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했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낭패’ 라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낭패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실패’란 말이 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거나 뜻한 대로 되지 않고 그르침이 ‘실패’의 뜻이다. ‘낭패’란 부주의나 준비 소홀 등 뚜렷한 원인을 있는 반면 ‘실패’란 최선을 다했으나 실패을 할 수도 있다. 전설속의 동물 ‘狼’과 ‘狽’는 항상 둘이 함께 있어야 잘 걸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두 동물은 잘 걸을 수 없는 다리의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속에서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자신이 가진 치명적 단점을 보완하고 대비하여 일처리를 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점을 보완하기 보다는 숨기거나 포장하려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번만은 괜찮겠지 하는 요행을 바라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낭패는 낭이라는 동물과 패라는 동물처럼 단점을 통해서만 들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버스가 고장이 나서 시간을 맞추지 못해 낭패를 본 경험도 있다. 정부의 정책 발표를 믿었다가 애꿎은 시민들이 낭패를 볼 때도 있다.
이처럼 낭패의 경험 가운데는 수동적 낭패가 있는가 하면 능동적 낭패도 있다. 수동적 낭패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이나 잘못된 정책이나 제도 등으로 곤란함을 당하는 경우를 말한다. 능동적 낭패란 준비부족이나 소홀로 인하여 겪는 잘못된 경험을 낭패라고 말한다. 이 글에서는 오래된 일이지만 능동적 낭패에 관해서 들춰보고자 한다.
유‧소년기 시절은 숫기도 많이 부족하였지만 병약한 신체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심으로 인한 성격과 함께 스스로를 위축시키는 삶의 극치였다. 칭미의 말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기억이 없는 유‧소년기를 보낸 나에게는 모든 일이 두려웠다. 학교 가는 일도 두려웠다. 오늘은 친구들에게 어떤 말을 들을까? 선생님에게는 어떤 핀잔의 말을 들을까? 늘 조마조마한 시간의 연속 이었다. 그러니 등교를 하거나 하교를 하는 시간도 대부분 혼자서 다녔다. 혼자서 다니면 따돌림을 당하거나 놀림거리가 되는 일이 없기 때문 이었다. 혼자서 걸으며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괴롭힌 친구를 열심으로 당수를 익혀서 괴롭힘 당한만큼 친구를 멋있게 무릎 꿇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걷는 일은 온통 나만의 세상이 되었었다. 어린 시절 일제 강점기의 영향으로 가라데와 같은 무술을 당수로 불렀다. 당수는 한자로 쓰면 당나라 ‘唐’에 손 ‘手’이다. 정확히 일본의 입장에서 말하면 외국 무술이라는 뜻이다. 당나라는 동양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제국이었고 당시 세계 정세에 어두웠던 왜인들은 자신들 것이 아니면 싸잡아 당나라 것이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이 아닌 외국인은 모조리 당인이라 퉁 처서 불렀다고 한다. 어쨌든 당수의 상상은 고슴도치의 바늘가시와 같은 나를 보호하고 위안하는 상상의 보호막이 되었다. 고슴도치는 땅을 파서 굴을 만들지 못하며, 온몸을 덮고 있는 바늘가시는 자기 몸을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왜소하던 체격이 몰라보게 성장하여 또래의 친구들에게 체력으로도 밀리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태권도를 배우고 같이 입관한 친구들보다. 빠르게 승급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는 또 다른 자신감으로 연결되면서 나 자신을 개조하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그중하나가 열등감에 사로잡혀 초등학교와 중학교 9년을 친구들과 말 한마다 나누지 못한 성격이 대학에서는 단 한번이라도 대표 자리를 내어 놓은 때가 없을 만큼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모되어 갔다. 대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학과의 각종 행사의 사회를 도맡게 되었다.
사회를 보면서 재미있게 진행한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급기야는 모 여고 동창회 모임에 사회자로 초대를 받게 되었다. 같은 학과 여학생이 내가 진행하는 것을 보고 총동창회장에게 연결하여 승낙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때는 YMCA 같은 곳에서 사회자 강습을 간헐적로 하기는 했어도 요즈음과 같이 레크리에이션 지도자 자격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시나브로 진행하는 솜씨가 늘기는 했지만 원정사회를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음에도 아무생각 없는 사람처럼 덜컹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사실 유능한 사회자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입담과 악기를 한두 개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했고 무어보다 노래 솜씨가 있어야 했다. 악기는 기타코드 한두 번 잡아본 것이 고작이었고 노래는 대중 앞에서 불러본 경험이 없었다. 이러니 반쪽도 아닌 삼합 중 입담하나만 가지고 사회를 보겠노라고 했으니 시작부터 잘못된 일 이었다. 강당을 가득 메운 회원숫자에 주눅이 들고 말았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반사경의 햇빛처럼 강하게 쏘아져 왔다. 마이크를 잡은 손이 심하게 떨림을 느꼈다. 학과 친구가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박수를 선도하며 용기를 불어 넣어 주느라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사실 몇 번의 학과 사회를 성공적으로 하였다는 칭찬이 교만한 마음 되어 준비까지 소홀하였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 이었다. 생땀을 흘리며 근근이 진행을 하고 있는데 맨 앞줄 맏언니 격 되는 분이 저를 불렀다. 마이크를 넘겨드리자 사회자 바지 지퍼가 열렸다는 것이었다. 얼른 고개를 숙여 바지 지퍼를 확인하는 순간 강당을 가득 메운 웃음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어떻게 끝맺음을 했는지 모른다. 낭패도 이런 낭패는 없다. 그날 이후 사회에 대한 트라우마가 나를 괴롭혔다. 그 일이 있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지속적인 자기 개발을 통하여 재직하던 대학의 모든 사회는 도맡아서 보게 되었다. 아울러 철저하게 준비를 하여 낭패를 당하는 일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유비무환이라 하지 않았는가?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낭패란 없다. 아니 있더라도 최소화 할 수 있음을 굳게 믿는다.
첫댓글 최선배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학창시절에 명사회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버들잎 외로워 노래부르면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지금도 섢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