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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윤홍식의 대승기신론 강의 4강(1: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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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또 강의로 들어가죠. 시간이 없으니까요. 대승기신론 3-3을 좀 간단하게 보고 나가겠습니다. 제가 교재를 3-3부터 나눠드렸는데요. 지난 시간에 했던 내용하고 연결해가지고 잘 이해해 보시면 지금 이 그림, 이 그림 그려져 있죠.
저희 학당 마크이기도 한데 알을 상징합니다. 알이라고 하죠. 저는 우리 민족 예전의 철학이 알 철학이라고 봐요. 그래서 이게 아주 고대적인 고대에서부터 철학의 가장 원형이라고 보여지는 게 이 그려보면 이겁니다. 우리가 계란이라든가 뭐 이렇게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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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알 흔히 이런 알은 자연에서 많이 접할 수 있죠. 이 알의 모양은. 근데요 이게 고대인들한테는요 점 찍고 동심원 막 그려놓으면 이게 태양이 됩니다. 그래서 암각화 이런 데 가보시면 이게 다 등장해요. 그래서 이 정보가 이 원형적인 정보가 저는 로고스라고 보고 인간의 의식 속에 새겨져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주의 진리도 이렇게 생겼고 인간이 또 우주의 진리를 이해할 때도 이런 식으로 이해해요. 그래서 지금 전 세계 공통적으로 이 그림이 나오고 요게 가운데가 태양이고 이게(동심원) 뭐냐 하면 태양이 미치는 범위입니다. 우주는 항상 중심과 주변이 있고 중심점은 하나고 주변은 무한해요. 뻗어나가는 힘은 무한해요. 그래서 여러분 이집트 벽화 이런 거 보셔도요 태양 그려져 있고 수많은 선이 나가는 거를 그려놓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 고대 신화부터 환인이니 환웅이니 하는 게 이 그림을 놓고 얘기하는 겁니다.
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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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가 이러기 때문에 그래서 자연의 이치도 이러기 때문에 뭐든지 중심이 있고 그 주변이 있고 이 중심점이 있다. 여기가 우주가 나온 자리다. 우주를 얘기하더라도 요즘 “인터스텔라” 때문에 우주에 대한 갑자기 상대성 이론 공부하고 블랙홀 공부하시고 바쁘신데 안 그래도 힘드신데 너무 머리 혹사시키지 마시고 이런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 이 동양식 해법은 우주는 태극에서 나왔다. 여러분 우리나라 국기 있죠. 태극기 태극에서 우주가 나왔다고 우리는요 나라 국기에다 새겨놓은 겨레예요. 그러니까 이런 거 좀 통 크게 노세요. 4차원 5차원 무한한 차원이 있다 하더라도 다 어디서 나왔다? 태극에서 나왔다는 거. 한 점에서 나와서 거기에서 무한한 차원의 우주가 다 만들어진다. 이렇게 기본을 전제하고 시작하세요. 그래서 이 과학은요 조금씩 파 들어가는 거고 철학은 우주의 로고스랑 바로 만나서 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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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직관하는 방식입니다. 두 개가 다 필요해요. 그래야 공부가 재미있어져요. 하나만 하면 재미없고. 하지만 이 또 과학으로 너무 머리 여러분 머리가 머리니까 힘드실 때는 철학으로 머리를 좀 씻어내셔야 돼요. 그래야 사물이 더 선명해 보이고 이치가 보입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알 중심과 주변 우주는 우주가 나온 근원은 반드시 있다. 우리 눈에 안 보일지라도 반드시 그 뿌리가 있다. 여러분 나무만 해도요 나무만 해도 뿌리가 안 보이죠. 안 보여서 나무 목(木)자에다가 나무 목자에다가 이게 안 보인다는 뜻으로 이게 볼 견(見)자 뒤집어진 거거든요. 이게 볼 견(見)자면 글자가 뒤집어지면 옛날 한자로는 갑골문이래 이제 고대문자로는요 이겁니다. 그대로 뒤집어진 글자(艮)예요. 그게 지금 이건 간(艮)자로 변했고 내려오다가 이건 견(見)자로. 나무 중에 안 보이는 부분이 뿌리 근(根)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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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인다는 거예요. 뿌리는 안 보여요. 그래서 뿌리가 없는 것 같은데. 뿌리가 없으면 이게 어디서 나옵니까? 똑같듯이 이 만물이요 우주에 존재하는 무한한 차원의 무한한 만물이 뿌리가 없이 어디서 나오냐는 거죠. 그 뿌리 자리를 점 하나 찍어놓고 이거를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냐면 한마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주가 나온 한마음, 비로자나불, 여래장. 여래장이라고 하는 건요 여래는 우리 여러분 아시는 여래(如來). 보세요. 여래라는 뜻도요 똑같을 여(如)자를 쓰면요 진짜 똑같다는 거예요. 시공을 초월해서 똑같다는 겁니다. 시공 안에 있는 건 무상(無常)하죠. 같은 여(如)자를 쓰면요 똑같다는 거예요. 이건 무위법을 말해요 이미. 우리가 작용을 통해서 만들어낼 수 없는 세계. 현상계의 모든 건 유위법이에요. 여러분이 노력을 하면 노력을 하면 뭔가 행위를 하면 그걸로 인해서 씨앗이 뿌려져서 만들어지는 세계고 무위법은 여러분이 씨앗을 뿌릴 수도 거둘 수도 없는 세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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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 자체로 퍼펙트한 세계. 그거를 여(如)라는 말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여(如). 그래서 여여(如如) 그러기도 하죠. “나 요즘 여여하다.” 이건 참나 상태로 살아가지 않고 여여할 수가 없어요. 현상계는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기 때문에 여(如)라는 말 안에는 이미 진리의 세계가 다 표현돼 있습니다. 늘 똑같다. 그런데 그놈이 오염된 게 아니라 참되다. 그래서 진여 그러면 더 퍼펙트해집니다. 진여(眞如). 반대로 여래(如來) 하면 어떻게 되나요? 똑같이 왔다는 겁니다. 똑같은 진리의 모습으로 왔다. 진리에서 왔다. 진리에서 간다. 다 같은 말이에요. 여래 여여 다 똑같아도 늘 진리 상태에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진리의 화신이라는 뜻도 되고 그냥 진리 상태에 계신 분이라는 뜻도 되고, 여래라는 말은.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면 뭘까요? 씨앗 장자 감출 장(藏)자. 이게 감추다.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장 지장고사라면 땅이 자궁이라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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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창고 이 생명체가 잉태돼 있는 곳, 아니면 생명체 씨알이 있는 곳. 그래서 이 창고나 어떤 자궁의 뜻이에요. 여래 여래장 그러면요. 외국에서도 번역할 때 영어로 번역할 때 “여래의 자궁” 이렇게 번역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뭐죠? 여래의 씨알이요. 장차 자라기만 하면 여래를 산출하는 곳이라는 거예요. 여래의 씨가 숨겨진 곳. 그래서 여러분의 불성을 여래장이라고 하는 게 그놈이 자라면 여래가 된다는 거예요. 불성(佛性)이란 말이랑 같은 뜻이라는 거 아시겠죠. 부처 불(佛)자에다 성품 성(性)자 하면 뭡니까? 부처의 씨알,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 여러분 안에는 퍼펙트한 불성이 있어요.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이 어린아이들을 관찰해 보니까 어린아이들이요 엄마 지적할 때 보니까 퍼펙트해요. 사단(四端)을 퍼펙트하게 써요. 그 짜장면집을 갔는데 어떤 짜장면집에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손님이 짜다면 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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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하죠. 손님이 짜다면 짜다. 그런 경우도 있어요. 제가 어떤 중국집을 갔는데 같이 갔어요. 만두를 먹는데 싱거운 거예요. 간장을 안 내놨더라고요. “간장 좀 주세요.” “간 돼 있거든요.” 손님이 짜다면 짜다가 절실한 상황이에요. 아니 나 내가 짜다는데 간을 했대요 자기는. 그냥 간장 주면 될 일을. 그렇죠. 그런데 이제 얼마 전에 갔는데 “손님이 짜다면 짜다.” 그 아이가 그걸 봤잖아요. 아이가 저 말이 뭔 말인지 알까? 싶은데 나중에 엄마한테 지적할 때 그걸 쓰더라고요. “엄마 못 봤어. 손님이 짜다면 짜다라고 그 식당에서 했었잖아.”라는 걸 가지고 어머니한테 공격하는 걸 봤어요. 그래서 이게 칼 같다. “애들한테 함부로 사단 가르칠 게 아니구나”라는 거. 이게 각오를 하고 해야지 이게 다 알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어린아이 뇌가 제대로 지금 뇌가 못 여물어서 표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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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는 게 있는 거지 억제를 못하는 게 있는 거지 지금 저 안에서요 그 불성은요 똑같이 작동하고 있다는 걸 제가 실감나게 봤어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용합니다. 또 이런 지적도 하더라고요 다른 아이랑 놀고 있었는데 엄마는 다른 아이 욕하기는 뭐하잖아요. 그 아이 때문에 우리 아이가 상처 입었고 뭐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더라도 이제 우리 아이 먼저 지적하고 이제 다른 아이한테는 이렇게 좀 훈계조로 좀 돌려서 말하고 했잖아요. 이게 서운했던 거예요. 다 그 얘기를 하면서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래도 너 내가 나중에 위로해줬잖아.” “그 아이들이 있을 때 위로했어야지 간 뒤에 위로하면 뭐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 계산을요 아이가 칼같이 하고 있죠. 이거 어른이랑 다를까요? 왜 그러면 그럴까요? 왜 이 나이에 따라 분명히 우리는 학습 받아서 엄청 지식과 많은 경험을 통해 자라는 것 같은데 왜 이 아이한테서도 사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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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이 그대로 작동하고 있을까요? 