 교황이 직접 세계를 다스리면 하나님의 뜻이 세상의 모든 질서 속에 가장 유효하게 구현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교황의 통치를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교황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교황이나 총회장 등 성직자들은 교회를 다스릴 책임이 있다. 그러나 국가를 다스리는 문제는 성직자들의 기능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국가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경제 문제를 생각해보면, 성직자들이 복잡한 경제 문제를 얼마나 알고 있겠는가? 성직자들은 경제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를 운용하는 일은 경제 문제에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관리의 기능이다. 그가 경제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해서 이를 경제 질서 속에 구현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재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직자들이 육법전서를 다 알고 있지 못하다. 재판은 재판관의 소임이다. 성직자들은 재판관을 향하여 정의로운 재판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정의로운 재판을 하는 것은 재판관의 책임이다.
교회가 국가를 통치하는 신정정치는 잘못이다. 중세의 암흑기는 이 잘못된 신정정치와도 관련이 있다. 역으로 국가가 교회를 통치하는 것도 잘못이다. 국가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국가가 교회를 통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교분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정신을 국가를 하나님의 통치에서부터 분리하려는 이원론적 구조로 이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려야 하고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 정치 문제이든 경제 문제이든 재판에 관한 것이든 군사 문제에 관한 것이든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국가 속에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많은 경우 국가는 이교적이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속에서 국가를 변화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한다.
셋째, 교회는 국가가 잘못하고 있을 때 이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개혁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중 첫째는 비판과 감화를 통해 국가를 갱신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무시되고 국가가 명백하게 사탄의 기능을 할 때는 불가피하게 교회가 국가에 저항해야 한다. 이 저항이 개혁을 위한 교회의 또 하나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가 칼빈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에 저항권을 인정했다. 첫째는 국가나 통치자가 하나님이 받아야 할 경배를 대신 받으려고 할 때, 둘째는 통치자가 독재자가 되어 포악하고 방자하여 백성의 자유를 억압할 때이다.
넷째로 교회는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공직자를 존경해야 한다. 칼 바르트는 교회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결정적인 도움은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공직자는 그들의 본연의 의무를 바로 수행하는 한 정의와 평화의 수호자일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들을 존경하고 바르게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도록 도와야 한다.
15. 교회의 궁극적 목표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교회의 종국적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세상 역사가 마감되고 악의 통치가 끝나 눈물과 슬픔과 애곡이 없는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면 교회는 더 이상 필요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까지 잠정적으로 존재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그 목표로 한다. 교회의 목표는 단순한 교세 확장이나 제도 유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 속에 확장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세계의 모든 교회에 경고한 말을 경청해야 한다. 라너는 『교회의 미래상』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교회를 염려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교회의 자유를 도모하고 있다. 예컨대 나치 시대에 우리가 유대인의 운명보다 우리 자신을 더 염려하고 교회와 교회 제도의 존속을 더 염려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교회다운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모든 구조와 제도는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라너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했다. “교회는 비록 은근히나마 지배 세력과 제휴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교회는 정의와 자유를 위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해야 한다.” 교회는 인간을 희생시키고 정의와 자유를 외면하면서 교회 제도의 확장을 꾀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도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였다. 교회는 예수가 선언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도구로 태동한 것이다. 교회는 그 자체로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주역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가치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 건설의 가장 중요한 도구라는 데 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건설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이유는 교회만이 하나님의 뜻을 명시적으로 알고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제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영적 지식의 보고이다. 교회만이 국가를 향해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고, 교회만이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본질과 목표를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이다.
1960년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기독교인 사이에 진행된 대화의 역사가 있었다. 이 대화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많이 이해했고 기독교인들도 마르크스주의자를 많이 이해했다. 특별히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이를 발생케 한 모순을 개혁하려는 정신에 있어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영역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개혁 함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눈에는 기도는 자신의 책임을 신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인민의 아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도한다는 것은 역사의 개혁과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하나님의 혁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를 개혁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옛 질서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질서를 이 땅 위에 수립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힘만으로 가능한가? 인간의 능력으로 투쟁과 싸움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환상이었다. 역사의 참된 개혁은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역사 속에 기도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어둠 속에 싸인 역사의 희망인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청신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