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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대립국면과 일본, 그리고 한반도 상황
남기정 교수(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전쟁-정전-냉전의 한반도 국제체제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2010년대 이후 한반도의 ‘전쟁-정전-냉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의 GDP가 일본을 능가하여 미중 경쟁이 개시되고, 중일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후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북한의 핵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하면서 전쟁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실천적 과제로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정밀한 해명이 필요해졌다.
한편 2017년 전쟁의 위기를 넘긴 이후로는 한반도 수준에서 평화프로세스가 전개되는 가운데, 동북아 수준에서는 한일관계가 저강도 복합 갈등의 국면으로 접어들어 한반도 국제정치에 일본 요인이 어떠한 작용을 하고 있는지 해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남북한이 주체가 되어 성취했던 판문점선언 이후 싱가포르와 하노이를 거쳐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지체되는 과정은 한반도 냉전-정전체제의 국제적 성격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속도조절을 요구하는 일본이 한반도 냉전-정전체제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이상의 사태전개는 한반도의 정전-냉전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동북아시아적 맥락이 강조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 냉전의 배경으로 미소 갈등과 함께 중국 요인이 중시되었던 인식은 해방 직후 남한 지식인의 냉전 인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를 고려하면, 한반도 냉전에서 중국 요인의 강조는, 한반도 정전-냉전 인식에서 미소 갈등의 요인이 전면화되는 시기 잠복되었던 이러한 이해가 2010년 이후의 정세 변화를 배경으로 다시 전면화하고 있다.
이삼성(2018)은 한반도 분단체제를 규명하는 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삼성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일본과 나머지 아시아의 분단’ 식의 논리로 오해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고유성에 대한 고민 속에서 냉전/탈냉전이라는 일반적 도식으로 포착할 수 없는 ‘통시적 연속성’의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것은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 제국체제 하, 중국 경영을 위한 미일 연합의 역사를 배경으로, 중국 내전이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결정했으며, 1949년 가을 대분단체제의 원형이 구성되었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 결과 전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대분단의 기축’인 미일 연합과 중국 사이의 긴장의 구조와 ‘소분단=민족분단’ 체제로서 한반도 휴전선과 대만해협 인도차이나의 분단선이 중층적으로 구조화되었으며, 두 개의 분단이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유지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1)
그러나 중국 내전이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결정했다고 한다면, 그 기원은 내전이 개시된 1945년으로 소급되어야 하며, 이는 유럽 냉전보다 이른 것으로, 유럽과 다른 기원을 갖는 전후 체제가 1945년 이후 형성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이후의 동북아시아 정전체제
종래 ‘직접적인 군사충돌을 회피하면서 전개된 미소 대립’으로 이해했던 ‘냉전’을 ‘글로벌한 수준에서 총력전의 양상으로 전개된 진영 간 대결’로 재정의한다면, 여기에는 ‘열전’, ‘정전’, ‘휴전’, ‘냉전’이 모두 포함되며, 이북한 대결은 비유럽사회에서,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보다 일찍 시작되어 보다 늦게까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 세계적 ‘진영 간 대립’의 중심은 동북아시아였으며, 유럽은 주변이었다. 냉전의 중심-주변이 전복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로벌한 냉전에서 중일대결은 미소대결 만큼 중요한 요소였으며, 유럽에서 냉전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주변에서 먼저 변화가 일어난다는 세계사의 일반 법칙이 관철되는 현상이었다.
동북아시아 냉전이 정전의 형태로 지속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지속과 격화가 중일대결이라는 전선의 존재와 충돌에서 비롯되고 있다. 동북아시아 정전체제를 탄생시킨 한국전쟁은 글로벌한 수준에서는 종종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한다. ‘잊혀진 전쟁’ 안에서 일본은 ‘숨겨진 존재(the hidden existence)’이다. 한국전쟁 종식을 논의하는 가운데 일본의 존재가 여간해서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의 ‘참전’은 중국의 ‘참전’ 만큼이나 매우 복잡한 문제를 던져준다. 한국전쟁의 숨은 그림으로서 일본의 ‘참전’과 중일대결은 숨기고 싶은 것이기도 하면서 드러내고 싶은 것, 잊고 싶은 것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아무 것도 아닌 것이면서도 결정적인 것으로서 복잡계(complex systems)의 현실을 구성한다.
따라서 한국전쟁에서 수행한 일본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는 정전체제를 종식시킬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전후 일본의 전개에서 한국전쟁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는 전후 일본을 총괄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전쟁 정전체제 극복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한국전쟁에서 수행한 일본의 역할과 존재를 무시하고 있고, 전후 일본의 총결산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한국전쟁이 일본의 전후사에 미친 영향을 무시하고 있다. 양쪽이 모두 역사적 사실에 눈을 감은 채 문제 해결에 이르는 관건을 애써 무시하고,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다.