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요 이걸 존중해 주시지 않으면요 교육이 안 됩니다. 인성 교육이 안 되는 이유는요 여러분들이 아이 안에 있는 양심을 존중해 주지 않아서 그래요. 그 아이가 부처고 그리스도고 불성이라는 걸 인정해줘야 돼요. 거기서 시작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잘 받들어 주자가 아니에요. 티벳에서 린포체 어렸을 때 찾아내죠. 불성 제일 발현된 분들이라는 분들을 환생하자마자 가서 찾아내잖아요. 그다음에도 혹독하게 가르쳐요. 왜냐? 이 아이가 자라면서 한 20년 공부하기 전에는요 제대로 된 린포체가 못 됩니다. 뭐냐면요 자질이 아무리 있어도 똑같다고요. 이번 생에 다시 와서 이 뇌가 아직 여물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뇌는 스무 살이 돼야 그래도 그나마 제 기능을 하고 서른 살은 돼야 온전한 작동을 합니다. 그 기간에 올바르게 배양을 해주면서 기다려주는 거예요. 아무리 뛰어난 분도 예수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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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넘어서 활동 시작하십니다. 그렇죠. 다 그래요. 모든 성인들이 서른 살 넘어서 그래도 시작해요 본격적인 활동은. 왜냐? 그전에는요 실수가 날 수가 있어요. 아직 이 육신을 온전하게 경영을 못 하는 거예요. 아무리 그 안에 엄청난 영성이 숨어 있더라도 하드웨어가 지금 딸려서 안 돼요. 하드웨어가 성숙되길 기다려야 돼요. 이게 이제 조건을 맞춰줄 때 제대로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전에도 물론 신통한 짓을, 그러니까 아이들도 가만히 보시면 만약에 이 불성이요 아이라는 이유로 가려질 어떤 조건이 아닌 일들인 경우에는요 어른 이상의 사단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 순간에는. 아이라는 어떤 제약 때문에 왜곡될 어떤 정보 부족이라든가 여러 가지 아이의 경험 부족으로 판단 못할 일이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많이 왜곡돼서 나올 수 있지만 아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왜곡될 일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요 사단이 그대로 튀어나옵니다. 그럴 때는 아이가 어른의 스승이 될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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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만큼은. 그것도 이런 걸 잘 생각하시고 우리가 한 인격을 길러야겠다는 거를 제가 “짜다면 짜다”라는 걸 보고 그걸 활용까지 해가지고 지적하는 걸 보고는 “야 이거 사단 정보가 나갔다가는 앞으로 초등학교나 유치원에서 난리가 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기대되는 난리죠. 얼마나 또..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을 한 번 이 지상에 풀어놔 보면 재밌지 않을까요? 그거 힘들다고 여러분이 외면하시면요 안 돼요. 힘들어도요 어른들이 공부해가면서 같이 공부해가면서 이겨내면요 아마 지상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가 펼쳐질 영성이 넘치는 세계가 펼쳐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그 근원이 다 이겁니다. 여래장. 진여. 다 같은 말이에요. 이걸 법신(法身)이라고 할 때는 알이라고 할 때는 이 중심점을 말하는 거고요 우리말로. 법신이라고 할 때는 뭐냐면요 진리의 몸이라는 건요 이 안에요 무한한 우주를 만들어낼 이거를 뿜어낼 수 있는 엄청난 진리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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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있다는 거예요. 현상계에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 진리가 없었다면 현상계에서 어떻게 진리, 이 진리의 결대로 우주가 굴러가게 되냐는 거죠. 여러분이요 명상할 때 아무 생각 없이 텅 비어 있죠. 근데 진짜 그 상태가 텅 비기만 한 상태라면요 어떻게 거기서 한 생각이 올라오고 감정이 올라오고 희로애락이 올라오고 현상계를 펼쳐내고 다 할까요? 여러분 주무실 때 그 텅 빈 의식이 어떻게 여러분한테 꿈이라는 걸 만들어내서 꿈속에서요 엄청난 건물과 화려한 풍경을 여러분이 다 만들어서 보고 그 안에서 경험하고 하게 할까요?
뭐가 있길래? 이 안에요 엄청난 정보가 다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무한한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갖고 있는 몸이라고 해서 법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 절에 가셔서 청정법신(淸淨法身) 하면은 그냥 법신인가 보다 하는데, 그 법이라는 건요 우주를 운행하는 모든 법.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표현한 게 꼭 맞다고도 볼 수 없지만 거기서 다루려고 했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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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이상의 엄청난 우주를 모두 경영하고 있는 법이 우주에 이미 있어요. 그 법이 이 일심, 여래장이라는 겁니다. 그 법은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법대로 우주를 경영해 가요. 그래서 여러분이 명상을 하고 텅 비어 있는 것 같아도 그 안에서 법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안에 필요한 영감도 주고 여러분이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안에서 육바라밀을 구현하라고 명령하기도 하고, 또 여러분이 뿌린 대로 거두게 카르마 법칙을 굴려서 여러분한테 그 결과물을 반드시 여러분이 책임지게 인도해 줍니다. 이 법신이라는 걸 모르고요 그냥 단순히 텅 빈 여래장 이렇게만 생각하시면 안 돼요. 텅 비어 있지만 그 안에는 온 우주를 경영하는 진리와 능력과 어떤 에너지가 꽉 차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자비가. 그런 자리라는 걸 아셔야 돼요. 그래서 이 하느님은 우리를 늘 사랑하신다. 한 순간도 우리를 포기하는 법이 없어요. 우리한테 또 끝없이 뭐라고 합니까? 양심으로 살으라고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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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아무리 악인이 돼도 저 안에 양심이 또 “그렇게 사는 건 옳지 않다”고 또 얘기합니다. 즉 이게 지혜와 자비와 힘이 다 들어 있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아요 그 자리는. 그리고 여러분한테 그 조언하기를 멈추지 않아요. 여러분한테 또 그대로 반드시 갚게 해줘요. 엄청난 지혜와 자비와 능력이 다 있는 자리, 이 자리를 계속 체험하셔서요 다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불보살이 되시려면요 계속해서 그 자리를 체험하셔서 그 자리의 전문가가 되시는 수밖에 없고, 전문가가 되는 요령은 그 자리를 자꾸 체험하는 수밖에 없어요. 체험하면서 연구하기. 체험하고 분석하고 체험하고 분석하다 보면 이게 육바라밀이 다 들어 있다는 거 아시겠죠? 선정으로 이 자리랑 접속하는 건 선정이고 이 자리를 이해하는 건 반야바라밀이고 이 자리를 현실에 구현하는 건 인욕 정진, 뭐죠, 보시 지계가 이 자리를 현실화시켜요. 요 육바라밀이 계속 돌아가는 사람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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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계신 곳에서 아주 퍼펙트하게 수행하고 계신 겁니다. 최선의 수행을 다하고 계신 거고 육바라밀을 놔버리는 순간 여러분은요 “내가 나중에 저 깊은 산 중에 가면 아무도 없는 데 가면 열심히 할 거야” 이런 식으로는 여러분 지금 인생이 지금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육바라밀이 진여에서 나오는 지혜와 능력과 자비를 하나도 못 끌어다 쓰고 있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끌어다 쓰시고 계셔야 돼요. 제 강의를 듣는 중에도 지금 깨어계셔야 됩니다. 몰라 하세요. 괜찮다 하세요. 그러면요 이 에고 차원에서 놀던 마음이 다시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선명해지고 고요해져요. 초연해져요. 이 희로애락에이 흔들리던 마음이 희로애락에서 한 걸음 빠져나오게 돼요. 초연해져요. 생사 문제에서도 빠져나와요. 나 병 걸리면 어떡하나? 실패하면 어떡하나? 낙오되면 어떡하나? 이 생각을 지금 하고 계시다는 거는 지금 에고 차원에서 놀고 계시다는 거예요. 몰라 괜찮아 하셔서 정신을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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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시면요 중심으로 돌아오면요 이 주변을요 초연하게 볼 수 있는 어떤 경지가 됩니다. 늘 정신을 안으로 안 돌려놓으면요 육바라밀이 시행이 안 돼요. 선정바라밀이 안 이루어지면 나머지 바라밀들이 약해요 힘이. 안 된다는 건 말이 아닌데 약해요. 그래서 선정바라밀을 해주셔야 자꾸 다른 육바라밀이 전체가 다 탄력을 받습니다. 이게 여래장이에요. 그래서 여래장이 뭔지는 정확히 한번 생각해 보시고. 자 진도 한번 나가볼게요. 대승기신론을 우리가 다 알아야 될 건 아니지만 여기 담긴 이치는 우리가 알아야죠. 그래서 대승(大乘)이라는 건 뭐였죠? 대승은 대승기신론에서 말한 대승이라는 건 이 한마음교, 한마음을 타고 가는 이 가르침이라고 했죠 대승은. 다른 경전에서 대승불교 경전에서 말한 대승하고 달라요. 지금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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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은 이 한마음이 위대하다 해서 대(大)고. “탑승하자. 이 한마음을 탑승하고 가자” 해서 대승이라는 겁니다. 한마음교를 지금 설파하는 거예요. 저도 종교가 원래 양심교라 똑같습니다. 한마음교나 양심교나. 이 대승의 가르침은 뭐냐? 대승의 의미란 뭐냐? 위대하다는 거랑 승(乘)이라는 걸 나눠서 얘기하는데요 위대하기는 3개가 위대하다. 체상용(體相用)이 위대하다. 이거(체體)는 풀어서 말하면 본체라는 얘기고요. 상(相)은 형상이요. 용(用)은 작용 그럽니다. 옆에 그림 보실래요. 2페이지.
