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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과 고난
기독교인들은 살면서 고난을 겪게 되면 당황합니다. 불신자들이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을 볼 때 혼란을 겪는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범적으로 살다가도 갑자기 사고나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 신앙이 흔들립니다. 기독교인들이 삶에서 당하는 고난은 그들을 힘들게 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고난 앞에서 이렇게 반문합니다.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인가?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1. 일상에서 만나는 고난
기독교인들도 살면서 고난을 당합니다. 지금 복음을 위해 당하는 신자의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으로 혼란을 겪는 경우는 드뭅니다. 신앙 때문에 고초를 당할 때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이미 각오를 단단히 합니다. 신앙으로 인한 고난은 ‘주를 위한 핍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은 들어도 신앙적으로 혼란을 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일상에서 갑자기 당하는 여러 가지 사고나 질병과 같은 고난입니다.
어떤 여집사님이 암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집사님은 평생 훌륭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교회에서도 모범적이었고 다른 교인들과도 관계가 좋았습니다. 집사님의 남편과 자녀들도 성실하게 교회를 다녔습니다. 부유한 집은 아니지만 신앙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집사님은 열심히 병원에 다녔지만, 암을 완치하지 못했고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어느 날 집사님의 가정이 속한 구역에서 문병을 왔습니다. 문병을 온 교우 중의 한 분이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어서 회개하세요. 이런 병에 걸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교우의 말에 집사님 본인뿐만 아니라, 집사님의 가족 모두가 신앙적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를 당하면 신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기독교인이 고난을 겪는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인가요?” 혹은 자녀가 사고를 당하거나 아파도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삶에서 당하는 고난은 아주 다양합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불의의 사고, 경제적 고통, 가정적인 어려움 등으로 힘들어합니다. 평생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만, 물질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생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기도 합니다.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 모두 훌륭한 신앙인이지만, 자녀들이 안타까운 경우를 당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이 살면서 당하는 고난과 사고는 비기독교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통계를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사고나 질병에 걸리는 비율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즉 ‘신앙’과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신앙이 ‘세상적인 부귀나 고난의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 베드로와 바울을 위시한 신약에 나오는 사도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부귀를 누리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들 중에는 힘들게 생활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누구보다도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고, 사고를 당하고, 질병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바울도 참으로 여러 종류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로서 받은 고난 외에도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오죽하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예언자들, 사도들,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이 부족해서 삶의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반면,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해서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사고를 당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신앙이 없다고 해서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세상적인 고난이나 부귀와 직접 연관시키는 것이 무리한 일입니다. 일상에서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2. 고난은 시험으로
기독교인이 만난 고난은 곧잘 ‘시험’으로 연결됩니다. 고난을 신앙 여부와 연결시키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용어는 모호한 말이지만, 한국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말이라 그냥 사용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험’은 신앙적인 혼란에 빠진다는 의미입니다. 교인에게 닥친 고난은 자주 신앙적 혼란으로 발전합니다. 고난이 신앙적 혼란으로 발전되는 것은 ‘신앙’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합니다.
대체로 ‘신앙’에 내용이 없고, 신앙과 삶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교인들이 시험에 잘 듭니다. 먼저 한국교회의 신앙 풍토를 잠시 보겠습니다.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시험에 잘 듭니다. 정말 작은 것으로도 시험에 빠집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를 보아왔습니다. 어떤 교인은 목회자가 반갑게 인사를 안 받아줬다고 시험에 들어 교회를 안 나옵니다. 넥타이를 선물했는데 그것을 안 매고 나왔다고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동료 집사와 식사 당번 순서 때문에 얼굴을 붉히다가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평소 자신이 즐겨 앉던 자리에 다른 교인이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고 시험을 받습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도 시험을 받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애를 먹습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시험에 잘 드는 이유는 결국 ‘신앙’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신앙에 대한 열정은 강조하지만, ‘신앙의 내용’에 대한 교육은 부족합니다. 설교는 ‘믿어라!’는 결신에 대한 강조가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교인들에게 결신은 강조하지만,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내용은 빈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교인들은 설교를 듣고 신앙적으로 살려고 결단하고 응답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내용을 채워나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삶과 신앙을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신앙적으로 살고 싶지만, 실제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막막한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교인들의 삶과 신앙이 분리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신앙과 삶의 분리 속에서, 교인들은 교회에서는 신앙적으로 처신하고, 사회에서는 사회의 규례에 따라 삽니다. 이런 신앙은 활력이 없습니다. 물론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흔히 가지는 이런 신앙적 취약성은 신학적 토대가 약한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신학적 토대’라고 해서 대단한 학문적 작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에 필요한 체계적인 인식을 말합니다. 교인들은 자신의 삶과 신앙에 대해 누구나 어느 정도의 통전적인 인식을 해야 합니다. 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신앙과 삶에 대한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신학자입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된 이원화 속에 살다 보니, 일상에서 작은 어려움만 만나도 교인들은 바로 신앙적으로 혼란스러워합니다. 하물며 일상에서 겪는 사고, 질병, 경제적 어려움과 같은 고난을 당하면 어쩔 줄 모르게 됩니다. 이런 혼란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급기야는 신앙이 매우 위축되거나, 답답한 심정으로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해도, 신앙에 생긴 혼란을 해결하지 못하고 무력한 교회 생활만 반복합니다.
