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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문헌에 나타난 예배 이해
1. 들어가는 말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모여 드리는 예배는 보통 주일 낮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회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구역예배, 철야기도회, 예식예배 등 많은 예배들이 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예배에 참여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일주일에 평균 3회 정도는 예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일 년이면 156회, 10년이면 1,560회 정도이며, 70세까지 산다고 가정할 때 무려 10,920회 정도 예배를 드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한 번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바른 예배인가, 예배자가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어떤 때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어떤 때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른 채, 그저 습관적으로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는지, 무엇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지 의식 없이 예배에 참여하기도 하고, 틀에 박힌 형식적인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다. 진정한 예배의 의미와 예배의 감격을 상실한 무감각적인 예배를 드리는 경우들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향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다. 또한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우리의 일상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그 삶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의 기쁨과 감격을 체험하지 못하며, 예배를 통해 자신이 변화되는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많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예배의 회의론이나 예배의 갱신론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올바른 예배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어떠한 자세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시는가? 성서가 말하는 가장 바람직한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성서가 예배라는 주제 아래 일관되고 확정적인 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는 어떤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는 것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단지 이 문제에 대해 성서의 각 책이 그 책과 관련된 공동체의 정황에 따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단언적인 답을 주지 못할 뿐이다.
이 시간은 이 문제에 대한 요한의 이해를 찾아보고자 한다.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기사는 예배에 관한 요한의 이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0~24)
이 구절은 예배에 대한 연구의 시금석이며, 예배라는 주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신약 구절이라고 하는 존 맥아더의 주장처럼, 요한의 예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필수적인 본문이다. 따라서 이 시간은 요한복음 4장을 중심으로 요한 문헌에 나타난 바람직한 예배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누구에게 예배드려야 하는가?
예배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누구에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너무도 당연한 답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또한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계명인 십계명에 의하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시며, 다른 존재들은 결코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는 혹시 그들이 신적인 존재라고 일컬어진다 할지라도 그렇다. 유대인들은 이 명령을 철저히 준수했다. 이 명령에 대해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다른 존재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상숭배요 하나님에 대한 커다란 죄악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대교 전통을 이어받은 기독교인들 역시 이 전통을 그래도 지키고 있는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 아니면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 유대교와는 차이가 있는가? 또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예수님 역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초기 교회의 상황에서 상당한 논란거리였던 하늘의 존재인 천사들은 어떠한가? 그리고 또한 다른 신적인 존재들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유대 종교적 전승을 이어받고 그들의 배타적인 유일신론을 공유한 기독교는 어떤 점에서 유일신 신앙에 대한 일종의 실제적인 실험대였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며, 또한 그분을 예배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유일신 신앙에 결정적인 도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기독교는 천사숭배 사상이 만연한 이교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습대로 천사와 같은 천상의 존재들에게 예배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 또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당시의 세계관으로 볼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중간적인 존재들이 있었다. 천사들, 승천한 인간들, 인격화된 신적 속성들, 로고스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이 같은 존재들을 신으로 떠받들고 숭배했으며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일신 신앙을 철저하게 지킨 유대교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엄격한 선을 그어 철저히 구분했다.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결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종교적 행위에서 예배는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을 구별하는 표식이었다. 이 때문에 어떠한 피조물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비록 유일한 신적 존재는 아니라 할지라도,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달랐다. 비록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을 범할 가능성 때문에 초기에는 논란이 있었고, 유대교의 영향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늘에 두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교로 보여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중재적인 역할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에 근거해 예수님을 예배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경향이 점차 나타나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신앙의 현저한 발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요한 문헌에 비교적 잘 드러난다. 복음서 중 가장 발전되고 고등한 기독론을 가진 요한 문헌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란의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요한복음의 중심 사상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기독론이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라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 소개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서론 격인 로고스 기독론에는 예수님을 창조 사역과 관련시킨다. 로고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다는 것이다. 요한은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다”고 진술한다. 이 구절에 전치사 ‘διἄ’를 사용함으로 인해, 창조의 중재자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님은 창조의 사역에 하나님과 함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자가 아니라 창조의 중재자, 동참자이다(1:3). 또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재적인 존재이다(1:51). 요한의 예수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신다(10:30, 38). 그러나 이 주장을 문맥과의 관련하에서 해석하면, 존재론적인 하나 됨을 선언한다기보다는 기능상의 하나 됨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에게 복종해야 하며(4:34), 아버지는 아들보다 크다(14:28)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함께하신 분으로 소개하면서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를 연결하는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중재자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요한의 기독론적인 관심은 예수님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고자 하는 의도를 명확히 한다.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예수님을 천지 창조 이전에 계신 선재론적인 존재이며, 창조 사역에 관여하는 분으로 소개하는 것은 예수님과 모든 피조물을 구별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선재론적인 존재이며,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신 분이다. 비록 창조자는 아니지만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늘의 영역에 속한 분으로서, 모든 주권이 그에게 있다.