한마음의 본체 형상 작용 3개가 나뉘죠. 본체를 뭐라고 해놨나요 제가? 법신이요. 형상은요? 형상도 법신이요. 작용에서 보신과 화신이 나뉩니다. 이게 뭔 얘기냐면요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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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텅 빈 자리 안에 모든 형상, 형상이라는 건 이게 법(法)이에요. 법 로고스. 우주의 모든 진리가요 형상이라고 지금 불교에서는 표현합니다. 그럼 이것(종이컵)도 형상이잖아요. 지금 겉에 표현된 형상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체상용에서의 형상이라는 건 이걸 만들어낸 설계도가 참나 안에 있다는 거예요. 고 형상을 말하는 거예요. 신묘한 형상이죠 원래는. 그래서 사실은 일반 형상과는 구분을 해서 봐야 되는데 문맥상에서 여러분이 구분해 주시면 돼요. 본체는 텅 비기만 한 것 같지만 그 안에 만법이 다 들어 있으니까 여기까지 해야 법신인 거예요. 텅 빈 중에 우주의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법신이니까 법신이라는 말을 본체(體)에만 붙이면 안 돼요. 상(相)까지 법신이에요. 용(用)에 와서 보신은요 생각 감정 오감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보신의 세계로 들어옵니다. 업보, 카르마가 작동하는 몸이에요. 카르마가 시작돼요. 화신은요? 보신의 어떤 하부 개념이에요. 그 카르마가 작동하는 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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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앞에 물질화됐을 때만 화신 그럽니다. 만져보고 보고 듣고 오감의 대상이 될 때 여러분 화신 그래요. 그냥 오감의 대상도 아니고 직접 만져보고 이런 물질화됐을 때 화신 그럽니다. 왜냐? 여러분 마음에도 오감으로 나타나죠. 여러분 명상하다 부처님 만났어요. 만져보기도 악수도 한 번 했어요 명상 중에. 정신으로 막 빛이 나요. 그럼 만져본 것 같지만 그건 보신입니다. 물질화된 몸이 아니고 명상 중에 만났으니까. 이해되시죠? 단순히 오감으로만 구분이 안 되고 오감인데 물질화된 그런 오감의 세계에 나타났을 때 화신. 역사적으로는 석가모니. 즉 육신으로 태어났을 때 화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로고스가 화신이 됐다는 게 보세요. 텅 빈 하느님 안에 있던 로고스가 물화됐다. 전형적인 이 대승불교 이론에 맞추면 전형적으로 맞는 이론이에요. 보세요. “성부 안에 있던 하느님 안에 있던 로고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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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육신으로 왔다.” 그러면 화신을 얘기하는 거죠 전형적으로. 보신이 아니라 그때는. 보신은 당연히 카르마의 몸인데 보신 중에 화신, 육신화된 존재. 이럴 때 우리가 이제 성자라고 하는 거죠. 성부와 성자가 이렇게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나눌 때 이거(체)를 성부 요놈(상)을 성령 이거(용)를 성자 이렇게 나누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렇게 그런 이론하고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건 아무튼 불교 이론이에요. 그래서 이거는 원효 스님이 설명 잘해놓으셨어요. 원효 스님의 소(疏)나 별기(別記) 보시면 이런 내용이 다 설명돼 있습니다. 이미 신라 때 다 됐던 이론을 지금 우리는 왜 상식으로 모를까요? 신라시대 때 다 설명되고 정리가 돼서 그 당시 지식인들은 다 알았던 내용을 왜 우리는 이렇게 낯설까요? 이런 것도 한번 생각해 보시고 이걸 아셔야 돼요. 법신은 여기의 세계고 보신은요? 이미 펼쳐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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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생각 카르마가 발생하죠. 어떤 생각을 했느냐에 따라서 카르마가 발생합니다. 어떤 감정을 품었느냐에 따라서 카르마가 발생합니다. 어떤 언행을 했느냐에 따라서 오감의 세계에서 이거는 이제 실질적으로 물질의 세계죠. 밖으로 어떻게 표현했느냐에 따라서 여러분 카르마가 발생합니다. 여기 이제 이 언행을 포함한 오감의 세계. 뭘 보고 들었냐에 따라서 카르마가 발생합니다. 카르마가 발생하는 세계로 오면은 보신의 세계, 업보의 몸이 돼버려요. 그중에 화신은 특히 그냥 육화돼서 육신을 가지고 나타났을 때를 우리가 화신 그러는 것뿐이기 때문에 크게 얘기하면 법신과 보신만 있어요. 카르마 없는 몸하고 카르마 있는 몸하고 이 두 개가 핵심입니다. 카르마 없는 거 카르마 있는 거. 이쪽은 무위법의 세계라 카르마가 없고요. 안 붙고. 여긴 유위법의 세계라 카르마가 붙어요. 이게 이제 여기서부터 오묘한 건데요. 한마음에서 그러면 이 용(用)까지도 한마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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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수많은 번뇌 망상까지도 결론적으로 뭐라는 겁니까? 다 한마음의 작용일 뿐이에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거는 한마음의 작용입니다. 그게 악일지라도. 이해되세요? 한마음의 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없어요. 신의 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없죠. 악인은 있겠죠. 그럼 악인한텐 신은 어떻게 할까요? 벌을 주겠죠. 하지만 그 악인마저도 그 악인도 악을 지을 때 이런 신성의 힘이 없었다면 악을 못 저질렀을 거고. 어떻게 신성의 힘이 없이 신의 뜻을 어기면서 악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까요? 인간만이 이런 짓을 잘해요. 다른 동물들은 이걸 할 힘이 약해요. 인간들은요 신성이 강하다 보니까 이런 신성을 어기는 짓도 합니다. 하지만 신성을 어길 수 있다고 여러분이 신성을 벗어난 게 아니에요. 여러분 차 몰고 가셔서 나는 교통법규 안 지켜 하고 신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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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보세요. 카메라 빵빵 찍혀서 다 과태료 날아오겠죠. 법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죠. 어길 수 있었던 것뿐이지. 그래서 인간한테 주어지는 이 자유마저도 사실은 참나에서 나오는 겁니다. 우주의 본체와 이 우주의 정보가 없다면 여러분 한순간 존재할 수도 없고 작용할 수도 없어요. 이해되십니까? 그걸 인간의 탐진치가 약간씩 틀 수는 있지만 그 트는 힘마저도 원래 참나가 준 거란 말이죠. 그거 아셔야 돼요. 그래서 이 모든 거는 능가경(楞伽經)에 이렇게 나옵니다. “악일지라도 다 여래장에서 나온다” 하는 게요 그래서 나온 얘기예요. 그런데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존재하는 모든 게 이 여래장의 작용이라고 해서 여래장이 지금 우리가 악을 하는 거 인정하나요? 허용은 해줄 수 있죠. 그런 허용이라는 게 아까 법을 어길 수 있는 그런 자유는 줬죠. 그런 정도의 허용은 있지만 근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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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했을 때 과태료를 물리고 나쁜 카르마로 갚게 한다면요 그거는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여래장의 뜻을 이해해가지고 따르기까지 또 어려워요. 여래장이 선악을 다 만들어줬다 해서 선악 악을 누리고 계시면 안 된다는 거죠 문제는. 우주를 만든 여래장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읽어내서 결국은 그 “악에의 유혹을 이겨내라고 그런 자유를 줬구나” 하는 것까지 이해하고 이겨내는 분들이 이제 불보살의 세계로 나간단 말이죠. 이런 것도 좀 이게 되게 수준 높은 얘기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 한마음 그려놓고 여기까지 이해를 좀 해보시자는 거죠. 한번 볼게요.
[3-3. 대승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大의 의미] ‘대승의 의미’에는 3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그 3가지인가? ① 첫째는 ‘본체’(體)가 위대함이니, 일체법의 진여가 평등하여 늘지도 줄지도 않기 때문이다. ② 둘째는 ‘형상’(相)이 위대함이니 여래장(여래의 자궁ㆍ씨알, 法身)이 무량한 본성의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③ 셋째는 ‘작용’(用)의 위대함이니, 일체의 현상계와 절대계의 선한 인과를 낳기 때문이다. [승乘의 의미]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이 법法을 본래 타고 간 바이며, 일체의 보살이 모두 이 법을 타고 여래의 경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所言義者 則有三種 云何爲三 一者體大 謂一切法眞如平等不增減故 二者相大 謂如來藏具足無量性功德故 三者用大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 一切諸佛本所乘故 一切菩薩皆乘此法到如來地故.
* ‘법法’은 우리가 타고 가야 하는 탈 것이며, 우리가 따라 걸어야 할 길이다. 따라서 대승大乘은 대도大道이다! 결국 위대한 것은 ‘한마음’이니, 위대한 한마음을 따르는 길이 ‘대승’이다.]