2019년의 한일‘경제’전쟁은 그 귀결이었고, 이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중단을 가져왔다. 이후 일본에서 전후 총결산 움직임은 안보3문서의 채택이라는 ‘전후의 부정’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일본의 전후 총결산을, 일본의 전후 총결산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상호규정하는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도 일본의 전후 총결산도 개별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으며, 동북아시아에 대립과 갈등의 질서를 극복하여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전쟁을 종식시키는 과정에서 복잡계의 현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유엔사 문제도 그 중 하나이다. 종전선언 또는 평화협정과 유엔사령부의 관계와 관련한 핵심 쟁점은 다음과 같다. 유엔군사령부의 존속 해체 문제와 정전협정의 유지 종료 문제가 연관된 문제인가 별개의 문제인가라는 쟁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때, 유엔군사령부가 해체되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자동적으로 해체된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2) 여기에도 일본은 ‘복잡계’의 한 변수로 자리잡고 있다.
법리적으로는 엇갈린 해석이 가능한 상황에서 유엔사 문제의 향방은 어느 정도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따른 것이며, 이에 조응한 정치적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위한 관계국에 일본이 포함되는가 여부가 새로운 질문으로 부상할 수 있다.
한반도 정전체제의 내성과 일본
판문점 선언이 발표된 2018년 4월 27일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가 정전체제 해체에 가장 근접한 날이며,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확실하게 평화에 대한 희망을 품은 날이다. 판문점 선언 발표 직후 실시된 여러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 평가는 70%를 넘어섰고, 특히 판문점 선언에 대해서는 보수층을 포함해 80% 이상의 국민들이 지지했다. 주변국들도 기본적으로 판문점 선언을 환영했다. 전년도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면서 국민들의 위기감과 피로도가 극에 달했던 점, 그리고 전쟁 재발이 한반도 주변 어느 나라에도 남의 일이 아닌 구조가 그 배경이었다. 당시 동북아 지도자들은 어떻게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그 생각이 가장 희박했던 것은 일본의 아베 총리였다. 아베 총리는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발적 충돌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2017년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2018년 시작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아베 총리의 태도는 냉담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심지어 부정적이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동북아 휴전체제에 '기지국가'로 편입되어 있는 전후 일본의 현실이 그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종식되고 그 휴전상태에서 성립된 동북아 휴전체제가 해체되면, 한국전쟁에 '기지국가'로 편입된 일본의 존재도 의미가 없어지고 그 역할도 종식된다. 예를 들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속에서 논란이 되었던 조선유엔군 후방사령부 문제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일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아베 총리와 일본 정부는 '탈기지국가'의 모습을 상상하고 전환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은 동북아 휴전체제 유지에 '기지국가'로서의 생존을 걸고 있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경위
2018년 '평양의 봄'으로 시작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오랜 전사가 있다. 한반도에서 평화 구축의 시도가 시작된 것은 1988년이었다. 이 해는 서울올림픽-패럴림픽이 열리는 해였는데, 가을 대회 개최를 앞둔 7월 7일 노태우 정부가 내놓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은 한반도의 휴전과 냉전의 동시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발표된 날의 이름을 따서 7.7 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총 6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전반부 3개 항목은 한반도 평화공존과 관계 발전을, 후반부 3개 항목은 남북한과 주변국과의 상호인정을 시도하는 것을 내세웠다. 전반부는 휴전 해체를, 후반부는 냉전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여기서 탄생한 한반도 정전체제-동북아 냉전체제의 동시 해체 움직임을 1차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1988년 시작된 1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1992년까지 이어졌고, 1992년 2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남북관계가 진전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는 한국과 소련이, 1992년에는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었고, 1990년 말에는 북일 간에도 국교정상화를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제기된 핵문제를 의제로 삼고 납치 일본인 문제의 해명을 요구하면서 1992년 11월에 협상은 결렬되었다. 북미 간에는 협상을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북한은 일본과 미국 모두와도 국교를 정상화하지 못했고, 이후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적대적 관계가 구조화되었다. 이는 중국과 소련이라는 후방을 잃고 고립된 북한으로서는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마침 사회주의 진영의 물물교환이 무너지면서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기 시작한 북한으로서는 핵과 미사일이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1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북일 협상의 결렬로 막을 내렸다. 거기서부터 북한 핵 문제가 발생했다.
1988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흐름은 전년도인 1987년 한국 민주화 혁명으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한국 외교가 처음으로 평화구축을 본격적인 과제로 다루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1987년 민주화 혁명이 한반도 휴전체제를 확정하고 그 유지를 위해 권위주의 체제를 용인한 한일 '1965년 체제'에 대한 이의제기였기 때문이다.
한일 '1965년 체제'는 역사청산과 안보의 교환관계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요한 저음'으로 작용하는 한일관계의 기본 구조이다. 그 배후에는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치르는 한국과 후방기지인 일본을 결합시키려는 미국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그래서 '1965년 체제' 하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확정된 동아시아 냉전에 한반도의 휴전체제가 연동되게 되었다. 한반도의 분단과 대립은 상시화되어 주기적으로 전쟁 직전의 위기가 조성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권위주의 체제가 경직되었다. 광주의 시민항쟁은 이 체제에 대한 이의제기였다. 국가 폭력 앞에 한동안 잠잠해졌지만, 1980년대를 통해 저항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1987년 민주화 혁명을 맞이할 수 있었다.
