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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탈원전 국가로의 전환과 한국사회에 던지는 함의
김수진 교수
(국토학교. 2023. 10. 20)
1. 독일, 원전 대국에서 탈원전 국가로 전환하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955년 파리조약에 의해 주권국의 지위를 회복하고 핵에너지 개발에 대한 금지가 풀리면서 국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원자로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 각기 서로 다른 100MW급 원형원자로 5기를 개발하는 첫 번째 원자력기술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당시 전통적인 원자로의 규모가 150MW인 것을 감안할 때 단기간에 100MW급 원형원자로 5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야심찬’ 계획이었으며 결국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다. 1950년대 원자력에너지에 열광하도록 만든 것은 고속증식로와 핵융합발전이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미래 비전이었다. 당시 고속증식로는 몇 십 년 후면 상용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러한 낙관적 전망 속에서 독일에서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고속증식로와 재처리 설비 시험 프로젝트가 수행되었고, 1970년대에 이르면 설비용량 300MW에 달하는 고속증식로 프로젝트가 계획되었다. 수차례의 기술 기준 수정과 이에 따른 건설 지연으로 인하여 초기에 예상한 건설 금액을 훨씬 초과해서 고속증식로가 건설되었다. 고속증식로 프로젝트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건설과정에서도 대규모 반대시위를 야기했다. 발전소 건설 후에는 당시 사회민주당(사민당)이 집권한 주에서 발전소 운영비용이 수익을 훨씬 초과한다는 이유로 발전소 운영이 승인되지 않았다. 이 고속증식로는 현재는 놀이공원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독일 경제 역사상 가장 큰 투자실패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1)
1960년대 200~300MW급 시범원자로 3기가 건설된 이후 1967년에 640MW 용량의 첫 상업적 원전이 발주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2년이 지난 1969년에 독일에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1200MW 원전(Biblis-A)이 발주되었다. 이후 1977년 7월까지에 총 15기의 원전 건설이 시작되어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까지 전력망에 연결되었다. 즉, 1967년 640MW 용량의 첫 상업용 원전 건설이 시작된 후, 불과 10년 만에 대부분의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은 사기업인 발전업체가 주문하는 원자로 모델이 표준화되어 있지 않았고 건설 계획과 건설 진행 상황에 따라 12~15 차례의 부분적인 건설승인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건설이 시작된 상당수 발전소의 공사기간이 8~10년에 달했다. 1980년대 초 이른바 ‘콘보이 convoy' 개념을 도입하여 원자로 건설 및 승인 표준화 작업을 시도했으나 이때 단지 3기의 원자로만 이 방식으로 약 5~6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즉, 1980년대 원자로 건설에 도입한 표준화 개념은 더 이상 확대되지 못했고 1980년대 초에 3기의 원전 건설을 끝으로 독일에서는 신규 원전 건설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0년 원전 폐쇄를 결정할 당시 독일은 원전 용량 측면에서 전 세계 4위를 차지하는 원전대국이었다. 참고로 당시 한국의 원전 용량은 독일보다 적었으며 전 세계 6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일은 2000년 원자력발전소 폐쇄 정책은 독일연방정부와 원자력발전업체인 4개의 사기업 간의 합의로 도출 이른바 ‘핵합의(Atomkonsens)’였다. ‘핵합의’는 원자력발전소의 폐쇄시점이 아니라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할 수 있는 기간에 대한 합의였다. 1998년 가을 사민당-녹색당 연립정부가 들어선 이후 발전업체와의 1년 이상의 협상 끝에 이 기간은 32년으로 결정되었다. 32년이라는 원전 운영기간을 토대로 2000년 개정 원자력법에는 19기 원전이 2000년 이후 생산할 수 있는 잔여전력량을 각 원전별로 규정했다. 잔여전력량을 모두 소진하면 원전을 폐쇄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주류 정당 중 하나인 기독민주당(기민당)이 원전 폐쇄 정책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합의는 기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 언제든 다시 되돌릴 수 있었다. 이런 점을 발전업체들은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정권이 바뀔 때까지 발전소 운영을 최대한 늦추는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사민당-녹색당 연립정부 당시에는 용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원전 두 기만 폐쇄되었다.2) 2005년 선거로 기민당-사민당 대연정이 들어섰을 때는 기민당과 사민당은 원자력에 대해 입장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연정합의문에도 명시했지만3) 대연정 기간 동안은 ‘핵합의’ 사항을 지키기로 합의했다. 이런 이유로 원전 폐쇄 결정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연정 기간 내내 원자력 문제는 주된 정치적 이슈였다. 기민당은 원자력발전소 수명을 연장하고자 했으며, 사민당은 원전 수명 연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기민당은 신규 원전 건설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산화탄소 감축과 재생가능에너지의 전력공급 증가에 따른 전기요금 인상 문제 등을 거론하며 원전 수명 연장 정책을 옹호했다. 기민당은 2008년 12월 전당대회에서 원전 수명 연장을 당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채택했다.4) 이에 반해 사민당 의원이 장관을 맡고 있는 연방환경부와 연방환경청 등은 원전수명 연장이 오히려 에너지전환을 저해한다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렇게 원전 수명 연장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발전업체의 전략적인 원전 운영으로 이 기간 동안 단 1기의 원전도 추가로 폐쇄되지 않았다.