이 위대하다는 대(大)의 의미는 3개가 있는데 본체가 위대하다. 일체법의 진여가 평등하여 늘지도 줄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텅 비어 있는 본체는 참으로 위대하다 늘지도 줄지도 않고 불생불멸한다 이 얘기입니다. 더 보탤 것도 없고. 보세요.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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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여기서 여기까지 나가셔야 돼요. 지금 보세요. 온 우주가 퍼펙트하게 진리의 작용이라면요 지금 이 진리에는 더 보탤 게 있을까요? 없죠. 인과의 세계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보탤 수도 없어요. 줄일 수도 없어요 살릴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어요.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그 존재하는 진리가요 우주 안에서 끝없이 자신을 시공간 속에서 끝없이 표현하고 있을 뿐이에요. 무한하게 표현할 겁니다. 대승불교 이론이 여기까지 오면요 소승불교랑은 이제 같이 타협할 길이 없어져요. 우주가 열반에 들고 끝내는 게 아니라 우주의 목적은 존재예요. 그냥 창조예요 사실은. 오히려 창조예요. 끝없이 지금 이 순간 자기 안에 있는, 법신 안에 있는 본체와 형상을 가지고, 보세요, 법신 안에 본체가 있고 형상이 있다면 작용이 없을 수가 없죠. 한마음은 작용까지가 한마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형상이 있으면 표현해야 돼요. 참나는 텅 비어 있으면서 동시에 끝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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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존재라고 이렇게 정의했죠 대승기신론에서. 따라서 현상계를 거부한다는 거는 역천이 돼요. 현상계를 거부한다는 건요 자연에 대한 우주에 대한 거부라고요. 이거는 결국 무슨 뭐에 대한 거부냐? 여래장에 대한 거부가 돼요. 그래서 소승불교랑은 타협할 수 없는 길을 지금 가는 겁니다. 즉 참나가 존재하는 한 여러분 생로병사는 있을 거고 윤회는 있을 거고 생멸 현상이라는 건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이 그 현상을 참나의 뜻에 맞게 활용하느냐 참나의 뜻을 어기는 방향으로 활용하느냐의 차이만 있지 이 존재 자체는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희로애락을 느끼고 괴로움을 느끼고 계신 거는 참나 안에 괴로움, 분노, 희로애락의 모든 진리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러분은 이걸 느끼셔야 된다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활용할 거냐가 여러분의 과제지 이거를 버렸으면 좋겠다라는 건 이미 동양에서 역천에 해당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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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거부하고 이 자연과 우주 자연과 싸워보겠다는 거랑 똑같다는 거예요. 그 우주자연이 결국 뭡니까? 신이에요. 우주 자연이라는 건 신의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하고 싸울 수는 없다는 거죠. 이걸 불교식으로 말하면 비로자나불하고 어떻게 싸웁니까? “티끌 하나도 비로자나불의 위신력으로 존재한다.” 이게 지금 불교 이론입니다. 절에 가시면 듣는 얘기예요. 화엄경에 나오는 얘기예요. 그러면 티끌 하나, 그럼 티끌 하나도 만드는 그 우주의 신성이 여러분의 희로애락도 다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희로애락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지금 거부하실 수 있나요?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이 거부할 때는 희로애락이 여러분을 불쾌하게 할 때지 행복하게 할 때는 절대 거부 안 하시는데요. 더 느끼고 싶지. 더 느끼고 싶은데 안 되니까 분노해서 화를 내시는 거지 그 자체를 거부하시면요? 여러분 이게 불가능한 얘기를 하나 해드릴게요. 왜 힌두교나 소승불교가 근본적으로 대승불교 입장에선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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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의 올바른 지향점은 어딘가에서요 간단하게 제가 이 얘기만 한번 해드리면요. 우리 안에 있는 이 위대한 신성은요 지금 이 순간에도 퍼펙트하겠죠. 깨어 있겠죠. 열반이겠죠 그 자체로.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여러분이 뭔가 깨어나서 열반에 드시려면요 든다는 내용은요 여러분 에고가 하는 겁니다. 참나는 그런 것 자체도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이 참나 걱정해 주실 일이 아니에요. 참나는 지금 이 순간 퍼펙트하고 우주를 경영하고 있고 깨어 있고 탐진치가 없는 열반 상태란 말이죠. 그렇죠. 그런데 여러분이 뭔가를 수도에서 깨어나고, 초기 불교 경전에서 석가모니가 “열반을 체험하고 거기 머무르라”고 하는데 체험하고 머무르는 건 다 에고예요. 즉 석가모니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열반의 마지막에 들 때도 에고가 살아있다는 문제가 생겨요. 힌두교에서는 이게 싫었던 거예요. 힌두교는 이 문제점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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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석가모니 초기 불경에서는 이 부분이 그냥 소략하게 처리됩니다. 그냥 여러분이 좋은 세계로 가고 끝나는 것처럼 얘기가 돼요. 거기에 문제가 생긴다는 걸 힌두교인들은요 정말 우주를 떠나고 싶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끝없이 연구합니다. 열반을 체험하고 안주한다는 것만 해도 거기에 에고가 있다는 걸 알아내요. 그럼 그 에고마저 박살내야 된다는 주장을 해요. 요게 요가수트라입니다. 고 에고마저 박살내야만 우리는 진짜 안정에 들어간다. 그런데 제가 요가수트라 강의할 때도 얘기했지만 이제 모순이 생겨요. 에고가 없어버리면요 여러분은 지복을 체험할 수도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석가모니 법구경(法句經) 다 읽어보셔도 에고가 완전히 없어지는 세계를 얘기한 건 아니에요. 열반을 열반을 누리는 뭔가는 있어야 되거든요. 뭐냐면 참나는 원래 열반이기 때문에 여러분 존재가 그냥 사라진 거지 여러분이 열반을 체득한 게 아닌 게 돼요. 이해되세요?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라고요 실제로는. 진짜 열반에 든다는 내용은 열반 여러분이 완전히 사라지는 거예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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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퍼펙트한 신성에는 조금 더 영향을 줄 수가 없고 여러분 존재만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 이게 깨달음이냐는 거죠? 이게 요가수트라에서는 이렇게 돼야 된다고 주장하니까 제가 요가수트라 인도 요가의 그런 주장에 대해 반박을 강의할 때 해드린 게 그거예요. 인도 요가 이론에도요 텅 빈 참나가 균형이 깨지면서 에고가 생겨서 구른다고 나오는데 그 에고를 없애고 다시 들어갔다 한들 깨달음을 유지시키는 에고가 없죠. 깨달음을 얻은 에고가 없기 때문에 여러분은 다시 또 균형이 깨지면 또 이 현상계로 돌아와야 하는 모순이 생기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 얘기를 안 한단 말이에요. 석가모니 초기경에서는 열반에 들 때 에고교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를 안 한단 말이에요. 그 부분을 그냥 지나간단 말이에요. 그럼 이게 뭐가 모순이 생기냐면. 힌두교는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에고가 사라지고 나면은 에고가 아니 에고가 살아있는 한은 우리는 현상계를 경험해야 된다. 왜냐? 에고는 이원성의 존재이기 때문에 에고가 살아있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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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상계를 경험하게 돼 있어요. 이게 모순에 빠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원하는 건 물론 이런 거예요. “이원성에 안 빠지는 에고가 참나만 체험했으면 좋겠는데.” 에고란 존재는 벌써, 보세요, 참나가 있고 참나를 느끼는 자가 있기 때문에 이원성에 빠져버려요. 이원성은 일단 하나가 시작되면요 여러분은 바로 현상계를 만들어내서 꿈같은 세계라도 만들어내서 경험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대승 불교에서는 “에고를 끝장내야 된다”는 것까지 동의해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보살행을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대승불교 안에서 또 두 패가 갈려요. 완전히 끝장내지 말아야 된다는 화엄경(華嚴經)과 지장경(地藏經)과 끝장내고 나면 오히려 더 전지전능해질지 모른다는 판타지를 주장하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능가경(楞伽經) 같은 경전이 나옵니다. 근데 이건 힌두교보다 더 엄밀하지 못해요. 에고를 박살냈는데 왜 더 자유를 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요. 그냥 다 끝내고 나면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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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시면 에고가 박살나고 나면 여러분 참나만 남지 여러분 에고가 전지전능해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에고가 끝장나고 나면 사실은 나라는 개체성만 그냥 사라지는 건데 왜 아미타블은 도대체 나는 전생 몇 겁에 성불했고 이걸 다 기억하고 있냐는 겁니다. 석가모니불도 그럼 지금 개체성이 없어야 되는데 자신의 과거가 다 있단 말이에요. 부처들이 나와서 불경에서 얘기할 때도 다 개성이 다르단 말이에요. 그렇게 돼버리면요 뭔 모순에 빠지냐? 애초에 개체성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렇게 힌두교와 불교가 만약에 서로 물고 늘어졌을 때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저는 제 입장은 그래요. 개체성이 사라져서는 안 돼요. 그리고 사라질 수도 없다는 겁니다. 참나의 작용의 중요한 부분이에요 여러분의 에고라는 거는. 에고를 통해서 여러분 참나가 작용을 해요. 생멸 현상을 일으키고 경험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에고는요 참나가 모든 곳에서 경험하면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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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 실제로 제대로 된 경험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에고를 만들어서 각각의 에고를 통해서 참나가 사실은 현상계를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오감까지 다 경험하려면은 에고가 필요하기 때문에. 참나 자체는 에고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 여러분의 에고가 엄청나게 귀한 거라는 거예요. 이 대승기신론도요 나중에 마지막에 에고를 다 없애면 더 완벽해진다는 그 말만 빼고 나면요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게 대승에 대한 기본 입장은 똑같으니까요. 대승들은 기본적으로 이 현상계를 긍정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현상계도 근원적으로 참나의 작용입니다. 