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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부순 會員회원님께서 보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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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여 인간 https://www.youtube.com/watch?v=TlcFgP6A2Fs - 잉여인간 | 왜 잉여인간이 계속 나오는지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HNC7wRAKplE |
- [문예극장] 잉여인간 | (1979/12/07) https://www.youtube.com/watch?v=-17P8FRk2ZM |
*** 剩餘人間잉여인간, 그 어둠과 빛에 대하여 *** |
(*참조: 당신의 소중한 시간 10분을 투자하셔야 하는 글입니다)
●출처: 신동기&신서영 著 「SNS 인문학」 (M31, 2022)
시사 주간지에 칼럼을 몇 달 연재한 적이 있다. 제목을 ‘신동기의 잉여Talk’로 잡았다.
여기에서 ‘잉여’는 두 가지 의미를 의도했다. 하나는 ‘별로 쓸모가 없는’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가 간과하고 있는’이었다.
필자의 그런 칼럼 제목 의도가 독자들에게 얼마나 의도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필자는 ‘잉여’라는 말이 주는 느낌에 부정과 긍정 두 측면이 모두 있다고 보았다. 소극적으로 볼 때는 부정적, 적극적으로 볼 때는 긍정적 의미였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잉여’는 그리 익숙한 말이 아니었다. 일상에서 쓰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에서처럼 사회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한 번씩 사용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갑자기 ‘잉여’라는 말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아마 경제성장율이 5% 이하 정도로 떨어지고 학교를 졸업한 20대의 취업률이 크게 낮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인 듯하다.
물론 이때 그 ‘잉여’의 의미는 ‘잉여가치론’에서의 ‘노동자의 몫을 빼앗는’ 그런 이데올로기적 무거운 의미의 ‘잉여’가 아니었다. ‘쓰고 난 나머지’, ‘하찮은’, ‘별로 쓸모가 없는’과 같은 일상적이고도 일반적인 의미의 ‘잉여’였다.
‘잉여’는 카톡에서, 친구간 대화에서 또는 인터넷 댓글에서 빈번히 등장했다. ‘잉여’라는 말 자체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그러다 보니 ‘잉여’의 파생 신조어도 등장했다. ‘잉여질’, ‘잉여롭다’와 같은 말들이다.
‘잉여질’은 한마디로 ‘뻘짓’을 말한다. 그리고 ‘잉여롭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대는 것을 말한다. 꽤 본질적이면서 어쩌면 문학적이기까지 하다. ‘잉여인간’은 이런 ‘남아도는’, ‘별로 쓸모가 없는’ 또는 ‘잉여질’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한 사회에 그런 ‘잉여 인간’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소위 ‘잉여사회’가 된다. 현실에서 ‘잉여’라는 수식어를 빈번히 필요로 하는 사회 역시 ‘잉여사회’가 된다.
‘잉여 인간’이라는 말이 활발하게 쓰이기 전, 비슷한 의미로 쓰이던 말이 ‘놈팡이’다. ‘놈팡이’라는 말의 어원으로는 본래 우리말이라는 주장이 있고, 또 독일어의 룸펜(Lumpen)에서 온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람들은 스토리가 있는 것을 좋아하고 이색적인 것에 마음이 끌린다. 룸펜은 룸펜프롤레타리아트(Lumpenproletariat)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룸펜프롤레타리아트는 ‘거의 일을 하지 않고 취업할 의사도 없으며,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구걸·범죄·매춘 등으로 그날그날 먹고 사는 부류’를 의미한다. 뒷 내용은 아니지만 앞 부분의 ‘거의 일을 하지 않고’ 내용은 어찌 되었든 ‘놈팡이’와 상통한다.
마르크스도 ‘잉여 인간’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가 쓴 용어 자체는 ‘잉여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산업예비군(Industrial Reserve Army)’이라는 말이었다.
사실 이 ‘산업예비군’이라는 말은 ‘잉여 인간’의 ‘사회적 의미’에 매우 가깝다. 아니, 사실 동일하다.
마르크스는 모든 ‘생산물’은 인간의 ‘노동력’과 ‘생산수단’이 더해져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생산수단’은 간단히 말해, ‘재료’와 ‘기계’ 두 가지를 말한다.