또한 요한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라고 표현하고 있다(요3:16, 18). 예수님을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곧 독생자라고(요1:18)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가장 바르게 계시할 수 있는 분이고,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자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선언한다. 이전에 하나님을 본 경험은 모두 간접적이거나 불완전한 것이요, 오직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할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서 요한복음의 독특한 기독론인 ‘ἐγώ ἐιμί’(나는 ~이다) 기독론은 예수님께서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ἐγώ ἐιμί라는 표현에는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의 기독론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도마의 입술을 통해 고백 된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다”는 증언 역시 요한의 이러한 의도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기독론이 발전하면서 점차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중재적인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고백하는 고등한 기독론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한의 기독론적 경향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예배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피조물처럼 예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예배와 관련하여 이 문제에 대해 보다 분명히 기술하고 있는 책은 요한복음보다 후에 기록된 요한계시록과 이사야 승천기이다. 이사야 승천기는 요한계시록과 거의 동시대에 기록되었으며, 기독교적 기원을 가진 책이다. 이 두 권의 책에는 “과연 천사들과 같은 천상의 존재들에게 예배 해야 하느냐?”와 “예수님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19:10에는 요한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때 요한은 이 말을 전한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한다. 요한이 천사 앞에 절하려 하자 그 천사는 요한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하면서 말한다.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22:8~9 참조). 그렇다면 요한이 그 천사에게 예배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천사를(22:8) 계시를 주는 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즉 그 천사를 계시자로 여겼기에 그에게 경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요한에게 경배받기를 거절함으로 이 지위를 부인한다. 그 천사의 부인은 천사와 같은 천상적인 존재들이 선지적 계시의 초월적인 수여자가 아니라 계시를 전달하는 피조물에 불과하며, 단지 계시를 전달하는 도구인 선지자들과 요한의 형제와 함께 종일 뿐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이어서 요한은 천사 대신에 계시의 참된 초월적인 근거인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라”는 지시를 받는다(19:10; 22:9). 사실 천사들 역시 하늘의 존재로 영화로운 위치에 있었다. 마태복음 28:4~5에 의하면 수직하는 자들과 천사가 여인들에게 나타났을 때, 여인들이 두려워 떨었다.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누가복음 24:5에 의하면 “여인들이 천사들을 두려워하여 얼굴을 땅에 대었다”고 한다. 여기서 엎드린다는 것은 신께 드리는 예배의 몸짓이라 할 수도 있고, 상급자에게 존경을 표하는 일반적인 몸짓일 수도 있다. 또한 두려움과 정신을 잃는 모습은 하나님의 환상이나 하나님의 목소리 혹은 다른 종류의 이상적 현상에 대한 계시를 받은 자의 반응을 일반적으로 특정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반응에는 천사숭배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이라고 주장하는 왕들에게 행하는 존경의 표식과도 같이 우상숭배의 뉘앙스를 주는 엎드림의 행위는 유대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천사의 숭배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유일신론을 범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천사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천사들은 계시를 전달하지만, 경배를 받지 않아야 된다는 점에서(19:10; 22:8~9) 기독교 예언자들과 동료–종들이며,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실행하는 천사들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지자들과 순교자들의 동료–종이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보다 분명하게 천사 예배를 금한다. 하나님의 종들인 천사들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권면한다.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진술은 천사와 같은 천상적인 존재들에게 예배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를 지적하고자 함에 그 하나의 목적이 있다.
