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길게 요약되어 다시 수정하여 올리겠습니다.(10분이 넘습니다)
성 요셉 신학교
김영화 순이바르바라
▣ 첫인사(기도)
▣ 성 요셉 신학교
성요셉 신학교는 1855년 매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장주기 요셉 회장이 제공한 3칸 짜리 초가집에 페낭 유학생 3명을 대신하여 6명의 신학생을 받아들이며서 시작되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푸르티에 신부를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처음의 명칭은 배론 신학교였으나 1861년 10월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조선 교회를 붕헌하면서부터 배론 신학교는 성 요셉 신학교로 되었습니다.
1900년 이후 주변 본당의 신부님들이 배론을 방문하여 폐허가 되고 겨우 남은 초가에서 신학교가 초가로서 방 두 칸, 부엌 한 칸이며 윗방이 교장 신부의 거실 겸 제대칸이고 아랫방이 학생 10명 내외의 공부방 겸 기숙사이었다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 교육과정
신학교의 교육과정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교육과정에 맞춰졌을 거라고 하며 일과표는 페낭 신학교의 시간표 참조하면 된다고 합니다. 교수진은 2명으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이며 장주기 회장은 신학교 책임자인 푸르티에 신부의 뜻을 헤아려 정성을 쏟으며 한문을 가르쳤으며 신부의 한글 선생을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라틴어반은 훗날의 소신학교 과정이고 1861년 이후 귀국하는 페낭 유학생들의 교육과정은 대신학교 과정이었습니다. 1859년 라틴어 과정이 2개 반이었고 수사학과정과 철학과정이 있었습니다. 1861년 4월 페낭 유학생 이 바울리노가 귀국 편입하여 조선대목구 소신학교는 조선 대목구 대·소신학교로 발전하였습니다.
1862년 프티니콜라 신부가 배론으로 와 라틴어반을 담당하였고 수사학과정 3명은 철학반으로 올라갔으며 6월말에는 임빈첸시오와 김요한 사도가 귀국하여 배론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의 평가서에는 학업 수행 능력과 성격과 품행 등이 표기되었다고 합니다.
1863년 임빈첸시오와 이바울리노가 각각 소품과 삭발례를 받아 처음으로 성직자가 탄생하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 전에 신학생은 라틴어과정 4명, 신학과정 2명, 삭발례자 1명 소품자 1명이었습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사제를 1명도 배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좁은 오두막집에 갇혀 갖은 질병과 두려움으로 고생을 하고 소리를 죽여가며 글을 읽어야 했고 마음놓고 산보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성요셉 신학교는 1866년까지 12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 성 요셉 신학교 이전의 신학생 교육
배론 신학교 이전의 신학생 교육은 1850년의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예비 신학교>로 이동 임시 형태의 교육이었으며 1836년 모방신부는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파리외방 극동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1845년에는 김대건 부제 입국하여 2명을 교육하였고 페레올 주교는 유학을 보내기 위해 국내에서 한두명의 신학생을 양성 지도했다고 합니다.
1850년 이후는 임시 정주형 신학교로 신학교 겸 숙소로 사용할 집 한 채 마련하여 배티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대목구장에 의해 조선 교회 안에 정식으로 설립된 첫 조선 대목구 신학교입니다. 신학생은 5명이었고 유학 준비 기관으로 소신학교이었다고 합니다. 배티 신학교는 배론 신학교가 설립되는 계기가 됩니다.
▣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는 중심에 섰고 임지가 신학교가 된 첫선교사이며 식물학과 여러 분야의 과학적인 지식이 풍부하여 신학교 주변의 식물을 채집하여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으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1874년 그의 업적을 기려 푸르티아에아라는 장미과의 한 속을 설정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윤노리나무)
푸르티에 신부는 지혜롭고 인자하며 부지런하였고 자기 희생과 겸손의 미덕을 가지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신심생활 입문의 번역을 마무리하여 베르뇌 주교가 그것을 인쇄하도록 도왔고 조선어한문라틴어 사전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10만 어휘를 모은 조선어 연구를 펴냈으나 다 소각당하였습니다. 그의 서한에는 사목활동 외에 백성들의 비참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박해 순교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프티니콜라 신부는 푸르티에 신부를 도와 라틴어를 가르쳤습니다. 1854년 상해에서 베르뇌 주교를 만나 조선 선교사가 되었으며 조선이 거룩하고 축복받은 순교자들의 땅이라고 하며 이 눈부신 나라로 보내주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배티를 중심으로 사목하다가 1861년 9월 신학교로 보내졌습니다. 동료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프티니콜라신부에게서 지칠 줄 모르는 헌신과 열정과 순명, 섬기는 자세, 솔직함, 인내심과 평온에서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심한 병에 시달렸으나 신부는 고통은 선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참된 보물이고 지나친 고통은 영혼에게는 대단히 큰 재산이며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이라고 하였습니다.
▣ 박해와 순교
이들은 1866년 3월 남종삼 요한을 체포하러온 의금부 도사가 박해를 피해 가던 한 여교우를 앞세워 배론을 급습하여 체포되었습니다. 두 신부님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같은 감옥에 갇혀 고문도 함께 받고 3월 11일 새남터에서 함께 순교하시고 함께 묻히셨습니다. 박해가 수그러들자 신자들은 유해를 발굴하여 왜고개 세묘지로 옮겼으며 다시 용산 샤르즈뵈프 신부에게 보내졌다가 1900년 명동성당으로 이전되어 현재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신부의 유해는 명동 대성당 지하에 모셔져 있습니다.
장주기 요셉 회장은 다블릐 주교와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치명하였고 신학생들 중 김 요한 사도, 유안드레아, 권요한은 서울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두 신부님은 아직 시복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확실치 않으며 현재 추진 중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성 요셉 신학교 의의
1) 첫 정주형 대목구 신학교로 사제 양성을 위한 대소 신학교를 겸비하였다는 것
2) 신학교의 삶은 미래의 수확을 약속하는 신앙적인 탐험이기에 사제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해도 한국교회에 영성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
3) 순교의 은총을 받아들인 두 신부님과 신학생들, 장주기 회장과 배론 출신 교우들이 끝까지 믿음으로 버티며 하느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
4) 전통적인 교육적 인간상과는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조선 사회의 전통교육이 근대교육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
5) 프랑스 신학 교육을 이땅에 접목시킨 최초의 교육기관이라는 점이며
근대 교육사적 의미로 1885년 부엉골에서 시작하여 용산으로 자리를 옮긴 예수성심신학교 시대에서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50년 한국 전쟁 때 배론 신학교의 건물이 전소되었으나 성지개발을 하면서 복원되었고 2001년 충북 도기념물 1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맺음말
신학교는 교회의 심장이라고 합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본 회칙 중 첫째가 적합한 사람을 선발하여 성직자로 양성시키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황에 사제양성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사제 양성을 위해 모든 것을 뒷바라지 하며 신학생들을 보호하는 주교님과 신부님들의 희생과 헌신은 그 자체가 감동적이어서 우리 신앙 생활에 사제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지를 알게 합니다.
죽을 때까지 떠난다는 정신의 아시아 선교가 목적인 파리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자기 뒤의 문을 닫고 떠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들의 선교정신과 순교 정신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참으로 소중하게 이어가야 할 믿음의 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 헤어짐(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