빵을 만든다고 가정하면, 크게 구분해 ‘밀가루’와 ‘오븐’을 말한다. 이 ‘밀가루’와 ‘오븐’, 즉 ‘재료’와 ‘기계’를 가진 사람이 자본가이고, ‘노동력’만 가진 사람이 노동자다.
자본가는 ‘밀가루’와 ‘오븐’을 갖추고 노동자를 고용해 빵을 만들어 돈을 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돈이 쌓이면 추가로 투자해 사업을 키운다.
이때 자본가는 ‘밀가루’와 ‘오븐’ 즉, ‘생산수단’에 더 투자하려 할까 아니면 ‘고용’을 늘리는데 더 투자하려 할까? 답은 ‘생산수단’이다. 시간이 가면서 기술은 발전한다. 과거보다 더 적은 금액으로 훨씬 성능이 좋은 오븐을 마련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더 적은 비용으로 훨씬 더 품질이 좋은 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고도로 자동화된 공장들이다. 과거 100명의 노동자가 하던 일을 이제 한두명의 노동자로 가능하다. 기계로 자동화했기 때문이다.
기업 매출은 2배, 100배로 늘어나는데 고용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줄어들기까지 한다. 이런 현상은 그 회사 소유주가 인정이 있느냐 없느냐, 사람을 우선시하느냐 그렇지않느냐와 아무 관계가 없다.
기술발전이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이고, 자신만 자동화를 하지 않고 굳이 사람의 손으로 상품을 만들겠다는 것은 회사 문을 닫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이 발전하면 일자리가 줄어든다. 물론 이때 새로운 산업이 등장하면 기존 산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이 새로운 산업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의식주와 문화 욕구를 충족시키는 상품의 종류와 품질이 어느 정도 포화 또는 한계 상황에 이르면 그때부터 새로운 산업의 등장은 둔화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산업이 창출하는 일자리가 기존 산업에서 밀려 나오는 실업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마르크스는 기술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 실업자들을 ‘산업예비군’이라 불렀다.
그리고 기업이 기술발전과 함께 ‘사람 고용’보다 ‘생산수단’ 즉, ‘설비 자동화’에 투자를 늘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Organic Composition of Capital)의 고도화’라 불렀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한마디로 ‘상품’은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유기적인 결합에 의해 생산되는데, 시간이 갈수록 기술발전과 함께 ‘생산수단’의 비중은 높아지고 ‘노동력’의 비중은 낮아진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산업예비군’인 ‘실업자’ 즉, ‘잉여인간’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마르크스가 150년 전에 간파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필연적인 법칙이다.
정치인들이 기업 경영자들에게 매출은 전년 대비 몇% 늘었는데 왜 고용은 그대로냐며 다그치는 모습을 가끔 본다.
자본주의 경제의 필연적인 법칙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를 알면서도 그렇게 묻는다면 그것은 가증스런 정치적 제스쳐이고, 모르고서 묻는다면 사회 규칙을 만들거나 그 규칙을 운영하는 子路자로서의 자격상실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 ‘잉여인간’의 필연적 등장을 자신이 자부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한 최초의 학자다.
‘인터넷 댓글이나 일상 대화에서 쓰이는 의미’의 ‘잉여인간’의 전형을 우리는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만난다. 이 1인칭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주인공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나는 내가 행복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날그날을 그저 까닭 없이 펀둥펀둥 게을르고만 있으면 만사는 그만이었던 것이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처져 있는 것이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낮잠을 잔다. 한 번도 걷은 일이 없는 내 이부자리는 내 몸뚱이의 일부분처럼 내게는 참 반갑다’,
‘사실 나는 인간 세상이 너무나 심심해서 못 견디겠던 차다. 모든 일이 성가시고 귀찮았으나 그러나 불의의 재난이라는 것은 즐겁다’,
‘나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한번 펴보고 아내 베개를 내려 비고 벌떡 자빠져서는 이렇게도 편안하고 즐거운 세월을 하느님께 흠씬 자랑하여 주고 싶었다. 나는 참 세상의 아무것과도 교섭을 가지지 않는다. 하느님도 아마 나를 칭찬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것 같다’라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드러낸다. ‘잉여인간’으로서 달관의 경지다.