민주화로 열린 정치 공간에서 평화 구축의 목표가 처음으로 한국 외교의 본격적인 과제로 떠올랐다. 광주민주항쟁 과정에서 독재와 분단 극복이라는 이중적 과제가 제기되면서 1987년 민주화의 열기는 통일의 열망으로 분출되었고, 1988년 7.7선언으로 촉발된 '북방정책'에 따라 한반도 휴전체제 해체의 시도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대체로 세 차례에 걸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노력이 전개되었다. 이와 동시에 진행된 것이 한일 역사화해이다. 독재와 분단을 지탱하고 식민지배에 의한 역사문제 극복 노력을 가로막고 있던 '1965년 체제'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그 극복이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1988년 7.7선언으로 남북의 화해협력과 주변국과의 교차승인이 동시에 진행된 1992년까지가 한반도 휴전체제 해체를 위한 첫 번째 시도였다. 그러나 북미 간 협상의 장이 열리지 않았고, 북일 협상이 결렬되면서 이 시도는 좌절되었고,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어 한반도 정전체제 해체가 재개되었으나, 그 프롤로그는 1998년 한일정상회담이었고, 2002년 북일정상회담은 에필로그였다. 이때의 한일공동선언은 한일 역사 화해의 정점이며, 그것이 일조공동선언으로 이어졌다.
일련의 정상회담과 각종 선언은 한반도 휴전체제 해체가 남북 간 화해협력과 한반도-일본 간 화해협력의 이중과제 수행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2018년 2월 평창에서 시작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세 번째 시도였지만, 이것이 북미 협상으로 전개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한일관계
평창에서의 해빙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을 수락하면서 탄력을 받았고, 판문점 선언을 거쳐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이 문제였다. 한국에서 진보정권이 탄생한 반면, 아베 정부의 역사인식이 후퇴하면서 한일 역사화해 프로세스가 정체된 것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뒤늦게 뛰어든 일본 정부는 그해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에 '국제법 위반' 카드를 꺼내들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나아가는 문재인 정부를 견제했다. 2019년 6월 30일 문재인-김정은-트럼프의 판문점 회동이 성사되자, 다음 날인 7월 1일 일본 정부 가 반도체 관련 핵심부품 수출규제를 발표했는데, 이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국제법 위반' 카드가 사용된 사례다. 이후 한일 관계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둘러싼 한일의 상호 불신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이미 양국 정부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어 놓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창올림픽 개막식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2월 9일 개막식을 앞둔 7일 도쿄에서 펜스 부통령과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북한의 '미소 외교'에 눈치채지 말라는 아베 총리의 반응은 냉담했다. 북한에 '최대의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아베 총리는 평창에서 고조되고 있던 화해 무드를 견제했다. 평창 한일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가 올림픽 종료 후 한미군사훈련 재개를 요구하고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내정간섭'이라고 일침을 가한 것은 이후 한일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북한에 대한 '최대 압박'의 지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아베 총리와 올림픽을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이라고 여겼던 문재인 대통령의 균열이 확인된 순간이다.
이러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일본 측의 의구심은 이미 2017년 9월에 발간된 정책제언서 '미일동맹의 재구축'에서 드러난 바 있다. 이 제언서에서 필자들은 일본의 대(對)한국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첫째, 문재인 정부에 2015년 합의의 이행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이를 위해 한일관계가 냉각되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과도하게 북한과 화해에 나설 경우 미국과 함께 일본이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결론이었다. 2017년 말부터 2018년 초까지의 상황은 이 정책제언서를 실행에 옮기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판문점 회담이 실현되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본격화되는 가운데,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조언을 통해 아베 총리는 북미관계 진전의 페이스메이커가 되려고 했다. 한편, 그해 10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한국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이를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한국 정부에 시정을 요구하면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로 향하는 문재인 정부의 행보를 견제했다. 이러한 아베 정권의 행동은 식민지 지배 극복의 과제와 한반도 평화 구축의 과제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제라는 사실을 거꾸로 입증하고 있었다.
신판문점 체제 구축의 주역은 기본적으로 한국과 북한에 미중 양국이었다. 한국전쟁을 치른 주요 국가들이다. 그러나 역사의 과정을 보면 여기에 러시아와 일본이 가세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은 김일성의 한국전쟁을 승인하고 지도한 국가이며, 이를 계승한 러시아는 한국전쟁을 종식시킬 책임이 있다. 푸틴 대통령은 북-미 간 전쟁이 임박한 분위기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을 촉구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는 2018년 봄에 한반도를 방문한 숨은 주역이었다. 한편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후방기지로서 한국전쟁을 치르는 미국을 지원했다. 미국의 공식 전사에 기록되어 있듯이 일본은 '후방지원의 요새'였고, 미국은 일본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일본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독립했지만, 그것은 전쟁에 연결된 미군기지를 안고 독립한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한반도 휴전체제에 단단히 편입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 그 실체와 의미를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역할이 주어지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필연적인 일이다.