여러분 에고가 없다면 깨달음에 카르마가 없다면 여러분 깨달음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가 있어요. 여러분이 깨달았다는 거는요 여러분 에고 차원의 얘기라니까요 철저히. 참나는 이미 그런 거에 관심이 하나도 없다니까요. 늘 깨어 있고 늘 열반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열반을 얻었다. 체험했다. 난 열반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건 다 에고 차원의 구분이기 때문에 에고가 만약에 날아가 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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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다시 열반을 얻었다는 것도 없다니까요. 열반만 있지. 근데 그건 이미 여러분의 열반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의 개체성이 소멸로 끝나버려요. 이 논리에 모순이 있다는 걸 한번 생각해 보셔야 돼요. 제가 이런 얘기 주장하는 데를 못 봤어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거에 대해 한번 고민을 해보시라고요. 내 개체성을 남길 거냐 말 거냐의 문제인데 사실은 이게 없앨 수 있는 거냐? 이런 근본적인 의문부터 여러분 다 고민하셔야 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그런 고민을 지금 이 대승기신론도도 결론에서는 지금 문제가 있어요. 개체성이 끝나면 더 완벽한 개체성을 갖게 된다는 주장을 한단 말이죠. 이런 대승 불교의 모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거는요 화엄경식으로 저는 극복하기를 부탁드립니다. 화엄경에서는 절대로 개체성을 끝내지 않습니다. 끝낼 수도 없습니다. 객체성을 지닌 채로 부처가 돼요. 그 부처라야 이 현상계를 제대로 도와줄 수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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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존재를 부처라고 안 하고 따로 그냥 화엄경에서 10지보살이라고 해요. 그 내용을 같이 좀 이해해 보세요. 여러분 참나는 이미 지금 이 순간에도 퍼펙트하게 깨어 있고 퍼펙트하게 열반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문제인 거지 에고가 문제인 거지 참나는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요. 그래서 “에고를 없애버리면 문제가 사라질 거 아니냐.” 지금 이런 식으로 극복하실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요. “에고가 어떻게 그 참나와 하나가 돼서 공명할 거냐?”의 문제라고 보시는 게 대승불교의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보세요. 두 번째 참나의 형상은 위대하니 여래장의 여래장이 무량한 본성의 공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무량한 진리들이 공덕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일반 형상이 아니죠. 참나 안에 있는 형상들이에요. 세 번째는 그러면 보세요. 여기까지 오면요 이 본체 안에 있는 형상은 씨알이란 말이에요. 표현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요. 표현이 안 될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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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반드시 현상계에 표현이 됩니다. 그게 작용이에요. 작용의 위대함이니 일체의 현상계와 절대계의 선한 인과를 낳기 때문이다. 절대계에 있는 선한 진리들이나 현상계에서 펼쳐지는 온갖 이 선한 공덕들은 다 참나의 작용이다. 여기서는 왜 악은 얘기 안 했죠? 왜 선만 얘기했을까요? 참나의 뜻은 선을 구현하는 거기 때문에 형상 그대로 표현하면 선이 나와야 돼요. 그런데 문제는 현상계에 들어오면요, 실상은 어떻게 되냐면 실상은 현상계에 들어오게 되면 현상계는 이원성의 세계예요. 법신과 보신의 세계는 카르마의 세계라 이원성의 세계예요. 이 세계에 이 참나의 작용이 나타나면요 참나의 작용에 장애가 생기는데 뭐냐 하면 에고가 발생하면서 이원완성의 세계에 들어온 에고는요 참나의 뜻을 어기는 방향으로도 가고 싶고 유혹을 늘 받고 있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원성의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참나가 그냥 실현되는 게 아니라 저항 속에서 실현되는 세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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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대승기신론 입장대로 참나 안에 있는 이 형상들이 표현돼야 된다는 것도 진리지만 동시에 이원성의 세계에서 표현된다는 건요 악에의 저항 속에서 표현한다는 뜻이 있어요. 즉 악도 이미 발생을 해버린다는 얘기입니다 현상계에 들어오면. 악의 존재를 무조건 인정해야 돼요. 악은 안 없어져요. 악 자체는 안 없어지는데 이런 불보살들이 추구하는 건 뭡니까? 참나의 뜻은 뭡니까? 악을 하지 말고 선을 하라는 거예요. 악의 존재는 인정합니다. 근데 악을 하지 말고 선을 하라는 거예요. 선을 할 때 여러분이 진짜 불보살이 되는겁니다. 여래장의 한마음의 진정한 화신이 되는 거예요. “선악이 다 한마음의 작용인데 우리는 그중에 악은 안 하고 선을 해야만 진정한 화신이 된다.” 이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시지만 좀 납득되십니까? 왜냐? 우주는 우주가 원하는 건 선을 표현하는 거기 때문에. 하지만 선을 표현하려면 악이라는 저항이 있어야만 그 속에서 표현할 때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악이 생긴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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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악에 골몰해버리면 탐진치에 빠져버리면 선을 어기는 경지로 가게 됩니다. 악을 그냥 실행해요. 이런 문제도 이원성 세계에 들어오면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작용의 세계에서는. 하지만 끝없이 우리가 이렇게 공부를 해야 되는 이유는 하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해서 선을 구현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거고, 그럴 때 우리가 제대로 한마음 안에 있는 로고스를 구현하는 존재가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로고스의 화신이라고 불렸던 4대 성인들 또 그 외의 수많은 성인들이 와서 다 한 얘기는 다 하나입니다. “악은 하지 말고 선을 해라. 니가 당해서 싫은 거 남한테 하지 마라. 너가 받고 싶은 거 있으면 남한테 해줘라.” 딱 그 얘기밖에 없는 이유가 이걸 할 때 이것을 할 때 우주의 이 신성이요 더 이 현상계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기도문에 나온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그 이유가 뭐냐 할 때 주기도문에 딱 담겨 있어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하려고요. 땅에서는 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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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창궐하기도 하니까요. 사람들이 탐진치의 눈이 멀어버리기도 하니까 로고스의 깊은 뜻을 드러내 가지고 다시 선을 향해 가라고 부추겨야 되는 게 이런 로고스의 화신들의 목표거든요. 대승기신론을 쓴 저자의 뜻도 뭡니까? 이 위대한 한마음의 작용에 탑승해서 기신(起信) 믿음을 일으키려고 한 거예요. “제발 여기에다 믿음을 내라. 당신들이 믿고 있는 그거 말고 이 위대한 한마음에 믿음을 내라”는 거예요. 위대한 한마음만 따라가면 여러분이 잘나서가 아니라 한마음이 도와서, 한마음 안에는, 보세요, 본래 텅 비어 있고 한마음 안에는 어떤 잡념도 붙을 수가 없고, 한마음 안에는 우주의 진리 좋은 선한 공덕들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한마음하고 접속만 하면, 그리고 선한 공덕들은 반드시 작용을 통해 표현되려는 자체의 힘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한마음에 접속하기만 하면 선을 하고 싶어지고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나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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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원래 이런 능력이 이미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접속만 잘하고 이 방해요소만 제거해 주면 나오게 돼 있다는 거예요 이게. 이래서 대승이다 하는 겁니다. 이런 게 위대한 이 한마음이 위대한 거고. 승(乘)은 일체 모든 부처님도 보살들도 이 법을 본래 타고 갔기 때문에. 보세요. 부처님이 여러분보다 에고가 더 뛰어나서 그런 존재가 된 게 아니고 우리 모두 갖고 있는 이 한마음을 더 잘 발현시켰기 때문에 부처가 됐다는 거예요. 이거 안 탔으면요 그분들도 부처 못 됐다는 거예요. 쌩으로 의지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에고의 힘으로 에고의 재주로 하려고 하면 그건 다 꼼수가 돼서 안 돼요. 참나랑 함께 움직였을 때 여러분 반야가 열리고 제대로 된 자비와 이런 선행이 나오는 겁니다. “일체 보살이 모두 이 법 타고 여래 경지까지 갔노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가 타고 가야 할 것이며 우리가 따라 걸어야 할 길이다. 따라서 대승이라는 건 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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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라는 건 보세요. 이 법을요 동양에서는 이 로고스를 뭐라고 합니까? 불교에서는 법(法) 우리 노자나 이런 동양 철학에서는 도(道) 그러죠. 도는 길이라는 뜻이죠. 로고스를 왜 길이라고 할까요? 이게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니까요. 불교에서 승(乘)이라고 한 거랑 같은 뜻입니다. 길은 여러분이 따라 걸어줘야 되죠. 승은요 타줘야 돼요. 거기 타야 돼요. 타고 같이 가야 돼요. 한마음에 타고 같이 가지 않으면 여러분은 절대로 자리이타(自利利他)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그런 위대한 길을 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시고.
[3-4. 입의분을 마침
여기까지 ‘입의분’(대승의 의미를 확립함)을 설명하였다. 다음에는 ‘해석분’(대승의 의미를 풀이함)을 설명한다.
已說立義分 次說解釋分.]
3-4 이제 입의분(立義分) 대승의 의미를 확립함을 설명했다. 대승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히 내가 개념을 세웠다. 체상용 이겁니다. 대승이라는 건 이 체상용이 아우러져서 대승을 구성하고 대승이라는 거는 “참나, 한마음의 본체를 정확히 체득하고 형상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작용을 통해서 육바라밀로 표현하는 게 진정한 대승이다”라고 의미를 세웠다는 겁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해석해 보겠다. 그 내용들이 다 그런 의미들에 담겨 있는 뜻을 깊이 풀어보겠다 해서 해석분으로 넘어갑니다.
[제4장 해석분
대승의 의미를 풀이함
4-1. 해석분의 3가지 내용
‘해석분’(대승의 의미를 풀이함)은 3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어떤 것이 3가지 부분인가? ① ‘대승’의 올바른 의미를 나타내 보임(현시정의顯示正義), ② 사특한 집착을 상대하여 다스림(대치사집對治邪執), ③ 진리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형상을 분별함(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 그것이다.