잉여인간의 모토인 ‘잉여롭게 그리고 쓸데없게’에 거의 완벽하게 부합한다.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 타산을 콧등으로 비웃을 정도의 높은 정신세계,
이부자리가 옷도 아닌 몸의 일부가 되는 신공의 경지,
불의의 재난이 오히려 놀이로 전화(轉化)되는 달관의 자세가 인간 아닌 신과의 교섭을 꿈꾸는 입신의 단계를 보여준다.
잉여인간의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더욱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의 높고 깊은 정신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剩餘人間잉여인간’하면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孔子공자다. 우리는 孔子공자 하면 ‘孔子공자 말씀’을 남긴, 범인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정신세계의 성인으로만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孔子공자 역시 실존의 인간이었다.
孔子공자는 ‘나라에 도가 서 있으면 벼슬에 나가고, 나라에 도가 서 있지 않으면 벼슬에서 물러나 가슴 속에 뜻을 품을 뿐이다’(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卷而懷之)라고 말했다.
그러나 孔子공자라고 해서 항상 이 거룩한 말씀 그대로 산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하루 제자 子貢자공이 孔子공자에게 물었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습니다. 이것을 장롱 깊이 넣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고 파시겠습니까?’(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求善賈而沽諸).
孔子공자가 대답했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지금 좋은 값에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沽之哉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대답했다. 하루빨리 취직되길 기다리는 지금 취준생들의 심정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어느 날 반란을 일으켜 費邑비읍 땅을 차지한 公山弗擾공산불요라는 인물이 孔子공자를 초빙했다. 제자 子路자로가 옳지 못한 자의 초빙에 응하려는 스승 孔子공자의 태도가 못마땅해 물었다. ‘아무리 가실 곳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어찌 公山氏공산씨에게 가시려 합니까?’(末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孔子공자가 대답했다. ‘그가 어찌 나를 아무 일 없이 불렀겠느냐. 나를 고용해 주는 자가 있다면 내 기꺼이 가, 周公旦주공단이 만든 周주나라와 같은 나라를 만들 것이다’(夫召我者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라고 대답한다.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는 孔子공자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다.
또 한번은 佛肹불힐이라는 자가 孔子공자를 불렀다. 이 자 역시 반란을 일으킨 옳지 않은 자였다. 子路자로가 왜 이런 자의 초빙에 응하려 하느냐며 또 딴지를 걸었다.
孔子공자가 대답했다. ‘그렇다. 이런 말이 있다. 참으로 단단한 것은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참으로 흰 것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然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라고 말하면서, ‘내가 어찌 조롱박처럼 줄기에 매달린 채 아무 쓰임 없이 그대로 버려져야 한단 말이냐’(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라고 대답한다.
자신은 특별해서 보통 사람들처럼 문제 있는 사람을 모신다고 해서 함께 휩쓸리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 자신한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이런 초빙이 있을 때마다 딴지를 거는 子路자로에게 ‘그럼 나는 이대로 힘들게 살다 그냥 죽으란 말이냐?’라는 뉘앙스의 불만을 터뜨린다. 孔子공자도 인간이다. 감정이 없을 수 없다.
어느 날 孔子공자는 ‘군자는 자신의 무능을 탓할 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속상해 하지 않는다’(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라고 말하고, 이어 ‘군자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疾沒世而名不稱焉)라고 말한다.
앞에서는, 군자는 사람들의 평가에 무심해야 한다 말하고, 뒤에서는, 그렇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는 것은 곤란하다 말하고 있다. 앞말은 군자 스타일인데 뒷말은 소인배 스타일이다. 孔子공자도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이었다.
孔子공자는 퇴락한 귀족 집안 출신으로 72년 생애를 살았다. 귀족 출신이니 직접 농사에 나설 수는 없었고, 퇴락한 집안이니 가진 것이 없었다. 거기에 하필 장수(長壽)까지 했다. 삶이 녹녹했을 리가 없다.
72년 생애 중 孔子공자가 직장생활, 즉 벼슬을 한 기간은 기록에 의하면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20대 때 창고관리 담당인 위리(委吏)와 가축관리 담당인 승전리(乘田吏)를 지냈고, 51세부터 56세까지 읍장격인 중도재(中都宰), 건설국장인 사공(司空), 법무장관인 대사구(大司寇)를 지냈다.
