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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물어사전/홍일표
올 초에 책을 종이쓰레기로 버린 적이 있다. 출판된 지 60년쯤 된 책인데 세로쓰기로 되어 있고 활자도 너무 작아 돋보기를 쓰고 봐야 될 정도였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는 바스러질 정도여서 더 이상 책으로서
읽힐 가망이 없을 듯하여 아쉬웠지만 사망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책이 언젠가는 같은 운명을 맞겠지하는 생각을 하니 좀 씁쓸했다. 18세기 당시만 해도 귀족들은 여행할 때 포켓판 크기의 책 30~40권 정도를 가지고 다닐 정도로 책을 가까이 했고, 많은 도서를 소장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로마귀족들은 수천 권의 저서로 채워진서고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일부만 희귀본으로 남아 전해지고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10세기 때 이란 바그다드에 살았던 알-나딤이라는 제본공은 자기가 제본한 책에 흥미를 느껴 책의 내용을 요약한 목록집을 만들었다. 현재 목록집 알-피리스트』는 남아 있지만 당시 제본한 책은 모두 사라졌다. 도서관에 산처럼 쌓여 있는 책들 중에서 앞으로 500년 후까지 살아남을 우리나라 도서는 과연 몇
권쯤 될까?
책 *사물들과 함께 하는 51가지 철학 체험/로제 폴 드루아
새로 산 책장에 책들을 정리해서 꽂는다. 나는 정기적으로, 특히 휴가를 떠나기 전에 이런 작업을 한다. 책이라는 묘한 사물은 정돈되어야만 우리 머리를 비울 수 있다. 이처럼 책과 함께 사는 삶은 독특한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책은 다른 사물들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기에 무엇이든 기대할 수 있다. 사실, 책은 얇은 종이와 두꺼운 종이와 접착제에 불과하다. 다른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무게가 나가고,낡고, 떨어지고, 찢어지고, 더러워지며, 때로 불에 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책은 목소리이며, 얼굴, 역사, 사유, 추억, 투쟁, 존재, 허튼소리, 천재적 재능, 정보의 보고이며 기억이다. 각각의 책에는 그것만의 정체성이 있고, 표방하는 주제가 있으며, 그 나름의 전개가 있다.
나는 책을 인격체가 아닌 다른 것으로 여길 수가 없다. 마르고, 까칠하고, 잉크가 발려 있고, 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겉모습이 인상적이며, 꽤 흥미롭고, 무언가를 말하고, 방법을 모색하고, 결정을 내리고, 독특한 열정으로 생기를 발하는 인격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이 사물은 내 몸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내 몸의 기억, 감수성까지 새겨져 있으나 의식할 수 없는 부분처럼 책은 확장된 내 몸의 일부다.
예를 들어 계속 책들을 옮기고, 여러 차례 다시 정리해도 나는 어떤 책이 어디 있는지를 거의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그동안 처분한 책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이별한 책들은 아마도 한 트럭 분량은 족히 될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책들 중에서 사지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의 환지통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것들도 있다. 사실 나는 이 낯익은 얼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책장의 선반들과 나'라고 불러야 할 것을 선명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나
는 각기 다른 생김새와 이력과 역사에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배열되어 있는 이 책들 자체가 어느 정도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이 수천수만권이 되었든, 많은 부분을 떠나보냈든, 아직도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상관없이 나는 바로 그 책들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높이 쌓아놓은 책 더미나 한쪽 구석에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책들을 정리할 때면 늘 머릿속에 얽혀 있던 끈과 매듭이 풀리고, 모든 것이 정돈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늘 그렇지만 책들이 포개진 채 아무렇게나 쌓여 있으면 내 정신도 혼돈 속을 헤매는 것 같다. 그런데 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어떻게 하면 책들을 무사히 책장
에 나란히 꽂아둘 수 있을까? 종이와 접착제와 잉크로 만든 책이 반란을 일으킬 일은 없으니 '무사한 것은 당연하겠으나 책을 인격체로 본다면, 그리고 역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동안 사람들이 책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에 관심을 두고 기술하지 않은 것이 놀랍다. 서가에는 흔히 서로 반박하고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으니 어느날 잠에서 깨어 일어났을 때 한차례 전쟁을 치른 책장이 부서지고, 책들이 찢어지고,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꼴을 보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책들은 '무사하다. 나는 이런 상황을 납득하기 어렵다.