모기장 밖에서 본 아베 외교
그러나 일본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2018년 3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말한 것은 아베 총리에게 충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평창에서의 남북화해 무드를 관망하던 아베 총리는 드디어 이에 대항하려 했다. 종전선언을 목표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의 '평화외교'에 대해 한반도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는 일본 정부의 전방위적인 '대결외교'가 시작된 것이다.
아베 총리는 3월 9일 오전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통해 CVID를 향한 '최대한의 압박'을 지속할 것을 강조하고 납치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으며, 4월 말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16일에는 직접 미국을 방문해 '최대한의 압박을 지속할 것'을 강조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확인을 받아 김정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납치 문제를 제기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볼턴은 일본의 대(對)백악관 외교에서 창구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일본의 대미 외교는 일본 정부와 호흡을 맞춘 볼턴의 회고록에 잘 묘사되어 있다.
볼턴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이 가져다주는 황홀감에 사로잡혀 방황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를 '현실에 가깝게 묶어주는 무거운 열쇠와 같은 존재'로 아베 총리를 평가하기도 했다. 볼턴은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은 한국의 작품이며'외교적 춤'을 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4월 12일 볼턴은 한국의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만나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의제를 피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자신의 신념이자 미일 양국의 조정된 입장이기도 했다. 같은 날 오전, 볼턴은 야나이 쇼타로 국가안전보장국장을 만나 일본의 입장을 확인했다. 볼턴에 따르면 일본은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분주했다고 한다. 일본은 한국과 '180도'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볼턴의 입장과 '거의 같았다'고 평가했다. 야누치는 납치 일본인 문제도 언급했다. 이후 납북 일본인 문제는 미북 정상회담의 또 다른 의제가 됐고, 4월 12일 볼턴과 야나이의 회담은 "모든 것이 뒤집어지길 바랐던" 볼턴과 일본이 마음을 합친 순간이었다.
4월 17일 미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아베 총리는 ICBM뿐만 아니라 중거리 미사일, 생화학무기 제거도 미북 간 의제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의 방중에 대한 의견을 묻자 아베 총리는 미국의 압박과 국제 제재가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 자리에서 아베 총리는 미국의 시리아 공격이 북한에 강한 신호를 보냈다고 강조했다. 볼턴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고 싶어하며, 아베 총리가 "그렇게 자주"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려고 한 것은 북한 문제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아베 총리는 미북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납치 문제를 언급할 것을 요구했다.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직후에도 아베 총리는 4월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약 30분간 정상회담을 가졌다. 아베 총리는 제2차 내각 이후 정력적으로 추진해 온 '지구를 조망하는 외교'를 통해 북한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국제적으로 설득하고 있었다. 아베 총리는 4월 29일부터 5월 3일까지 중동을 순방하며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정상들을 상대로 북핵-미사일 CVID, 납치 문제의 조기 해결을 위한 일본의 입장을 설명하고 지지를 확인했다.
5월 4일, 정 안보실장은 볼턴을 세 번째로 만나 판문점 회담에 대해 설명했다. 같은 날 오후, 야나이도 볼턴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논의했다. 다니우치는 서울에서 전해지는 환희에 대항하려 했다. 5월 26일 제4차 남북정상회담(2차 문 대통령과 김정은 회담)이 열리자 아베 총리는 28일 다시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갖고 북미정상회담 전에 일미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방침을 확인했고, 6월 7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에 지나치게 양보하지 말 것을 재차 요구했다.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과 북미 공동성명 발표로 아베 총리의 '대결 외교'는 궁지에 몰렸다. 북미정상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아베 총리는 납치 문제의 조기 해결을 위해 아베 총리가 직접 북한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밝혔다.
