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부터 명상을 하며 자연스레 차를 접하게 되었다. 명상하면서, 또는 명상을 잠시 멈추고 말없이 차를 우려내어 마시는 것, 그것은 명상의 한 부분처럼 생각되었다. 인사동의 차 가게에서 저렴한 차를 소개받아 마셔 보았다. 그러나 그 맛은 내가 빠져들만한 맛이 아니었다. 절의 스님이나 차를 잘 아는 분들에게 가끔 귀한 차라며 대접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귀한 차'를 마시면서도 '맛이 좋다'는 생각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80년대부터 전남 보성에서 차 재배가 대단위로 이루어지면서 티백에 담은 차를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녹차가 유행을 탔다. 그러나 그 차도 내 입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차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20년 전 중국 항주일대를 여행하며 용정을 방문했고 거기서 용정차를 만났다. 그리고 그 맛에 반했다. 나는 수 백그램의 차를 사가지고 돌아와 종종 그 맛을 음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의 맛은 약해졌다. '왜 그럴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지낼 때 문득 '아, 내 몸이 "차"와 하나가 되는구나. 그래서 밖에서 들어오는 차의 맛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주에서 사온 차가 다 떨어진 후 나는 인사동의 차 가게에서 용정차라는 이름이 붙은 차를 구해 마셨다. 그러나 그것은 용정에서 마신 그 차가 아니었다. 인사동의 이 가게 저 가게를 돌며 용정차를 구해 맛을 보았지만 모두 내가 기대하는 맛이 아니었다. 몇 년 후 홍콩에 갈 기회가 생겨 중국 백화점에서 용정차를 샀는데 그 역시 내가 기대한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차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차에 돈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내 집에는 차가 넘쳤다. 지인들이 내가 차를 좋아하는 줄 알고 이런 차, 저런 차를 들고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가끔 무료할 때 이런 저런 차를 맛 보았는데 그러다가 한 차가 나를 사로 잡았다. 고요하고 깊이가 있는 차였다. 맛을 특정하기가 어렵지만 장중하여 무게가 느껴지는, 그래서 산란함을 눌러 차와 함께 고요하게 만드는 그런 차였다. 늦은 가을 낙옆이 진 후, 모든 화사함을 버리고 홀로 고요히 서있는 천년의 나무와 같았다. 그 차를 담은 봉투가 점점 가벼워지고 멀지 않아 그 맛에 작별을 고해야 할 때 나는 용정차를 다시 만났다.
두 달전 나는 예년과 다름없이 '서울카페쇼'를 찾았다. 커피와 관련된 부스를 대략 돌아본 후 나는 차와 음료 부스가 있는 맨 아래층의 전시장으로 향했다. 음료에는 눈길 조차 주지 않으며 전통차 부스를 찾아 전시장을 돌았다. 예년에 비해 참가업체수가 적었다. 매년 방문해 차를 샀던 '쌍계제다' 부스도 찾을 수 없었다. 몇 군데 되지 않은 전통차 부스를 한 곳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시음을 했다. 그리고 한 부스에서 오래전에 빠졌던, 지금도 여전히 사모하는 용정차를 만났다. 이른 봄 새싹이 땅속에서 뀸틀대는 듯, 그 생명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풋향과 은은한 단맛, 고소함, 맑고 투명함, 그려면서도 균형을 잡아주는 살풋한 씁쓸함...
내가 좋아하는 그 차를 공방을 찾아 온 분들과 나눌 수 있어 더욱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