2009년 가을 연방의회 선거 결과 기민/기사연합당과 자민당의 보수-자유 연립정부가 출범하자 새로운 연립정부와 에너지 기업 간에 원전 수명 연장을 위한 협상이 이루어졌다. 협상 결과 운영 중인 17기 원전의 수명이 평균 12년 연장되었다. 1980년 이전에 운영을 시작한 7기의 오래된 원전의 경우 수명이 8년 연장되었고, 1980년 이후에 준공된 10기의 원전은 수명이 14년 연장되었다. 이러한 원전 수명 연장은 ‘에너지컨셉(Energiekonzept)’의 정책 틀 내에서 이루어졌다.5) 신규 원전 금지 조항은 유지되었으나 2000년 ‘핵합의’의 주요 내용인 잔여 전력량은 원전 수명이 연장된 기간에 맞추어 증가했다. 원자력법이 다시 개정되었다. ‘에너지컨셉’은 2050년까지 독일의 에너지 전환을 위한 장기 비전을 담고 있다. ‘에너지컨셉’에서 원자력은 ‘교량에너지원’으로 강조되었고, 기후변화 목표와 적정 에너지 가격, 그리고 해외 에너지 의존도 감소 등을 위해 원전의 수명 연장이 불가피하다고 강조되었다.
2010년 가을 원전 수명 연장 정책이 확정되었다. 당시 베를린에서는 원전 수명 연장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총리집무실 앞에서 열리기도 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전의 수명 연장 정책이 강행되었으나 불과 6개월 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나면서 독일 원자력 정책에 다시 획기적인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메르켈 연방총리는 원전 수명연장정책을 철회하고, 오래된 원전 7기와 오랫동안 고장으로 운영이 중지된 1기 원전에 대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그리고 원전 폐쇄의 적정 시기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자 윤리위원회를 위촉했다. 2011년 3월 당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 2주일 후에 바덴-뷔르템부르크 주와 라인란트-팔츠 주에서 주의회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시민들은 원전 수명 연장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특히 주 의회 선거가 있기 직전의 주말에는 베를린, 뮌헨, 쾰른 등 대도시에서 20여 명의 시민들이 반핵 시위에 참여했다. 주 의회 선거와 반핵시위 등의 상황이 메르켈 총리로 하여금 원전 폐쇄에 대한 결단을 강제한 측면이 있다.
윤리위원회와 독일의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기술검토 보고서를 바탕으로 독일연방정부는 원전 폐쇄 최종 시기를 2022년으로 원자력법에 명시했다. 그리고 운영을 중지시킨 8기 원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운영하지 않고 폐쇄하기로 결정했으며, 나머지 9기 원전에 대해서는 수명연장에 따른 추가 전력량을 삭제하고 2000년 ‘핵합의’에서 결정된 잔여전력량을 다시 규정했다. 다만 2000년 ‘핵합의’와 달리 이번에는 각 원전 별로 원전의 최종 폐쇄 시점을 원자력법에 명시했다. 즉, 잔여전력량이 소진되면 원전을 폐쇄하지만 늦어도 언제까지 폐쇄해야 한다고 폐쇄 시점을 원자력법에 명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원자력법 개정은 연방의회의 절대 다수의 찬성을 끌어냈다. 이로써 독일의 원전 폐쇄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 일단락되었다.