解釋分有三種 云何爲三 一者顯示正義 二者對治邪執 三者分別發趣道相]
4장 해석분 대승의 의미를 풀이함. 한번 보시죠. 해석본은 4-1입니다. 세 가지 내용이 있다. 해석분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는데 첫째 대승이란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설명해주는 올바른 의미를 풀어주는 현시정의. 올바른 뜻을 제대로 풀어내서 보임 이런 부분이 있고 이 파트가 있고 또 다른 파트는요 두 번째 파트는 사특한 집착을 상대하여 다스림. 사특한 집착에 두 개가 있다 그랬죠. 보세요. 자 이렇게 에고의 세계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에 오면요 나와 이 세계에 대해서 집착이 생깁니다. 나에 대한 집착이 아집이고요. 나를 포함한 이 모든 세계 어떨 때는 또 나의 상대가 될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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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으로서 세계, 그리고 사실은 우리 자연의 일부니까 세계의 일부니까 엄밀히 말하면 나를 포함한 모든 세계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그걸 법집 그래요.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한 집착, 나에 대한 집착. 근데 왜 이게 집착이 붙냐면요 이 모든 거는 참나의 작용인데 참나랑 별도로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참나랑 별도로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집착을 여러분이 어떻게 갖고 계신지 한번 보시죠. 지금 여러분 마음 안에 마음의 제일 중심점이 참나거든요. 그럼 이 참나가요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의 에고와 세계를 이렇게 표현해내고 있는 거를 지금 느끼십니까? 체험적으로 느끼십니까? 통찰하십니까? 참나가 뒤에서 빛을 비춰주기 때문에 내 에고도 작동하고 이 오감의 세계도 작동하고 있는 거 그렇게 느껴지세요? 이게 안 느껴지면요 보살로서 이제 보살도 하기 힘들어집니다. 보살 자격이 안 주어지는 게 매 순간 이걸 느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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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참나의 작용이라는 걸 실감나게 체험적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왜? 보살도에서 이런 아공 법공 요걸 깨치는 걸 아공 그래요. 자기 에고가요 실체가 있는 게 아니고 참나의 작용이라는 걸 알면 아공(我空). 이 현상계 색깔의 세계 소리의 세계 오감의 세계를 포함해서 내 마음속에 모든 돌아가는 감정과 이런 개념의 세계 또한 모두 참나의 작용이라는 걸 알아야 법공(法空)인데 아공 법공을 알아야 사실은 이제 제대로 된 보살도 1지보살이라도 정확히 들어가거든요. 그럼 1지보살부터 왜 이렇게 쳐주냐면요 현상계를요 참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건 체험이 필요해요. 체험과 개념이 정확히 만나야 돼요. 이게 안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눈앞에 있는 이 펜 하나도 여러분하고 여러분 참나랑 독립돼서 있다고 생각해요. 알아차리는 여러분하고 독립돼서 이 펜이 있을 수 있나요 지금? 알아차리는 여러분이 안 계신데 이 펜이 여러분한테 여러분 마음에 지금 이게 들어와 있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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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죠. 알아차리는 존재감 없이 여러분의 생각 감정이 돌아갈 수 있나요? 나라고 하는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나요? 나라고 하는 정체성 또한 참나의 작용이고 여러분이 보고 듣고 하는 오감의 세계 그리고 생각 감정의 세계, 마음의 세계, 오감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에 다 해서 결국은 다 여러분 참나의 작용일 뿐이라는 걸요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안에서 비춰지는 그 참나의 빛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을 때 여러분이 반야바라밀이라는 걸 얻게 됩니다. 영화, 영화로 보세요. 영화. 영사기에서 빛이 나가죠. 이 빛 하나가 나가서 저 안에서 빛이 나가는 요게 있고 앞에서 필름을 통과한다고 치죠. 빛이 필름을 통과하면 스크린에 오만 산도 나오고 바다도 나오고 하죠. 애초에 이 빛이 없으면 이게기 비칠 수 있을까요? 요 빛이 여러분 지금 정신의 빛입니다. 알아차리는 자예요. 요 빛이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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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안의 뭔가를 거칠 때 필름을 거칠 때 여러분 마음에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가 펼쳐져요. 그런데 근원이요 영사기에서 처음 나오는 빛은 순수하다는 거를 늘 알아차리실 수 있고 여러분 그 극장에서 만약에 영화를 보신다면 여러분 앞에 있는 스크린을 볼 뿐만 아니라 “저 영사기에서 나오는 순수한 빛이 이 스크린의 이 화면들을 유지시켜준다”는 거를 자각하시면서 보실 수 있냐는 거죠. 그거랑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 마음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이 참나에서 빛이 비춰주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스크린에 나타나서 움직이고 있는 거라는 걸 아실 수 있냐는 거죠. 이걸 잃어버리면요 영사기 빛이 없이 스크린에서 알아서 화면이 움직이는 줄 안다고요. 이것도 이제 가능합니다만 예전 그 빛을 쏴가지고 영사기 돌려서 돌리는 걸 생각해 보세요. 이해되십니까? 이 빛으로 인해서 우리가 이걸 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참나의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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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 여러분 지금 보고 듣고 슬프고 울고 웃고 다 알아차리실 수가 있는 거예요. 이걸 말하는 거예요. 불교는 마음의 문제로 우주를 풀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세계도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세계를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 세계는 내 마음 안에서 내가 알아차려주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고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걸 알고 보시냐는 거죠. 그래서 아집과 법집은 다른 게 아니에요. 아집은요 어떤 이기주의도 당연히 아집인데 그렇게만 보지 마시고 나 자체를요 참나랑 별도로 독자적인 실체라고 보는 입장인 거예요. 참나가락 없이도 나는 존재한다. 참나가 없이도 이 현상계는 존재한다고 보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보이시죠 실제로. 근데 이게 착각하는 이유가 불교 용어는 여러분 마음에 들어와 있는 세계를 가지고 얘기하기 때문에 그러면 이해가 되실 거예요. “내가 없으면 세계가 없지.” 여러분 깊은 잠 주무실 때 세계가 있던가요? 없을 걸요. 딱 깨면 “여기는 지구냐? 어디 어느 시점이냐?” 다시 돌아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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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잖아요. 아! 지금 여기는 2014년 몇 월 며칠이고 나는 어디서 정신을 차렸다. 여러분 혼자 영화 찍으시는 거예요 매일매일. 그 기간이 짧아서 그렇지 길면 영화죠. “여기 어디야? 지금 몇 시야? 아직도 지구야? 아직도 2014년이야?” 하면서. 정신 차리고 나면... 접속이 끊겼다 다시 돌아오면요 다 낯선 거예요 사실은. 그걸 여러분 매일 겪고 계신 거예요. 사실은 매일 돌아가세요. 돌아가실 때 여러분 다 놓고 가셔야죠. 다 안 놓으면요 잠에 못 들어갑니다. 다 내려놓을 때 푹 깊은 무위식에 들어가요. 그래서 깨어나면 다시 현상계로 또 접속이 돼서 다시 이 세계 속에 들어오세요. 매일매일 신비한 현상들을 겪고 계신 거예요. 근데 그거는 이제 객관적인 상황이고 여러분 마음에서 펼쳐지는 걸 가지고 말하면 이 마음이요 여러분 주무실 때는요. 꿈이라든가 다른 차원에 접속해서 거기서 살다 오신다고요. 여러분 마음에 펼쳐진 오감은 이제 다른 오감들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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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게 전부라는 거 아시겠어요? 꿈꿀 때는요 그 세계가 전부예요. 현상계는 오히려 몰라요. 가끔씩 이제 자각몽(自覺夢) 꿀 때는 같이 겹치는데 이쪽도 알고 저쪽도 사는데 이중 세계를 사는데 진짜 그 세계 골몰해서 꿀 때는요 그 세계밖에 없지 다른 세계는 없어요. 그럼 여러분 잠깐 주무시는 사이에서도 사실은 딴 세계에서요 재밌게 살다 오세요. 그래놓고 또 여기 떠나면 큰일 난다고 하는데 만약에 그런 위치라면 돌아가시자마자 사실은 제가 볼 때 인간이 영원히 죽으면 여러분 의식 잃을 때부터 또 다른 꿈이 펼쳐질 텐데요. 또 신나게 그 세계에서 사시고 계실지도 모르는데요 사실은. 그렇죠? 꿈꿀 때 일어나는 현상 생각해 보시면 가능한 얘기 아닙니까? 꿈꿀 때랑 또 비슷한 세계에 가서 또 재미있게 사시고 계실 또 이쁜이 하나 지나가면 금방 따라와서 또 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모르고. 이게요 왜냐? 그 차원을 옮겨갈 때 조금 기억이요 좀 이쪽 기억이 약해져요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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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이런 얘기도 한번 인터스텔라보다 더 재미있는 얘기. 이걸 뭐라고 해야 될까요? 하여튼 이런 현상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만 연구해 봐도요 엄청 재밌어요. 여러분이 진짜 여러분을 책임져줄 진리들은 여기서 나옵니다. 블랙홀이나 뭐나 사실은 여러분 모르고 돌아가셔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치는요 여러분이 겪을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가는 또 다른 삶에 대한 얘기고 여러분 마음에 대한 얘기예요 근원적으로. 결국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을 통해서만 우주를 해석하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요 시공을 초월해서요 우주의 모든 걸 이해하는 거랑 같아요. 세세생생 여러분이 체험하고 느끼는 건 여러분 마음뿐이에요. 여러분 마음에 들어온 세계와 여러분이 나라고 생각하는 그 에고의 영역과 여러분의 에고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 그리고 이 모든 걸 존재하게 하는 참나. 여기서 여러분은 영원히 못 벗어난다는 게 대승불교의 입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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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영원히 못 벗어나니까 이 에고의 세계를 버리고 나는 초월해서 참나로만 있으면 좋겠다”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참나는 표현의 존재지 작용하는 존재지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참나도. 참나 자체가 우주를 만들어내고 작용하는 존재라고요. 여기서 도망갈 도리가 없어요. 그래서 남은 답은 뭐만 남습니까? 자리이타 중생 구제만 남는 거예요. 그 중생 안에 나도 들어가요. 즉 나와 남 모두 잘되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거예요. 도망갈 데도 없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그럼 다른 수가 없으니까 처음에 많은 중생들은 이 우주에서 열반도 추구해보고 혼자 살 길도 추구해보고 막 해보다. 나중엔 다 어디로 수렴되겠습니까? 하다하다 이치를 알고 나면? 영 이치를 모르는 친구들은 빼고요. 이치를 이제 알게 된다면요 결국은 보살도에 동참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내가 수많은 생을 사람 죽이고도 살아봤고 감옥에서만도 살아봤고 뭐 나쁜 짓은 다 해봤는데 결국 얻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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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는 뭡니까? 거기서 답이 나옵니까? 결국 “우주가 나더러 원하는 거는 여기에 동참하라는 것 같다” 하고 마음을 열 때 그 사람도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자가 된 뒤에도 자기가 또 뿌린 건 다 받아야겠지만 그래도 성자가 돼서 보살로서 그 업을 받을 수도 있고 갚을 수도 있어요. 여러분 과거의 업을 여러분이 과거의 업은 반드시 찾아갈 겁니다. 그건 성스러운 우주의 진리예요. 여러분이 거부하실 게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우주가 경영돼요. 남이 벌 받은 친구는요 여러분 남들이 죄 지을 때 뭐라고 합니까? 벌 받을 만한 친구들, “너는 우주가 반드시 너를 응징할 거다” 해서 본인한테 찾아온 거는 “왜 이러십니까?” 하면은 어떻게 이거 좀 이렇게 살짝 피했으면 좋겠고. 뭔가 안 맞죠? 그게 벌써 비양심적이잖아요. 그래서 양심을 따른다고 봤을 때 여러분 흔쾌하게 맞이하셔야 돼요. 단 어떻게 맞이하는 게 최고냐? 그거 없앨 수도 없고 받아야 되잖아요.
