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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암계(暗計)의 시작(始作) [1]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는 유명한 관광지이자 바다와 육로 를 잇는 교량적인 위치에 있어서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석양 무렵이었다. 백색의 경장을 입은 미모의 중년여인이 선착장에 내려섰다. 그녀는 전신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고고함을 은은히 풍겼으며 허리에는 쌍륜 화극을 차고 있었다. 그녀가 선착장에서 대여섯 걸음 나왔을 때였다. 문득 청삼을 입은 육순 가량의 노인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여인을 보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누구요? 화절 아니오? 이게 대체 몇 년 만이오?" 백의경장 차림의 여인은 다름 아닌 고혜원의 사부인 화절 서하경이 었다. 세인들은 그녀가 쌍륜화극을 휘두르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화절이란 별호로 불러왔다. 화절 서하경도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 누군가 했더니... 원아를 제자로 데려가던 때였으니 벌써 십 삼 년이나 흘렀군요. 한데 어쩐 일인가요?" 노인은 태연히 둘러댔다. "바람 쐬러 나왔소이다. 혹여 수지비(水地比) 괘가 맞을까 하고... ...." 수지비는 감(坎)이 상괘이며 곤(坤)이 하괘로 사람을 만나 친밀하 게 지낸다는 의미가 내포된 점괘였다. 실상 그는 점괘로써 자신이 신통력을 지녔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그가 점술가의 복장인 청삼을 입고 나타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하경은 놀랍다는 듯 감탄을 터트렸다. "과연... 도가(道家)의 심법을 수련한 분이라 다르군요." 노인은 조화상인으로 불리는 요극초란 점술가였다. 그는 한때 정일파(正一派)에서 재(齋)나 초(醮)를 감재(監齋)하는 중진 도사였는데 자진 이탈하여 속세로 나와 자신의 속마음을 감춘 채 무림오절과 친분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가 속해 있던 정일파는 태일교(太一敎)나 전진파(全眞派)와 함께 도교의 전통 깊은 일맥을 이루어왔다. 무당파(武當派)와 전진파가 북방에서 세력을 확장한 반면 정일파는 남부 지방에서 터전을 닦은 유수한 문파였다. 따라서 그는 무림에 널리 알려진 도인이었고, 무림고인들과도 폭넓 은 교분을 쌓고 있었다. 서하경도 지난 날 그를 몇 번 본 일이 있었 기에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요극초는 정색을 했다. "과찬의 말씀을....... 한데 어디를 이리 바쁘게 가는 것이오?" "호호! 제자를 만나보려고요." 정확히 말하면 서하경은 유청풍이 정말 수리마제 단궐의 전인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하산하여 와호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요극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자와 헤어져 삼 년이 지났으니 보고 싶기도 하겠구려." 서하경은 갑자기 서둘렀다. "벌써 날이 저무는군요.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주위는 어느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요극초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어허, 무슨 섭섭한 말씀을... 와호장은 하루 이틀 거리도 아니건 만 이 지우의 집을 지척에 두고 밤길을 재촉하겠단 말이오?" 서하경은 잠시 망설였다. 사실 날도 저물었지만 남해(南海)에서부터 장시간 배를 타고 온 터 라 다소 피곤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 다. '이 자는 소실이 무려 아홉이나 된다던데.......' 요극초는 눈치가 빨랐다. "허허, 모두 휴가를 보냈소이다. 집에는 하녀들뿐이니 안심하시구 려." 서하경은 비로소 수락하는 뜻을 비쳤다. "그럼, 폐를 끼쳐야 되겠군요." "오히려 영광이외다." 그는 앞장서서 그녀를 안내했다. 요극초가 사는 장원은 조화산장(造化山莊)이라 불렀다. 그것은 점(占)을 치는 그의 장기도 장기려니와 기관지학(機關之學) 에도 밝은 그가 자신의 장원을 직접 설계하여 지었기 때문이었다. 소 문에 의하면 그의 장원에는 무궁한 조화가 깃들어 있다고 했다. 