9기 원전은 원자력법에 명시된 일정대로 폐쇄되었다. 다만 2022년 12월 말까지 폐쇄하기로 한 마지막 3기 원전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2023년 4월15일까지 임시 연장 운영하기로 2022년 11월 11일 연방의회에서 결정했다.6) 그리고 올해 4월15일자로 마지막 원전 3기가 폐쇄됨에 따라 독일은 2000년 세계 4위의 원자력 대국에서 20여년 만에 원전 제로 국가가 되었다.
2. 독일 탈원전 과정에 대한 해석: 위기의 상호작용
독일의 탈원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정치제도, 특정 사건에 대한 사회적 반응, 정치적 행위자 등 개별 요인을 분절적으로 파악하기보다 독일의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원자력을 둘러싼 위기 또는 갈등 상황이 어떻게 강화, 억제, 또는 조정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하버마스의 후기자본주의 위기경향성 이론에서 개념을 빌려 원자력을 둘러싼 위기를 정치투입시스템에서의 정당성 위기, 정치산출시스템에서의 합리성 위기, 그리고 사회문화시스템에서의 수용성 위기로 구분하고 독일 탈원전을 이 세 가지 위기 상호작용하면서 원자력 위기가 강화된 결과로 해석한다.7)
독일의 원자력 위기의 상호작용을 도식화하면 <그림 2>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1970년대 반핵운동으로 표출된 수용성 위기는 당시 집권당인 사민당 내부에서 원자력 입장에 균열을 일으킨다(a1). 집권 사민당의 원자력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로 인해 원자력행정이 ‘표류하게’ 되면서 원자력행정의 합리성 위기를 촉발한다(Fach and Simonis, 1987, p.139). 1970년대 후반 몇몇 행정법원에서 원자로 안전과 방사성폐기물 처분 문제를 이유로 원자력발전소 건설 승인을 취소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1970년대 반핵운동은 궁극적으로 원자력 이용의 정치적 정당성 위기로 이어진다(a2). 1970년대 반핵운동으로 녹색당이 태동했을 뿐만 아니라 사민당 내부에도 원자력에 비판적인 그룹이 생긴다(Nelkin and Pollak, 1980). 1980년대 초 사민당이 연방의회에서 야당이 되면서 사민당은 원자력에 비판적 입장을 강화했으며, 재처리와 고속증식로 프로젝트를 반대하고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계기로 원전 폐쇄를 정당 정책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사민당이 반핵정당이 되면서 원자력 이슈는 독일의 주된 정당인 기민당과 사민당의 정책 차이를 보여 주는 균열라인(cleavage line)이 된다. 1998말 연방의회선거 결과 반핵동맹(사민당-녹색당)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2000년 원자력법 개정을 통해 원전 폐쇄가 입법화 된다. 즉, 1970, 80년대 빌, 그론데, 브로크도르프의 원전 건설 반대운동과 재처리 및 방사성폐기물 처분 프로젝트, 칼카르 고속증식로 프로젝트 등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핵시위는 원자력 문제에 대한 정치적 논쟁을 촉발시켰으며 궁극적으로 원자력의 상업적 이용에 대한 정치적 정당성 위기로 이어졌다.
시민사회의 반핵운동이 원자력 이용에 대한 정치적 논쟁을 촉발했지만 동시에 원자력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도 원자력 위험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를 지속시키는데 기여했다(l1). Radkau(2011, p.210)는 특히 원자력문제는 다른 환경문제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적인 위험을 다루는 것으로 시민대화 등을 통해 다양한 의견이 표출될 수 있는 정치 공론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1990년대 기민당과 사민당은 원자력의 미래 이용과 고아레벤 프로젝트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원전 폐쇄가 1998년 연방의회 선거의 주된 정책 이슈가 되었다. 이후 2005년과 2010년 선거에서도 원자력발전소 수명연장을 둘러싸고 기민당과 사민당의 논쟁이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는 무엇보다 방사성폐기물 처분정책이 수용성 위기와 정치적 정당성 위기를 심화시켰다(r1, r2). 방사성페기물을 최대한 ‘재활용’하여 폐기물의 양을 줄인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는 결과적으로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재처리공장 건설은 1970년대 말 고아레벤과 1980년대 바커스도르프에 대규모 반핵시위를 초래한 후 결국 발전업체에 의해 철회되었다. 재처리와 함께 ‘닫혀진 핵연료사이클’을 완성하는 고속증식로 프로젝트도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갈등만 초래했다(r1). 그리고 사회적 합의에 기초하지 않은 고아레벤 프로젝트도 30년 이상 반핵운동을 지속시켰다(r1). 여기에 1990년대 야당이 집권한 니더작센 주에 방사성폐기물처분 프로젝트가 집중됨으로써 당시 집권당인 기민당과 야당인 사민당 사이에 고아레벤 프로젝트와 콘라트 프로젝트는 주된 정치적 갈등요인으로 작용했다(r2).