2018년 10월과 11월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되는 가운데 한국의 외교력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이면에는 일본 외교도 하노이로 향하고 있었는데, 2019년 2월 27일 하노이 회담을 앞두고 아베 총리는 2월 20일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미북 외교 일정이 하노이로 향하는 도중에도 아베 총리는 볼턴 등 강경파를 지원했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노딜을 이룬 직후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회담을 갖고 트럼프 대통령의 노딜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서울이 하노이 노딜의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미일 양 정상은 납치, 핵-미사일 문제 등 전통적 의제 해결을 위해 미일 간 더욱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 이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동력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일동맹의 벽에 가로막힌 결과를 낳았다. 볼턴은 2019년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의 장광설'을 중간에 잘라낸 것을 좋게 평가했다. 이때 이미 미국에게 중요한 문제는 한반도 정세가 아니라 한일 관계였다. 북한 문제를 언급한 후 트럼프는 한일관계로 화제를 돌렸다. 이를 회고하는 볼턴의 서술에서 미국 정책결정자의 한일관계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볼턴은 문재인 대통령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뒤집으려 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일본의 관점에서 이 조약의 목적을 설명하며,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된 적대감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평화외교'는 일본이 워싱턴을 무대로 추진하는 '대결외교'에 밀렸다. 윤석열 정권이 등장해 한일관계 회복과 한-미-일 안보협력을 추진하는 것은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한국의 정권교체와 휴전체제 강화
제3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하노이 노딜 이후 흐름을 되돌리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문재인 정부를 지탱했던 더불어민주당의 발목을 잡았고,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후보가 박빙의 승리를 거두며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윤 후보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문 정권의 남북화해정책과 대일외교를 철저하게 추궁했고, 취임 후에는 문 정권이 추진한 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애니싱 배트 문(Anything but Moon)' 노선을 채택했다. 북한과의 대화와 관여를 중시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종전선언'에 '거짓 평화'를 요구한 것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통한 압박만이 '진정한 평화'를 보장한다는 압박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 전환은 먼저 국방안보 분야에서 시작됐다.2022년 7월 한국 국방부는 문재인 정부에서 축소 조정 및 폐지된 연합훈련의 부활 방침을 보고하고 한미연합훈련의 '정상화'에 돌입했다.2022년 9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실시된 대규모 한미연합전술훈련은 4년 10개월 만에 재개됐다. 같은 달 30일에는 한ㆍ미ㆍ일이 동해 공해상에서 연합 대잠수함 훈련을 실시했는데, 2017년 4월 제주 남쪽 한ㆍ미ㆍ일 중간수역에서 한ㆍ미ㆍ일 대잠수함전 훈련을 실시한 이후 5년 만의 일이다. 민감한 시기에 북한은 연이은 미사일 시험발사로 응수했다. 이는 과거에 없던 일이다. 한미연합훈련에 미사일 시험발사로 응수하는 것은 우발적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북한이라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북한이 2022년 10월 4일 드디어 일본 상공에 화성-12형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이것도 2017년 9월 이후 정확히 5년 만의 일이다. 미국과 일본-필리핀이 10월 3일부터 실시하고 있는 해상훈련에 한국 해병대가 사상 처음으로 참가하는 것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다. 복원되고 강화되는 한-미-일 안보협력에 북한도 이례적인 무력시위로 대응했다. 윤석열 정권 들어 한미, 한미일 연합훈련이 과거보다 대규모로 부활하는 가운데, 북한이 연일 발사하는 각종 탄도미사일이 지역의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 들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과정에서 중단되거나 축소된 연례 한미연합훈련인 키리졸브, 독수리,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등이 부활했다. 또한 림팩에 역대 최대 규모의 훈련단이 참가했고, 이와 연계해 실시되는 '퍼시픽 드래곤'에 미국, 일본, 호주, 캐나다와 함께 참가했다. 그 성격도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이에 대한 북한의 반격이 일상화되면서 중국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 들어 축소 또는 조정되었던 한미, 한미일 군사훈련이 부활, 강화되고 이에 대해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을 반복하면서 위기가 일상화되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부정하며 시작된 국방부문의 '정상화'에 이어 한일관계의 '정상화'가 시도되었다. 국방의 '정상화'로 '위기가 일상화'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역사문제에서의 양보로 한일관계는 급격하게 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2023년 3월 6일, 한일관계의 걸림돌이었던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제3자 배상' 라는 방침으로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겠다고 발표했고, 3월 16일에는 이를 평가한 일본 정부와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대법원 판결의 대전제인 '불법적 식민지 지배' 문제는 모호한 상태로 남았고, 2023년 3월 한일관계에서 일어난 것은 '1965년 체제'로의 회귀였다.
극동 1905년 체제, 한일 1965년 체제, 한반도 휴전 체제
그 결과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한일 1965년 체제'에 탑재되어 작동해 온 '역사와 안보의 교환 구조'가 부활했다. 즉, 역사를 봉인하고, 경제협력을 매개로 한일관계를 안정화시키고, 한미일 안보협력체제를 구축, 가동하는 구조가 복원된 것이다. 이후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가 부활 강화되고 있으며, 그 대가로 북-중-러의 진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신냉전 돌입이라기보다는 한반도 휴전체제의 전면적 부활이며, 이에 호응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제 및 한일 1965년 체제의 부활 강화이다. 한반도 탈냉전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맞이하고 있는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대립, 갈등, 분단의 현실은 신냉전이 아니라 냉전의 지속이며, 그 동북아적 변형인 휴전체제의 전면화에 불과하다.
이렇게 식민지 지배의 역사 문제를 봉인하고 안보 협력을 추진하는 '역사-안보' 교환 구조가 부활했다. 역사를 봉인하면 지정학에 대한 봉인이 풀렸다. 예를 들어, 센다이 다이묘(千々和泰明)의 『戦後日本の安全保障』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지난해 5월인데, 마치 윤석열 정권의 등장을 예견한 듯하다. 천도화는 '일본과 일본에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조선(적어도 그 남부), 대만이 권력의 뒷받침에 의해 동일 진영에 장악되어 있는 극동지역 질서'를 '극동 1905년 체제'라고 불렀다. 이미 대만을 세력하에 둔 대일본제국이 러일전쟁 승리로 한반도를 확보했고, 이로써 동아시아의 힘의 공백을 메워 질서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의 조선과 대만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옳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략) 당시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로 처리되고 있다. 한편, 전후에 이 체제는 일체화된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하며, 이를 '미일-한미 양대 동맹'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의 두 동맹이 실체적으로 하나이며, 그 기원이 1905년에 있었다는 이 해석은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즉 한반도 휴전체제가 '극동 1905년 체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휴전체제를 고집한 아베 총리와 '극동 1905년 체제'를 만든 메이지 원로들이 연결되는 것이다.
