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8년 임자 > 1월 21일 > 최종정보
영조 8년 임자(1732) 1월 21일(기묘) 맑음
08-01-21[13] 진수당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동지경연사 송인명 등이 입시하여 《예기》를 진강하고, 관서의 의열사에 사액을 내리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려 말에는 문식이 없고 본질이 우세하였다. 그러므로 군주는 정해진 거처가 없고 권신이 권병(權柄)을 잡았지만 찬탈하거나 반역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은 군신간의 대의는 극히 분명하고 지엄하여 범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문식이 날로 성해지고 본질이 더욱 없어지는데, 무신년(1728, 영조4)의 일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영남 명현(名賢)의 자손조차 흉역(凶逆)의 일을 달갑게 여기니 이것은 문식이 우세하여 생기는 폐해이다. 서쪽 지방에서 충신과 의사가 많이 배출되는 이유는 본질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의 문은 참으로 좋지만, ‘문이 질을 이긴다.’라는 문은 도리어 없느니만 못하다. 서북의 풍속이 이미 본질이 우세하고 문식이 없으니, 시속을 따라 다스리고 간간히 격려하는 정사가 있어야 한다. 지금 만약 거창하게 사액하여 형식을 돕는다면 뒷날의 어지러운 폐단이 삼남과 같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는가. 괜히 그 본질만 없애서 유익함이 없을 것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예(禮)이다 예이다 하지만, 옥백(玉帛)을 이르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서쪽 지방의 사람들이 구태여 사액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옛사람이 지닌 충의(忠義)의 진실한 마음으로 스스로 면려하면 그 빛나고 아름다움이 3자의 화려한 편액보다 나을 것이다. 이런 뜻으로 평안 감사 및 본읍(本邑)인 중화에 하유하라.”
하였다. 유정이 아뢰기를,
“‘사(士)에게 뇌문(誄文)이 있게 된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것에 대해, 신은 글 뜻으로 인하여 우러러 진달할 것이 있습니다. 기묘명현(己卯名賢) 선정신(先正臣) 김정국(金正國)과 그의 형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 및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는 함께 선정신 김굉필(金宏弼)을 사사(師事)하여 도덕과 문장이 실로 막상막하여서 당대에 추존(推尊)하여 유종(儒宗)으로 삼았습니다. 사후에 모두 시호를 내려 주어 나란히 제향을 받게 되었지만, 유독 김정국만은 관작이 정경(正卿)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추증(追贈)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사림들이 지금까지 개탄하고 애석해합니다. 이것은 실로 유현(儒賢)을 숭장(崇獎)하는 성대한 은전에 유감이 있는 것이니, 연석의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기묘사화 이후로 선비의 기개가 꺾여 감히 학문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김안국 형제가 후학에게 성리학 서적들을 은밀히 가르쳐 주었으니 사습(士習)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두 사람의 공입니다. 그러므로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때 이 두 사람도 종향(從享)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문묘에 종향할 대상으로 거론된 사람도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되니, 특별히 시호를 내려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묻게 한 다음 내게 물어 처리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주-D011] 대자리를 바꾼 일 : 《예기》 〈단궁 상〉에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할 때, 동자가 ‘화려하고 선명하니, 대부(大夫)가 사용하는 돗자리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증자가 듣고 두려운 기색을 띠며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동자가 재차 반복하여 말하자, 증자가 ‘바름을 얻고서 죽으면 그뿐이다.’라고 하고는 돗자리를 바꾸게 하였다. 이에 증자를 들어 올리고 돗자리를 바꾸었는데, 다시 자리에 누워 미처 안정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라는 내용을 가리킨다.
[주-D012] 이윤신(李潤身)이 …… 않습니다 : 이달 17일 정언 이윤신이 올린 상소를 가리킨다. 《承政院日記 英祖 8年 1月 17日》
[주-D013] 문질빈빈(文質彬彬)의 …… 못하다 :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질(質)이 문(文)을 이기면 촌스럽고, 문이 질을 이기면 사(史)하니, 문과 질이 적당히 배합된 뒤에야 군자(君子)이다.’라고 하였다.[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 하였다. 질은 본바탕을, 문은 아름다운 외관을, 사는 겉치레만 잘함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본질보다 문식이 우세하여 생기는 폐해를 경계하였다.
[주-D014] 경전에 …… 하였다 :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예(禮)이다 예이다 하지만, 옥백(玉帛)을 이르는 것이겠는가. 악(樂)이다 악이다 하지만, 종고(鍾鼓)를 이르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집주(集註)에 “공경하면서 옥과 비단 같은 예물로 받들면 예가 되고, 조화를 이루면서 종과 북 같은 악기로 나타내면 악이 된다. 근본을 빠뜨리고 오로지 그 말단만을 일삼으면 어찌 예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