육바라밀로 보살이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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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버리면 돼요. 보살이 돼서 열심히 중생을 구제하면서 그걸 맞이하면요 공덕을 많이 쌓아놔서 여러분 우주도 배려해 줄 거고요. 또 여러분이 깨어 있고 여러분 마음 관리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여러분 앞에 나타난 과보로써 온 그런 험한 역경이라 하더라도 여러분 육바라밀로 깨어서 “이 역경 또한 나의 마음에 뜬 스크린 나타난 영상일 뿐이다”라는 걸 통찰하면서 참나의 빛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그 세계를 이겨내시겠죠. 그러면요 여러분이 우주에 아주 중요한 암세포 하나를 정상세포로 돌리는 것처럼 아주 고귀한 일을 하신 거예요. 여러분이 뿌리고 여러분이 받았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우주의 한 부분을 정화시킨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업보 참는다고 그런 거 있죠? 어떤 사람이 날 괴롭혀요. “에이 카르마를 더 짓지 말자” 해서 무조건 참고 버티면서 그 사람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이겨내시려고 하는데 무시도 업입니다. 또 다른 카르마예요 이것도. 아무것도 안 한다고 카르마를 안 짓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어요 원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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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하려고 하는데 왜 외나무다리에서 또 빠지네요. 물에 또 떨어졌어요. 그래도 또 도와주면 카르마가 계속 이어질 것 같아서 조용히 갔어요. 이 판단에 뭐가 문제가 있죠? 안 도와준 카르마를 지었기 때문에 또 또 만나야 돼요. 그게 아니에요. 육바라밀대로 해결해서 도와주고 육바라밀에 흔쾌하게 해버리는 게 업을 처리하는 거지 무시하고 외면한다고 되지 않아요. 여러분 안에 또 다른 앙금으로 남을 겁니다. “내가 무시한다고 봐줬더니 이게 할수록 봐줬더니 더 하네.” 이럴 수도 있고 여러분 속에서요 그걸 무시한다고 해결됐다는 것도 얼마나 자명하지 않은 얘기입니까?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얻으셨나요? 그냥 여러분의 생각 아닙니까? 그렇죠. 제가 얘기했죠. 꼴찌끼리 다 맞춰보지 마시라고. 비슷해요 수준이. 그 수준이 비슷하니까 귀신같이 “너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니?” “나도 어떻게 이런 생각이 났어.” 하면서 그러면 이제 거기 1등짜리가 보면 “아 쟤들 어떡하냐?” 이런 상태지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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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하고 좀 맞춰보시고요 여러분 양심의 소리를 좀 들어보시면요 상식적인 답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렇게 어떻게 죄를 좀 안 받아보고 싶은 건 저도 똑같아요. 제 에고에서도 과거에 묵은 카르마 저한테 좀 안 오고 이렇게 다음 생에 저한테 찾아온다든가 이번 생애에 저는 좀 안 건드렸으면 좋겠고 이런 마음이 다 듭니다. 이게 현상계 이게 재미있는 거예요. 에고는 이런 별 생각을 다 하는 존재예요 애초에. 이거 경영만 잘하시면 되지 그런 생각 못하게 하시면 안 돼요. 에고는 그러라고 있는 거예요. 현상계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체크해 보는 게 에고예요. “이렇게 된다면, 이렇게 된다면, 지금 내가 빨리 뒤통수를 치고 제 돈을 뺏어 본다면..” 에고는 다 할 수 있어요. 안 하시면 돼요. 이런 생각 자체를 막으려고 하시면 오히려 더 번잡해지고요 그럴 때마다 육바라밀로 “너 자명해? 너 자명해?”라고 꼬치꼬치 캐서 그 에고의 에고가 사고하는 습관을요 좋은 습관으로 고쳐주는 게 중요하지 육바라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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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화하는 게 중요하지 그 에고 붙잡고 싸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이게 어린아이랑 같아요. 자라면서 이해하면 자동으로 해결될 일을 붙잡고 싸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고 자체를 성숙시키는 비밀도 특이한 에고를 특별한 에고를 만드시라는 게 아니라 늘 깨어 계시면 돼요. 참나의 빛이 에고까지 골고루 비춰주면 에고도 변합니다. 그래서 늘 육바라밀 실천할 생각만 하시기 바랍니다. 핵심 내용을 지금 너무 많이 하고 있는데 조금만 더 할게요. 이거 억울해서 이렇게 못 끝네요. 지난 시간에 한 거 지금 새로 못 들어갔잖아요. 그래서 대치사집(對治邪執) 이런 아집과 법집의 사특한 집착들을 깨는 거를 또 한 번 얘기해 줘요 중간에. 세 번째 진리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형상. 즉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인데 이거는요 발동하여 나아간다는 뜻이거든요 도로. 발동하여 도에 나아가는 형상들을 이렇게 분별해 주겠다는 거다.
이게 뭐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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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죠? 계제(階梯) 분석이에요. 이 정도 하면 1주 이 정도 하면 1지 이 정도 하면 2지 이렇게 해서요 도에 나아가는 단계들을 정확히 설명해 줍니다. 이게 이제 이제 뭐죠? 1주보살 1지보살 뭐 10지보살 10지보살에서 대승기신론은 개체성을 완전히 초월하자는 입장이니까 12지까지 주장합니다. 12지까지 가서 끝내자라는.
[4-2. 한마음의 2가지 문
[① “대승의 올바른 의미를 나타내 보임(현시정의顯⽰正義)] ‘일심법一心法’(한마음의 법)에 의지하여 2가지 문이 있으니, 어떤 것이 2가지 문인가? ① ‘심진여상문心眞如門’(마음의 참되고 늘 똑같은 문), ② ‘심생멸문心生滅門’(마음의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소멸하는 문)이 그것이다. 이 2가지 문은 일체의 법法을 총섭한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2가지 문이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顯示正義者 依一心法有二種門 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 是二種門皆各總攝一切法 此義云何 以是二門不相離故.]
4-2 한마음의 두 가지 문. 대승의 올바른 의미를 나타내 보임. 첫 번째 대승의 올바른 의미를 나타내 보이는 현시정의 파트입니다. 거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이에요. 일심법이란 한마음의 법. 자 보세요. 한마음 안에는요 한마음 법 그랬을 때는 체상용인데 보세요. 체와 상은 이거는 출세간법(出世間法)이에요. 법으로 구분하자면. 요 작용만 세간법(世間法)입니다.
법의 세계예요. 세간법의 세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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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간법의 세계에 관여가 돼 있다. 한마음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근데 이것도 또 아셔야 돼요. 한마음의 작용 자체는 세간일까요? 출세간일까요? 한마음 자체가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인데요. 그 한마음이 일으키는 작용은 그럼 시공간 안에 존재일까요? 밖의 존재일까요? 근원적으로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자 이거예요 이거. 중력이니 뭐니 과학을 연구할 때도 이걸 좀 아셔야 되는데 만유인력법칙을 지금 여러분 실험합니다. 제가 늘 이거 보여드리는 게 제가 이 손을 놓으면 이놈이 떨어지죠. 신이 이걸 떨어뜨렸어요. 만유인력법칙대로. 신 안에 텅 빈 신 안에 있는 만유인력의 법칙의 공식대로 방금 떨어뜨렸는데 우리 눈에는 신이 작용한 게 안 보이죠. 작용은 안 보여요. 신의 작용은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안 보여요. 그런데 뭐가 보입니까? 현상계 안에 드러난 현상계의 존재들이 변하는 걸 보고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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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을 일으켰다는 걸 아는 거예요. 여러분 보세요. 생각 지금 생각이 번뇌에 가득 차 있고 분노가 타올라요. 명상을 해서 참나랑 접속을 했더니 무엇도 안 했는데 참나, 깨어서 그 분노와 생각을 봤더니 누그러져요. 그러면 요거는 지금 참나는 구체적인 작용을 한 게 안 보이는데 현상계 안에 있는 존재들은 변해 있단 말이죠. 아니면 어떤 일정한 공식대로 움직이고 있단 말이죠. 물은 아래로 늘 흐르고 있어요. 작용하는 건 물이죠. 우리 눈에 보이는 구체적 작용은 물인데 흐르게 하고 있는 그 신의 작용은 안 보이죠. 신의 작용은요 안 보여요. 그래서 이거를요 노자에서도 이거를 무위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무위의 용(用)이라고 하는 거예요. 무위의 작용. 보이지 않는데 우주를 다 굴리고 있는 그 자리. 그래서 이 도처럼 진정한 경영자도 노자는 무위로 경영하라고 하는 게 이거예요. 억지로 명령을 해서 그 말을 들으면 작용을 내가 거친 작용을 일으킨 거죠. 근데 여러분이 양심적으로 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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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시켜도 사람들이 양심적이 된다고요 주변 사람들이. 이건 무위의 작용이에요. 내가 얼굴 붉히고 말로 하고 즉 어떤 현상계의 뭔가로 여러분이 남한테 안 했는데 저쪽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요. 여러분 깨어 계시기만 해도 주변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킵니다 실제로는. 근데 거기서 말과 그런 행동까지 하면은 더 잘 되죠. 행동하지 말고 말하지 마라는 게 아니라 깨어있음만으로도 무위의 작용을 일으키는데 그게 현실을 변화시키는 말과 행동으로까지 일어나게 작용을 일으켰다면요 더 큰 변화를 일으키겠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아요. 여러분 깨어 계시기만 해도 지금 제가 왜 깨어 계시기만이라도 하라고 하냐면요? 여러분이 지금 깨어 계시지 않으면요 욕망의 탐진치의 결을 지금 따라가고 계신 게 돼요. 탐욕이 일어나요 마음에서 쉽게. 뭔가 거기에 대해 분노해요. 어리석어져요. 계속 가만히 있는 중에 어리석은 쪽으로 가고 계세요. 근데 깨어 계시기만 하면 몰라만 해도 다른 거 안 해도 몰라만 하고 내 안에 있는 참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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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만 해도 생각이 계정혜의 방향으로 굴러갑니다. 선정을 얻었죠. 그러면요 상황을 더 자명하게 보려고 하고 실천할 때도 조심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변해버려요. 요 스위치 하나 끄고 켜고 차이란 말이에요. 이 우주의 신묘한 작용을 내 마음 안에 들어오게 하느냐 못 들어오게 하느냐 차이예요. 우주에는 이런 무한한 능력이 꽉 차 있는데 못 받아쓴다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성자들이 안타까워합니다. 엄청난 힘이 우주에 있는데 꺼내서 쓸 줄을 모른다는 거예요. 보물을 꺼내서 쓸 줄을 모른다는 게 이겁니다. 접속만 하면 여러분한테 육바라밀을 잘하는 능력이 탁월하게 막 생겨날 텐데 여러분이 접속을 못 하니까 에고의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안 되죠. 에고는 탐진치의 방향으로 흐르게 흐르기가 쉽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런 것도 좀 생각해 보시면... 그래서 자 보세요. 이렇게 체상용을 억지로 나누면 출세간법과 세간법이 나오지만 실제로 참나 자체는 세간에서 작용하더라도 그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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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이 드러나지 않다는 거. 그런데 또 다르게 얘기하면 현상계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게 결국 참나의 작용이다고 보면은 사실은 세간법까지도 다 포괄한다고 볼 수도 있는 거고요. 그 차이 아시겠어요? 이 한마음 자체만 가지고 얘기하면 이 체상용이 시공을 초월하는 영역일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런데 결국 그 작용 안에 세간법도 들어있다고 보면은 세간의 모든 일까지도 사실은 다 참나의 작용이라고 또 볼 수도 있다 하는 거. 이렇게 좀 구분도 하되 또 통합도 해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만 할게요. “대승의 올바른 의미”에서 이 일심법(一心法)이라고 하는 건 한마음 안에 우주의 모든 법이 다 들어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초월적인 영역을 심진여문(心眞如門)이라고 하고요. 마음에 심진여상문이라는 거는 마음에 늘 참되고 늘 똑같은 그 문이라는 의미고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는 거는 마음의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소멸하는 현상계를 구현해내는 참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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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영역 참나의 그 문이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 문은 일체의 법을 총섭한다. 일체법은요 세간 아니면 출세간이라는 거예요. 이 두 가지 문이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문은요 절대 떠나지 않는다. 보세요. 결과적으로는 세간이나 출세간이나 보세요. 출세간의 법은 드러나지 않은 로고스고 세간의 법은 드러난 로고스지 다 한 법이지 두 법이 있지 않다는 겁니다. 만유인력법칙, 참나에 있는 만유인력법칙을 나타내는 정보가 있겠죠 참나 안에는. 그 법이 밖으로 드러나면 이 물건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이 두 개가 다릅니까? 하나는 시공 안에 들어와 있고 하나는 시공 밖에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하나의 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다 하나다. 그렇게 해서 다 하나다고 하면 다시 일심법으로 돌아와 버려요. 이해되십니까? 일심법, 이 안에 모든 게 들어있다. 그래서 일심법에는 두 가지 문이 있다.