조화산장은 양자강이 부채꼴로 회돌이 치는 하구(河口) 모래톱에 있었다. 유구한 세월 동안 형성된 모래톱은 숲이 우거지고 꽃들이 만 발하여 절경을 이루었다. 서하경과 요극초는 찻잔을 앞에 놓고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며 담 소를 나누었다. 그녀는 금황색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표정이 환해졌다. "좋은 사봉용정(獅峯龍井)이군요." 사봉용정은 가장 최고급 녹차로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항주(杭 州)가 주산지였다. 입 안에서 맴돌던 담백한 차 향기가 실내로 은은히 번져나갔다. 요극초는 겸손해 하면서도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지우가 흡족해하시니 기분이 좋소이다." 문득 서하경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요즈음 비등원주는 별고 없죠?" 요극초는 짐짓 미안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근에는 만나지 못했소이다. 아시다시피 내가 정일파에서 나왔을 때 사문의 비학(秘學)이 담겨진 비급을 가졌다고 모두들 오해했지요 . 만일 그가 뒤를 봐주지 않았더라면......." 서하경은 의아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가요? 한데 도장이 금황옥진비결(金皇玉眞秘訣)을 지녔다고 다시 소문이 나도는 이유는 뭐죠?" 요극초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벌써 들었소?" "배에서 무인들이 얘기를 나누더군요." "이십 년 전, 화절이 옥진천사(玉眞天師)를 만나고 돌아간 다음 나 도 그 방에 갔었으니 어쩌겠소. 오해를 살밖에... 그저 입을 다물고 지낼 수밖에 없는 신세라오." 일순 서하경의 눈에 처연한 빛이 아스라이 스쳐갔다. "하필 그날......." 정일파에서는 장문인을 천사(天師)라 불렀다. 천사 옥진상인은 도교 최고의 내가심법이 기록된 금황옥진비결이란 비급을 보관하던 중 암습 당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금황옥진비결을 창안한 사람은 정일파의 삼십 육대 천사를 역임한 장종연(張宗演)이었다. 그는 원 세조 쿠빌라이(忽必烈) 칸(汗)도 그 실력을 인정할 만큼 남방(南方)의 도교를 일거에 부흥시킨 대단한 능력자였다. 그러한 인 물이 만든 비급이기에 상상 못할 오묘함을 지녔으며 당연히 탐내는 사람도 많았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그 심법을 익히게 되면 어떠한 마성도 제거할 뿐더러 영생불사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금황옥진비결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었다. 요극초는 분개하여 억양을 높였다. "모두가 다 날 모함하는 소리요!" 그때였다. 갑자기 서하경의 안색이 홱 변했다. '윽, 이 자가.......' 그녀는 무공을 사용할 엄두조차 못 낸 채 상체를 휘청거렸다. 요극 초는 그녀를 바라보며 음산한 흉소를 흘렸다. "흐흐흐! 차 속에 수면제를 조금 넣었지. 그러니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요." 아무리 서하경이 초절정 고수라 해도 차 속에 섞인 무색무취한 몽 혼약을 식별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분한 나머지 이를 빠드득 갈아붙 였다. "이... 간악한 놈!" 요극초는 탐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며 말했다. "흐흐, 이제 순순히 금황옥진비결을 내놓으시지......."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되려 서하경에게 비급을 내놓으라고 협박하 고 있었다. 서하경은 아미를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하면 옥진상인을 왜 만났느냐?" 서하경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 이제 보니 네놈이 그 분에게 독을 썼구나!" "그야 물론이지. 한데 그 늙은이 몸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전후사 정을 미뤄볼 때 틀림없이 그 늙은이가 널 부른 것은 금황옥진비결을 맡기려 했기 때문이야. 흐흐... 그런 사실은 오직 나만 알고 있는 것 이지." 서하경은 그의 교활함에 치를 떨었다. "악독한 놈, 그럼 네가 가졌다고 헛소문을 퍼트린 이유는 뭐냐?" "그야 다른 사람이 널 노리면 안 되니까. 