그리고 56세 때 대사구를 퇴직한 뒤 孔子공자는 이곳저곳 제후들을 찾아 나선다. 유람이 아닌 재취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68세에 결국 재취업을 포기한 孔子공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이때부터 제자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잇는다. 수업료는 어포 10마리 정도로 보잘 것 없었다.
孔子공자가 ‘孔子공자 말씀’을 하다가도 태도가 바뀌곤 하는 것은 바로 이 생계 때문이었다.
광이라는 곳에서 도적떼를 만나자 자신은 하늘로부터 인간의 교화(文)라는 대업을 부여받은 몸이어서 도적들이 자신을 해칠래야 해칠 수가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孔子공자였지만, 제자에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莫我知也夫),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일 것이다’(知我者其天乎)라고 말할 정도로 고독한 존재가 바로 孔子공자였다.
孔子공자는 그의 삶 중 상당 기간 사실 ‘잉여인간’이었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는 하늘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고독했고, 이상은 하늘만큼이나 높았지만 현실에서 그를 위한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재취업을 위해 노구를 이끌고 12년을 헤맸지만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그 상황이 잉여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을 잉여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孔子공자는 ‘잉여인간’이었다.
‘잉여인간’은 사실 아직 사회학적으로 정의된 용어가 아니다. ‘남아도는’, 사회적으로 밀려나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을 이르는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을 ‘별로 쓸모가 없는’ 존재로 인식해 자조하는 이들을 이르는 말인지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잉여인간은 마르크스의 ‘산업예비군’처럼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아직 직장을 잡지 못한 이들을 의미할 수도 있고, 소설 「날개」에서의 주인공처럼 한없는 무기력에 빠진 이를 의미할 수도 있고, 孔子공자처럼 높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로 기본적으로 사회와 코드가 맞지 않은 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따져보면, 이 세상에 직장을 구하기 위해 한번이라도 고민해보지 않은 이 없고, 수십년의 삶 중 어느 한때 무력감에 빠져보지 않은 이 없고, 자신이 품은 뜻을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한탄해보지 않은 이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존을 위해 직장을 고민하고, 삶의 의미 찾기에 열중하다 무력감의 나락에 빠지고, 발은 진흙밭을 딛고 있으면서도 눈은 별빛을 향한다.
인간 아닌 동물은 직장 고민할 일이 없고, 삶의 의미를 추구할 사유 자체가 없고, 발만 진흙밭을 향한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도 진흙밭을 향한다.
잉여에는 ‘별로 쓸모가 없는’ 측면과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가 간과하고 있는’ 가능성 또는 기회라는 측면의 두 얼굴이 있다.
미취업 상태는 취업을 하려 해도 취업을 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지만 동시에 모든 진로에 대한 가능성도 함께 있다. 취업이 아닌 자영업을 선택할 수도 있고, 같은 취업을 하더라도 급여나 안정성이 아닌 보람, 삶의 질 또는 몇 년 후 자신이 독립해 자기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등으로 직장 선택의 기준을 바꿀 수 있다.
무기력한 상황 마찬가지다. 정신없이 일에 쫓기는 대부분의 직장인은 365일 중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잠시도 갖지 못한다.
인생은 대체로 냉탕 아니면 열탕이다. 온탕이 없다. 자의든 타의든 시간이 넘치는 때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다.
도저히 더 이상 참기 어려울 정도로 무기력해 봤다 싶으면 이제 몸을 세워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마주하는 것도 괜찮다. 스스로를 북돋아야 한다.
삶은 살아내는 것이지 그냥 저절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인간은 처음부터 모순적 존재이자 위대한 존재다. 모순적 존재인 것은 동물적 속성인 육체에다 신적 속성인 이성을 붙여놓았기 때문이고, 위대한 존재인 것은 그런 동물적 속성도 가진 불완전한 존재가 끊임없이 신적 영역을 넘보며 완전을 꿈꾸기 때문이다.
동물에게는 현실만 있을 뿐 이상이라는 것이 없다. 신에게는 처음부터 완전한 이상 세계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동물은 오로지 현실에 적응할 뿐이고, 신은 더 이상 추구하고 노력할 여지가 없어 그냥 그대로 무료하게 멈춰있을 뿐이다.
