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필
분 단 의 여 진
전 창 범
“생사 여부 만이라도 꼭 확인해주세요”
“요즘 안 좋은 모습으로 꿈에 자주 나타나셔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ᆢ”
탈북민으로 국가대표 여자 리듬체조 선수단 코취인 그녀는
아시아 역도대회 참가차 평양방문을 2주 앞둔 나를 찾아왔다
때마침 양구에서 전국 리듬체조 대회가 열릴때다.
그녀는 평양 시내 한복판에 있는 조그마한 한옥 주택의 위치와
그집을 눈으로 내려볼수 있는 고려호텔 내의 장소가 개략 그려진 약도를
건네면서 “꼭 부탁 드린다" 며 두 손으로 내손을 꼬옥 잡는다
어머니 의 외모까지 설명을 마친
그녀의 촉촉히젖은 눈동자에는 애절함이 강하게 나타나있다
9년 전,
"같이가자“ " 너네들 끼리 가라,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몇일 동안 실랑이 끝에 그녀는 결국 어머니를 두고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돈을 벌어서 추후 에 꼭 모셔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날 밤 " 내 걱정은 말고 부디 행복하게 잘 살으라 " 는 어머니를 끓어
않고 두 모녀는 밤새 울고 또 울었다.
다음날, 다시는 못 볼지 모르는 어머니 얼굴을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이담에 꼭 모시러 오겠다” 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그녀의 가슴은 갈기
갈기 찢어지고 있었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후 그 눈물은 그리움으로 변해 그녀의 평생 눈물이 되었고,
다시 모시러 가겠다는 는 약속은 그녀의 가슴에 평생 못이 되었다.
그녀는 북한에서 유명한 리듬체조 선수 출신으로 북한 대표선수단 지도
자로 활동 중 남편과 어린 아들과 함께 탈북하였고
당시국내ㆍ외 많은 언론에 보도된 바도 있었다
그녀가 어머니와 이별의 아픔은 물론, 생명의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남편의 병 치료와,
어린 아들의 교육과 미래,
그리고 자유롭고 풍족한 삶이었다
탈북 3년 후 부터 그들의 탈북을 도와주었던 중국교포를 통해 어머니
소식을 주고받으며 일 년에 몇 차례씩 송금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소식도
없고 연락도 할 수 없어서 애가 탄다는 얘기다.
그녀의 얘기를 쭈욱 듣고 있던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이면서 꼭 도움을 주고 싶었다
실 향민이신 아버님께서 살아계실 때 KBS의“이산가족 찾기” 방송 시간
만 되면 TV 앞에 앉아 밤새 꺼~억 하는 신음소리 같은 울음을 토해내시며
우시던 생각이 났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보고 오겠다고 결심했고
그녀에게도 굳게 약속했다.
동시에 평생 고향 을 그리워 하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인 평북
구성군을 꼭 가보고 아버지 원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고 싶었다.
그것은 아버님 묘비에 새겨넣은 자식들의 약속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엿다.
2013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아시아역도 팀 선수권 대회” 는 북한에
서는 처음 개최되는 공식국제대회 이면서 남북분단사에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는 대회이다.
대회 규정에 따라 한국선수단이 참여하면, 대회 기간 내내 경기장에
태극기 를 계양 해야 하고, 대한민국 국호를 사용하게 해야 하고, 금메달을
획득 핳 경우 애국가 까지 연주해야 하기 때문인데 이는 남북분단이래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고, 북한 측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아주
예민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한국초청을 거부하다가 우리 측의 강력한 항의 와,
아시아 연맹의 대회취소 압박으로 겨우 참여가 결정된 우여곡절을
격은 대회였다
국내.외 언론들 또한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국 역도연맹 에서는 당시 한국실업 역도 연맹 회장직을 맡고있던
나에게 선수단장을 맡겼는데 나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선수단의 안전과 북한측의 대회규정 준수여부, 특히 가능성이 많지
않았던 금메달 획득(애국가연주) 등 걱정이 태산 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L 코취의 일과, 아버님고향방문 등 개인적인 일이 부담으로
더해져 밤잠을 제대로 잘수 없었다.
9월12일 김포공항 에서 40여명의 선수,임원,심판들 과 결단식을 마친후
언론들과 간단한 기자회견을 끝내고 장도에 올랐다.