원자력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원자력행정의 합리성 위기를 가속화시켰다(l2). 사민당이 원자력에 비판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1980년대에 사민당이 집권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는 칼카르의 고속증식로 운영을 승인하지 않았다. 1990년대에는 사민당이 집권한 니더작센 주에서 수행된 방사성폐기물 프로젝트로 인해 당시 기민/기사당-자민당 연립정부와 사민당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초래되었고 이로 인해 콘라트의 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위한 주정부 승인이 지연되었다.
결과적으로 독일에서는 1970년대 중반 이후 각 사회정치시스템에서 원자력을 둘러싸고 발생한 합리성, 수용성, 정당성 위기가 상호작용하면서 원자력 위기를 심화시켰다.
3. 독일 에너지전환의 두 축: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
독일 에너지전환(Energiewende)의 핵심적인 두 축은 탈원전과 재생가능에너지 확대이다. 에너지전환은 1980년대 당시 반핵운동 진영의 대안 연구소였던 생태연구소(Öko-Institut)의 보고서에 등장한 개념으로 ‘석유와 우라늄이 없는 성장과 번영’으로 묘사되었다. 당시 이러한 에너지전환전은 독일 정치 담론에서 소수가 꿈꾸는 비전이었다(Strunz, 2014: 150).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독일 연방정부가 공식적으로 표방한 ‘에너지전환’ 정책은 이후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글로벌 표준 정책이 되었다.
2000년 독일이 탈원전을 결정할 때 독일은 재생에너지를 지원하기 위한 법(재생에너지법 EEG)을 제정했다. 2000년 EEG법 제정 당시 목표는 2010년까지 1차 에너지공급에서 차지하는 재생에너지 목표 최소 4.2%였으나 이 목표는 2007년에 달성하여 2004년 EEG를 개정했다. 개정법에서는 2010년까지 재생에너지 전력생산 비중을 12.5%, 2020년까지 최소 20% 달성한다는 목표를 수립했으나 재생에너지 전력생산 비중이 2010년 17%, 2014년 26%로 증가하면서 이 목표도 초과 달성했다. 이에 독일 연방정부는 2017년에 재생에너지 전력생산 목표를 다시 상향 조정했다. 이번에는 2020년 35%, 2035년까지 40~45%, 2045년까지 55~60%, 2050년까지 최소 80%를 목표로 세웠다. 그러나 이 목표치도 조기 달성되었다. 2023년 7~9월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비중은 50%를 넘어섰다. 2023년 4월 신호등 연립정부(녹색당-사민당-자민당)는 2030년까지 독일연방 총 전력소비량의 최소 80%를 재생가능에너지 전기로 공급하기로 목표를 재수립하고 태양광과 풍력 확대를 가속화하여 석탄발전에서 탈피하고 에너지효율성을 증가시킨다는 계획이다.8)
원전 폐쇄 결정이나 보수연립정부에서 원전 수명을 연장할 당시만 해도 원전 폐쇄를 반대하거나 수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주된 이유로 언제나 전력공급 안정성이 거론되었다. 원전 수명을 연장할 때도 당시 원자력이 에너지전환을 위한 ‘교량에너지’로 필요하다는 논리가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런 정부의 우려는 결과적으로 ‘기우’였다. 정부가 EEG법을 수차례 개정해야 할 만큼 재생가능에너지 증가 속도는 정부의 계획을 언제나 앞질렀다. 불과 6년 전인 2017년에 수립한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전력 80% 달성 목표를 2030년 목표로 무려 20년이나 앞당긴 것이다. EEG법을 통해 재생에너지전력을 우선적으로 전력망에 연결하고 20년 동안 고정된 가격으로 재생에너지 전력을 매입하는 FIT제도를 도입하였고, 이 제도에 힘입어 시민들이 에너지협동조합 등을 만들어 재생에너지에 투자할 수 있는 안정적인 여건이 조성된 것이 주효했다. 독일은 2030년까지 석탄발전도 폐쇄한다는 계획이다. 2030년이 되면 독일은 1980년 독일 정치담론의 변두리에서 태동한 ‘우라늄과 석탄이 없는’ 에너지전환 비전이 완성될 것이다.