[* 능가경楞伽經
‘적멸’을 ‘한마음’이라고 부르며, 한마음을 ‘여래장’이라고 부른다.
寂滅者 名爲一心 一心者 名如來藏
*능가경楞伽經
‘여래의 씨알’(如來藏)은 선과 악의 원인으로, 일체의 중생을 두루 일으켜 만든다. 비유하자면 환술사가 여러 존재를 변화시켜 나타나게 하는 것과 같다.
如來之藏是善不善因 能徧興造一切趣生 譬如伎兒變現諸趣.]
이거를요 능가경 보시면 적멸(寂滅)을 한마음이라고 부르고 한마음을 여래장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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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이나 여래장이 결국 적멸, 텅 빈 열반의 자리라는 걸 얘기했고요. 능가경에서 이 말을 합니다. 여래의 씨알, 여래장은 선과 악의 원인이다. 악까지 집어넣어주는 건 이런 이유입니다. 선과 악 모든 것의 원인이라 일체의 중생을 두루 일으켜 만든다. 중생의 온갖 잘못된 부분도 다 여래장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결국. 비유하자면 환술사가 여러 존재를 변화시켜 나타내게 하는 것과 같다.
[* 원효의 대승기신론소⼤乘起信論疏
‘한마음’(一心)이란 무엇이던가? 일체의 현상계는 ‘오염됨⋅청정함’(染⋅淨)의 구분이 있으나, 그 ‘본성’은 이렇게 둘로 나누어 지지 않으니, ‘참됨⋅망령됨’(眞⋅妄)의 두 가지 문을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一)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오염됨⋅청정함의) 2가지 구분이 없는 그 자리는 온갖 현상계의 실체가 된다. 그래서 텅 비기만 한 ‘허공’과는 같지 않으니, ‘본
성’은 스스로 신령스러운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음’(心)이라고 부른다.
何爲一心 謂染淨諸法 其性無二 眞妄二門 不得有異 故名爲一 此無二處 諸法中實 不同虛空 性自神解 故名爲心.}
그다음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 나온 한마음에 대한 설명은 제가 많이 강의한 건데 보십시오. 한마음이란 무엇이든가? 일체의 현상계는 오염과 청정 두 가지 이원성의 구분이 있지만 본성은 이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지 않으니 참됨과 망령됨 두 가지 문을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라고 한다. 보세요. 한 마음이라는 걸 풀어주는 겁니다. 이 자리가 왜 하나냐? 여기선 이원성이 없어서 하나라는 얘기고요. 왜 마음이냐? 그 자리는요 텅 빈 하나라고 하면 텅 빈 허공 같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텅 비고 허망한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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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과 같지는 않고 본성은 스스로 신령스러운 이해력을 가지고 알아차리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하는 거다. 한 마음을요 결국 이게 한마음이 열반이고 여래장이고 적멸입니다. 그런데 이 텅 빈 마음은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래서 일심(一心)이라고도 부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보시고요. 그러면요 아까 여래장에서 모든 게 선과 악이 다 여기서 나온다는 것만 하나 제가 설명 드리고 끝낼게요. 여래장 안에 선과 악을 만들면 하늘은 그럼 악도 “하늘은 악한 존재이기도 한 거 아니냐?” 이렇게 오해하실 수 있는데 이거예요. 하늘에는요 참나 마음 안에는 사랑 정의 예절 지혜 성실만 꽉 차 있겠죠. 이걸 구현하고자 하는 도밖에 없겠죠. 왜냐면 이기성이 없기 때문에 하늘은 지금 이기적인 유혹이 없거든요. 또 불교식으로 말하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요것만 구현하려는 힘이 꽉 차 있겠죠? 정보가. 그런데 현상계에 들어오면요 보시를 구현하려고 하면요 보시를 안 하는
1:06:00
가능성에 대해서 정보가 이미 있는 거 아닌가요? 보시에 대한 정보가 있다는 얘기는 뭐도 있다는 얘기입니까? 이원성 세계에 들어오면? 보시를 안 하고 반대로 보시의 반대 개념도 이미 있다는 얘기예요 정보가. 참나 안에 있을 때는 문제가 안 돼요. 그거는 참나 안에서 한 덩어리였기 때문에. 에고가 없었기 때문에. 에고를 가지게 되면 이게 문제가 돼요. 구현될 때는요 보시를 안 하는 방향도 로고스에는 있단 말이에요. 이거 이해되십니까? 참나 차원에서는 문제가 안 됐던 선을 방해하지 않았던 로고스가 현상계에 들어오면 선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이 로고스가 드러나 버리면 선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고요. 보시를 안 하고 오히려 뺏는 쪽으로 갈 수도 있다는 거. 보시의 반대 개념도 있단 말이죠 애초에. 그래서 이원성 세계에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요 악의의 심각한 유혹을 겪게 됩니다. 선을 깨버리고 싶은 욕망이 생겨요. 이해되시죠? 여기서 선을 구현하는 게 목표인데 지금 여기서 정신을 잃어버린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1:07:00
수많은 중생들은, 보세요, 인터스텔라 생각해 보세요. 저 여러분 참나의 세계에서 파견된 우주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 우주 가면 완전히 열심히 하려고 인의예지 막 육바라밀로 온몸에 무장하고 딱 그 별에 도착해서 딱 내리는 순간 정신을 잃어버리고 탐진치로 뛰어가고 있단 말이에요. 왜 왔는지도 잃어버렸어요. 후발대가 또 도착하면 같이 또 뛰어다녀요. 그러다가 어쩌다가 이제 보살이 오는 거죠. 딱 왔는데 정신 차리고 그 별에서 정신 안 잃어버린 존재가 우리가 왜 왔는지 아니까 육바라밀을 하자고 했을 때 앞의 선발대들이 화낸단 말이죠. 자기도 그러자고 해놓고 와놓고. 이해되세요? 이런 형국이라고 보시는 게 맞습니다. 분명히 인의예지 구현하려고 존재는요 모든 존재는 다 육바라밀을 구현하려고 태어났어요. 본성상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비유가 비슷하죠. 왔는데 정신 잃어버리고 나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이 더 미운 거죠. 왠지 뭔가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고.
1:08:00
주변의 양심적인 사람을 보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나의 어떤 부족한 부분을 지적한다는 느낌으로 보면 내 에고는 뭔가 기분이 나쁠 수도 있어요. “공부 좀 적당히 하지.” 뭐 이러면서. 누구 하나만 너무 열심히 치고 나가면 내가 불행해지잖아요. 다 50점 맞을 땐 기분 좋았는데 친구 사이에 한 친구가 치고 나가면서 60점 맞기 시작하면 뭔가 이렇게 저 친구도 좀 놀았으면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죠. 그래서 이 보살들은요 여러분 “우리가 이제 홍익보살이 됩시다” 하고 이렇게 모였잖아요. 정신 차리셔야 돼요. 잃어버리지 마시고 이 현상계에서 지금 어디 참나의 별에서 이쪽에 왔다고 생각하시고 정신 잃어버리지 마시고 육바라밀을 가지고 여기 지금 먼저 온 사람들도 설득하고 뒤에 올 사람들도 오자마자 또 정신을 잃기 쉽기 때문에 교육제도를 교육제도를 보강해서 정신 안 잃어버리게 또 이렇게 상기(想起)하게 플라톤의 상기설(想起說)이 우리가 원래 다 이데아를 알고 있었는데 육신 안에 들어오면서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1:09:00
그걸 상기시켜주기만 하면 된다는 게 플라톤의 교육론입니다. 다시 이데아 로고스를 깨워줘야 돼요. 그래야 그 친구가 또 여기서 정신 차리고 보살도를 하면, 보살에서 보살로 이어지는 이 문명은요 뭐가 문제겠습니까? 에고가 존재한다고 왜 문제예요? 그 에고로 인해서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을 하고. 이 보세요. 참나 안에 있는 이 무한한 진리를 시공 속의 유한한 세계에서 끝없이 펼쳐져 가는 그게 우주의 맛이라니까요. 우주를 거부하지 마시고 우주의 맛을 제대로 내는 데 동참하시자는 거고. 그게 보살이다 홍익보살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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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윤홍식의 대승기신론 강의 4강(1:09:37)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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