그러나 기독론적 관점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달랐다. 물론 요한계시록에서도 처음부터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등하다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진술한다. 요한계시록 서두에는 계시의 전달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1:1).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예수님이 천사에게, 천사가 요한에게 그리고 요한이 기독교인에게 계시를 전달한 것이라고 하는 전달 사슬을 제시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계시를 전달하는 도구와 계시자를 구별하려 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자의 부류에 속한다. 반면 천사는 요한과 동일한 부류인 계시를 전달하는 도구로 간주된다. 이 같은 요한의 의도는 예수님을 천사를 비롯한 다른 존재들과 구분하고자 하는 데 있다. 천사는 계시를 전달하는 도구이기에 예배를 받을 수 없으나, 예수님은 계시자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예배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1:1),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으나(5:7), 예배를 받지 않아야 하는 종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5:8~12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려지는 분명한 신적 예배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이 사건의 배경은 하늘 보좌가 있는 방이다. 이 방은 천사들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이다. 5:12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표현은 찬미의 용어들로써, 유대 문헌에서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에게도 적용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이러한 천사의 찬송을 예수께 돌린다. 이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예배의 대상으로 간주하려는 것이다. 또한 보좌 환상의 절정인 5:13에서는 예배 그룹이 확장되어 전 피조물을 포함하며, 하나님의 찬미(4:9~11)와 어린양의 찬미(5:9~12)가 하나의 찬송에 결합되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드려진다. 이 찬송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의 정점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드려지는 우주적인 예배를 예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연결시킴으로 예수님이 예배의 대상임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예배의 택일적인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마땅한 영광을 공유하는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드려지는 특별한 예배(5:9~12)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연합된 예배이다. 그러나 형식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우선권을 갖는다. 요한은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를 공유한 것으로 표현하지만(3:21; 22:1), 주로 하나님만을 보좌에 앉으신 분이라 부른다. 그러면서 때때로 요한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단일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사야 승천기에도 하늘에서 예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한 환상과 천사들에게 드리는 예배를 금지하는 가르침을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 승천기에 의하면 두 번째 하늘에 도달한 이사야가 그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천상의 한 존재에게 경배하기 위해 엎드린다. 그를 안내하던 천사는 그에게 경배하는 행동을 금지한다. “여섯 층의 하늘에 있는 천사나 옥좌에 예배하지 말라 내가 일곱 번째 하늘에서 너에게 말하기 전에는 일곱 하늘로부터 온 보좌나 천사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를 이끌기 위해 그곳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이사야 승천기 7:21~22). 후에 이사야가 그의 안내자를 향해 ‘나의 주’라고 부르자 천사는 “나는 너의 주인이 아니라 너의 형제-종이다”라고 말한다. 천사에 대한 예배를 금한 행위는 경배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며 천사들은 선지자 이사야보다 월등한 존재가 아닌 그의 형제–종이라는 사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천사들에게 예배를 금지하라고 한 이사야 승천기는 예수님과 성령의 경우에는 예배드리고 명령한다. 그리고 이사야는 환상 중에 예수님과 성령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보았다. 비록 천사들이 하늘에 속한 신적 존재이지만 이사야 승천기는 그들에 대한 예배는 금하며, 예수님과 성령은 하나님과는 구별된 존재이지만 그들 역시 예배의 대상이며, 또한 예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님에 대한 예배는 유일신론을 지키려는 기독교의 사상에 중대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허락할 수 없었으나,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배는 교리적으로 결정하기 이전에 초기 교회의 찬송시들과 예배에 자발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예수님께 하나님 칭호를 직접 드리는 행위를 포함한 고등 기독론이 매우 초기 예배의 상황에서 형성되어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었다. 요한계시록과 이사야 승천기가 서로 의존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관한 내용의 일치는 이러한 당시의 교회적 상황을 반영해 준다.
요한 문헌을 근거해 볼 때, 초기 교회는 천상적인 존재라고 할지라도 다른 피조물들에게 드리는 예배는 단호하게 금지한 반면, 예수께 예배드리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인정되었고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