책 *철학자의 사물들/장석주
토트"는 고대 이집트에서 문자의 신, 지혜의 신으로 섬김을 받았다. 파라오는 토트에게 문자가 인간의 기억을 무디게 하고 결국은 없애는 악마 같은 장치가 아니냐고 따진다. 파라오의 기우는 지나친 것이었다. 인류 역사를 일별하면, 문자는 인류의 기
억을 감소시키는 대신에 기억과 공존하며 풍요롭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책은 문자로 이루어진 인류 기억의 집적체이다. 책이 나온 이래 인류의 기억과 지식은 엄청나게 확장되고, 비례하여 인류 문명은 빠른 속도로 번성했다.
책은 사물이고, 그 재료는 종이이다. 전지 한 장을 세
번 접으면 16쪽이 되고, 다섯 번을 접으면 64쪽이 된다. 이렇게 접은 종이 여러 묶음을 하나로 묶어 실로 철하고, 여기에 표지를 씌우면 한 권의 책이 탄생한다. 책은 종이의 여러 묶음으로 두께를 갖고 입체로 변신하며, 물성物性을 갖는다. 물론 그 종이
의 표면에는 문자나 그림으로 된 지식이나 기억들이 인쇄되는 것이다. 책은 표지, 속표지, 차례, 본문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가진 형태이고, 그 자체로 시간과 공간을 품은 작은 우주이다. 책을 우주로 상상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것은 보르헤스가 처음으로 발견하고 퍼뜨린 보르헤스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수고》에서 "세계가 존재하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이 신비한 것이다."라고 쓴다. 책은 신비한 것들의 문자적 누설이다. 그것은
문자로 구현된 신비기도 한데, 왜 신비인가 하면, 책이 언표로서 언표 불가능한 것을 말하고 드러내는 까닭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들은 그 안에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과 다양한 날짜와 속도들”을 갖고 있는 "하나의 다양체"(질 들뢰즈 팰
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라고 말한다. 책, 인류의 부실한 기억력의 대체재. 이것의 세계는 《인문우주론》에서 이쑤시개에 대한 논문에 이르기까지 실로 잡다하고 조밀하다.
책의 전생은 종이이고, 종이는 나무에서 나온다. 종이는 서기 105년 후 원흥 원년에 중국 왕실의 관리인이던 채륜이 처음 발명한다. 채륜은 뽕나무 껍질, 삼, 넝마, 어망 등을 써서 종이를 만들었다. 이 재료들을 짓이겨 가느다란 실을 분리해내고 물과 함께 반죽하여 평평한 막 위에 펼쳐 건져내는 방식을 썼다. 이것을 말리면 원재료의 섬유질이 촘촘하게 뒤엉킨 얇고 부드러운 종이가 되었다. 중국 왕실은 이 종이 제지술을 국가 기밀로 보호했다. 채륜 이후 2000년 동안 제지업자들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섬유질 성분으로 이루어진 종이들을 만들어냈다. 제지 업자들이 종이를 얻기 위해 쓴 재료들은 솔방울, 감자, 엉겅퀴, 개구리 침, 늪 이끼, 사탕수수, 조류, 아스파라거스, 옥수수 껍질, 양배추 밑동, 바나나, 거름, 상아 부스러기, 생선, 먼지 따위로 실로 다양했다. 종이가 나온 뒤 책은 더 다양하고 정교한 형태를 얻게 되었다.
- 리아 코헨, <탁자 위의 세계>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표지는 두껍고 질긴 종이를 쓴다.
얇고 부드러운 종이를 쓰는 본문을 보호하고 책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책을 신체로 보자면 본문은 내장기관이고,겉표지는 내장을 감싼 피부이다. 표지는 내장의 건강과 밀도가 드러나는 표면이다. 표지는 그 책이 지향하는 철학과 저자의 취향과 교양 정도를 드러낸다. 내가 책 표지 장정을 눈여겨 보는 이유이다. 책의 표지는 그것이 감당해야 할 운명의 외시이다. 가장 좋은 표지는 책의 내용을 가장 덜 표현한 책, 일체의 장식성을 배제하고 단순함의 미학에 도달한 것들이다.