독일의 성공적인 에너지전환의 요인으로 우선 독일의 정치적 안정성과 이를 기반으로 한 독일 연방정부의 일관된 에너지전환 정책 추진을 꼽을 수 있다(Cheung et al. 2019). EEG법에 따라 재생에너지에 지원된 비용은 독일 전체 가계의 전기요금에 반영되었다. 전기요금 인상에 따른 정치적 논쟁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FIT에 따른 초기 재생에너지 확대를 일관되게 추진했으며 이러한 일관된 정부 정책은 재생에너지기술에 투자하는 민간 투자자에게 재생에너지 시장에 대한 확실성을 제공했다. 이와 더불어 탈원전에 대한 시민사회의 강력한 지지가 뒷받침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사건이 독일의 에너지전환에 유리한 국면을 제공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1998년 사민당-녹색당 연립정부 출범,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등은 앞서 제시한 독일 원자력 위기의 상호작용을 강화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다. 재생에너지로의 에너지전환은 2005년 사민당-녹색당 연립정부가 끝나고 기민당 등 보수정당이 집권당을 형성했지만 그 흐름을 바꿀 수 없었다. 재생에너지가 늘어나면서 독일 곳곳에서 재생에너지 생산과 관련된 고용이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재생에너지 분야는 에너지 공급 안정성뿐만 아니라 고용 창출, 경제성장에도 기여하면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에너지전환은 독일 연방정부가 일관되게 이끌었고, 정책을 통해 구조적 전환이 뒷받침되었으며, 독일 공동체가 강력하게 지지한 탈원전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Cheung et al. 2019: 644).
4. 독일 에너지전환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함의
독일이 2000년 이후 20여 년 만에 원자력에너지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의 원전 용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독일과 한국은 정치 시스템에서도 차이를 보일 뿐 아니라 원자력발전의 소유 및 운영 구조도 다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독일의 주류 정당인 사민당이 원자력 이용에 반대하면서 독일에서 원자력 이슈가 의회정치 내에서 수십 년 동안 논쟁적 이슈가 된 반면, 한국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영향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세계 원전 시장 침체기에 buyer-market이 형성되어 당시 원전기술 자립을 위해 한국표준형 원자로를 개발하려 했던 한국에게 유리한 기술이전 조건이 형성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한국에서는 한국표준형 원자로의 최초 모델인 영광 3,4호기를 건설했고 이후 같은 모델로 10기의 원전이 복제되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는 의회 내에서 정당 간 원자력에 대한 입장 차이가 드러났지만 원자력정책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으며, 2017년 문재인 정부가 표방한 탈원전 정책은 입법화되지 않았다. 그 결과 2022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탈원전 정책은 폐기되고 원전 수명 연장과 신규 원전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독일의 탈원전을 원자력 행정의 합리성 위기, 원자력 이용의 정당성 위기 및 수용성 위기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살펴본 것처럼 한국도 이 위기 다이어그램으로 살펴볼 수 있다. 9) 독일과 비교할 때 한국의 위기 다이어그램은 <그림 3>와 같이 나타난다. 독일의 위기 다이어그램과 달리 한국에서는 각 위기의 영향이 점선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위기의 징후는 있으나 독일처럼 상업용 원전 이용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원자력 위기의 징후는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건설 문제에서 두드러진다. 1980년대 중반부터 방사성폐기물처분장 후보지 물색이 본격화되었으며 안면도, 굴업도, 부안 사태 등에서 나타나듯 정부 및 지방정부의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지역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r1). 이러한 주민의 반발은 원자력행정의 집행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즉, 지역주민들의 후보지 반대운동에 부딪힐 때마다 후보지 결정을 철회하고 후보지 선정절차를 수차례 변경하는 과정을 겪었다(a1). 원자력건설 프로젝트가 효과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집행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건설은 2005년 경주로 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장이 결정될 때까지 19년 동안 정책 실패를 거듭했다. 2005년에도 고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장을 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장 부지에 건설하지 않는다는 분리 정책을 통해 방사성폐기물처분장 후보지 선정에 돌파구가 마련되었지만, 결국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장 이외에 다른 방사성폐기물 프로젝트는 결과적으로 연기되었다. 독일에서 1970년대 중반 방사성폐기물 처분 문제로 인해 5년간의 신규 원전 건설이 중단된 것과 비교한다면, 방사성폐기물 처분을 둘러싼 갈등이 20년 가까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시민사회에서나 제도권 정당정치 영역에서 원자력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3~2004년 부안에서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반대운동이 격심해졌을 때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은 정부의 원자력정책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했다.10) 이것은 수용성 위기가 정치적 정당성 위기를 촉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a2).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는 신규원전 건설과 고리원전 1호기 수명연장을 반대함으로써 여당인 새누리당과 입장 차이를 보였다. 즉,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원자력 수용성 위기가 정당 간 원자력 이용의 입장 차이에 기초해 정치적 논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징후를 보여준 것이다(a2). 