2022년 9월 2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국장의 사상은 이 '극동 1905년 체제'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아베 국장에 참석한 한덕수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제법적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라고 일본 측의 인식을 받아들였다. 이날 국장에서 스가 전 총리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야마현 유토의 심정을 빗대어 조문을 낭독했다. 야마현은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으로 구성된 일본의 지정학을 창안한 사람이고, 이토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할 때까지 이를 실행한 당사자다. 국제법은 그들이 한국을 길들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며, 국제법으로 그들의 침략적 행동을 포장했다.
간 전 총리의 이런 발언의 배경에는 아베 내각 시절부터 이미 부활의 조짐을 보였던 지정학적 구상이 있다.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호소야 유이치(細谷雄一) 등의 '신지정학' 그룹이 대표적이다. 그들의 '새로운 지정학'에서 한국은 배제 대상이다. 한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징용공' 문제로 '자기주장'을 펼치며 국제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기타오카는 일본 주도의 '서태평양 연합' 구상을 제기한 적도 있다. 한국은 조약, 선언, 합의를 지키지 않는 나라로 '법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다.
이후 한국에서 정권이 교체되면서 앞서 언급한 '극동 1905년 체제'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한편, 2022년 6월 샹그릴라 다이얼로그 기조연설에서 기시다 총리는 일본이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 속에서 평화와 번영의 발걸음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변경이 당당하게 통용되는 (중략) 그런 약육강식의 세계로 되돌아갈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고 강조했다. 라는 선택 앞에 놓여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과 주장은 일본에서 2022년 12월에 채택된 '국가안보전략' 문서에 반영되어 있다. 지난해 말 발표된 한국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여기에 한국의 국익을 동기화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강제동원' 문제는 대일 외교의 과제 목록에서 사라졌다.
아베 총리의 국장에서 스며든 주권선 사상은 전후 70년 아베 담화의 사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2023년 3월 6일 한국 정부에 의해 대법원 판결에 대한 해결 법안이 제시되고 한일관계 회복과 한-미-일 안보협력의 긴밀화가 가시화되면서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역할에 대해 일본이 한-미연합사령부의 의사결정 과정에 행위자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극동 1905년 체제'의 사상은 '한일 1965년 체제'의 사상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한반도 휴전체제의 사상을 이루고 있었다.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의 사상, 결과, 전망
이를 문서화한 것이 캠프 데이비드 3문서다. 2023년 8월 18일 윤 대통령, 바이든 대통령, 기시다 총리 등 한-미-일 3국 정상이 워싱턴 근교의 미국 대통령 휴양지 캠프 데이비드에 모여 첫 단독 3국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세 정상은 회담 결과 3개의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발표했다.
정상회의 정례화 등 3국 간 포괄적인 협력 방안을 담은 한‧미‧일 공동성명 '캠프 데이비드 정신', 한‧미‧일 협력 추진 과정의 원칙을 문서화한 '캠프 데이비드 원칙', 역내 도전과 도발, 위협에 대한 정보교환, 메시지 조정, 대응조치를 신속히 협의한다는 내용을 담은 '3국 협의의 약속' 의 '3국 협의 약속(Commitment to Consult)' 등이다. 이로써 사실상 동맹에 준하는 안보협력의 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문서에 '의무(duty)'라는 단어는 없고 '약속(commitment)' 수준에 머물렀지만, 정상회담을 주도한 미국 측이 '3자 협의'에 담은 의도는 회담 전후로 나온 미국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에서 읽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한 백악관 관계자의 말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문서 채택을 통해 한-미-일 3국 정부가 "사람들이 협의할 의무(what we would call a duty to consult)를 약속했다"는 입장이다. 의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의무처럼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과 일본 간에 서로 한 나라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나 위기가 발생하면 서로 협의하기로 약속했다는 점이다. 한일 간 안보위기에 대한 협의 약속을 통해 한일 안보협력은 '새로운 역사의 장'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한미일 안보협력은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실선으로, 한일 간 안보협력을 점선으로 표시하는 구도로 전개되어 왔다. 그 기원은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북한의 선제공격에 대응해 미국이 유엔의 깃발을 내걸고 유엔 협력을 표방한 일본의 기지를 이용해 전쟁을 수행한 데서 비롯됐다. 이후 일본은 한국전쟁의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고, 휴전으로 전투가 종결된 후에도 그 기능을 유지한 채 '기지국가'로서 한반도의 휴전체제에 편입되었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기초는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를 확정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및 동시에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이었다. 한편 휴전 후 한국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체결된 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동북아 휴전체제의 세 가지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미일안보조약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 휴전이 낳은 쌍둥이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한국이 참여하지 못하고 한일 간 무교섭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또 다른 양자간 조약으로 존재해 왔다. 이 간극을 메운 것은 주한 유엔군사령부와 일본 유엔군 후방사령부의 긴밀한 소통과 협력이었다.