게다가 또 한 가지 이유 가 있지." "그게 뭐냐?" "흐흐, 그런 소문이 나돌면 이상하게 생각한 네가 제 발로 날 찾아 와서 물어볼 게 아니냐? 지금처럼 말이야." 서하경은 그의 교활무비함에 머리가 다 어지러워졌다. 막 발작하려 던 그녀는 전신이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다탁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 안 되는데.......' 요극초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안아들며 음험하게 웃었다. '세상에는 오직 나만 알지. 금황옥진비결을 이 계집이 지니고 있다 는 사실을.' 그는 무인연락소를 통해 얼굴도 모르는 대통좌로부터 명령을 받았 다. 그것은 화절을 납치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을 취했다. 명령을 실행하고 자신의 야망 또한 달성하게 된 것이다. [2]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자 중원의 산은 만산홍엽(滿山紅葉)이 되었다 . 한데 하늘은 먹장구름이 잔뜩 끼여 한바탕 벼락이라도 내리칠 것만 같았다. 정오 무렵. 개봉의 소문난 만두집 만미당에서 기물이 부서지는가 하면 비명소 리가 터져나왔다. 와장창! 퍽! "으윽!" "이런 뻔뻔스러운 놈! 빚지고 큰 소리는......." 곰같이 생긴 장정 두 명이 육십여 세쯤 된 외팔이 노인을 개 패듯 이 두들겨 패고 있었다. 흉측한 인상의 거한들은 와호장 소속의 쌍곰보 형제인 팽고(彭賈) 와 팽소(彭巢)였다. 그들은 개봉의 무법자이자 해결사로 소문이 자자 한 자들이었다. 오른 팔이 절단된 노인은 바로 유청풍의 부친인 유대진(柳大進)이 었다. 그는 매를 견디다 못하여 마침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만미당의 한쪽 옆에서 피골이 상접한 비쩍 마른 갈곤태가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어이, 유대진, 언제 다 갚을 거야?" 유대진은 고통으로 인하여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일어났다. "갈총관, 여유를 주시오. 이자는 꼬박꼬박 상환하고 있지 않소?" 갈곤태는 느끼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흐흐, 이러다간 원금을 한 푼도 못 갚아. 기한을 정하란 말이야." 그의 주요업무 중 하나는 채무관계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여우가 뼈를 갉아먹듯 비쩍 마른 자가 악착스럽게 돈을 받아낸다고 하여 세 인들은 그를 호미취골(狐尾取骨)이라 불렀다. 유대진은 난색을 지었다. "수입이 뻔한데 갑자기 어떻게......." 순간 쌍곰보 형제의 손발이 무섭게 작렬했다. "여물통 다물지 못해?" 퍼퍼퍼퍽! 복부와 가슴을 난타 당한 유대진은 죽은 듯이 쓰러졌다. "으우욱!" 불구의 몸으로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한 자체가 무리였다. 하지만 팽고와 팽소는 험악하게 쏘아붙였다. "한 번만 더 입을 놀리면 칵 죽여버리겠어!" "썅, 늙은이가 말이야. 어디서 말대답을......." 바로 그때였다. 쌔액! 예리한 파공음을 동반하며 묵직한 직육면체가 팽고를 향해 날아갔 다. 뚜껑이 활짝 열려진 네모난 물체는 만두 운반상자가 분명했다. 곧바로 싸늘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이 작자들!" 음성의 실체는 유청풍이었다. 그는 두 발을 모은 채 허공에서 팽소 의 턱을 노렸다. 그러나 팽고의 대응은 매우 빨랐다. 그는 만두상자를 두 손으로 잡자마자 곧 박살내 버렸다. "요 녀석이......?" 와자작 부서지는 소리와 동시에 조각난 나무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 다. 이때 중간 지점에 서 있던 갈곤태는 유청풍의 허리를 수도(手刀) 로 푹 찔렀다. "이리 와!" 그의 동작은 번개 같아서 유청풍은 그대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윽!" 쌍곰보 형제는 이때다 싶어 유청풍에게 우르르 달라붙었다. "이 쥐새끼!" "감히 뉘 앞에서......." 퍽! 우지끈! 폭행으로 숙달된 그들은 유청풍의 허리와 등을 사정없이 내리 밟았 다. 유청풍은 악 소리도 못하고 무수히 얻어맞고 말았다. '우욱, 이놈들.......' 하지만 그는 절대 항거하지 않았다. 짧은 순간 부친이 냉엄한 눈빛을 쏘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 친의 이런 살을 에는 듯한 안광을 단연코 본 적이 없었다. '굴종이 아니라 자제하라는 뜻이다. 함부로 힘자랑하면 여기서 살 수 없다고 하셨지.' 팽고와 팽소는 어느 정도 분이 풀렸는 듯 한 소리 지르며 물러났다 . "조심해, 살고 싶으면." 