비행기는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중국 북경에서 북한 측 항공기로 갈아탄 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여 호텥에 왔는데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안고 말았다.
선수단 숙소가 당초 고려호텔 에서 양각도호텔 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고려호텔에서 그녀의 모친 집을 살펴본다는 계획은 일찍부터 물 건너
가버렸다.
그녀의 애절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다음날 개회식장에서 경기장에 태극기가 당당하게 계양된 모습과,
“대한민국선수단” 피켓을 앞에들고 늠름하게 입장하는 우리 선수단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감격의 눈물을 감출수 없었다. 걱정했던 금메달도
예상보다 빨리 6개를 획득하여 평양 하늘에 애국가가 6차례나 연주되었다.
정말 모든 순간들 이 감격 이었고, 역사적인 순간들이었다.
국내언론에서는 이런 사실들을 대대적으로 보도(추후에 확인) 하였지만
북한언론 에서는 한국선수단 동향을 거의 외면 하였다
공식 스케줄이 순조롭게 진행 된 것과는 달리 개인적인 계획들은 모두
벽에 부딪 히고 말았다
L코취 어머님 동향은, 경기장 통근버스 노선을 평양역(고려호텔)쪽 으로
몇차례 변경해가면서 살펴 봤 지만 도저히 찾을수 없었고
아버님고향 방문도 북한측에서 난색 을 표해 이룰수 없었다.
평양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 했지만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서 기쁨을 느낄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를 애기했다
“괜찮아요, 수고 하셨습네다”
라는 그녀의 힘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실망스런 얼굴과,
한숨짓는모습과,
눈물젖은 눈동자가 머리속에 함께 그려지면서
내가슴도 덩달아 찢어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버지 산소에 가서 죄송 하다는 말을 하면서
아버지의 우시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내 가슴은 또 한번 아픔을 맛보았다ㆍ
6.25 전쟁 , 남북 분단의 비극
이것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비극은
거미줄 같이 보이지 않는 여진을 확산시키며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직.간접 적으로 찢어놓고 있다.
나도, 그녀도 또다른 사람들도 억울하게 이 거미줄에 역여있다
2) 시
영혼의 껍질
전창범
동공없는 희뿌연 눈동자가 미동도 하지않고
반쯤 벌어진 입술로 가쁜숨을 겨우 내쉬고 있다
"오신지 1년이 넘었어요,
아무도 못알아 보세요"
흘러 내리는 침을 요양보호사 가 연실 닦아 주면서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가 과거에 많은사람들 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 이었던 저명한
철학교수 였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날때 와는 달리 갈때는 자기의사가 존중되어야 한다 " 며
종교철학을 강하게 비판하던 그의 강의가 생각난다
그 강의에 적극 공감했던 나는 지금 이상황이 매우 혼란스럽다.
깔끔한 성격에 자존심이 강했던 그가 그의 철학과는 달리
끊어져가는 생물학적 끈 에 겨우 매달려
마지막 영혼의껍질 을 벗으려 안간힘을 쓰고있다.
마음이 무겁다.
살아 계실때 얼굴 한번 뵈려고 반나절을 달려온것이 후회스럽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기도를 한다.
"아버지하나님 하루빨리 그에게서 영혼의껍질 을 벗겨주시고
아버지 품으로 편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몇일후 ,
나의 상비약상자 에는 특별한 약봉투 하나가 추가되었다
거기에는
"노후대비 비상약(주의)" 라고 빨간글씨가 쓰여져 있다 .
24, 8 13
3) 시
폭 우
전 창 범
24양록제 전시용하늘이 절규하고 있다
양동이로 퍼붓듯 억수같이 장마비가 내린다
시뻘건 흙탕물이
금새 물골을 만들며 아래로 달린다
밤나무 성근가지에 얼기설기 지어진 까치집에는
사나운 까치 부부가 깃털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듯이 있다
밤낮없이 울어대던 참매미도, 종달이도, 논개구리도
하늘의 위세에 눌려 숨을 죽이고 있다
용케도 한 평 남짓한 정자각을 차지한 나는
정자각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굵은 물줄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아늑감을 만끽하고 있다
천둥번개가 계속되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바깥세상이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면서
모든 오물들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암덩어리 같은 삶의고통, 외로움
모두 함께 떠내려 가고 있다
알수 없는 희열에 점점 도취되고 있다
나는지금
“노아의 방주” 에 홀로 올라 타고 있는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