책을 펼쳐 보라. 책은 새처럼 좌우 양면을 날개 삼아 펼친다. 책의 펼쳐진 양면은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물과 불, 우레와 바람이다. 아울러 책의 양면은 음양인데, 그 음양 위에 인간들이 이성과 감성이 만든 성채가 세워진다. “책은 작은 존재이다. 하지만 책을 손바닥 안에 멈춘 채 정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고 서로 대립하며 유동하고 확장하는 데 동적인 그릇(容器)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풍양력으로 가득찬 모태母胎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힘을 삼키고 내뱉은 커다란 그릇, 커다란 항아리라고 생각한다."(스기우라 고헤이, 《형태의 탄생》 놀랍게도 책은 고형물이 아니다. 제 안에 흐르고, 유동하고,확장하는 역동성을 품은 말랑말랑한 사물-도구이다. 책은 커다랗고 동시에 아주 작다. 책은 팽창과 수축 운동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책의 안쪽으로 하나의 선이 흐른다. 하나의 흐름. 이야기와 지식이 흘러가는 선. 본문의 흐름을 보여주는 선. 문자로 기술된 것이 만들어낸 긴 선. 그보다 훨씬 더 다양한 선들. “다른 모든 것들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
속되거나 단절된다."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앞의 책)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선과 운동들을 따라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다독가이자 “마를 줄 모르는 백과사전적 지식의 창
고”라고 평가를 받는 움베르토 에코는 “오늘날 책은 바로 우리의 노인이다. 우리는 미처 고려하지 않지만, 문맹인 사람(또는 문맹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삶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 (움베르토 에코,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누구나 책을 통해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삶을 살 수가 있다. 그 시간을 연장하다 보면 결국
은 불사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 에코는 이렇게 썼다. "책은 생명 보험이며,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다.”(움베르토 에코, 앞의 책) 책읽기가 생명 보험이라니! 영원히 죽지 않으려고 지불하는
선금이라니!
책은 어떻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를 갖게 되었을까? 왜 책은 더 크거나 작지 않을까? 에코는 그것이 인류의 해부학적 구조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책의 형식은 우리의 해부학적 구조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주 커다란 크기가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자료나 장식 기능을 가진 것들이다.
표준 책은 담뱃갑보다 작아서도 안 되고 '신문'보다 더 커서도.안 된다. 책의 크기는 우리 손의 크기에 달려 있으며, 그 크기는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변하지 않았다."(움베르토 에코, 앞의 책) 책의 형태와 크기가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은 인간의 손이 가진 크기와 구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이다. 책은 기억과 지식의 연장이고, 동시에 신체의 진화적 형태이다. 따라서 사람의 몸이 지금과 같은 해부학적 구조가 아니었다면 책 역시 지금과는 다른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개인 장서치고는 꽤 많은 책을 갖고 있다. 이게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서가에 꽂힌 책들은 나를 뿌듯하게 만든다. 책 모으기에 아무 보람이나 기쁨이 없었더라도 그 많은 책들을 위해 돈과 시간을 물 쓰듯 썼을까? 앞으로도 나는 많은 책들을 사서 서가를 채우려고 한다. 나이가 들어 내 곁에 아무도 없을 때 이 서가의 책들을 느릿느릿 읽어나갈 것이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이렇게 썼다. “책읽기는 밥을 구하는 노동과 관련이 있으며, 고루함과 독단에서 벗어나는 영혼을 위한 장엄미사, 번뇌를 끊고 열반정적에 나아가기 위한 참선이기도 하다. 먼저 책읽기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지적인 흥분과 열락감을 준다. 책읽기가 즐겁지 않다면, 기분을 화창하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책읽기를 그만둘 것이다." (장석주, 《비주류 본능》, 영림카디널) 장엄미사, 참선 따위의 말들을 굳이 골라 쓴 걸 보면, 이 무렵 나는 책읽기에 어떤 종교적 신성성을 느꼈나보다. 저 유년기에서 장년
기에 이른 오늘날까지 내 무의식에 꿈틀거리는 죽음에의 두려움이 번쩍 하고 떠오른다. 책읽기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의 욕망이 추동한 것은 아닐까? 유년기에 나는 이미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촉발된 물음의 연쇄 속에 있었
다. 생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나는 저기가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는가? 왜 나는 무가 아니고 말하며 생각하는 존재인가? 우주는 지적 설계로 나온 것인가? 우주는 오메가 순간, 즉 거대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가? 우주 종말 뒤에
나는 여기가 아니라 어디에 있을까? 무로 돌아간다면 무란 무엇인가? 그 물음의 연쇄들이 거센 힘으로 등을 떠밀어 책을 향하게 했다. 실제로 나는 여러 도서관과 무수히 많은 서점들을 떠돌며 책들을 섭렵했다. 일찍이 책이 삶의 시간들을 겹으로 살게 하고, 삶의 시간을 연장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이 조숙과 영악함은 불행일까, 행복일까?
