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
행운은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 보름 전쯤이다. 마당 청소를 하다 장미 넝쿨 아래 버러진 화분에 잡초와 같이 자라는 화초를 발견했다. 풀들과 경쟁하느라 줄기가 가늘고 웃자라 금방이라도 바람에 넘어질 듯 나약했다. 자세히 보니 봉선화다. 지난해 심은 분에서 씨앗을 떨구어 추운 겨울을 용하게 견디고 싹을 틔웠다. 물 한번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생명의 경이로움을 본다. 꽤 여러 포기다.
실한 것만 골라 두 분에 옮겨 심었다. 각각 세 포기 두 포기로 나누었다. 그때만 해도 살아 예쁜 꽃을 피우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내 식물 키우는 재미는 알고 있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화초 분갈이용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정성을 쏟았다. 하루가 다르게 이파리에 윤기가 나고, 줄기가 튼튼해졌다. 성의에 보답이라도 하듯 잘 자랐다. 매일 쳐다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며칠 전부터 봉선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거실 창문을 열고 한참씩 바라보니 생각이 깊어 진다. ‘지난해 꽃을 본 후 너의 존재를 잊고 있어 미안하다. 인간이란 이렇게 간사한 동물이다. 우연히 다시 만나 고맙다. 매일 아침 너를 보는 재미가 내 삶에 활력소다. 인연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살며 어느 순간 잊었다가 다시 생각이 나고, 다시는 보지 못할 듯싶다가도 엉뚱하게 만난다. 너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분홍색 웃음으로 다가오지만 나는 그사이 일 년이나 더 늙었다. 너 보기는 어떨는지 모르나 내가 네게 마음 씀은 지난해와 같으니 올해도 곱고 아름다운 꽃으로 내 마음을 정화해 주기 바란다.’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봉선화는 분에서 꽃도 피우고 바람에 꽃잎도 팔랑인다. 제법 많이 자랐다. 버팀대를 세우고 거름을 더 주었다. 바람에 줄기가 넘어지거나, 꽃을 피우는데 에너지가 더 필요할까 싶어서다. 오늘 아침엔 생기가 있고 발랄하게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꽃송이가 몇 개인지 헤아려 본다. 하루가 다르게 송이가 늘어난다. 정성을 쏟는 만큼 웃는 모습이 환하다. 봉선화다운 모습을 보이며 삶의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준다. 세상살이도 같다며, 내게 일상에도 좀 더 정성을 쏟으란다.
봉선화꽃에서 어머니와 누나가 보인다. 봄철 농번기가 지나고 초여름 농한기가 오면 마당 가 담장 밑에서 연분홍 꽃을 달기 시작한다. 활짝 핀 꽃을 따서 소금과 함께 찧어 손톱에 붙여 두면 붉은 물이 든다. 붉은색으로 곱게 물든 손톱을 보며 환하게 웃음 짓던 모습이 그립다. 지금은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십여 년이 되었고, 누나도 나이 팔십 넘은 노인으로 멀리 경기도 가평에 산다.
우리 집은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는 마당의 담장 밑에 심어 놓은 봉선화에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가 꽃을 망가트리면 몹시 안타까워했다. 누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니며 손톱에 꽃물을 들어 달라며 졸랐다. 지금은 두 분 다 봉선화꽃 속에 추억으로 남아 있다. 보고 싶고 그리운 어머니와 누나를 생각나게 한 꽃, 봉선화가 고맙다.
봉선화는 ‘나다움’을 지키며 연분홍 웃음을 짓는다. 아침부터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하루의 출발을 가볍게 한다. 헌화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한 보답이 과분하다. 처음 분에 옮겨 심을 때 정성을 쏟은 것 외는 별로 도운 게 없다. 가끔 물을 주고, 바람에 넘어지지 않게 지주를 세웠을 뿐이다. 자신의 분수와 형편에 맞게 자라는 봉선화의 겸손을 본다.
오늘 아침에는 봉선화가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지금·여기’를 열심히 살아가라며 웃는다. 사물을 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각도와 고도,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다양한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는 것은 편견 없이 대상을 보는 것이며 객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지난여름 봉선화 꽃씨가 영글었을 때 그 씨를 받아 보관하지 않을 정도로 무심했던 나다.
괜스레 기분이 좋다. 아침마다 분홍색 꽃을 맞는다. 작은 봉선화 몇 포기가 기쁨을 준다. 거실 창문을 열면 바로 보인다. 벌써 열흘이 넘었다. 예상보다 개화기가 길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세풍에도 꽃잎을 흔들면서 웃는다. 나도 매일 만나는 지인에게 웃음을 줘야겠다. 지난겨울의 모진 추위를 이기고 다시 만난 것은 큰 인연이다. 올여름의 시작이 봉선화꽃으로 행복하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