3. 신앙이 부적은 아니다
이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갑시다. 가장 주의해야 하는 신앙관은 신앙과 이 세상의 성공 여부를 직접 연결시키는 경우입니다. 즉 신앙이 이 세상에서 건강, 물질, 사회적 성취 등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드러내 놓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아도, 교회를 잘 다니고 신앙을 가지면 이 세상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교인이 많습니다. 신앙을 이렇게 이해하는 교인들은 고난을 당하면 더욱 당황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했는데 내가 왜 이런 사고를 당하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신앙관은 신앙을 ‘부적’(符籍)으로 보는 것과 유사합니다. 부적을 가지고 있으면 불행이 피해 간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을 소유했으니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 있는 방법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소유의 개념으로 인식됩니다. 이런 신앙을 ‘부적 신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 신앙관을 가진 교인들은 악인이 세상에서 잘 되면 무척 혼란을 겪습니다. 교회에 다니지도 않고 아주 부도덕하고 포악한 사람이 성공해서 잘 사는 경우가 주변에 흔히 있습니다. 여러분도 악한 자가 잘 사는 것을 보면 신앙적으로 혼란을 겪습니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실패가 신앙의 정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악한 세력은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라지의 비유를 보십시오(마13:24~30). 밭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때로는 가라지가 더 크게 잘 자라기도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가라지는 역사 속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모든 악은 극복될 것입니다. 그동안은 악과 어둠이 일시적으로 득세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은혜로 옵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주어집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됩니다. 신앙은 좌절에서 소망을 갖게 하고, 허무에서 생명을 보게 하고, 죽음에서 부활을 바라보게 합니다. 신앙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넘어서며, 벅찬 감동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신앙이 이 세상의 부귀나 고난의 여부에 의해 규정될 수는 없습니다.
고난은 신앙인이나 비신앙인에게 구별 없이 옵니다. 사고와 질병도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고난을 당하거나, 즐거운 일을 당하는 것은 삶이 주는 일상사입니다. 성경은 고난이나 즐거움이 교인 가운데 누구에게나 올 수 있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 물질이나 사회적인 성취도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고난이나 성공이 신앙과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적인 어떤 것으로도 신앙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4. 신앙은 고난 앞에서 빛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고난이 신앙인과 비신앙인에게 구별이 없이 온다면, 신앙인과 비신앙인은 아무 차이가 없습니까?” 고난은 누구에게나 불현듯 올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도 사고를 당하고 질병에 걸립니다. 여기에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당한 후, 어떻게 응답하는지에서 차이가 납니다.
비신앙인은 사고나 고난을 당하면 ‘자연인’으로서의 반응을 합니다. 자신의 성격이나 타고난 기질을 따라 고난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인생을 반전시켜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이기고 주변의 환호를 받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고난으로 인해 좌절하고, 삶을 불평합니다. 때로는 허무에 빠지고 주변을 원망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잃고 자신을 저주합니다. 이렇게 고난에 대해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지만, 이 모든 반응은 자연인으로서의 반응입니다.
신앙인은 고난을 만나면 자연인으로서의 반응을 넘어 ‘신앙인’으로 반응합니다. 여기에서 차이가 납니다. 신앙인 역시 인간인지라 자연인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놀라고 분노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워합니다. 신앙인도 인간적 기질에 따라 고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도 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자신의 인간적 기질을 넘어 ‘신앙’으로 고난과 마주합니다.
신앙은 구체화될 때 생명력이 있습니다. 여기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두 개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청년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단계에 있습니다. 취업을 앞두고 미래를 설계합니다. 그런데 몇 차례의 취업 실패와 앞날의 어려움이 오면 자신을 잃고 좌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마저 상실합니다. 또 어떤 청년은 이성 교제를 하다가 헤어지게 되면 몹시 힘들어합니다. 그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삶을 염세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자신을 포기하고 목숨을 끊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청년들도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면 동일한 고통을 겪습니다. 취직이 안 되면 불안하고, 사랑하는 이성과 헤어지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자연인으로서 누구나 겪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인간적인 고통입니다. 하지만 기독 청년은 고통의 상황에서 신앙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교회로 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대면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고 소리쳐 대화하십시오. 여기서 기독 청년의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동일한 고통에 처한 기독 청년의 신앙적인 반응입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삶의 의미 자체를 상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결국 신앙으로 일어설 것입니다.
신앙인은 고난이 주는 고통은 받아들이지만, 그 고통으로 인해 소망을 잃지는 않습니다. 신앙인도 큰 질병에 걸립니다. 신앙인도 질병에 걸리면 아파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고통으로 신음하지만, 그 질병으로 인해 허무의 힘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신앙인도 물질이 없어 곤궁을 겪습니다.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이 지금도 물질적인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지만, 그의 삶이 염세적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고통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14:32).
나아가 신앙인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신앙인도 고난이 주는 물리적 고통과 심적 고통을 겪지만, 그 너머에 있는 주님의 뜻을 찾습니다. 고난을 통해 오히려 깊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바울의 이 말씀은 신앙인이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고난 앞에서 신앙은 진정 빛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