유청풍은 일어나자마자 갈곤태를 노려보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행패를 부리는 거요?" 그는 연신 피멍든 눈가를 씰룩거렸다. 갈곤태는 유대진을 힐끗 바라 본 후 입을 열었다. "행패? 네 아비가 빚을 잔뜩 지고 안 갚으니 난들 어쩌겠냐?" 유청풍은 난생 처음 듣는 소리라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빚? 가난하지만 우리가 남에게 빚질 일이 어디 있소?" "흥! 네 아비에게 물어봐라." 유대진은 겨우 몸을 가누며 갈곤태를 경멸의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아이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어쩐지 그는 평소와 달리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갈곤태는 능글맞 은 표정을 지었다. "흐흐! 어린애라도 알아야지. 좌우지간 일 년 내로 갚아!" 유청풍은 갈곤태의 말이 맞다는 것을 눈치 채고 이를 악물었다. "대체 빚이 얼마요?" "물경 금화 삼천 백 냥이다." 유청풍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대체 언제 그렇게 큰 빚을 졌단 말인가? 은자로 환산하면 육만 이천 냥... 만미당의 하루 이문이 고작 은전 열 냥인데... 이 건 도저히.......' 아무리 열심히 주판알을 퉁겨봐도 상환(償還)은 불가능했다. 갈곤 태는 그런 눈치를 알고 턱하니 뒷짐을 지었다. "봐라, 독촉할 수밖에 없지. 앞으로는 이자를 내도 장기채무자가 되어 더욱 고리를 부과한다. 이것이 바로 국법이야." 그는 유들유들한 눈초리로 유청풍의 상하를 쓸어 내렸다. 저소득자가 오히려 고리를 부담하는 괴이한 산술적 논리가 존재하 지만 나라의 법이 그러니 힘없는 백성이 뭐라고 항의하겠는가? 아마 이러한 악법을 근거로 살루문이 활개를 치는지 모르는 일이었 다. 유대진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 하고 있지 않소?" 갈곤태는 말도 안되다는 듯 코방귀를 픽 꼈다. "흥, 먹을 것 다 먹어 가며 그런 소리하면 안되지." "우리가 호의호식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국수와 만두로 연명하는 걸 당신들도 잘 알지 않소?" "유대진, 내가 너라면 내 배 째시오 하고 퉁기진 않을걸?" 유청풍은 참다못해 한소리 붙였다. "무슨 억지요? 방법이 없는 걸 뻔히 알면서......." 갈곤태는 수염도 없는 턱을 쓸어 내리며 음흉스런 표정을 지었다. "없기는 왜 없어......? 성의 문제지." 유청풍은 화가 난 나머지 언성을 높였다. "달리 뭐가 있단 말이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게를 둘러보았다. 맛의 전당 만미당은 명성에 비해 너무 단촐했다. 두 개의 가마솥과 한쪽에 쌓아 놓은 대소 옹기 그릇, 그리고 낡은 목제 탁자와 의자뿐이었다. 그나마 쌍곰보 형제가 거의 절단 내버린 상태라 이제는 변변한 기물(器物)마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갚을 길이 막막한데.......' 갈곤태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쏟아냈다. "내 말만 잘 들으면 서로 홀가분하고 떳떳해진단 말이야." 유청풍은 귀가 번쩍 트였다. "방법이 있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빚만 갚을 수 있다면 그는 어떠한 고초라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유대진은 재빨리 아들의 앞으로 나섰다. "풍아!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그러자 해결사 쌍곰보 형제가 또 다시 손과 발을 무섭게 휘둘러댔 다. "아니 이 늙은이가 뒈지려고 환장했나?" "염병! 빚지고 큰소리는......."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대여섯 번의 매서운 가격을 시도했다. 유대진은 무지막지한 뭇매를 견디지 못하고 또다시 땅바닥을 뒹굴 었다. "욱!" 그의 입에서는 선혈이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유청풍은 얼른 그들 을 밀쳐버리고 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다. "그만 두시오! 이런다고 해결되오?" 갈곤태는 허공을 응시한 채 비릿한 흉소를 흘렸다. "얘들아, 살살 다루어라. 흐흐.... 생각할 기회를 줘야지." 쌍곰보 형제는 그의 말을 듣더니 슬며시 물러났다. 