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쭈욱 13개 절을 지나서 오늘의 본문 말씀을 주십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는 미래의 은혜의 자유롭게 하는 약속을 줍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리가 미래의 은혜의 이 약속을 믿으면서 살면, 염려는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풍성함"은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사도바울의 말씀은 진실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의 은혜의 약속을 가지고 염려의 불신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부딧히는 갖 가지 도전 앞에서 우리는 망설이게 되고 움추려듭니다. 왜 그럴까? 믿음이 연약해서일까요? 믿음의 방법이 안좋아서일까요? 믿음의 햇수 즉, 짠밥 수가 적어서일까요? 아니면 심장이 약해서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만큼 경험은 인간의 다음 행보를 넉넉하게 해 주는 안내자가 됩니다. 흔히들 길을 가보지 아니하고 개척하는 것을 우리는 탐험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우리가 잘 아는 인터넷익스플로(explore)가 탐험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요. 나는 이쯤에서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생각합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소하신 이래 맨 처음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갔습니다.
보스토크 1호로 무중력 상태의 우주권에 돌입하여 약300km의 고공에서 시속 1만 8,000마일 속도로 1시간 48분 동안 지구를 일주한 뒤 예정지에 귀착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우주는 어둡지만 지구는 파랗고 아름다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우리 믿음의 형제들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라도 한번은 처음으로 가는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모두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반대로 내가 지금껏 경험한 것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보지 못했던 곳, 내가 해보지 못했던 일 얼마든지 있습니다.
옛말에 立象盡意(입상진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이 세상의 다가 아니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문학작가나 예술가가 직접 보지 않아도 혹은 경험하지 않아도 창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의 별을 보고 전체 우주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도 우리는 지구만을 생각하는 데, 이것은 편협한 것입니다. 일월성신을 모두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그것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도 우리에게 주신 문화명령입니다. 온 천지를 다 주셨는데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1.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풍성하게 주셨는지는 성경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셨느니라는 말씀과 같은 모든 용어가 있는 것은 2절이고, 이 말씀의 일부가 있는 것은 무려 20,155절이나 있습니다. 얼마나 더 주셔야 할까요?
왕상 3:13 또 내가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리니 네 평생에 어느 나라에서도 너와 같은 자가 없게 하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2. 하나님 뜻을 분별하라
-롬 12장 2절에 하나님의 뜻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선해야합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 전서나 로마서를 여러 가지 민감한 문제를 다룰 때 항상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믿음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원천은 샘물이 솟아나는 밑바닥이기 때문입니다.
롬14장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화평)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창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 복을 단순히 육신의 복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흉년들이 들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굽 땅으로 내려갑니다. 또 거기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육신의 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바로가 사라를 다시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냅니다.
이때 아브라함에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 땅의 육신의 복만을 따라갔더니 큰 일이 생길 수 있었구나 내가 먼저 추구해야할 복은 단순히 이 땅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이구나 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11장 8절에서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가나안 땅)에 나아갈새 갈 바(하늘 본향)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와의 사건에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히11:16. 그들이(아브라함) 이제는 더 나은 (하늘)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그래서 창 13장에서 아브라함은 롯과 땅을 선택할 때 어떻게 합니까? 롯은 육신적으로 보기에 좋지만, 죄악의 땅인 소돔고모라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헤브론은 선택합니다. 그는 거기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습니다.
그러니까 창 12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고, 13장에서 가서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들을 때 어떨 때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어떨 때 아멘하십니까?
우리는 그 말씀에 내게 맞는 말씀일 경우에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아멘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진짜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가 언제입니까? 또 우리가 진짜 아멘 해야 할 때가 언제입니까? 그 말씀이 내게 맞지 않을 때입니다. 그 말씀이 나의 생각과 맞지 않을 때입니다. 그 말씀이 내 본성과 맞지 않을 때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정한 은혜입니까? 그 말씀이 내 생각과 맞지 않지만 내 뜻을 포기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또 내가 평생 확신하고 고집해왔던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꺾고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549장의 가사는 독일의 슈몰크(B. Schmolk,1704) 목사 부부가 32세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슈몰크 목사는 언제나처럼 아픈 몸을 이끌고 여러 지역을 심방하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두 아들이 부둥켜안은 모습으로 잿더미 속에서 타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기도가 찬송가 549장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달라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벤자민 슈몰크 | Hymnary.org
9 그러나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유혹에 빠지고 많은 어리석고 해로운 욕망에 사로잡혀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그것을 갈망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고 많은 슬픔으로 스스로를 찔렀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11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아 너는 이런 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 12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그대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할 때 그대가 부르심을 받았던 영생을 붙잡으라.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잡으라.
—그런 다음, 다시 올림픽 시합에 대한 오래된 감동적인 비유를 사용하여(고전 9:24; (빌립보서 3:13-14) 성 바오로가 그토록 사랑했던 비유, 그리고 디모데가 설교하고 가르칠 때 그의 옛 스승의 입술에서 자주 들었음에 틀림없는 비유인 그는
"하느님의 사람"에게 썩기 쉽고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비참한 투쟁을 딛고 일어서서 고귀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합니다.
참된 상인 영생을 붙잡으려고 애쓰라고 명한다. 여기서 강조점은 주로 "선한 싸움"과 "영생"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탐욕스러운 자들의 투쟁" 및 그것의 "비참하고 썩어질 면류관"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선한 싸움"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 대항하여 계속해야 하는 경쟁과 투쟁입니다.
이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그 싸움이 믿음을 위하여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이 믿음에서 힘을 얻고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사람"이 항상 그의 눈앞에 있어야 할 상입니다. 그것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관이 "죽도록 충성된 자들"에게 주실 생명의 면류관이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야고보서 1:12시련 가운데서도 인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험을 이기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임이요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이 있고 마귀의 시험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당연히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참는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습니다. 시험을 참으면 잠시 있다가 시들어질 승리의 월계관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은혜를 천대까지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흉년이 들자 그것을 참지 못하고 이방 땅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남편을 잃고 아들 둘을 잃어버렸습니다. 밑동까지 잘려진 그루터기와 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욥은 시험을 잘 참고 견뎠습니다. 욥은 마귀의 참소를 받아 큰 시험을 당했습니다. 재물과 자식을 잃었습니다. 몸이 병들었습니다. 아내는 저주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가운데서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 결과 욥은 믿음을 인정받고 난 다음에 전보다 배나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욥이 시험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욥기 23장 8-9절을 보면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고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전후좌우로 하나님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시험보다 더 어려운 것이 고난 중에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욥은 23장 10절에서 “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욥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위의 말씀 중에 하나님 뜻을 분별하라 -롬 12장 2절에
(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 만나인에게 주신 복음의 말씀은 살전5:16-18입니다. 함께 봉독하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항상 기도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 주 안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