양 사령부는 휴전협정 체제가 작동하는 제도적 장치로, 1950년 7월 24일 유엔 안보리 결의 84호에 따라 유엔군이 창설되고 도쿄에 유엔군사령부가 설립되었다. 휴전 후 1957년 유엔군사령부가 용산기지로 이전하면서 일부 소규모 부대가 일본에 남아 후방사령부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에 기원을 두고 휴전을 계기로 완성된 쌍둥이 조직이었다.
이후 한국전쟁 휴전체제 하에서 한국은 전장의 전초국가(outpost-state), 일본은 기지국가(base-state)로 존재했고, 유엔군사령부와 후방사령부의 실질적 주인인 미국을 매개로 양국은 안보질서 속에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휴전체제 하에서 분리되어 있던 전선과 후방기지를 통합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양국이 직접적인 군사 안보 협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양국에서 '1965년 체제'에 대한 이의를 강하게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고 책임지지 않는 일본을 안보협력 파트너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경계심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한국과의 안보협력이 전후 평화주의를 구현한 평화헌법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됐다.
1965년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 대한 양국의 해석 차이만큼 이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냉전시대에도 한일 안보협력은 경제협력을 매개로 '역사와 안보'를 맞바꾸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번 회담의 목표가 대 중국 포위망 완성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 목표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한일관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그동안 미국을 매개로 유사 동맹관계에 머물렀던 한일관계가 실질적 군사동맹으로 격상되었기 때문이다. 한-미-일로 구성된 삼각형에서 점선으로 그려졌던 한일관계는 이제 실선이 되었다.
이에 따라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관여가 보다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일본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전후 처리 문제에서도 일본의 발언권이 인정될 것이다. 결국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일본의 개입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한국전쟁 말기 휴전회담의 이면에서 외교력을 총동원해 실현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한 꿈이다.
1990년대 이후 군사적 '보통국가'화의 오랜 꿈을 담아 지난해 말 일본이 채택한 3개 안보문서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협의의 약속'과 겹쳐보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지난해 말 개정된 '국가안전보장전략'과 '국가방위전략'에는 동지국(like-minded countries)으로 분류된 협력대상국과 다양한 방위협력을 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상호군사지원협정(ACSA)도 염두에 두고 있다. 즉, 한국과의 상호군사지원협정은 그 점에서 이번 캠프 데이비드 회담 이후 논의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 목표점은 MD(Missile Defense)의 완성일 것이다.
상호 보완하는 한반도 휴전체제와 기지국가의 내성
윤 정부는 출범 직후인 2022년 5월 21일 서울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열고 한미동맹을 '포괄적 글로벌 전략동맹'으로 강화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인 2023년 같은 날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G7을 계기로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공교롭게도 매우 상징적이다. 윤 대통령 스스로 자부하듯 윤 정부 1년의 한국 외교는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에 집중했고, 이를 '정상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사실상 전략동맹으로 강화된 한미동맹을 가치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확대 강화하고, 한일관계를 안보파트너십으로 재정의하고, 역사를 불문하고 미국을 매개로 안보협력을 추진하는 1965년 체제로 복귀시키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동안 암묵적으로 이어져 왔던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이 캠프 데이비드라는 세계가 주목하는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통합되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정전협정 70년을 맞는 2023년, 한반도는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평화체제로 나아가기 위한 대전환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다시 전쟁의 위기 앞에 서게 되었다. 윤석열 정권이 문재인 정권의 '평화외교'를 전면 부정하고 '대결외교'로 전환한 결과다. 이미 '대치외교'의 자세로 일관하던 일본과 파장이 일치했다. 그 결과 미일동맹의 자기장은 더욱 강력해졌고, 한국은 이에 끌려가면서 한반도 휴전체제가 부활, 강화됐다. 한반도 정전체제의 내성은 기지국가의 내성으로 인한 것이며, 기지국가의 내성은 한반도 정전체제의 내성을 이룬다.