곧, 동물과 신은 둘 다 위대해질 기회 자체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위대해질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 없는 자, 그는 동물이거나 신이거나 혹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존재일 뿐이다.
‘잉여’. ‘긍정의 잉여’에는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가 간과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다. ‘가능성’과 ‘기회’의 씨앗이다.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는 가능성,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 위대해질 수 있는 가능성.
이상처럼, 孔子공자처럼 그리고 기어코 삶을 살아낸 지금까지의 이 땅 수 많은 사람들처럼.
●출처: 신동기&신서영 著 「SNS 인문학」(M31, 2022) p9-22
* 今齋금재 朴壽鳳박수봉 會員회원님께서 보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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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노년에 대한 글"🟪
😃 老人노인과 어른...!! |
- 老人노인: 많으면 사회가 병약해 지지만, 어른: 많으면 윤택해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패하는 음식이 있고, 발효하는 음식이 있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老人노인이 되는 사람과 어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 老人노인: 나이를 날려버린 사람이지만, 어른: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해지는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머리만 커진 사람이고, 어른: 마음이 커진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지만, 어른: 어린 사람에게도 배우려 합니다.
- 老人노인: 아직도 채우려 하지만, 어른: 비우고 나눠 줍니다.
- 老人노인: 나이가 들수록 자기만 알지만, 어른: 이웃을 배려합니다.
- 老人노인: 나를 밟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지만, 어른: 나를 밟고 올라서라 합니다.
- 老人노인: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만, 어른: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겉모습이 늙어가는 것을 슬퍼하지만, 어른: 속사람이 충만해지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늙으면서 어르신이 되어라!!
- 老人노인: 늙은 사람이고. 어르신: 존경 받는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몸과 마음, 세월이 가니 자연히 늙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어르신: 자신을 가꾸고 스스로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어르신: 상대에게 이해와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상대를 자기 기준에 맞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고, 어르신: 좋은 덕담을 해 주고, 긍정적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상대에게 간섭하고 잘난 체하며,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이고, 어르신: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고, 알아도 모른 체 겸손하며, 느긋하게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대가없이 받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르신: 상대에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고독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고, 어르신: 주변에 좋은 친구를 두고, 활발한 모습을 가진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이제 배울 것이 없어 자기가 최고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고, 어르신: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자기가 사용했던 물건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어르신: 그 물건들을 재활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 老人노인: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그 댓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황혼에도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괴테는 노년에 관한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老人노인의 삶은 喪失상실의 삶이다.
* 사람은 늙어가면서 다음 5가지를 喪失상실하게 된다. |
"건강, 돈, 일, 친구, 꿈" |
살아있는 자면 누구나 맞이하게 될 노년이 되어가면서 괴테의 말을 음미하며,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황혼도 豐饒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未完成미완성입니다.
* 素玄堂소현당 姜貞淑강정숙 畫伯화백님께서 보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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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인생 高手고수와 下手하수 |
高手고수에게는 인생이 놀이터이고, 下手하수에게는 인생이 전쟁터이다.
高手고수는 나날이 축제이지만 下手하수는 나날이 숙제이다.
高手고수는 인생을 운전하지만 下手하수는 인생에 끌려다닌다.
高手고수는 일을 바로 실천하지만 下手하수는 일을 말로만 한다.
高手고수는 화를 내지 않지만 下手하수는 화를 툭하면 낸다.
高手고수는 사람들과 웃고 살지만 下手하수는 사람들과 찡그리며 산다.
高手고수는 남에게 밥을 잘 사지만 下手하수는 남에게 밥을 얻어먹는다.
高手고수는 만날수록 사람이 좋은데 下手하수는 만날수록 더욱 진상이다.
高手고수는 손해보며 살지만 下手하수는 절대로 손해보지 않는다.
高手고수는 뭘해줄까를 생각하지만 下手하수는 뭘해달라고 강요한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시간 되시고 걱정없는 날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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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륜(年輪)과 경륜(經輪) http://m.blog.daum.net/jokh1125/15864046?category=277531 |
* 淸溪청계 全敏鎣전민형 會員회원님께서 보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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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泉소천 鄭鐘圭정종규 會員회원님께서 보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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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호 會員회원님께서 보내 주셨습니다.
***** (202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