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8년 임자 > 1월 21일 > 최종정보
영조 8년 임자(1732) 1월 21일(기묘) 맑음
08-01-21[13] 진수당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동지경연사 송인명 등이 입시하여 《예기》를 진강하고, 관서의 의열사에 사액을 내리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종백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서쪽으로 내려갔을 때 관서(關西)의 일을 목격하고 삼가 근심스럽고 개탄스러운 점이 있어서 돌아오자마자 한번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그저께와 어제 연이어 입시하였는데 신하들이 연석에서 여쭈어 정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아뢸 겨를이 없어서 지금에서야 우러러 진달합니다. 관서의 풍속이 삼남과 달라 백성의 습속이 우매하여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섬기는 의리를 모르니, 관방(關防)이 되는 중요한 지역의 풍속이 경박하고 나쁜 것은 참으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송인명이 전에 감사로 있을 적에 오로지 풍속을 바로잡고 교화를 돈독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서관충효록(西關忠孝錄)》을 지어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절의를 기리고 표창하는 일이라면 모두 거행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중화(中和)의 의사(義士) 임중량(林仲樑) 등 10여 인이 임진왜란 때 대의를 떨치고 일어나 적을 토벌하여 충절이 혁혁하게 빛났습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본읍(本邑)에 사당을 세워 혼령을 안치하고 의열(義烈)이라는 편액을 걸었습니다. 그 우뚝한 사적이 해가 오래된 뒤에 인멸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므로 송인명이 또 그 사당에 비석을 세워 그 일을 칭송하였습니다. 이어 또 덕의(德意)를 선포하여 서쪽 백성을 인도하니, 이 뒤로 서쪽 지방 사람들이 비로소 충절이 귀중한 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많은 선비가
의열사(義烈祠)에 사액(賜額)해 주시기를 청하여 서쪽 지방을 더 빛내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 풍성(風聲)을 세워 주는 도로 볼 때 윤허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서로(西路)는 삼남과 다릅니다. 삼남은 형식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신이 일찍이 영읍(嶺邑)의 수령과 호서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항상 문식을 억제하고 본질을 장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는 이와 다르기 때문에 신이 전날 변방을 안무(按撫)할 때 오로지 덕의를 선포하고 풍교(風敎)를 숭상하여 권장하는 것을 힘써야 할 일로 삼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서북의 무력을 믿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무력이 비록 강하더라도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섬기는 의리를 모르면 그 이른바 무력이라는 것이 나의 소유가 아니어서 도리어 해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남방은 변란이 생겨도 평정하기 쉬웠지만 서북은 변란이 생기면 평정하기 어려웠으니, 삼남 지방의 사람은 나약하여 용기가 없고 서북 지방의 사람은 굳세어 힘이 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항상 ‘무신년(1728, 영조4)의 역변(逆變)이 다행히 서로가 아니라 삼남에서 일어났는데, 만약 서로에서 일어났다면 갑자기 섬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종전에 우리나라에서 변란이 서로에서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하여 난리를 막을 일이 서로에 많았습니다. 임진년(1592, 선조25), 정묘년(1627, 인조5), 갑자년(1624), 병자년(1636)의 난리 때 모두 서쪽 지방 사람들의 힘을 빌렸기에 표창하여 장려할 만한 충신과 의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백과 수령 된 자는 음악과 여색에 유련(流連)할 뿐이요, 그 가운데 조금 우수한 자도 돈과 포(布)를 많이 모으는 것을 능사로 삼는 데 지나지 않으니, 큰 근본에 관계되는 부분에 유념하여 격려하고 발휘하는 정사가 있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서쪽 지방의 충신과 의사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습속이 날로 더욱 퇴폐해져서 업으로 삼는 것은 단지 거간꾼이 이익을 꾀하는 일일 뿐이어서 우매하고 심한 경우 부모와 형제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니 매우 해괴하여 자못 동방예의지향(東方禮儀之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이 일찍이 이 점을 개탄하여 《경민편(警民編)》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또 《충효록(忠孝錄)》을 편집하여 한 도(道)를 효유(曉諭)하고 중화의 의열사에도 비석을 세운 일이 있습니다. 유신이 아뢴 것은 이 일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사원(祠院)에 사액하는 일은 삼남과 차이가 있으니, 사액하는 일은 비록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하더라도 만약 즉시 명령을 내려 격려하는 성상의 뜻을 보이시면 필시 풍성을 세우는 데 일조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려 말에는 문식이 없고 본질이 우세하였다. 그러므로 군주는 정해진 거처가 없고 권신이 권병(權柄)을 잡았지만 찬탈하거나 반역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은 군신간의 대의는 극히 분명하고 지엄하여 범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문식이 날로 성해지고 본질이 더욱 없어지는데, 무신년(1728, 영조4)의 일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영남 명현(名賢)의 자손조차 흉역(凶逆)의 일을 달갑게 여기니 이것은 문식이 우세하여 생기는 폐해이다. 서쪽 지방에서 충신과 의사가 많이 배출되는 이유는 본질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의 문은 참으로 좋지만, ‘문이 질을 이긴다.’라는 문은 도리어 없느니만 못하다. 서북의 풍속이 이미 본질이 우세하고 문식이 없으니, 시속을 따라 다스리고 간간히 격려하는 정사가 있어야 한다. 지금 만약 거창하게 사액하여 형식을 돕는다면 뒷날의 어지러운 폐단이 삼남과 같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는가. 괜히 그 본질만 없애서 유익함이 없을 것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예(禮)이다 예이다 하지만, 옥백(玉帛)을 이르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서쪽 지방의 사람들이 구태여 사액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옛사람이 지닌 충의(忠義)의 진실한 마음으로 스스로 면려하면 그 빛나고 아름다움이 3자의 화려한 편액보다 나을 것이다. 이런 뜻으로 평안 감사 및 본읍(本邑)인 중화에 하유하라.”
하였다. 유정이 아뢰기를,
“‘사(士)에게 뇌문(誄文)이 있게 된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것에 대해, 신은 글 뜻으로 인하여 우러러 진달할 것이 있습니다. 기묘명현(己卯名賢) 선정신(先正臣) 김정국(金正國)과 그의 형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 및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는 함께 선정신 김굉필(金宏弼)을 사사(師事)하여 도덕과 문장이 실로 막상막하여서 당대에 추존(推尊)하여 유종(儒宗)으로 삼았습니다. 사후에 모두 시호를 내려 주어 나란히 제향을 받게 되었지만, 유독 김정국만은 관작이 정경(正卿)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추증(追贈)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사림들이 지금까지 개탄하고 애석해합니다. 이것은 실로 유현(儒賢)을 숭장(崇獎)하는 성대한 은전에 유감이 있는 것이니, 연석의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기묘사화 이후로 선비의 기개가 꺾여 감히 학문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김안국 형제가 후학에게 성리학 서적들을 은밀히 가르쳐 주었으니 사습(士習)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두 사람의 공입니다. 그러므로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때 이 두 사람도 종향(從享)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문묘에 종향할 대상으로 거론된 사람도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되니, 특별히 시호를 내려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묻게 한 다음 내게 물어 처리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