책을 반으로 펼치면 / 김 영
두꺼운 책 한 권을
딱 반으로 펼쳐놓으면
꽤 넓은 들판이 생기고 지평선이 보인다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는 사이
작은 냇물이 졸졸 흐른다
그 위에 양 떼를 풀어놓아도 좋고
몇 채의 집을 짓고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짓고
울타리를 세우면 좋겠다
울타리의 용도는 옛날에도 망설였고
지금도 망설이는 일이지만
넘어오는 것과 넘어가는 것 중
어느 것을 막는 일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딱 반으로 펼친 책장에서는 여차하면
다시 접어버리면 되는 일
그러고 보니 움푹한 구릉지대나
큰 강이 흐르는 곳들은
허공이 딱 반으로 접힌 곳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반으로 접힌 책
그쯤 읽으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시시비비도 대충 가려질 만하겠다
딱 반이라는 곳들은 힘이 세다
양쪽으로 나누어 주고도 남는 힘으로
양쪽을 붙잡아 둘 수 있다
책은 그 힘으로 내용을 지탱하고
등장인물들을 끌고 가고
결말을 끝장에 둘 수 있다
두꺼운 책일수록
더 많은 양쪽을 반으로 갖고 있다
나라는 책, 한쪽이 너무 두꺼워졌다
서녘의, 책 / 박기섭
굳이 말하자면
나는 이미
낡은 책이다
그러니까 그 책 속의
내 시도
한물간 시다
귀 터진 책꽂이 한쪽에
낯익고도 낯선 책
날을 벼린다손 금세 또 날이 넘는,
은유의 칼 한 자루
면지에 박혀 있다
찢어진 책꺼풀 사이로
붉게 스는
좀의 길
그 활판 그 먹활자
향기는 다 사라지고
희미한 종이 재만 갈피에 푸석하다
터진 등 덧댄 풀 자국
바싹 마른
서녘의, 책
감나무 책 / 이삼현
책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봄날, 새잎으로 단장한 뒤뜰 감나무는
갓 출간된 한 권의 책이었다
두께만큼 우거져
첫 장을 펼치면 싱싱한 잉크 냄새가 났다
이파리마다 빼곡히 적힌 연둣빛 글자들
그늘에 앉아 지그시 눈 감고
나부낄 때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책 한 권이 다 읽혔다
마음 골짝에 나무 한 그루가 심어졌다
한 철 돌려 가며 읽는 책
까막눈인 어머니도
앞이 캄캄할 땐 다가와 낱장을 말없이 넘기곤 했다
짐을 부려놓은 아버지가 중얼거리며 밑줄을 긋던 곳도 감나무 아래다
이른 아침 목청껏 낭독하는 까치 소리에 잠이 깼고
재잘거리며 읽는 참새 소리를 좋아했다
독서의 즐거움이 홍시로 익을 즈음
손때 묻어 낡아진 책장은 이내 뜯겼다
간밤 무서리에 떨어져 쌓인 낙엽을 쓸며
펼칠 때마다 느낌과 즐거움이 새로웠던 책
몇 번씩 반복해 읽던 책장을 쓸어 담으며
나는 조금씩 두꺼워져 감나무를 닮은 어른이 되었다
책 읽는 여자 / 최금진
여성도서관 휴게실에선 눈먼 햇살이 그녀를 읽지
오래된 맞춤법의 틀린 오자를 모르는 늙은 사서처럼
시간은 그녀의 비문투성이 과거를 다 모른 채
그녀가 대출해간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반납해야 할 월요일과 화요일을 점검하고 있지
기억해야 할 어떤 문장을 되새김하듯 그녀는
손거울을 보며 지워져가는 입술 라인을 고치지
이렇게 낡아버려 모든 게 다 지워질 것 같은
두꺼운 책의 표지를 열면
그녀가 모르고 끼워둔
빛바랜 한숨과 그녀의 눈물이 떨어지기도 하지
도서관 의자 뒤에 적힌 흰 페인트의 숫자는
세상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유일한 좌표
도서관이라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녀는 자신의 조심스런 발소리조차 들을 수 없지
그녀가 읽는 책은 어떤 독신자의 일기,
살아 있어서 늘 캄캄했던 자의 이야기 위에
그녀도 제 눈과 손을 떼어 한 겹씩 붙이고 있지
언제부터 그녀가