그러나 선거에서 원자력 문제는 주된 이슈로 부각되지 않았다. 이것은 오랫동안 원자력정책이 탈정치화 되었기 때문이다. 즉, Nelkin and Pollak(1980, pp.128-129)이 지적하듯,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포함한 정부의 전력수급계획이 “기정 사실(a fait accompli)”로 발표되고 의회는 행정부의 정책을 승인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원자력의 기술적 특성과 전력수급계획에 따른 원자력발전소 건설로 인해 원자력 문제에 대해 의회가 개입할 여지가 축소되었다. 또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또는 신규 원전 부지 선정을 둘러싼 갈등에 정당이 직접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정당이 원자력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표현하고 조정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의회에서 원자력발전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와 공론화가 부재함으로써 원자력발전과 관련된 문제와 갈등이 일부 해당 지역에 제한된 차원에서 머물렀을 뿐 본격적인 수용성 위기로 이어지지 못했다(l1의 부재).
2008년 한나라당이 집권하면서 의회 내 주요 정당 간 원자력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8년 8월 이명박 정부는 원자력을 확대하여 2030년까지 전력생산에서 원자력 비중을 59%까지 확대한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이 원자력확대 정책에 대해 주요 야당인 민주당은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 결과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에서 원자력 진흥에 관련된 조항이 삭제되었다.11) 방사성폐기물 처분을 미룬 채 원자력발전을 확대하는 원자력행정의 계획 비합리성이 원자력 이용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을 촉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r2). 그러나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에서 원자력 진흥 조항이 삭제된 것이 실제로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12) 원자력 진흥 조항의 삭제 여부와 상관없이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전력수급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또, 이 조항의 삭제 여부와 상관없이 원자력은 핵심적인 녹색 기술로 간주되어 녹색성장 예산이 배정되었다(국회예산정책처, 2010). 신고리 원전 3, 4호기 건설 프로젝트의 경우도 국회 국정감사에서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승인되기 전에 주기기 계약을 체결한 관행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으나, 전력수급계획에 따른 건설 진행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13) 이러한 사례는 의회의 에너지정책 개입 활동이 실제로 행정부의 원자력정책을 통제하지 못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l2의 부재).
결과적으로 원자력행정의 계획 비합리성이 의회의 행정부 통제를 통해 교정되지 않음으로써 원자력행정의 합리성 위기 표출을 억제시킨다. 그리고 정당이 원자력 문제를 대변하지 못함으로써 원자력을 둘러싼 갈등이 지역주민과 중앙정부의 갈등으로 축소되고, 결국 원자력 문제의 공론화가 저해됨으로써 위기 표출이 억제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독일과 비교할 때 한국의 위기 상호작용 도식에서 빠진 부분은 바로 원자력 이용의 정치적 정당성 위기가 원자력행정의 합리성 위기나 시민사회의 수용성 위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탈원전을 표방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문재인 정부의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탈원전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지 않았다. 2020년 총선과 2022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탈원전을 공약에 포함시키지 않은 반면, 국민의힘은 탈원전 폐기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독일과 비교하여 가장 큰 차이는, 독일의 주류 정당인 사민당이 원자력정책의 veto-player 역할을 한 반면 한국에서는 민주당이 그 역할을 지금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 원자력은 정당정치에서 주된 논쟁적 이슈로 부각되지 않으며 원자력 문제는 탈정치화된다. 이러한 탈정치화가 야기하는 가장 큰 문제는 지금까지 사용후핵연료 등 핵폐기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 여부에 대한 국가 정책도 부재한 상태에서 사용후핵연료 정책은 오랜 기간 표류하고 있으며, 현재는 사용후핵연료 임시 저장설비를 원전 부지 내에 증설하려고 하면서 지역주민과의 갈등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원자력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회피되고 있기 때문에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원전 지역 내의 문제로 국한되고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위험을 드러내어 논쟁하는 것이라고 했다. 원자력은 독일사회가 가장 오랫동안 논쟁해온 이슈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논쟁했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탈원전을 달성할 수 있었다. 논쟁하는 과정에서 독일사회는 원자력의 위험이나 해결되지 않은 핵폐기물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에너지전환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RE100에 맞서 정부가 CF100을 추진하고자 한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이 경쟁적 에너지원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에너지전환이 원자력 확대 정책 속에서 지체될 수 있다. 원자력발전소 건설 문제를 단순히 전력수급계획의 일환으로만 다루고 정치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한국사회는 원자력 위험에 대응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기후위기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수진. 2016. “독일과 한국의 원자력정책 비교연구: 하버마스의 위기경향성 개념에 의거하
여” 환경정책 24(4), 177-225.