유청풍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자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돈 관계 가 어디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인가? '분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구나. 일단 저 자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갈곤태를 향해 소리쳤다. "방법을 알려주시오. 내 몽땅 갚아버리겠오." 유대진은 아들을 적극 만류했다. "안 된다, 풍아!" 그때 쌍곰보 형제가 솥뚜껑만한 손을 번쩍 쳐들며 윽박질렀다. "거참, 늙은이 정말 말이 많구만. 입 좀 다물라구." "젠장, 얘기를 들어 봐야 되는지 안 되는지 알 것 아냐. 엉!" 그들은 주먹을 내리칠 것처럼 손바닥에 탁탁 부딪치며 위협을 가했 다. 유청풍은 재빨리 부친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서 방법을 말하시오." 드디어 갈곤태는 비릿하게 흑심을 드러냈다. "듣자하니 네놈이 꽤 힘 좋다고 소문났더구나. 그래서 말인데... 네 몸값으로 대신하는 방법도 있지." 유청풍은 안면을 부르르 떨었다. '비겁한 인간들! 닭싸움에 지더니 결국 농간을 부렸구나.' 문득 그는 의문이 떠올라 다시 물었다. "한데 누가 날 금화 삼천 냥에 사겠소?" 갈곤태는 인심쓰듯 얄팍한 입술을 말아 올렸다. "원금은 백 냥이다. 처음 일 년 동안 이자를 적게 내는 바람에 이 자에 이자가 붙었지. 하나 탕감이란 것도 있지. 네 몸값으로 대신하 면 이자를 싹 감해 주마." 유청풍은 복잡한 머리 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벼룩이 간을 꺼내먹을 놈들! 이자가 원금의 삼십 배라고? 어쨌든 우리 형편에 갚을 방법은 이놈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좋다! 아버님의 부담을 덜어 드리고 이 기회에 돈이나 많이 벌어보자.' 유대진은 비틀거리며 아들의 팔을 잡아당겼다. "풍아!" 하지만 유청풍은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그는 일부러 얼굴 가 득 염증을 드러냈다. "아버지, 저도 이런 이문 없는 장사에는 진저리가 났어요." 순간 유대진은 정광을 번쩍이며 사곡을 바라보았다. '으음, 결국 그 분이 우려한 대로 되는 것인가?' 그는 고인이 된 단궐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때 유청풍은 새삼 부친의 등을 바라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그 어 려운 가운데서도 사곡환자들을 위해 만두를 제공한 아버지! 오늘 따라 외팔인 아버지의 등은 한없이 넓어 보였다. 그럴수록 유 청풍은 내심 빚을 갚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유대진이 묵묵히 돌 아서자 그는 음성에 힘을 실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단, 거기에 금화 열 냥을 더 얹어 주시오." 돌연한 추가요구에 갈곤태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 빚 갚아주는 것도 황송하게 여길 처지에 돈을 더 달라니? 너 간덩이가 단단히 부었구나." 유청풍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생활할 돈은 있어야 할 것 아니오?" 갈곤태는 유대광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기야 외팔이 병신이라... 이럴 때 말로나마 인심 한번 써 볼까? '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일 아침에 오마." 쌍곰보 형제도 옆에서 느긋한 흉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예상한 대로 잘 되었을 때 하수인만이 갖는 기쁨일 것이다. 갈곤태는 홀가분한 안색으로 그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얘들아, 가자." [3] 그날 밤 유대진은 쉴새없이 피를 토해냈다. "우웩!" 발치에는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는 옹기가 놓여 있었다. 유청풍은 뜨거워진 물수건을 부친의 허리에 번갈아 대주었다. "찜질만 해서는 안 되겠어요. 의원을 데리고 올게요." 그는 물수건 하나를 부친의 등에 올려놓고 있을 동안 다른 물수건 이 뜨거워지도록 옹기에 담가 놓았다. 그렇게 몇 번 반복했을 즈음 유대진은 아들의 손을 제지시켰다. "으웩! 괜찮다. 그보다......." 유청풍은 의원을 부르러 가려다가 멈칫거렸다. "예......?" 그것으로 부자는 입을 다물고 방 안엔 잠시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 다. 