한미일 동맹, 대만, 원전
원전 오염수 문제는 동아시아 정전체제의 산물이다. 전후 일본은 동아시아 정전체제 속에서 ‘기지국가’이자 ‘원전국가’로 존재해 왔다. '원전국가'라는 개념은 일본의 '전후국가'의 역사적, 공간적 특징을 담고 있다. 후쿠시마의 사고 또한 동아시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동아시아 문제로서의 원자력이 오염수 문제의 기원이다. 일본의 원자력 문제가 동아시아의 지역적 문제임을 확인하는 것은 일본의 완성된 "원전국가"가 사실상 "기지국가"임을 인식하는 것으로도 가능하다. '기지국가'가 전후국가 일본이 동아시아 정전체제 속의 군사적 지위를 표현하는 말이라면 '원전국가'는 그 사회경제적 표현이다. 여기서 '원전국가'란 "원전이 국민의 삶과 기업의 생산성에 양적, 질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로 정의할 수 있다.3)
이는 융크의 '원자력국가(Der Atomstaat)'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융크는 "원자력 산업의 발전에 따라 통치를 합리화할 기술주의자들에게 독재적으로 권력이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이러한 체제와 문화를 가진 국가를 ‘원자력국가’라 불렀다.(Robert Yungk, 1989) 네그리의 ‘원자력국가’와 ‘핵무력국가’ 개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네그리는 ‘원자력국가’ 즉 ‘Stato Nucleare(Nuclear Power State)’와 ‘핵무력국가’, 즉 Potenza Nucleare(dominance with nuclear weapons)를 구분하고, Stato Nucleare로서의 일본의 특징에 주목했다. 즉 네그리의 개념에서 ‘원자력국가’는 기술, 경찰, 군사력을 갖춘 세력에 의해 주권이 실질적으로 결정되는 것을 말하는 바, 일본이 그러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오염수 방류의 결정과정은 네그리의 통찰에서 봤을 때, 원전국가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정전체제에서 일본만 원전국가일 수는 없다. 1953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 '평화를 위한 원자력' 이후, 미국은 일본에서 원자력 발전 계획을 신속하게 채택했다. 이는 일본을 소련, 중국에 대한 쐐기로 사용하려는 미국의 전략에 기반. 원전은 미군기지와 등가물로서, 미일동맹의 상징이다.(池上, 2012) 그러나 이와 거의 동시에 한국과 대만이 같은 길을 걸었다. 1955년 7월 1일, 한미 원자력 협력 협정이 처음 합의된 후 1956년 2월에 체결되었으며, 1955년 6월, 대만 행정원 산하에 원자력위원회 설립하기도 했다. 나아가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1950년대 중반, 미국은 오키나와에 핵무기 배치했다. 1959년 6월 오키나와에서 핵무기를 장착한 나이키 미사일이 오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과 대만에 원전을 도입한 것은 미국이 핵무기 확산을 막고 두 국가에서 핵무기 포기로 인한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공식적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한 대만과 한국에 핵발전소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잠재적 핵 억지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본은, 한국 대만과 함께 ‘대표적인 잠재적 핵보유국’으로 분류된다. 일본에서 도카이무라(東海村)가 미일원자력동맹의 상징이라면, 롯카쇼무라(六ヶ所村)는 잠재적 핵보유국 일본의 상징이었다. 그런 배경을 고려하면, 원전오염수 문제는 미일동맹의 문제이면서,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과 한국, 대만이 참여한 동아시아 원전 질서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원전오염수 문제는 대만을 둘러싼 미중 대립을 배경으로 추진되는 한미일 동맹화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2023년 4월, 가데나기지에 핵공격 능력을 가진 F15E 스트라이크 이글 전투기 배치되었는데,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 후 핵탑재-공격 무기가 오키나와에 배치된 것은 처음이었다.(しんぶん赤旗, 2023.5.18.) 나아가 아마미오시마의 군사화도 현저하다. 러우전쟁에서 게임체인저라고 불린 하이마스가 배치되었다.(Jbpress, 2023.9.22.)
문제는 후쿠시마 이후 일본의 탈핵 움직임과 이에 이은 대만과 한국의 탈핵 움직임이 있었고, 이는 원전 거버넌스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지위를 흔들 가능성이 있었다. 이후 이들 국가에서 원전 재가동 및 원전산업 확대로 선회하는 배경에는 미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오염수 문제는 특히 이에 제동을 거는 악재가 될 수 있다.
한편 '원전국가'에게 오염수의 해양 투기는 사활적 문제다. 원전의 사용후 핵연료를 롯카쇼무라 재처리공장에서 재처리후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나머지를 핵폐기물로 처리하는 것이 일본의 원자력 정책의 근간인데, 삼중수소는 제거가 안되기 때문에 바다에 방출할 수밖에 없다. 롯카쇼무라 재처리공장에서는 매년 800톤의 핵연료를 처리하고 삼중수소가 포함된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한다는 계획이다. 후쿠시마 오염수의 해양 투기에 제동이 걸릴 경우, 롯카쇼무라에서의 재처리공장을 가동시키기 어려워지면서, 일본의 원자력정책이 근간에서 붕괴할 수 있다.4)
원전국가의 붕괴는 기지국가의 종언으로, 그리고 나아가 동아시아 정전체제의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오염수 문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체제전환이자, 동아시아 질서변환의 문제다.
<주석>
1) 이삼성,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핵무장 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 한길사, 2018, 805-808.
2) 金斗昇, 「国連軍司令部体制と日米韓関係ーーいわゆる朝鮮半島有事に焦点を合わせて」, 『立教法学』 86号, 2012, 293(52)-291(54)
3) Nam, Kijeong "Is the postwar state melting down?: an East Asian perspective of post-Fukushima Japan", Inter Asia Cultural Studies, Vol.20 Issue 1, 2019.
4) 「日本のメディアは腐っている!」海洋放出の"真の理由", 小出裕章さんが熱弁, 202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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