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8월 24일(목) 시편 4:1-8 찬송 487장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개역 개정)
- 고난의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의 용기와 기쁨 -
본시는 3편과 마찬기지로 압살롬 반역사건(삼하15:1-18:15)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기록된 다윗의 비탄시이다.
그러나 동일한 비탄시이긴 하지만 3편이 고난 중에
다윗이 하나님께 대해 가졌던 진취적 신앙을 강하게 부각시켰던 시라면
본시는 여호와 신앙으로 대적자들에 대해 책망하는 믿음의 용기와
고난 중에도 남다르게 평안을 누린 다윗의 신앙의 기쁨이 강하게 표출된 시이다.
또 3편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다윗의 감격을 노래한 ‘아침 찬송시’인데 반해
본시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자만이
두려운 밤조차 평안히 맞이할 수 있음을 노래한 ‘저녁 찬송시’로서(4, 8절)
후대 사람들이 저녁 예배시에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본시의 서두 부분인 1절은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근거로 현재의 고난을 극복케 해달라는 간구의 내용이다.
중반부 2-5절은 대적자들에 대한 경고와 회개 촉구를 통하여
다윗 자신의 믿음의 용기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내용이다.
후반부 6-8절은 대적자들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함으로
다윗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진정한 심령의 평안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본시에서 고난 중에도 조금의 위축됨이나 굴복함이 없이
여호와 신앙으로 담대하게 대적자들을 향해
호령하는 넘치는 신앙인의 기개를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신앙 때문에,
고난으로 남들이 모두 좌절하고 슬퍼하는(6절) 중에도
기쁨과 평안을 노래하는 다윗의 모습 속에서(8절)
장차 썩어 없어질 이 땅의 것들 때문에 시름 잊을 날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고 어리석게만 느껴진다.
그런즉 이 땅을 살아가는 중에서
특히 그 어떤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변치 않는 기쁨과 평안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구원과 각양 좋은 것을 소망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약1:17)
4절)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이 구절은 해석하기가 난해한 구절이다. 말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으나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다윗은 자기 권고의 대상을 ‘너희’라고 하였는데
4절이 3절을 그대로 받는 것이라면 ‘너희’는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5절의 권고는 도무지 대적들을 향한 권고라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떨다’로 번역된 말은 본래 ‘분노하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는 말은
‘너희는 분노함으로 범죄하지 말라’로 번역해야 옳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서 ‘너희’는 다윗과 함께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적절하다.
왜냐하면 지금 분노하는 것은 대적들이 아니라
대적들에게 쫓기는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엡4:26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성도들에게
오래 분노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는데 이 역시 본 구절이 대적들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을 향한 권고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여 준다.
6절에 보면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은 지금 너무도 억울하고
기막힌 상황에 처하여 불평 불만을 쏟아내며 분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다윗이 분노하는 것을 범죄에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분노함으로 범죄치 말라는 것은
분노가 범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물론 분노하는 것이 곧 범죄는 아니다.
사람은 감정을 소유한 존재이다.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불의한 일을 보면 분노할 수 있다.
때문에 성경도 분노하는 것 자체를 죄로 보지 않는다.
분을 그치라고 하였지 분노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속히 분노하지 말라고 하였지 분노가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바울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하였지 분노하면 안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분노하시는 분으로 나온다.
예수님도 때로 분노하셨다.
장사꾼들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매우 크게 분노하셨다.
이것은 분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문제는 분노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분노하는 것과 분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다르다.
분노의 지배를 받게 되면 바로 죄로 연결된다.
분노의 지배를 받게 되면 바로 악한 말을 하게 되고 불평하며 원망하게 된다.
그리고 심하면 그 분노를 풀기 위하여 그룻된 일을 행하게 된다.
복수를 하고자 덤비다가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바울이 엡4:26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한 후에 한 말이 무엇인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7)는 것이다.
분노의 지배를 받게 되면 마귀가 틈을 타게 된다.
그리고 마귀가 틈을 타게 되면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는 하여도 죄를 짓지 않도록 분노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 .
이와 관련하여 다윗은 다른 시에서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37:8) 했다.
다윗의 권고나 바울의 권고처럼
적어도 그날이 지나 잠자리에 들기까지는 분노를 버려야 한다.
분노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평안을 누릴 수 없다.
분노를 품으면 그것이 독이 되어 자기를 해치고 다른 사람을 해친다.
그런즉 분노에 지배를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윗은 5절에서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의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아무리 억울하게 하고
공격을 가해도 의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롬12:1에서 ‘거룩한 산 제사’를 말하였는데
다윗이 말하는 ‘의의 제사’ 또한 같은 맥락의 말이다.
이러한 산 제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섭리를 믿고 의지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은 친히 보복하여 원수를 갚아주실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한다면 분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의가 불의에 의해 공격을 받는 곳이다.
그래서 너무도 억울한 일이 많다. 분노할 일이 많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분노의 지배를 벗어나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전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