도서관에 꽂혀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누구도 그녀를 끝까지 읽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지
폐관 시간이 가까워도
그녀는 일어날 줄 모르지
이 한 권의 책 / 이진심
엉금엉금 기어서
일생동안 겨우 당도한 책상 위에
이 쓸모없는 손을 올려 놓는다
두 손의 겉장은
몇 개의 칼자국과 굳은살로 너덜너덜하게
닳아있다
살아생전의 일을 고하라고 한다면
이 손을 읽어딜라고 간구하겠다
이 손위에 난 흔적들을 들여다보아
달라고
이것이 내 일생의 주행기록이라고
이미 괴로움이란 괴로움은 다 지워져버린
가여운 책을,
길들이란 길들은 다 흐려져 있는
삼중당문고 같은 손바닥을
책상 위에 고요히 올려놓겠다
찢어버린 페이지가 많았던
그 책에 엎드려 나는 잠들었다
어두운 강물에 누워 멀리멀리 떠내려가는
꿈을 꾸었다
밑줄 그었던 구절마다 커다란 웅덩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악기 다루는 아름다운 책을 원했으나
도구와 무기를 다루는 목록뿐이었다
도구를 다룰 때마다
무기를 휘둘러 조금씩 전진해 나갈 때마다
이 가벼운 삶을 악기처럼
이 무거운 일상을 악기처럼
이 느린 괴로움을 내가 가진 악기처럼 연주하였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책을
두 손을 나는 갖게 되었다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책
너무 가여웠으나
너무 무거워 아무도 훔쳐 갈 수 없었던 .
닳고 닳아 누구라도 건드리면 푹 먼지를
날리며
저 혼자 무너져버릴 가엾은 책
나는 책에게 조금씩 먹혀 들어갔다
여백마다 적혀진 굵은 글씨를 보면 알수 있다
어떻게 책의 입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갔는지를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바다로 가득 찬 책* / 강기원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해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홀겹의 환어(幻魚) 지느러미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시집)
알 수 없는 책 / 권예자
처음부터 이 책이 꼭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다
재미있게 읽을 자신은 없었지만
제목이 상큼했고 표지가 깔끔했다
달리 눈길을 끄는 책도 없는데다
도서상품권 유통기한에 쫓겨 그냥 샀다
책 속에 매화와 난초가 수줍게 피고
새들이 날며 초목이 자라길 바랐다
시처럼 곱게 내리는 이슬비
소설처럼 감미로운 대화도 있을 거라 여겼다
때로는 경포대 둥근 달을 보며
파도소리도 함께 듣고 싶었다
책을 잘못 골랐다는 예감은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였다
그 면에 가장 많이 실린 단어는
아니다 틀렸다 싫다 못한다
행간마다 태반이 엄살일 뿐
독자를 배려한 구절을 찾지 못했다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내용
다 읽지 못하고 넘긴 페이지 수두룩하다
단정하던 제본 엉성해지고 곱던 표지마저 너덜거린다
이제 그만 덮을까 망설이면서도
어딘지 숨어있을 매력적인 문장을 찾아
낡아버린 결혼의 책갈피를 촘촘히 탐색한다
밑줄 그을 색색의 연필을 준비해 놓고
무논의 책 / 이종암
내 어릴 적 아버지 멋진 책을 만드셨다
봄과 여름 사이 오월의 논에 아버지
산골짝 물 들여와 소와 쟁기로 해마다
무논의 책 잘 만드셨다
모내기 전 여기, 밀서密書다
물 위는 하늘 아래는 땅 서로 마주보는
밀서 안쪽으로
바람이 오고 구름이 일어나고
꽃향기 새소리도 피어나는 무논의 책
아버지 어머니 책 속으로 걸어가면
연둣빛 어린 모가 따라 들어갔다
그리하여 초록 치마를 펼쳐놓은 책 위로
하늘이 구름을 시켜 햇빛과 비를 뿌리며
한철 또록또록 그 책 다 읽고나면
밥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