Cheung, Grace, Peter J. Davies, Alexander Bassen. 2019. “In the transition of
energy system: What lessons can be learnt from the German
achievement?” Energy Policy 132: 633-646.
Strunz, Sebastian. 2014. “The German energy transition as a regime shift,”
Ecological Eoconomics 100: 150-158.
주석
1) Der Spiegel 28/2008, p. 30.
2) 640MW의 Stade 원전과 340MW의 Obrigheim 원전이 각각 2003년과 2005년에 폐쇄되었다.
3) CDU/CSU와 SPD 간의 대연정 합의문, “Gemeinsam für Deutschland – mit Mut und Menschlichkeit”, November 11, 2005, p. 41.
4) “Bewahrung der Schöpfung: Klima-, Umwelt- und Verbraucherschutz”, Antrag des Bundesvorstandes der CDU Deutschlands an den 22. Parteitag am 1./2. Dezember 2008 in Stuttgart.
5) “Energiekonzept für eine umweltschonende, zuverlässige und bezahlbare Energieversorgung”, September 28, 2010. BMWi (Bundesministerium für Wirtschaft und Technologie)/ BMU.
6) https://www.base.bund.de/DE/themen/kt/ausstieg-atomkraft/ausstieg_node.html (2023. 10. 8. 자료 접근)
7) 이하 글은 김수진(2016) 209-211 인용
8) 독일연방정부. 2023. 4. 25. “Energiewende beschleunigen. Mehr Energie aus erneuerbaren Quellen” (2023. 10. 8. 자료 접근) (https://www.bundesregierung.de/breg-de/schwerpunkte/klimaschutz/energiewende-beschleunigen-2040310)
9) 한국의 위기 상호작용 관련 내용은 김수진(2016) 211-213 인용
10) 2000년대 초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선정을 둘러싸고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을 때 몇몇 의원들이 신규원전 건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2003년 부안에서 반대운동이 심화되면서 몇몇 의원들이 방사성폐기물 처분과 연계해서 신규 원전 건설 문제에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2001년 산자위 국정감사(국감)에서 신현태(한); 2002년 산자위 국감에서 손희정(한); 2003년 산자위 국감에서 정갑윤(한), 안영근(한), 장재식(민), 이상배(한) 진술 참조, ‘산자위’는 산업자원위원회, 괄호안의 ‘한’은 한나라당, ‘민’은 민주당을 나타냄).
11) 민주당 의원의 비판적 입장 표명에 대해서는 기후변화대책특별위원회 2009년 2월 12일, 4월 14일, 4월 20일 회의에서 김재윤, 우제창 의원 발언 참조.
12) 녹색성장위원회에서 제시한 녹색성장을 위한 국가 전략에는 원자력 확대가 포함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국회 기후변화대응·녹색성장특별위원회의 2011년 8월 29일 회의에서 민주당의 유원일 의원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녹색성장위원회의 위원장은 녹색성장기본법이 기본적인 원칙을 명시하지만 녹색 성장의 전반적인 의미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다소 애매모호하게 답하고 녹색성장기본법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원자력 확대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또 지식경제위원회 회의(2009.12.30)에서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에서 원자력 진흥 조항이 삭제된 것이 원자력 진흥에 문제가 되지 않느냐는 한 여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은 원자력산업이 녹색성장전략을 이끄는 산업으로 만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3) 2006년 산업자원위원회 한국수력원자력 국정감사 답변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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