유대진의 숨소리만 점점 가빠지는 와중에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 만 가끔씩 들릴 뿐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유대진은 돌연 엄숙한 안 색으로 말했다. "죽은 네 어미 얘기를 해 주마." 일순 유청풍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머니...... 요?" 그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는 어머니, 이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영상이 아련한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유대진은 놀라운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래, 네 어미는 수리마제를 구하고 죽었다." 유청풍은 숨이 콱 막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그게......?" 곧바로 유대진의 음성이 이어졌다. "지금으로부터 십 칠 년 전, 검혈은 중상을 입고 우리를 찾아왔다. 당시......." 유청풍의 어머니 상우아(常玗娥)는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상천택 (常天澤)의 외동딸이었다. 상천택이 황제의 자문기관인 내각대학사를 그만 두고 서안(西安)에 서 살 때 그녀는 청년협객 창랑수(滄狼手) 유대진과 혼인을 했다. 일 년 후 유청풍이 태어나자 단란한 가정에 웃음꽃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달콤한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중상을 입은 단궐이 의식을 잃은 채 마당에 쓰러져 있 는 것을 상우아가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즉시 의원을 불러다 간신히 단궐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열흘 후 단궐은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되었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이유인즉 그에 게 독상을 입힌 자는 교활하고 잔인한 작자라 훗날 반드시 보복하리 라는 것이었다. 단궐은 심한 독상을 입어 당장 은혜를 갚을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 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며칠 후, 유대진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수십 명의 괴한들이 침입한 것이었다. 이때 상천택과 상우아는 그들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 죽었으며 유대 진은 한쪽 팔이 잘린 채 한살배기 유청풍을 안고 겨우 도망쳤다. 하지만 그는 이때 당한 독상으로 인해 공력을 잃고 말았다. 그는 아들의 안위를 염려하여 신분을 숨기고 여러 객점을 전전했다 . 다행히 그는 만두 빚는 법을 배워 오늘의 만미당을 꾸려나온 것이 었다. 그러나 그가 빚을 진 사유에 관하여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유청풍은 금시초문인 과거지사를 듣고 잠시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 다. 문득 그는 단궐의 독상을 떠올리며 물었다. "독을 다룬 솜씨로 보아 흉수는 독혈이 아닐까요?" 그가 의심한 이유는 독혈 방시굉이야말로 가장 극악한 용독술의 달 인이기 때문이다. 유대진은 호흡이 가쁜 나머지 느릿느릿 입을 열었 다. "쿨럭... 함부로... 증거가....... 천락무예단(天樂武藝團)... 그 리로 가... 허억......." 결국 그는 응혈(凝血)이 인후를 막는 바람에 허무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일에 유청풍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아, 아버지......!"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부친은 응답이 없었다. 부친의 두 손은 벌 써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유청풍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소리없이 오열했다. '반드시... 반드시 밝히고 말 테다. 원흉을......!' 그는 부친의 시신 위에 하얀 이불보를 덮어 주었다. 애끓는 밤이었 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